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스모스에게 부치는 엽서
이언 김동수
해변(海邊)엔
코스모스 피는 시월(十月)이 오고
더불어 뽀오얀
사장(沙場)을 거닐던
아 가슴에 그리운 날들
싱그런 코스모스 가지가지 사이로
가랑잎 지는
산사(山寺)의 뒤안길에
잿빛 염주(念珠) 흰 목에 두른
목이 긴 여승(女僧)을
내 사랑했었네.
바람이 불적마다 흩날리는
저 코스모스 이파리들
날이면 날마다
산록(山麓)을 타 내리는
설운 목탁(木鐸) 소리에 울어
병(病)든 비둘기는 가슴을 앓고
으스러지게 껴 앉은
서로 가슴에
눈물처럼 흰 배꽃이 졌네
아
해변엔 코스모스 지는
시월(十月)이 가고
더불어 뽀오얀 사장(沙場)을 거닐던
가슴에 그리운 날들이여
가슴에 그리운 날들이여
(1966년)
새벽달
김동수
누가
놓고 간 등불인가
서편 하늘 높이
천년(千年) 숨어 온
불덩인가
속살로만
타오르다 피어 난
하늘의 꽃등
먼 길을 가는 나그네
여기 멈추어
부드러운 네
치맛자락을 보듬고
밤을 뒹군다
별빛마저 무색한 밤
오늘도
내 키보다 둥실
높이 떠서
끝내 눈을 감지 못하는
성녀(聖女)
오, 내 어머니여
비금도(飛禽島)
김동수
섬은 늘 깃치는 소리로 떠 있다
바다에서 돌아온 아이는
시퍼런 파도를 토한다
우리의 달은 어디에 있나요
빈 섬을 보채다
어둠 속에 안개처럼 웅크리고
몇 년이고 잠들지 못한 꿈
목선마다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출렁일수록 가랑잎처럼
밀려만 가는
바람탄 비금도에서
갈기갈기 헤진 일상을 투망질하던
아이들은
새벽이면 맨살로 바다로 간다
우우 또 한 차례
몰려왔다 포말(泡沫)지는
하얀 새떼들의 울음
호드득 호드득 갈매기 되어
꿈에만 날아보던 하늘을 두고
섬은 늘 깃치는 소리로
가난한 아이들의 울음을 건지고 있다
교룡산성(蛟龍山城)
김동수
희뿌연 안개 서기처럼 깔리는 굴헝.
새롬새롬 객사기둥만한 몸뚱어리를 언뜻언뜻 틀고, 눈을 감은 겐지 뜬 겐지 바깥소문을 바람결에 들은 겐지 못 들은 겐지 어쩌면 단군 하나씨때부터 숨어살아 온 능구렁이.
보지 않고도 섬겨 왔던 조상의 미덕 속에 옥중 춘향이는 되살아나고 죽었다던 동학군들도 늠름히 남원골을 지나가고 잠들지 못한 능구렁이도 몇 점의 절규로 해 넘어간 주막에 제 이름을 부려놓고 있다.
어느 파장 무렵, 거나한 촌로에게 바람결에 들었다는 남원 객사 앞 순대국집 할매. 동네 아해들 휘동그래 껌벅이고 젊은이들 그저 헤헤 지나치건만 넌지시 어깨 너머로 엿듣던 백발 하나 실로 오랫만에 그의 하얗게 센 수염보다도 근엄한 기침을 날린다.
산성(山城) 후미진 굴헝 속, 천년도 더 살아 있는 능구렁이, 소문은 슬금슬금 섬진강의 물줄기를 타고 나가 오늘도 피멍진 남녘의 역사 위에 또아리치고 있다.
*교룡산성(蛟龍山城) -남원시가지를 북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산성
말하는 나무
김동수
나무 하나 서서 이파리들 흔들고 있다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나뭇잎 펄럭이며 이야기들 나누는데
그냥 서서 펄럭이는 나무 하나
나무 밑에 서 있으면 무수한
말(言)들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들은 말이 없다.
