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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11)묵인~무학대사~미륵보살
134. 묵인 (墨印) ☀불교에서 나온 말
"먹으로 새겨 두다"의 뜻으로, 먹 글로 전수받은 불법을 마음에 새긴다 는 의미이다.
이는 여러 단계로 구분되는데,
부처님에게서 친히 수지불망(受持不忘)하는 단계,
고승에게서 여러 스님들과 함께 수지불망(受持不忘)하는 단계,
중생과 함께 많은 스님에게서 듣는 단계(수지불망:受持不忘)등으로 나뉜다.
135. 무재칠시 (無財七施) ☀불교에서 나온 말
무재칠시(無財七施)는 잡보장경(雜寶藏經)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용어로,
재물이 없더라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가지 보시(布施)를 말합니다.
여기서 보시(布施)라는 말은 자비심(慈悲心)으로 남을 위해 조건(條件)없이 베푸는 것으로,
재보시(財布施), 법보시(法布施),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재보시(財布施)는 재물이나 물질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고,
법보시(法布施)는 설법 등을 통하여 정신적으로 깨우쳐 주고 잘못을 가르 쳐
부처님 법을 전해주는 것이며,
무외시(無畏施)는 재보시, 법보시 이외의 행위로 남의 어려움, 두려움, 걱 정, 위험, 병환 등의
곤경을 구해 주어 마음의 평안(平安)을 주는 것이 라고 합니다.
☀ 무재칠시(無財七施)는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베푼다고 하면 물질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물질이
아니더라도 베풀어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7가지를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 합니다.
⌾ 어떤 이가 석가모니를 찾아가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하소연하니,
석가모니는 그가 남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 사람이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있어야 주지 무엇을 준단 말씀입니까?”고 다시 묻자 석가모니가 재물이 없어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일곱 가지를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① 안시(眼施): 호의를 담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기
②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온화하며 부드럽고 미소 띤 밝은 얼굴로 사람을 대하기
③ 언사시(言辭施): 따뜻하며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로 사람을 대하기
④ 신시(身施): 일(몸)로 남을 도와주거나 예의바르게 사람을 대하기
⑤ 심시(心施): 따뜻한 마음과 선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
⑥ 상좌시(床座施): 자리를 양보하여 내어주기
⑦ 방사시(房舍施):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방이나 집을 제공하기
“네가 이 일곱 가지를 몸소 행하여 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이 따르리라.”
<잡보장경[雜寶藏經] 卷第六, 無財七施(무재칠시)>
☀ 보시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 즉 도와서는 안 되는 경우
① 소유자에게는 무조건 도와서는 안 된다.
② 거절하는 사람에게도 도와서는 안 된다.
③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으면 도와서는 안 된다.
④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자, 도와주면 태만해지는 자는 안 된다.
⑤ 아주 미안하게 느끼거나, 부담감을 너무 가지면 제외해야 한다.
⑥ 보시를 하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 사람, 즉 돕지 않았으며 부처가 될 사람에게는 피한다.
⑦ 그 돈이나 물건을 보시하는 데에 쓴 것보다 더 크게 활용해야 할 적 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136. 무진장 (無盡藏) ☀불교에서 나온 말
엄청나게 많아 다함이 없는 상태.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덕이 광대하여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직역하면 ‘무진(無盡)’은 다함이 없다는 뜻이고 ‘장(藏)’은 창고이므로
‘다함이 없는 창고’라는 뜻이 된다. 무진은 또한 잘 융화되어 서로 방해함이 없는 상태를 설명하는 말로,
원융무애(圓融無碍)와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
《유마경》〈불도품〉에서는 빈궁한 중생을 돕는 것은 무진장을 실천하는 것이며, 보살은 가난하고
궁한 자들에게 무진장을 나타내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생기게 한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다함이 없는 덕을 지니고 있음을 비유해 무진장이라 한다.
