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저에게 두툼한 서류 봉투와 함께 어떤 엄마의 편지가 배달되어 왔습니다.
"저는 자폐증(발달장애) 장애를 안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최준의 엄마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엄마의 사연과 최준의 활동을 담은 스크랩 북을 보고 저는 놀라움과 감동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조승우군이 주연을 한 영화 <말아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폐증을 가진 청년이 마라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그 영화는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감동을 선사했지요.
최준군은 바로 '판소리의 말아톤'이란 별명을 가진 소년입니다.
최준(18세). 대화능력은 대여섯 살 수준. 자폐성 장애 2급, 중증. 낯선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대화하는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함. 초등학교 4학년까지 기저귀를 차고 지냈슴.
그러한 준이를 변화시킨 것은 엄마의 피나는 노력입니다. 3살 무렵, 아들이 자폐아라는 판정을 받은 이후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거의 24시간 붙어서 산 엄마는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 끝에 지금의 준이를 있게 했습니다.
이런 준이가 엄마와 아빠만큼 좋아하고, 웬만한 또래 아이들보다 확실히 잘하는 게 있습니다. 음악. 특히 '피아노'와 '판소리'입니다.
어렸을 때 준이는 소리에 민감해서 그릇이나 물건 두드리는 소리를 유심히 듣곤 했답니다. 상점에 가면 상품이나 진열대를 일일이 두드려 소리의 높낮이를 확인해보곤 했답니다. 기계소리나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를 싫어 해 지금도 변기 물을 내리고는 바로 도망친다고 합니다. 장난감 태엽 돌아가는 소리는 귀를 막고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싫어했답니다. 그대신 프로펠러 소리나 음악소리는 너무너무 좋아했답니다.
준이의 부모님은 이런 준이를 보고 초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게 했답니다. 하지만 피아노 학원에서는 한 음만 계속쳐대서 건반을 망가뜨리기도 하는 준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1년도 안돼 포기했답니다.
그러나 음악적 재능은 쑥쑥 자라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우연히 들은 <캐논변주곡>의 멜로디를 그대로 피아노에 옮길 만큼 절대음감을 보여 엄마를 놀라게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사물놀이를 가르치려고 국악학원을 찾았는데, 마침 지도하던 대학생 교사의 전공이 판소리여서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준이는 아이들의 음정과 박자가 맞지 않을 때마다 "틀렸어, 아니지!"라고 웅얼거리며 판소리의 세계에 빠져 들었답니다.
5분도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불안하게 돌아다니던 아이가 1시간이 넘게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 연습을 하는 것을 본 준이 엄마는 "이거다!" 싶었답니다.
그 뒤로 준이의 음악적 재능은 무럭무럭 자라 중학교 때는 <전국 청소년 국악 경연대회>에서 비장애 학생들과 겨뤄 판소리 부문에서 우수상을 탔고,
2002년 4월에는 <흥보가>를 완창 하고,
2006년 4월에는 <춘향가>를 완창하고,
2007년에는 <동랑청소년 예술제>의 판소리 고등부 부문에서 비장애 학생들과 겨뤄 2등상을 탔고,
2008년 3월에는 <음, 소리에 빠지다>라는 공연에서 판소리와 함께 피아노 실력을 선 보였고,
2009년 2월에는 <흥보가>를 완창했습니다.
준이에게는 판소리가 즐거운 놀이이고, 자신을 치유하는 치료법이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대상입니다.
공연 전에 격려하러 찾아 온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 군. 왼쪽부터 배군 어머니 박미경씨, 최준군, 배형진군, 최군 어머니 모현선씨.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이란 자폐나 정신지체 같은 뇌기능 손상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수학이나 암기나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특정 영역에서 천재성을 보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이었던 미국인 킴픽 등이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최준군을 서번트라고 할 수 있는 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재능을 잘 살려주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듣거나 소리 연습을 할 때면 "너무 아름다워요!"하고 소리친다는 준이.
삼겹살과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고, 헬리콥터와 비행기의 날개와 지하철을 좋아해 컴퓨터에 날개 있는 모든 것들과 전 세계 지하철을 다운 받아 놓았다는 준이.
기쁘거나 슬플 땐 아무 음악에나 맞춰 춤 추는 걸 좋아하고, 예쁜 스포츠댄스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사춘기 소년 준이.
밤늦도록 피아노와 판소리 연습을 하느라 힘들어도 요령 피우는 방법조차 모르는 연습 벌레 준이.
말 대신 소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준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은 기적을 선보이는 아름다운 청년 준이.
지금 준이는 대학입시라는 또다른 도전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두 손 활짝 펴고 소리로 세상을 여는 준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때까지 준이의 '아름다운 도전'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판소리의 말아톤 최준! 잘한다! 얼씨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