어디론가 쓸려가 흙이 되거나
더러는 어두운 하늘에 날아
반짝이겠지만, 그걸 바라보는 이는 드물다
길 아닌 길가에서
스스로 길이 되어, 잎을 떨구고
너와 나 사이에 나무 하나 서 있다
한가(閑暇)
김동수
빗장을 걸고 집을 나섰다
그 사이 거미가 집을 지었다
내가 집을 비우고 나오는 사이
우리 집 마당은 더욱 가벼워
바람을 불러 들였다
햇살이 고루 들어
저 홀로 들어왔다 저 홀로 나가고
모처럼 내 서재 안에 갇혀 있던
컴도 집 뒤안 툇마루로 나와
감나무 그늘을 덮고 잠이 들었다
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낯선 곳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동안
구석에 밀려 있던 먼지들도
제자리로 나와
한낮을 즐기고 있다
문(門) 간에 풀(木)도 한 두 포기 돋고 있다
달밤
김동수
새벽달 하나
서편 하늘에 떠 있다
새벽달 같은 내 마음 하나
홀로 떠서
눈 감지 못한 새벽을
지키고 있다
허공의 벽
김동수
허공에도 벽은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도
벽은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얼굴을 내민 여린 새싹들도
시방 저 무거운 허공을
밀어올리고 있는 중이다
온 힘을 다해
땅을 박차 일어서고 있는 중이다
초원에서 갓 태어난
누우떼 새끼들도
포식자들의 피 냄새에
온 몸으로 맞서
그의 전 생명줄
허공의 벽을 밀어 올리고 있다
두려움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
살아 있음이 벽이고 허공이다
나의 시
이언 김동수
이제 나는
밥이 되고 슬픔이 되리라
어두운 골목 귀퉁이를 돌면서
벽을 등진 새벽
문 닫고 홀로
눈물 뜨겁게 훔치던 네
주먹 속의 찝찔한 눈물이 되리라
밥이 밥이 되지 못하고
힘이 힘이 되지 못하고
시리게 웅크린 네 슬픔의 곁방에서
휘파람을 날리며
풍선처럼 가벼이
하늘을 날아도
시들은 너에게
한 점의 그늘도 내려주지 못한 채
어느 누구 가슴 하나 때릴
시 한 구절 써 본 일이 있었느냐
아, 한 방울의 눈물
네 곁에서
한 잔의 소주라도 될 수 있다면
다가가리, 다가가서 불꽃처럼 타올라
회오리쳐 네 가슴에서
터질 수만 있다면
시가 되리라
허기 진 날 장(場)터의 국밥처럼
얼얼한 눈물
네 곁에서 너에게 힘이 되는
나의 시가 되리라
나이를 먹는다는 것
김동수
햇살에 스며드는 일이다
가을 날 물들어 가는
감나무 잎처럼
뜨겁고 어두웠던 마음들
널어 말리며
이제 온 힘 다해 살지 않기로 한다
싹이 돋고 잎이 자라
낙엽이 지는 사이
자박 자박 누군가 오고
또 누군가 가버린
이 이역의 순례에서
그대와 나의 발자국
하나로 포개보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천천히
햇살에
나를 꺼내 말리는 일이다
말리는 일이다
현대시에 나타난 양자역학의 세계
이언 김동수
Ⅰ. 양자역학
‘양자(量子)’란 원자 속의 작은 입자(粒子)들이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가리키는 말이고,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 ‘힘의 학문’이기에, 양자역학이란 원자와 같은 미시적 입자들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과학적 지식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가변성’을 지닌 학설로 재정립 되었다.
입자(粒子)와 파동(波動)
이러한 변화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 바로 아인슈타인인데, 그 중 하나가 입자(粒子) 와 파동(波動)에 관한 이중성이다. 입자는 눈에 보이는 아주 작은 물체들이고, 파동은 진동이 공간을 따라 전달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소리, 빛, 전기파 등의 파동이 때로는 입자가 되기도 한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을 ‘양자 중첩’이라고 한다. 동시에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관측되지 않는 전자는 이쪽에 있을 확률, 저쪽에 있을 확률 등등이 중첩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섭하는 파동처럼 행동했고, 관측되는 순간 다른 곳에 존재할 확률이 없어지고 하나의 위치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입자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이러한 ‘양자 중첩’과 얽힘, 불확정성 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멸을 거듭하면서 변해가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사상’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립자들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빛을 가지고 실험을 해 보았다. 그 결과 빛이 실체가 있는 입자(粒子)이면서 동시에 실체가 없는 파동(波動)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물리학자들은 마치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물질과 다르지 않아 놀라워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오래전에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같은 양극단은 인간의 분별심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변하고 무상(無常)하여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을 이미 전하고 있었다.
