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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식(洪元植, 1877~1919)은 본관이 남양으로, 1877년 10월 13일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넘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순화(洪淳華)이고 어머니는 박씨로 알려져 있다. 제암리에서 자라 청년이 된 후 대한제국 서울 시위대 제1대대 군인으로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군대가 해산을 당하자 의병전쟁에 참여하여 충남 지역을 비롯하여 각처로 다니면서 왜군과 싸웠다. 그리고 1914년 3월 29일 인근 청북면 판교리에서 고향 제암리로 돌아와 기독교 권사가 되어 학교를 세워 신교육운동에 주력하며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홍원식은 고향 제암리에서 제암 교회의 안종후와 고주리의 천도교인 김성렬 등과 함께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는 발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속칭 ‘두렁바위’로 불리는 조선 후기 전형적인 씨족 중심의 농촌마을이었다. 제암리는 3ㆍ1운동 당시 전체 33가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31가구가 순흥 안씨들이 살고 있던 집성촌이었으며,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천도교인이 제일 많았고, 다음 감리교, 유교 순으로 모두 종교적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전에 이미 동학이 포교되어 천도교 신자들이 많았고, 감리교는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 들어왔다. 이후 빠른 전파를 통해 초가집의 교당이 만들어지고 인근 주민을 합하여 15호의 신자 집이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인은 천도교에 비해 늦게 들어와 천도교인에 비해 그 수가 적었다.
홍원식은 발안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뒤 제암리 학살 만행으로 순국하였는데, 당시 부인 김씨도 같이 순국하였다. 부모를 잃은 후손들, 특히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평탄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원식의 후손인 손자 홍기봉 씨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홍원식과 김씨는 순국 당시 슬하에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그는 홍선헌으로 당시 10살이었다고 한다. 제암리 학살의 희생은 순국자들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의 삶에도 너무나 큰 아픔을 안겨주었다. 아들 홍성헌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 무참히 짓밟혀진 제암리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다. 홍선헌은 아편젤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을 다녔고, 성장하여 20대 초반 만주로 이주하여 봉천과 목단 등지에서 항일독립군 활동을 펼쳤다. 이후 생존의 몸부림 속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홍성헌은 슬하에 1녀 2남을 두었다.
홍원식에 대한 개인 생애사를 조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만큼 남아 있는 기록과 기억이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발안장터의 만세 운동과 제암리 사건을 중심으로 써 내려가면서 홍원식을 비롯한 제암리 순국 선열들의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일제의 강압적 무단통치가 강화되고 식민지하 민족적 차별과 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민중들은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ㆍ1운동은 거족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폭력 정치와 경제적 예속 관계는 조선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발표를 기점으로 탑골 공원에서 만세 함성이 일어났고, 이 함성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수원군의 3ㆍ1운동은 서울과 개성의 만세 운동과 함께 3월 1일 수원면 방화수류정(용두각) 아래에서 시작되었고, 조직적으로 격렬하게 펼쳐진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26일의 송산면 만세 운동에서부터 촉발하였다.
송산면에서는 홍면옥(일명 홍면)과 홍효선 등이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송산면 주민들은 3월 26일 오후 5시경 송산면사무소로 몰려가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사강리 장날인 3월 28일 홍면옥과 홍효선 등이 앞장서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장터 등지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1,0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모여 송산면사무소 뒷산 및 부근에서 격렬하게 만세 운동을 벌여나갔다. 이 과정에서 순사부장 노구찌(野口廣三)가 총을 쏘며 저지하자 격분한 시위 군중들은 노구찌에게 달려들었고, 놀란 노구찌는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다 시위 군중들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돌과 몽둥이에 맞아 처단되었다.
