내가 평생을 두고 가장 후회하는 일이 있다.
당시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재익박사,
그는 나와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는 머리도 우수할 뿐더러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1학년을 마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자 김재익박사도 2학년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우리의 우정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깊어만 갔다.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이였다.
내가 미국의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귀국하기까지에도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근모, 그동안 배운 것이 무엇을 위함이었는가,
이제는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보람이 있겠는가,
어서 돌아오게나"
그의 진지하고도 진솔한 대화는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가깝게 지내면서도 존경심을 가졌던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슬그머니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김박사, 오늘 들려주고 싶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이것은 정말 심각하면서도 귀한 이야기야."
서두를 꺼내놓고 본론에 들어가지 못했다.
80년대 초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정책토의에 더 열중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야기에 빨려들기 시작하면서 나의 의도는 까마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다음에는 반드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리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도의 기회를 일단 유보했다.
오늘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기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는 곧 찾아왔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중국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상하이에서 열리는 국제 원자력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김박사, 내가 이번에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어. 세상이 참 많이 변했지,"
서두를 이렇게 꺼내자 그는 내게 축하의 악수를 건냈다.
그날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학자와 경제학자의 만남, 그 만남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진지한 자리였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또 다시 뒤로 미뤄야만 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지"
그와 헤어지면서 몹시 마음이 무거웠다. 후회스러웠다.
좀더 과감히 전도를 못한 나를 탓하며 며칠 후 중국 출장길에 올랐다.
"아웅산 폭파 사건" 상하이에서 나는 이 소식을 들었다.
"아, 김재익박사 그는 어찌 되었을까?"
나는 모든 회의를 미루어 놓고 그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의 한 호텔방에서 마음을 찢으며 통곡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장2절 말씀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가슴에 와 박혔다.
이 말씀을 떠올리며 오열했다.
급히 귀국하여 사랑하는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후회의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다음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을,
왜 나는 그날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던가,
그를 만나러 갈 때만 하더라도 몇 번이나 다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도
소중한 일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는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의 영정을 보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반드시 전도해야 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친구여, 이제 자네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