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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핍박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처음에 동주(洞州 黃海瑞興)사람 김치양(金致陽)은 태후(太后)의 외족(外族)인데, 성품이 간교(姦巧)하였다. 일찍이 남을 속이는 꾀로써 머리를 깎고 중이라 하여 천추태후의 궁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므로, 성종(成宗)이 장형(杖刑)을 내리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그를 불러와서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에 임명하고, 수녕이 되지 않아서 귀하고 총애(寵愛)됨이 비할 데가 없었다. 백관(百官)의 벼슬을 주고 빼앗음이 모두 그 손에 달렸으며, 친당(親黨)이 조정에 포열(布列)하여 세력이 조야(朝野)에 떨치었다. 집을 지었는데 3백여 간이나 되며, 누각(樓閣)․정자(亭子)․동산․못<池>이 극도로 화려하였다. 밤낮으로 태후와 놀고 희롱하여 아무런 두려움과 꺼림이 없었다. 동주(洞州)에 절<堂>을 세우고 이름을 성숙사(星宿寺)라 하고, 또 궁성(宮城)의 서북 모퉁이에 십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그 그림 그린 형상은 기괴하여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몰래 다른 뜻을 품고 음조(陰助)를 구하여 모든 기명(器皿)에도 그 뜻을 새겼다. 그 종(鍾)에 새기기를, “동국(東國)에 태어날 때에는 <태후(太后)와> 같이 선종(善種)을 닦고, 후에 서방(西方)에 가는 날에는 <태후와> 함께 보리(菩 提)를 증(證)할 것이다”하였다. 왕이 항상 이를 내쫓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내쫓지 못하였다. 이 때에 와서 태후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것은 치양과 관계하여 낳은 아이였다. 태후는 치양과 모의(謨議)하여 왕의 후사(後嗣)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대량군(大良君)을 꺼려서 강제로 그를 출가(出家)하게 하였으니 대량군이 이 때 나이 12세였다. 후에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거처하였는데, 태후가 몰래 사람을 보내어 헤치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절에 늙은 중이 방 가운데를 파서 지하실(地下室)을 놓아 불칙(不測)의 변고를 막았다.
12년
대부(大府)의 기름 창고에서 화재(火災)가 나서 천추전(千秋殿)에 불길이 번져서 탔다. 왕이 전우(殿宇)와 부고(府庫)가 불에 탄 것을 보고 슬퍼하고 탄식하여 병이 나서 정사를 보살피지 못하였다.
중락..... 유행간(庾行簡)이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왕이 그를 사랑하여 남색(男色)으로 총애(寵愛)하였다. 매양 교(敎)를 내릴 때마다 반드시 먼저 행간(行簡)에게 묻고 난 후에 시행하니, 이로 말미암아 왕의 사랑을 믿고 교만하여 백관(百官)을 업신여겨 마음대로 턱짓을 부리니, 근시(近侍)들이 그를 왕과 같이 대하였다.
(이하 중략)
현종조
최충(崔沖)이 말하기를, “옛글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廢)하리오”라고 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음란하고 방종하여 가만히 나라를 위태하게 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종께서 ‘백성들이 현종의 촉망(囑望)함을 알아차려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악당(惡黨)을 배제(排除)하고 사자(使者)를 빨리 보내어 맞아 와서 왕위를 전해 주어 왕실(王室)이 튼튼하게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리오’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모(천추태후)가 끼친 화근(禍根)으로 인하여 병권(兵權) 가진 신하[廉兆]가 반역(反逆)을 일으키고 강한 인국(隣國)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서울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임금이 파천(播遷)하였으니 불행이 극도에 달하였다. 번정(反正)한 후에는 오랑캐와 화호(和好)를 맺고, 전쟁을 쉬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賦稅)를 박하게 하고 요역(요役)을 가볍게 하며, 준수(俊秀)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서울과 지방이 평안하고 농사가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나라를 중흥(中興)시킨 황이라 이를 수 있다“ 하였다.
목종 12년의 이하 생략 부분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강조의 움직임에 대한 부분입니다.
결과적으로 천추태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나 생각하긴 쉽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바람난 여자"에 불과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으려 했던 KBS 제작자들의 발상 자체가 이해가 안됩니다.
고증하기 힘든 곳에 상상력을 발휘하는게 불가피하다지만, 픽션이 너무 강해 카페에서도 조차 왜곡논란이 일어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헌애왕후가 어머니로서의 자격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고려사 부분인데요.