2. 양자의 불확정성 원리와 비국지성(非局地性)
1927년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불확정성 원리’를 제안했는데, 이 원리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과 관련되어 있다. 빛과 물질이 모두 입자적 특성과 파동적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파동은 보이지 않은 미시 세계에 확산되어 있어 그 위치와 운동량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관측에 의하면 전자와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지만 다른 물질과의 상호 작용이 없는 한 파동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세상은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에 따라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상호 작용)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 미국방부가 이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다. 같은 시간에 만들어진 두 개의 소립자를 아주 먼 거리까지 떨어지게 한 다음 하나의 입자에 자극을 주고 상태를 변화시켰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도 동시에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소립자들이 시공(時空)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현상을 양자 물리학에서는 ‘비국지성(非局地性)’이라 하고, 서로 얽혀있는 이러한 현상을 ‘양자 얽힘’이라고도 한다.
이와 유사한 실험을 통해 한번 인연을 맺은 소립자끼리는 영원히 직접적인 교감(정보)을 나누고, 그렇지 않은 소립자끼리도 늘 간접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감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이나 감정을 주고받는 텔레파시(telepathy)도 소립자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어와 같은 회귀성 물고기의 고향 찾아가는 능력이나, 철새들의 이동 등 모든 생명체가 진화된 유전자(DNA)로 그때그때 주어진 환경(조건, 여건)에 적응하면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근원적으로 보면 다 소립자의 무한한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라 보고 있다.
3. 양자역학과 귀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덕 됨이 성대하구나!
-子曰 鬼神之爲德은 其盛矣乎인저
공자가 말한 귀신론이란 우주의 질서와 원리를 상징하는 말이다. 지금처럼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중용(中庸)』의 귀신론은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에 대한 인식을 직관적으로 말한 것이다. 당시의 귀신은 오늘날의 고스트(Ghost)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신묘(神妙)하다는 의미의 귀신론이다. ‘신묘하다’는 것은 우주와 세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힘을 말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귀신의 덕(德)이 성대하다’는 것은 세상에 귀신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를 오늘날 양자역학의 입장에서 보면 ‘보이 않는 파장(에너지)의 기운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라 하겠다. 송나라 정이천은 ‘귀신은 천지에 힘써 다스려(功用) 조화를 이루어 자취를 드러낸다.’라고 하였다. 주자(朱子)는 “두 기운으로 말하면 귀(鬼)는 음(陰)의 영(靈)이요, 신(神)은 양(陽)의 영(靈)이며, 한 기운으로 말하면 이르러 펴져 신(神)이 되고, 되돌아가 귀(鬼)가 되니, 그 실제는 한 물건일 뿐.”이라고 했다. (중용 16장) 즉, 귀신은 음양의 조화로 사물과 사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하였는데, 양자역학에서 말한 파장에너지와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원자 속의 전자와 전자가 서로 접근하면 빛인 광자를 방출하거나 흡수하면서 빛인 광자는 입자(陽)와 파동(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모든 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모든 사물과 사람 사이에서 상생작용을 하게 한다는 동양철학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 보면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려는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의 불연속성, 비결정성, 비국지성을 20C 이전의 인식론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귀신론이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비결정적이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호작용한다고 한다고 말한 양자역학의 세계가 그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을 존재하게 하는 미시세계는 보이지 않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그것이 입자나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듯하지만 융합하고 화합하며 조화를 이루며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백승호. ‘중용에서 귀신이란 무엇인가’ 참조)
Ⅱ. 불교의 색즉시공과 중도
1. 불교의 공(空)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은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은 연(緣), 즉 인연에 의하여 생겨났고, 인연에 의하여 변할 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 그러기에 불교의 공(空)은 그저 비어 있는 텅 빈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일체만물에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은 아직 그 어떤 규정성이 없는 ‘무(無)’의 상태라는 것이다. 일체의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空)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은 없음을 뜻하는 ‘무(無)가 아니고 오히려 수많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무한의 잠재력을 갖는 가능성의 ‘무(無)’,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라는 것이다. 줄기세포가 연기적 조건에 따라 신경세포가 되기도 하고 피부세포, 허파세포가 될 수도 있듯이 무한한 가능성의 상태가 공(空) 혹은 공성(空性)이라는 것이다.