이후 수원군의 강렬한 만세항쟁은 3월 31일 향남면 발안장터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는 1,000여명의 시위 군중들이 모여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며 거세게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날은 장이 열리는 날이었기에 많은 사람들과 장꾼들이 모여 있었다. 3ㆍ1운동 당시 많은 만세 운동이 장터에서 벌어졌는데, 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고, 또한 자연스럽게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공유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시위 군중들은 연설을 하고 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며 행진을 하였다. 그러면서 경제침탈의 원흉으로 생존권을 위협했던 길가의 일본인 가옥과 상점에 돌을 던졌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더욱 더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발안장터의 만세 운동은 특히 이곳에서 식민지 수혜를 등에 업고 경제력을 장악해가던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제암리 사건을 촉발시켰던 주범 중 한 명인 일본인 사사카는 발안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자로, 발안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렸던 상징적 인물이다. 발안 만세 운동에서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 상가 등이 집중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일제의 경제적 침투에 대한 생존권의 발로였다.
긴급히 출동한 일제는 진압 과정에서 경찰과 보병들을 앞세워 마구잡이로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만세 운동의 과정에서 거센 투석전과 일제의 무자비한 사격 속에 시위 군중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결국 시위를 이끌던 유학자 이정근도 일본 수비대장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발안장터의 만세 운동에서는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만세 운동의 물결은 멈추지 않았고, 다음날 4월 1일, 2일 밤에도 주민들은 당제봉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산상 횃불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발안장터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는 온 세상이 떠나가도록 활활 타올랐다.
발안장터의 만세 운동이 일어난 직후 4월 3일에는 수원군 최대의 만세 운동이 우정면과 장안면의 연합으로 일어났다. 향남면 발안에서의 3ㆍ1운동은 바로 우정ㆍ장안면과의 연계를 통해 일어난 것이었다. 우정ㆍ장안면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백낙렬은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 함께 유학자 이정근과 사전 모의하였으며, 발안장터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동참했던 제암리와 수촌리, 고주리 주민들은 4월 3일의 우정면과 장안면의 대규모 연합 만세 운동에 함께하며 ‘대한독립’의 기치를 높였다. 이때 홍원식은 제암리를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만세 운동에 동참하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서울에 올라가 3월 1일의 만세 시위에 참가한 후, 수촌리로 돌아와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하며 3ㆍ1운동의 사전모의에 들어갔다. 이들은 서울의 정세를 파악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독립운동비 부담에 대해 의논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암리의 홍원식과 기독교도들이 적극 동참하였다. 시위 주동자들은 사전에 시위 군중을 모으는 방법 등을 의논했고, 각 동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으니 각 호마다 1명 이상씩 나오게 하자고 결정했다. 그리고 4월 3일에 주민들을 쌍봉산에 집결시키기로 했다. 이외에도 중요한 논의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일본인 순사 처단과 주재소 및 두 개의 면사무소를 파괴할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선동하여 군중들에게 주재소 및 면사무소를 포위하고, 먼저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문을 파괴하게 한 뒤에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 순사를 타살하기로 했다.
이것은 주도면밀한 사전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고, 이는 곧 실행에 옮겨졌다. 3ㆍ1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날 시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면사무소 및 주재소의 파괴와 일본 순사의 처단이었다.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은 서울에서 3ㆍ1운동이 일어난 것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독립에 대한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전 준비 끝에 우정ㆍ장안면을 중심으로 한 3ㆍ1운동은 4월 1일 밤 7시에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하여 일제히 시작되었다. 그리고 4월 3일 오전 11시 장안면사무소에 약 2백여 명이 모여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장안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쌍봉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군중들은 수촌리 천도교 전교실에서 만든 태극기와 깃발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쌍봉산에는 약 1천여 명이 모여 있었고, 군중들은 오후 3시경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집기류들을 파손하고 불에 태워버렸다. 이윽고 성난 군중들은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장안면장을 다시 앞세워 태극기를 들게 하고 군중의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오후 4시경에 화수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앞에서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순사를 포위해 처단했다.
우정ㆍ장안면에서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뿌리 깊은 종교 조직과 향촌 조직의 연대에 있었다. 실질적으로 3ㆍ1운동에 2천 5백명이라는 대규모의 인원이 참여한 것은 우정ㆍ장안면민뿐 아니라 발안 만세 운동에 참여 했던 주민들, 그리고 향남면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등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결과였다.
