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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다. "칭얼칭얼 대는 꼬마 애가 살았는데 엄마, 아빠는 나쁜 무리들에 의해 돼지로 변하고 슬픔에 차 눈물만 흘렸지만, 멋진 왕자님을 만나 힘을 얻어 나쁜 놈들을 물리치고 엄마, 아빠를 구해냈답니다"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전전승 내려왔다. 할머니 다리를 베개 삼아 누운 손자들에게 할머니는 지그시 눈을 감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니면 전문 이야기꾼에게 막걸리 한잔 먹이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야기꾼은 없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는 어느새 끊어졌고, 설화학자들에 의해 수집되어 기록되어졌을 뿐이다. 이런 시대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통해 현대판 이야기꾼을 꿈꾼다.
숲 속으로 길을 잘못 들은 치히로의 아빠와 엄마는 치히로가 꺼려함에도 불구하고 문을 통해 정령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어른은 새로운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만 아이들에게는 낯선 공간은 항상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호기심에 대한 절제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공간을 접하고 낯선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간다. 타의공간에 대한 거리낌없이 들어온 치히로의 부모들은 주인이 없는 식당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들을 정신없이 먹어 치운다. 치히로는 꺼려하고 만류하지만 아빠는 지갑도 있고 카드도 있다고 한다. 예절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돈이면 모든지 되는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들 무슨 상관일까. 뭐니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있는데 말이다.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그들은 기아에 허덕여 어쩔 수 없이 먹는 것이 아니다. 먹고 싶은 욕망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더 이상 식욕은 본능이 아니라 욕망이다. 인간이 지닌 모든 본능은 사회를 통해서 욕망으로 변한다. 배가 고픈 것은 본능이지만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은 욕망인 것이다. 그 끝없는 욕망은 치히로의 아빠와 엄마를 돼지로 만들어 버렸다. 치히로의 엄마와 아빠는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이브인 것이다.
여기서 치히로와 아빠, 엄마가 들어선 귀신들의 세계는 엘리아데가 말하는 聖의 공간은 아니다. 이 공간은 현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인간이 사는 세계와 너무 흡사하다. 일을 해야 살수 있으며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다. 그리고 유바바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인처럼 황금에 눈이 멀었다. 문을 통과함으로써 귀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나누어지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달라진 것은 없다. 정령들의 세계는 치히로에게 더욱더 처절하다. 유아기적 단계에 있는 치히로는 부모를 잃었고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다. 그리고 유바바의 독재 아래 있고 욕망을 분출할 수도 없다. 이곳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동양적 상상력으로 꾸며졌지만 처절한 현실이다. 이곳은 치히로에게 악몽과 같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온천을 배경으로 한다. 온천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이다. 우리나라에 때밀이 문화라는 목욕문화가 있다면 일본에는 온천 문화라는 목욕문화가 있다. 근래에는 일본관광객들이 우리나라의 때밀이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많이 찾는다고 하지만 일본인이 즐기는 목욕문화의 근간은 온천 문화이다. 일본의 온천은 우리나라의 대중목욕탕과 같으며 약사빠르기로 소문난 일본 원숭이들도 이 온천을 즐긴다고 한다. 이야기꾼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주 일본적인 온천을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온천에 깊은 의미를 심어 놓았다. 온천은 불과 물을 가진다. 불과 물은 고대 철학자들이 이야기되어 온 세상을 이루는 근본 요소이다. 이 둘은 상극이지만 인간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찌들은 신들은 세상의 근원이 존재하는 곳에서 자신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은 인간의 상징이고, 물은 귀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불의 중요성은 세계의 신화에서도 드러난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를 보라.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불이 신의 전유물에서 인간에게 전이되는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불을 잘 사용하면 한없는 이익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우리에게 한없는 피해가 주어진다. 인간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욕망은 그 여부에 따라 인간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그런 반면 물은 다르다. 인간이 댐을 짓고 저수지를 조성하고 인공비를 만들어 낸다 해도 인간에게 있어 물을 다루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이다. 우리가 물을 한없이 더럽힐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오염된 강의 신이 치히로의 도움을 받아 치유되고 그 보답으로 쓰디쓴 약을 내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유바바는 이름을 빼앗음으로 종업원들을 지배한다. 인간이 바벨탑을 세워 신에게 도전하려 하자 야훼께서는 각기 다른 언어를 만들어 세상 사람들을 나누었다고 한다. 솔직히 귀신의 세계에조차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웃기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장자끄아노의 "불을 찾아서"같은 영화도 아니고 언어를 안 쓸 수가 있나. 그런데 유바바가 이름을 빼앗아 종업원을 지배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언어 발생에 있어 가장 먼저 생긴 말들은 사람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내 주위의 가족에,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서 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언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름은 인간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근원같은 존재가 되었다. 얼마나 손쉬운가. 유쾌한씨를 유쾌한씨라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름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말이다.
욕심 많은 유바바에게는 쌍둥이 누나가 있다. 쌍둥이라는 선과 악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똑같은 구멍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의 성격은 정반대일 수도 있다. 노아의 방주에 탑승조건이 짝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면 이런 관념은 인간의 시원적인 관념인 듯 싶다. 유바바의 언니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있어 해결책 같은 존재이다. 그녀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은 소용없다며 손수 만들고 유바바의 아기와 새 그리고 떠돌던 요괴가 힘을 모아 만든 머리띠를 치히로에게 부적처럼 선물한다. 그리고 유바바와 언니인 자신이 힘을 모아야 되는데 성격이 전혀 맞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얘기하며 선인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화적 원형의 소산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상징은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읽어내는 재미는 없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너무나 교훈적이다. 그러나 이런 뻔한 것에도 불구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재미는 신화적 원형에 기초한 동양적 상상력의 발로라는 점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헤리포터"가 만들어낸 세계도 새롭게 창조된 세상이 아니라 고대의 신화와 전설에 빌려 온 서양적 상상력의 발로라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동양적 상상력의 발로인 것이다. 동양인으로서 서양적 상상력의 세계를 접하는데 있어 경이롭고 신비하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는 동양인인 우리에게 친근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신화적 원형을 읽어내며 다른 나라의 신화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