무진(無盡)은 끝이 없음, 잘 융화돼 서로 방해함이 없음을 뜻해 원융무애(圓融無碍)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덕(德)이 많아 한량없는 상태, 다함이 없는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을 비유해 무진장이라 한다.
137. 무차대회 (無遮大會) ☀불교에서 나온 말
승속(僧俗)과 노소(老少),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여
법문을 듣고 잔치를 열어 물건을 베푸는 일종의 법회이다.
모든 중생에게 공덕이 골고루 미치도록 잔치를 베풀며 불경(佛經)을
강의하고 불교의 이치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법회다.
이는 보시정신(布施精神)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덕(德)을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신앙적 의미도 있다.
또 이 대회를 통하여 왕은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달래주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에서
국가가 시주자(施主者)가 되어 베풀기도 하였다.
138. 무학대사 (無學大師)
무학대사는 성이 박씨요, 이름은 자초(自超)이며 삼기사람으로 그가 있던 집은 계월헌(溪月軒)이고
무학(無學)은 그의 호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잉태하였을 때 태양이 품안으로 떨어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는 18세 때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출가하여 득도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연도(燕都)에 가서 지공(指空)을 뵙고, 다음해 법천사에 나옹(懶翁)을 찾으니
매우 소중히 대하였다. 그 뒤 무령한과 오대산 등으로 다니다가 서산 영암사에서 나웅을 만나
몇 해를 함께 지내고 1356년에 돌아왔다.
나옹도 돌아와서 천성산 원효암에 계신 것을 알고 무학대사가 찾아뵈었더니 불자(拂子)를 주었다.
오래지 않아 의발을 전해 받았으며 1364년 나옹이 회암사에서 낙성회(落成會)를 베풀 때
스님을 청하여 수좌(首坐)를 삼았다. 나옹이 입적한 후에는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자취를 감추고
고려 말년에 왕사(王師)를 봉하였으나 사퇴하였다.
또한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법을 듣고 부도암에 앉아 참선 수도를 하는데,
하루는 암자에 불이 나서 온 절이 소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오직 무학 선사만은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불상같이 움직이지 않자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뒤 스님은 <능엄경>을 보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서 침식을 잊어버리고 더욱 공부에 진력하였는데
혹 잠이 와서 졸게 될 때에는 어디서인지 문득 종과 경쇠를 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서
잠을 깨워 주기도 하더니 그 뒤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 5년에 몸에 신양이 있어서 시자가 약을 지어드리고자 하였을 때 무학선사가 말했다.
“80된 늙은이에게 약이 다 무어냐?”
그리고 금정암으로 옮겨가서 ‘미구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하더니 예언대로 병이 심화되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최후 선문답을 함에 이르러 한 중이 물었다.
“대각, 각각 흩어지면 어디로 갑니까?” “모르겠다.”
“스님께서는 병중에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까?”
그러자 무학대사는 대답은 않고 손가락으로 옆에 있는 중을 가르킬 뿐이었다.
그래서 중이 또 물었다.
“색신은 곧 지수화풍으로 된 것인즉 필경 마멸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진법신이란 대체 어떠한 것이오니까?”
이에 무학선사는 두 팔을 옆으로 벌리면서,
“이것이 곧 하나이다.”
하고 대답한 뒤에 조용히 입적하였다.
그날 밤 찬기대사가 개성 법왕사에서 꿈을 꾼즉 허공이 꽉 차리만큼 큰 부처님께서 머리위에
커다란 연꽃을 이고 계셨는데 그 연꽃 속에 무학선사가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뒤에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미구에 무학선사가 입적하였다는 부고가 왔다.
☀
‘이성계’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만가(萬家)의 닭이 일시에 울고 천가의 다듬이 소리가
일시에 들렸으며 또한 무너진 집으로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고 나오는데
꽃이 떨어지는 것과 거울이 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성계는 이런 꿈을 꾸고 길흉을 알지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다가 근처에 해몽을 잘하는 노파가 있다는
말을 듣고 노파에게 가서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노파가 급히 말을 막으면서,
“저는 이 꿈에 대하여 해몽할 수가 없습니다.