일제는 3월 31일 발안 시위가 있은 직후 경기도 경무부 경시 나가타니(長谷部巖) 대위를 중심으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파견했다. 검거 작전 수행 중 다시 4월 3일 우정ㆍ장안면의 대규모 연합 만세 운동으로 화수리에서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토벌 작전은 더욱 거칠어졌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그날 시위를 주도했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야간에 수촌리를 급습하여 김교철 이하 차인범ㆍ정순영ㆍ이순모 등을 체포했고, 진압 과정에서 가옥들을 방화하여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제암리에서 조금 떨어진 이웃 마을인 수촌리는 일제의 보복 만행으로 마을의 전체 42채의 가옥 중 38채가 불탔다. 이때 만세 운동의 중심적 공간이었던 수촌리 교회 또한 함께 불타 없어졌다. 축소 보고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 헌병 측 자료를 보더라도 제암리 사건 이전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호, 사망자 46명, 부상자 26명, 검거인원 442명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들이 일제의 보복 탄압이라는 것은 조선주차헌병사령관이 대신에게 보낸 보고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보고의 내용 중에 ‘수원과 안성 지방의 시위 주동자 검거 중에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76호를 소각하였는데, 이중에는 검거반원이 보복심을 일으켜 방화한 것도 확인하였다’고 했다.
이렇듯 일제의 폭력적인 탄압이 심화되는 가운데 발안장터의 만세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4월 15일 400여 명이 모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에 놀란 발안 주재 순사는 이들을 해산시켰다. 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이 지역의 만세 운동이 다시 격렬하게 전개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 일제는 일본인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철야 경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만세 운동의 원인을 향남면 제암리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로 파악하고 만세 운동의 주동자 색출을 내세워 세계적인 학살 만행인 ‘제암리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일제는 우정ㆍ장안면과 발안장터의 시위가 연계되어, 이 지역이 내란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3ㆍ1운동의 주동자 들을 모두 처단해야 한다는 빌미를 내세워 마구잡이로 학살과 방화를 자행했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은 발안에 도착했다. 이들의 임무는 진압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발안 내 다른 지역의 시위 주동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동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아리타는 제암리 진압을 시작하였다. 제암리에 도착한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이고 제암리와 인근 마을의 주민 약 20여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때 홍원식 선생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주민들과 함께 교회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아리타는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둬 놓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부하들에게 불을 지르고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제암 교회는 총성과 함께 불타오르며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진 것이다. 이 만행으로 홍원식은 주민 20여 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이날 이런 만행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현장에 달려 온 홍원식의 부인 김씨도 일본군의 총격에 사망하여 부부는 홀로된 자식을 남기고 한줌의 재가 되었다. 불타는 교회에서 뛰쳐나와 목숨을 건지려던 이들 모두 총에 맞아 순국하였고, 남편을 찾아온 부인들 또한 순국했다. 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암리 마을의 가옥들에 불을 지르고, 이웃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나무에 묶어 총살했다. 발안 만세 운동과 우정ㆍ장안면 만세 운동의 핵심 인물인 고주리의 김흥렬과 그 일가족은 참살당했다. 죽은 이들은 재가 되어 산화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원한은 통곡으로 울려퍼졌다.
제암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며 발안장터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많은 이들과 함께 홍원식 부부는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홍원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부인 김씨에게도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여 선양하고 있다.
제암리 희생자들은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다소 주장하는 논지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지의 순국기념탑에는 23명으로 되어 있고(안정옥(安政玉)·안종린(安鍾麟)·안종악(安鍾樂)·안종환(安鍾煥)·안종후(安鍾厚)·안경순(安慶淳)·안무순(安武淳)·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안유순(安有淳)·안종엽(安鍾燁)·안필순(安弼淳)·안명순(安明淳)·안관순(安官淳)·안상용(安相鎔)·조경칠(趙敬七)·홍순진(洪淳晋)·김정헌(金正憲)·김덕용(金德用)·강태성·동 부인 김씨·홍원식·동 부인 김씨), 연구자에 따라서 24명, 또는 고주리의 학살자 6명(김흥열(金興烈)·김성열(金聖烈)·김세열(金世烈)·김주업(金周業)·김주남(金周男)·김흥복(金興福))을 포함하여 29명 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며, 당시 일제 측 자료도 20여 명에서 32명 등 정확하지 않다. 최근 연구에서는 전체 희생자가 37명이라고도 보고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자료조사와 많은 부분 확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3ㆍ1운동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나갔던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일제 만행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아픔이다.