2. 연기(緣起)·중도(中道)
불교의 공(空)은 색(色)의 자성(自性)이 본래 공하므로 모든 법은 서로 연기하여 생(生)하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공(空)을 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바람은 모양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空)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기에 ‘있는 것이 없는 것(有卽是無)’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無卽是有)’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연기(緣起)이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언제든지 변화 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는 중도(中道)의 세계라 하겠다. 그러므로 연기 없는 공(空)이 없고, 공(空) 없는 연기가 따로 없으며, 이 공(空)이 곧 중도(中道)와 다르지 않는 공성(空性)의 세계라 하겠다.
Ⅲ. 연기론(緣起論)과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는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와 같다는 것이다. 유형(有形)인 질량과 무형(無形)인 에너지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이 그것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그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곳으로 전달할 수 있을 뿐, 에너지의 총량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기에 따로 생성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등가성 원리’는 유형·무형의 형(形)이 바뀐다 해서 그 본질이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은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불교의 ‘불생불멸설(不生不滅說)’과 같은 맥락(脈絡)을 이루고 있다.
예컨대 운동에너지가 열(熱)로 바뀔 수도 있고, 반대로 열(熱)이 운동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주전자 속의 물이 열에너지에 의해 끓으면서 생긴 뜨거운 수증기가 주전자 뚜껑을 밀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얼음과 물의 관계도 그렇다. 물(에너지) 한 그릇이 얼음(질량) 한 그릇이고, 얼음 한 그릇이 물 한 그릇이 되는 이치와 같다.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고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하니 이 세상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이어지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라 하겠다.
Ⅳ. 현대시에 나타난 양자역학의 세계
-관찰자가 있으면 입자, 없으면 파동의 상태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지 않고 언어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다’는 개념을 과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더욱 그렇다. 세상은 이렇게 이전의 언어와 체계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불확정 세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詩)를 읽을 때에도 그렇다. 대부분의 시를 읽고 나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도 어쩌면 이런 시적 상상력의 세계와 같지 않을까 한다. 서로 다른 차원, 다른 사유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킬 때는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인이면서 이상 연구자인 김상현 씨도 ‘1931년, 이상의 시에 나타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서 이상은 ‘남다른 시대 감수성과 놀라운 물리학적 사유’를 갖춘 시인으로 1931년 8월 11일 발표한 시 「운동」은 상대성이론을 단순히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상대성이론을 문학에 적용하기 위해 쓴 시라고 해석한 바 있다.
그것은 관찰자 효과에 따른 물질의 이중성, 곧 보이는 것이 전부 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인간의 무한한 관심, 그리하여 과학으로 밝혀내지 못하던 거대한 우주는 그런데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우주가 그렇듯 인간도 서로 교감하지 않으면 의미가 생(生)하지 않는다. 교감하지도, 교감되지도 않으면 소멸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1.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은 ‘관측하기 전 ’파장’의 상태이다. 그것을 이 시에서는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냈을 때 그 몸짓 파동이 나에게로 와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는 양자역학적 변화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기에 마지막 행 ‘눈짓’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는 관측 후 존재(입자)이고, 1연의 ‘몸짓’은 관측되기 전의 파동 상태라 하겠다.
우주의 모든 양자는 물질의 형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동(파장)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눈짓을 갈망하는 몸짓이 아닌가? 물리학자 울프가 “우주의 모든 양자는 물질(입자)의 형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동(파동)들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눈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구자영, 「양자역학과 김춘수의 ‘꽃’」, KDI 경제정보센터
삼라만상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파동(에너지)의 세계에서 보이는 입자(물질)의 세계로, 그러다가도 관심을 갖지(관측 되지) 않으면 다시 파장으로 사라져 버리는 불확정 상태에 놓여 있는 양가적(兩價的)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김춘수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그리하여 그에게 다가가 ‘꽃’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공(空)’이 ‘색(色)’이 되고, ‘색(色)’이 다시 ‘공(空)’으로 전환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세계, 이게 바로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와 다르지 않는 우주의 신비계가 아닌가 한다.