요망하게 계집이 어찌 대장부의 앞일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하온즉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고 다른 곳에 찾아가서 물어보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해몽을 잘하는 사람으로는 노파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또 누구를 찾아가서 물어보란 말인가?”
“그러시다면 그 대몽을 해설할 만한 스님을 한 분 천거하겠습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쯤 올라가시면 설봉산이란 산이 있고 그곳에 토굴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도인 스님 한 분이 계시오니 그분에게 가셔서 물어보시면
시원하게 말씀해 드릴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노파가 일러주는 곳으로 찾아갔다.
“스님이 이 산에서 수도하고 계신 스님이십니까?”
“수도랄 것이 있습니까. 번화한 세상이 싫어서 그저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이렇게 은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속세에 사는 이성계라는 사람인데 무슨 일을 구상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징조의 꿈을 꾸었으나 해득할 길이 없어서 그 의심스러운 것을 풀고자
불원천리하고 찾아왔으니 자비심을 드리우사 해몽하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수도승의 몸으로 불도의 참선공부밖에 모르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대사를 경영하는 분의 꿈을 어찌 해설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래도 알게 되고 저래도 알아서 다 듣고 왔사오니 겸사하지 마시고 말씀하여 주십시오.”
무학선사는 어쩔 수 없어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 장차 임금이 될 꿈이라고 해몽해 주었다.
그리고는 무학선사는 이성계에게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자리에 반드시 절을 세우고
3년 동안에 5백 성제를 올려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말을 듣고 태조는 마음이 흐뭇하였으나 가슴은 찌리하였다.
<꿈해몽: 만가의 집에서 닭들이 "꼬기오" 울어댄 것은 '고기위(高貴位)'로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고,
다듬이 소리는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며, 서까래 세 개를 가로로 등에 진 것은
'임금 王'을 뜻하는 것이고, 꽃이 막 떨어지는 것은 곧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이며,
거울이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는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뜻>
☀
무학선사와 태조 이성계와의 사이에 얽힌 재미있었던 이야기 중에,
조선을 건국 후 이성계는 왕이 되고 무학선사는 국사가 되어 서로가 존경하는 입장이었다.
어느 날 이성계가 무료하였던지 무학선사에게 서로 스스럼없이 농담이나 하고 지내자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왕사께서는 꼭 돼지 같소이다.”
그러자 무학선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승상께서는 꼭 부처님 같소이다.”
이에 태조는 무척 난처했다. 자신의 농담을 상대가 농담으로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물었다.
“나는 왕사께 돼지 같다고 농을 했는데 어찌하여 나를 부처님 같다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무학선사가 대답했다.
“저도 분명 농담을 한 것입니다. 돼지 눈으로 사람을 보면 모두가 돼지같이 보이지만
부처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모두가 부처님처럼 보이지요.”
그제야 태조는 무학선사의 농담의 뜻을 깨닫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이전,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금산군 일대를
비단으로 덮는 일이었다. 금산군 일대를 비단으로 덮는다는 것은 왕의 입장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일개 장군의 입장에서 그곳을 비단으로 덮는다는 것은 왕이 되는 꿈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학선사를 만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선사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야심을 들은 무학선사는 빙긋이 웃으며 이런 조언을 했다.
“장군의 힘으로 한 고을에 비단을 까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워서 고심하십니까?
그곳의 지명을 금산 즉 비단산이라고 바꾸세요.
그리하면 그곳 일대가 비단으로 덮일 것이 아닙니까?”
이성계는 이런 조언을 받고 애초의 그곳의 이름을 바꾸어
비단산이라는 뜻으로 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39. 묵조선 (黙照禪)
묵조선은 조동종의 굉지정각선사에 의해 완성된 후 선종 당대 수행법 중 간화선(看話禪,公案禪)과
함께 회자되어 왔다.