제암리 학살 만행이 벌어진 후 제암리와 고주리, 수촌리, 발안 등지는 그야말로 공포와 참혹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일제는 만세 운동의 폭력적 탄압과 보복적 만행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를 올렸다고 판단했으나,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외교관과 외신기자, 선교사들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 일제의 만행을 보도한 외신 기사. 2 선교사들은 현장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자국에 진상을 알렸고, 이를 통해 제암리 사건이 외신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
4월 6일에 일어난 수촌리 마을 방화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4월 16일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중 의외로 제암리 사건 현장을 처음 목격하게 된 커티스ㆍ테일러ㆍ언더우드 등에 의해 사건 소식은 서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개인적인 차원에서 스코필드가 여러 차례 방문하여 부상자 치료와 난민 구호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4월 19일에는 영국 대리영사와 노블을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이 현장을 답사하였다. 이후에도 노블을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를 자주 방문하여 부상자 치료와 난민 구호에 나섰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선교비 2천원을 긴급 지원하여 교회와 교인 집 복구비로 사용케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현장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 교회에 진상을 알렸다. 또한 외교 경로를 통해 총독부에 제암리 만행을 항의하며 구호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제암리 사건으로 국내 선교사뿐 아니라 외국의 여론까지 악화되자, 조선군 사령부에서는 제암리 사건의 원인이 된 수촌리와 화수리 토벌 작전을 수행했던 지휘관들을 문책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악화된 여론을 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여론을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돌려보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였다.
제암리 사건은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인 3ㆍ1운동을 일제가 폭력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제암리 사건은 민족 저항에 대한 폭력적 탄압과 무자비한 실상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제암리 사건은 홍원식의 구국 운동의 모습 속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일제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식민 지배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의 발로이다.
홍원식을 비롯한 제암리의 시위 주동자들은 일찍이 기독교와 천도교를 통해 개화사상과 민족주의 의식을 지녀온 인물들이었다. 특히 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홍원식은 제암리 교회 권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천도교인들과 함께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여 3ㆍ1운동 이전부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3ㆍ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들은 마을의 지도자로서 적극적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주도하였다. 발안장터를 중심으로 한 만세 운동과 우정ㆍ장안면의 만세 운동은 이 지역 주민들이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 및 독립을 향한 의지가 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제암리와 고주리를 비롯한 수원 지역의 민중들의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반증이다.
현재 제암리 학살이 벌어진 자리에는 발안장터의 만세 함성과 아픔을 간직하고,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간직한 ‘제암리 3ㆍ1운동 순국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제암리 기념관은 1997년 착공되어 2001년 완공하였다. 제암리 기념관이 오늘날 이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역사는 처음 소실되었던 제암리 교회가 다시 복원되어지면서 시작되었다.
제암교회는 1919년 4월 15일 일제의 만행으로 불탄 뒤, 7월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되었고, 1938년 현재의 위치에 기와집 예배당이 만들어졌다. 1959년 4월에 3ㆍ1운동순국기념탑이 세워졌고, 1970년 9월에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단체에서 속죄의 뜻을 담아 모은 1천만 엔을 보내와 새 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되었다.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공식적인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기독교인들의 씁쓸한 사과와 모금으로 교회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1982년 9월 대대적인 유해 발굴 사업이 진행되어 23위의 묘로 안장되었으며, 다음해 7월 기념관과 새로운 기념탑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미보다는 우리의 손으로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구예배당과 기념관을 헐고 새롭게 제암리 3ㆍ1운동순국 기념관이 세워져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고 외치며 민족교육의 장으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제암리 기념관 입구에서 오른쪽 작은 등선 위에는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23인의 묘소가 있다.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 있는 듯하지만, 묘소 주변에 핀 분홍빛 무궁화와 함께 아직도 소리 없는 외침이 존재하는 듯하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보상, 그리고 더 중요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곳에서는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들의 개인적 삶을 통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비춰본다. 그리고 개인적 삶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나간다. 두렁바위 독립군! 홍원식, 그의 고결한 희생은 우리들의 삶 속에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출처: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