2.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 에서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詩입니까.
눈앞에 보이는 현상의 오동 잎(色)을 보면서 그것을 현상으로 드러나게 하는 현상 이면의 절대성(누구: 空)에 대한 동경과 외경심을 염송하고 있다. 이어 2~5행에서 보여주는 ‘푸른 하늘 - 알 수 없는 향기 - 작은 시내 - 저녁 놀’이라는 가시적 자연 현상(色)들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그 뒤에 가려져 있는 ‘공(空)’의 현현(顯現)임을 설파하고 있다. 보이지는 않으나(空) 존재(色)하는 그것들, 곧 눈앞의 현실이 아닌 배후에서 역사하는 절대자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구도심(求道心)이 그것이다.
3. 미당 서정주의 시 「내가 돌이 되면」
내가 / 돌이 되면 // 돌은 / 연꽃이 되고// 연꽃은 / 호수가 되고 // 내가 / 호수가 되고// 호수는 / 연꽃이 되고 // 연꽃은 / 돌이 되고
미당 서정주도 「내가 돌이 되면」에서 불교의 인연론과 윤회관에 근거하여 세상만물이 연기적으로 유전하는 존재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돌→연꽃→호수’가 되고, ‘나→호수→연꽃→돌’이 되어 끊임없이 유전(流轉)해가고 있으니 삼라만상은 모두가 다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현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니, 모든 사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因果) 법칙에 따라 유전(流轉)된 불확정적 가유(假有)의 세계라는 것이다.
유정과 무정의 세계에 두루 걸쳐 있고, 천류(遷流) 과정에 있는 각각의 존재가 존재론적 비중과 무게를 동일하게 갖고 있다.(......) 일체 만유가 서로 상관하여 이것 속에는 저 것이 들어 있고, 저 것 속에는 이것이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일부’ 일 수 있고, ‘전부’일 수도 있다.
-문태준, ‘자아의 영속성과 영원성’, 『미당문학』 4호 48면, 2017.
연기론에 의해 변전 과정에 놓여 있는 각각의 존재가 결국 ‘동일한 비중과 무게를 갖고 유전(流轉)된다’는 ’불생불멸‘의 불교적 인식, 이는 아인슈타인의 ‘등가성 원리’와 다르지 않는 세계라 하겠다.
4. 김인희 시 「아버지의 집」
-‘무의식의 에너지를 탐구한 시 쓰기’
모든 것이 태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곳 / 있는 듯 없는 듯 부드러움 속에서 / 검 지도 희지도 않은 / 빛도 어둠도 아닌 / 신선한 살들로 만들어진 수많은 길들과 함께 안개 덮인 숲속에 아직은 머물러 있네 / 떠나기 위해 / 이곳은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직전 // 말씀의 끝
‘신선한 살들로 만들어진 수많은 길’들이 ‘떠나기 위해 여기, 곧 ’우주의 집‘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아무 것도 없는 우주 공간, 곧 ‘우주의 집’이다. 그곳을 시인은 ‘아버지의 집’이라 명명하고 있다.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수많은 길들이 안개 숲에 덮여 ‘이 우주 공간’에 가득 편재해 있다. ‘어디로 떠날지 모를 이 길’ 곧 양자역학에서 말한 ‘파장’들이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기다리며 새로운 길, 새로운 세계를 펼치기 위해 우주 공간(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다.
이 시편에서 ‘아버지의 집’은 광자(光子)가 처해 있는 위치를 의미합니다. ~ 복사 에너지로 지어진 이 우주의 창조 과정을 모두 지운다면 마지막에는 광자, 즉 빛의 알갱이 하나가 남을 것입니다. 그 광자가 위치와 운동을 동시에 가지고는 있으나 하나의 위치에 고정되지 않고 ‘운동성’을 품고 떠나기 위해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 김인희·주영중, ‘무의식의 에너지를 탐구한 시쓰기’에서
떠나기 위한 상태로 항시 머물러 있는 운동성 에너지가 ‘아버지의 말씀’(관심, 관찰)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우주적 에너지요, 빛이요, 그것이 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관심’이요, ‘사랑’이며 그것이 우주가 지니고 있는 양자역학적 세계라 하겠다.