좌선을 중시하는 묵조선은 “중생의 마음은 곧 제불의 본원이지만 번뇌의 티끌에 의해서 가리워져
있으므로 오직 좌선을 통하여 망연(忘緣)을 멸하면 그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다”고 주창하고 있다.
묵(黙)은 언수에 대한 일체의 분별과 망상을 뛰어넘은 절대의 심성(心體)을 가리키며 조(照)는
절대의 심성을 밝게 비추어 보는 지혜의 작용을 의미한다. 단하지순의 법을 이어받은 굉지정각은
<묵조명(黙照銘)>에서 “묵묵히 말을 잊으면 밝고 분명하게 현전 하리라”고 설파한다.
묵조선의 진수를 설하고 있는 <굉지선사광록>에서는
“한결같은 본원에서 천차만별의 세계를 모두 꿰뚫어 보나니 오직 그 가운데 한사람이 있어서
바름도 없고 그릇됨도 없도다. 이 한사람은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나지도 늙지도 않는다.
이 경지는 오직 스스로 증득함으로서 상응할 수 있을 뿐이니 생각과 헤아려 도달할 수 없도다.”고
밝히고 있다.
묵조선의 좌선은 본증묘수의 실천적 상징이며 일체의 현상유동하는 현실의 어디에나
본래 원만하게 갖추어진 불성을 언제 어디서나 깨닫고 온 누리의 중생에게 봉사한다는
이타문의 지유선을 말한다. 묵조선도 공안을 참구한다.
140. 문수보살 (文殊菩薩)
문수보살은 지혜를 완전히 갖춘 보살로서, 석가모니의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맡아서
석가모니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이 세상에 나타난 보살이다. 문수보살을 문수사리(文殊舍利),
또는 만수시리(滿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 등으로 불리며 여러 보살중 제일 상수보살(上首菩薩)로
다음 세에 법왕 즉 부처가 되기 때문에 법왕자(法王子)보살이라고도 부른다.
대승보살 가운데 한 분이며, 문수와 만수라는 말은 ‘묘(妙)’라는 뜻이고,
사리와 실리라는 말은 두ㆍ덕ㆍ길상(頭,德,吉祥)이란 뜻이므로,
이를 합치면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뜻이 된다.
머리에 5계를 맺은 것은 대일여래의 5지(智)를 나타내는 것이고,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꽃 위에 지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청련화를 쥐고 있다.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기 위해
늘 사자(靑獅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찍이 반야경을 결집, 편찬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보살의 이름을 사람들이 들으면 4중죄(重罪)가
소멸된다고 한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서 보현보살과 더불어 삼존불의 일원이 되어있으며
설법을 아주 잘하는 보살이다. 중국 오대산이 문수의 처소이고,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 오대산이 그의 처소이다.
141. 문수보살게송 (文殊菩薩偈頌)
面上無嗔供養具(면상무진공양구):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口裡無嗔吐妙香(구리무진토묘향): 부드러운 말 아름다운 향이로다.
心裡無垢是眞實(심리무구시진실): 깨끗하고 텅비어 참된 그 마음이
無垢無染是眞常(무구무염시진상): 깨끗해 티 없는 부처님 마음일세.
문수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지혜(智慧), 즉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화. 인격화한 보살입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을 대지(大智)보살이라 부르며, 석가모니불의 양대보살 중 (오른쪽에는 보현보살)
왼쪽에 위치한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데.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 뛰어들어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활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됩니다.
화엄경에서도 보현보살과 더불어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 등장하며 선재동자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문수보살의 존상을 보면 오른손엔 일체의 번뇌와 무명(無明)을 단호하게 끊어 버릴 수 있는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쥐고 용맹과 위엄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는 형상으로
많이 표현됩니다.
항주의 무착문희선사(無着文喜;821-900)는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항상 계율을 익히고
경학에 열중하였습니다. 뒤에 대자산의 성공(性空)선사를 만나 여러 지방의 다른 사찰들을
두루 참배할 것을 권유받았습니다.