5. 배은율 시 「흙의 상소문」에서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을 때 흙은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린다 / 얼마 전 흙속 에 이름 모를 시체가 암매장 당한 적이 있다 / 이럴 때 흙은 운다, 울음이 붓을 키운다 /~생략~/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곳은 바람이 오가는 허공이다 /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 들이 살고 있다 - 2025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배은율의 「흙의 상소문」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 이는 불교의 공즉색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입자와 파동 그리고 질량·에네지 등가법칙과도 동맥을 이루면서 우주적 비의를 새롭게 읽어내고 있었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에너지]이 살고 있다’는 경이로운 표현으로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한층 드높여 주고 있다. (심사위원 김동수)
6. 김추인의 「쓸쓸한 양자역학」
― homo atomicus(원자 인간)
너는 거기 있다/ 나는 너를 본다// 빛이, 빛의 입자가 너에게 충돌, 튕겨 나와/ 파동으로 파동으로/ 내 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보인다는 건// 아니다 에스컬레이터 계단 위/너는 고체화된 바람처럼 서 있을 뿐/ 기계가 널 끌어 올릴 뿐/ 기계 에너지가 너에게 속도를 가해/ 네 위치를 내게 보여줄 뿐// 이제 30초 후에/ 너의 위치는 내 앞이 될 것이다/ ~중략~// 원자가 원자를 가볍게 손잡는다/ 손바닥 열이 서로의 피부 속으로 파동쳐 간다./ 손에 힘이 가해져 온다 대책 없는 격열?/ 아주 짧은 시간 스치듯/ 범람하는 마음이 오는 거라 믿기로 한다/ 전자구름 속 전자들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 확률 상 꼭 너 같다/ 제 온기를 다 거두지 않는 채, 넌 사라지고 - 월간 현대시, 2024. 6월호
‘오늘의 네가 어제의 너일까? 좀 전의 네가 앞으로도 계속 너로 남아 있을까’ 반문하면서 입자와 파동의 끝없는 흔들림 속에서 예측 불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쓸쓸함을 노래하면서 기계문명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현대인의 무력성을 안쓰럽게 응시하고 있다.
Ⅴ. 양자역학적 인식
보이는 것이 전부 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인간의 무한한 관심, 그리하여 과학으로 밝혀내지 못하던 거대한 우주는 그런데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서로 만나 공감하지 않으면 의미가 생(生)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교감하지도 교감되지도 않으면 소멸된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양자중첩의 원리는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가 여러 위치에 존재하면서 입자가 파장의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자들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정되지 않은 파동의 상태', 곧 불확실성의 신비에 싸여 있다가 관측을 하게 되면 입자의 상태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생성과 변신의 가능성으로 자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양자역학의 특성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곧 우리를 둘러싼 신비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언 김동수(金東洙)
ㅇ월간『詩文學』으로 등단(1981년), ㅇ시집:『하나의 창을 위하여』, 『말하는 나무』, 『그림자 산책』, 『늑대와 함께 춤을』등 ㅇ저서:『한국현대시의 생성미학』,『시적발상과 창작』,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망명문학』 ㅇ수상: 시문학상, 한국비평문학상, 조연현문학상 등,
ㅇ백제예술대 명예교수, U.C. 버클리 대학 객원교수, 캘리포니아 국제문화대학 초빙교수, 『온글』· 『미당문학』 발행인, 『씨글』 편집인
(한국 문학의 메카, 남원) 문학특강 김동수 시인 편 - YouTube
전북시인협회 영상아카이브 (김동수시인) - YouTube
행복한 삶을 위한 문학치료 - 김동수 교수 특강 - 전주문협 - 문학채널 - ETB 교육산업신문 - YouTube
전주문협 2020 대동제 - 행복한 삶을 위한 문학치료 - 김동수 송희 시인 특강 - 문학채널 - ETB 교육산업신문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