무착은 곧바로 오대산 화엄사의 금강굴에 이르러 한 노인이 소를 끌고 가기에 그를 따라 사찰에
들어갔습니다. 노인은 균제(均提)동자를 불러 소를 놓아주고 무착을 데리고 절에 들어갔습니다.
절들은 모두 금빛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노인과 마주 앉자 노인이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옵니까?”/ “남방에서 옵니다.”/ “남방의 불법은 어떻습니까?”
“말법의 비구들이 계율이나 조금 지키고 살아갑니다.”
“대중들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혹 삼백 명도 되고 혹 오백 명도 됩니다.”
다시 무착이 물었습니다. “이곳의 불법은 어떻습니까?”
“용과 뱀이 함께 있고 범부와 성인이 같이 삽니다[龍蛇混雜 凡聖同居].”
“대중들은 얼마나 됩니까?” /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입니다.”
노인은 동자를 불러 차와 소락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무착은 그것을 먹고 마음이 환하게 열리고
상쾌하여졌습니다. 노인은 다시 파리로 된 찻잔을 들고 무착에게 물었습니다.
“남방에도 이러한 것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그러면 평소에 무엇으로 차를 마십니까?” 그러나 무착은 대답이 없었다.
날은 저물었고 하여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하룻밤을 투숙하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그대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투숙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 “그대는 일찍이 계를 받았는가?”
“계를 받은 지는 오래입니다."
“그대에게 만약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왜 계를 받았는가?”
무착은 물러나오고 노인은 동자에게 무착을 전송하게 하였습니다.
무착이 동자에게 물었습니다. “전삼삼 후삼삼이 얼마나 되는가?”
그러자 동자가 “스님”하고 불렀습니다.
무착이 “왜 그러느냐?”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됩니까?” 무착은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 “여기는 금강굴 반야사입니다.”
무착은 처참하였습니다. 그토록 여러번의 문답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었건만
비구라는 상, 대중이라는 상, 물질에 대한 집착, 수행지식과 계율 그리고 말과 글에 대한 집착으로
문답의 진의를 알 수 없었고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한 말씀 가르침이 있기를 빌었습니다.
그것으로 이별의 정을 달래었습니다.
그 때 동자가 들려준 게송입니다.
“성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구나
성안내는 그 마음이 참다운 보배요
깨끗하여 티가 없는 그 것이 부처라네.”
말이 끝나자 균제동자도 절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만 오색 구름 가운데
문수보살이 금빛 사자를 타고 노닐었는데 홀연히 흰 구름이 동쪽에서 와서 감싸 버리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무착은 오대산에서 주석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게송입니다. 무착선사는 문수보살을 직접 뵙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앙산(仰山) 선사의 법을 받아 깨치고
대자유인이 되었습니다.
142. 미래불 (未來佛)
석가모니 부처님의 뒤를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님은 "미륵(彌勒 Maitreya)" 부처님이시다.
미륵 부처님은 인도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56억7천만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용화세계를 건설하고 석존의 교화에서 빠진 중생을
교화 제도한다고 한다.
미륵부처님이 도솔천으로부터 이 세상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아래서 중생들을 제도하실 때
이 세상은 낙토로 변하여 갖가지 재난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재물과 권력으로 다투지 않고 서로
공경하여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다.
미륵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3회에 걸친 용화법회에서 모두 다
제도할 것이라 한다. 이처럼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다가올 약속의 부처님으로 유토피아적
이상세계(理想世界)에 대한 중생들의 동경과 희구로 특징 지워진다.
143. 미륵보살 (彌勒菩薩)
‘미륵’은 산스크리트어 마이트에야 (Maitreya)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미륵야 (彌勒耶)란 말에서
끝의 ‘야’ 자가 생략된 듯하다.
원뜻은 ‘자비’이다. 자비란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식물 등의 모든 생명과 관계가 있다.
미륵보살은 부처님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째에 가서 이 세상에 나타나 부처님 재세시
그의 설법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한다. 그때까지는 도솔천에 머무른다고 하는데
‘도솔’이란 ‘족함을 안다’는 뜻이다.
원래 미륵보살의 ‘미륵’은 성,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陀)라고 표기하고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고 번역한다.
이 보살은 남인도의 바라문 출신인데 이미 도솔천에 상생(上生)하였으므로 거기서
다시 하생(下生)하게 되고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동양의 미륵사유상(彌勒思惟像)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한 이상적인 형상이라고 격찬한 일이 있다.
그 사유는 아미타불의 5겁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친 사유와 마찬가지로 중생구제를 위해서
불보살이 갖추고 있는 모든 지혜를 다 연마한 것이다.
지혜는 존재의 충족이요, 자비는 시간의 충족이다. 역시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처음에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쓰고, 뒤에 또 <시간과 존재>라는 책을 쓰려 했다.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 불교나 동양의 논리이고 존재를 기준으로 한
서양의 그것은 차츰 하나의 파탄을 보이고 있는게 아닌지.
미륵보살은 불경에서 보리(菩提)의 사람이라 한다.
깨달음은 시간의 충족이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얻게 하는 것이 자비의 실체이다.
타력(他力)이란 것은 참으로 자비도(慈悲道)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미륵의 이름으로 본원은 이야기되지 않지만 미륵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던 덕분에
아미타불의 이해가 빨랐던 것도 사실이다.
미륵보살은 일생보처(一生補處)라고는 해도 겨우 일생 동안만 계박(繫縛)되고 그 다음에는
부처님의 위처(位處)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보살 중에서는 최고위에 있고 그 차생(次生)에는
도솔천에서 이 인간계에 하생하여 부처님의 불처(佛處)를 충족시키는 점 때문에 역시
<유마경>에서는 유마거사에게 병문안을 하러 가는 여러 보살들 중 앞장선 보살로 되어있다.
하지만 이 보살은 전에 그런 성불의 예언이 있었던 것 때문에 유마거사로부터 면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하고, 역량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앞장서기를 거절한다.
그 때의 보살의 고백 중에 유마거사는,
“미륵이여, 당신이 깨달음에 이른다면 그때에는 모든 중생도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이를 것이요.
왜냐하면 모든 중생에 의해 이해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보리(깨달음)이기 때문이요, 당신이 완전히
열반에 들 때, 그때에는 모든 중생도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요. 왜냐하면 모든 중생이 완전한
열반에 들지 않는 한 여래도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요.”
라고 말했다.
<무량수경>에서의 법장보살, 따라서 아미타불의 본원과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는 것은
<유마경>이 정토 경전과 깊은 유연(類緣)을 가지고 있는 증거의 하나로서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세친의 형 무착(無着)의 스승도 이름이 미륵인데, 이 사람은 역사상의 실재 인물이다.
신앙상의 미륵에게는 영원히 이 지상을 정화시키고 전 인류를 성불시키는 의미가 실려 있는 듯하다.
144. 밀교 (密敎)
기원 후 320년경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굽타 왕국이 일어나 인도를 재통일하였다.
굽타왕국은 인도인에 의한 통일국가로서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되살아났고 그 결과
인도 민족종교인 브라만교가 다시 부흥하였다. 그러나 굽타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도 크게 발전하였다.
기원 후 6~7세기경 브라만교와 인도 민간신앙이 결부하여 힌두교가 성립하였다.
힌두교는 불교의 장점도 흡수하여 민족종교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이에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밀교가 일어나게 되었다. 밀교는 대승불교 교리에 힌두 의식을 받아들여서 이루어진 불교로서
힌두교의 주술신앙과기도의식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밀교에서는 불교의 신앙화 경향이 나타났다.
불교가 신앙화 되고 종교의식으로 조직된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가 신앙의식으로 재출발하여
재구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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