"辛酉에 敎하기를 「唐堯는 八元1)으로써 다스리고 周는 十亂2)으로 因하여 일어났으니 나라를 다스리는데 資賴할 바는 오직 어진 이뿐이다. 나는 어려서 父母3)의 가르침을 잃고 자라서 師訓이 없으므로 朝廷에 臨하여 일에 다다르면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왔는데 어찌됨인지 去年 以來로 자주 乾坤의 變怪가 나타나고 또 邊境의 근심이 많아지니 다만 自責하는 마음이 깊을 뿐이어늘 어찌 감히 남을 허물할 생각이 있으랴. "
여기서 ""나는 어려서 父母3)의 가르침을 잃고 자라서"" 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주석을 보니 원문에서는 義方이란 문구를 사용했었습니다.
의방은....義方 = 義로써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어미가 자식을 敎訓함을 말한 것이니 左傳 隱公二年條에 「)碏諫曰 臣聞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雅」라 하였음.
좌전 은공편에 나오는 부분인데, 어쨌거나 어미가 자식을 교훈해야 함에도 목종 자신이 사훈(스승의 가르침?)이 없다고 밝히는 것을 보니 헌애왕후도 자식 교육에 그다지 신경을 많이 쓴거 같진 않습니다.
그리고 대량군을 맞이한 사람은
"이윽고 皇甫兪義 等이 大良院君을 받들고 이르러 드디어 卽位케 하였다. "
황보유의라는 사람인데, 당시 황보씨의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기에 같은 성씨인 헌애왕후와 황보씨등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나 봅니다.
고려사 열전 경종편엔 헌애왕후에 대한 부분이 있스빈다.
○ 헌애 왕태후(獻哀王太后) 황보씨(皇甫氏)는 대종(戴宗)의 딸로 목종(穆宗)을 낳았다. 목종(穆宗)이 즉위하매 존호(尊號)를 책상(冊上)하여 응천 계성 정덕 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 하였다. 목종(穆宗)의 나이 이미 18세인데 태후(太后)가 섭정(攝政)하여 천추전(千秋殿)에 거(居)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천추 태후(千秋太后)라 하였다. 태후(太后)가 김치양(金致陽)과 더불어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로써 왕위를 이으려 하였는데 때에 현종(顯宗)이 대량 원군(大良院君)으로 있으매 태후(太后)가 이를 미워하여 억지로 출가(出家)시켜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우거(寓居)케 하였으므로 세상(世上)에서 신혈소군(神穴小君)이라 칭하였다. 태후(太后)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살해(殺害)하기를 꾀하였는데 하루는 내인(內人)을 시켜 술과 떡을 보내니 모두 독약을 넣은지라 내인(內人)이 절에 이르러 소군(小君)을 찾아 뵙고 몸소 권하여 먹이려 하였으나 절 중이 문득 소군(小君)을 땅구멍 속에 숨겨 놓고 속여 말하기를,
ꡒ소군(小君)이 산중(山中)에 놀러 나갔으니 어찌 간 곳을 알리요.ꡓ
라고 하였다. 내인(內人)이 돌아간 뒤에 정중(庭中)에 흩어버리니 오작(烏雀)이 먹고 곧 죽었다. 무릇 충신(忠臣)․의사(義士)를 더욱 꺼려 죄없는 신하를 많이 모함하여도 목종(穆宗)이 금할 수 없었다. 12년 정월(正月)에 천추전(千秋殿)의 화재로 태후(太后)가 장생전(長生殿)에 들어갔다. 뒤에 강조(康兆)가 김치양(金致陽) 부자(父子)를 죽이고 태후(太后)의 친속(親屬)을 해도(海島)에 유배하였으며 또 사람을 시켜 목종(穆宗)을 시해(弑害)하였다. 이에 태후(太后)가 황주(黃州)에 돌아가 살다가 21년이 지난 현종(顯宗) 20년 정월(正月)에 숭덕궁(崇德宮)에서 훙(薨)하니 수(壽)가 66이라 유릉(幽陵)에 장사하였다.
반역 열전엔 김치양이 나옵니다.
김치양(金致陽)
김치양(金致陽)은 동주인(洞州人)이니 천추 태후(千秋太后) 황보 씨(皇甫氏)의 외족(外族)이다. 성품(性品)이 간교(姦巧)하고 음경(陰莖)이 능(能)히 수레바퀴를 끌만큼 강성(强盛)하였다. 일찍이 거짓 삭발하고 천추궁(千秋宮)에 출입(出入)하여 자못 추성(醜聲)이 있어 성종(成宗)이 이를 알고 먼 곳에 곤장 쳐서 유배하였다.
○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불러 합문 통사 사인(閤門通事舍人)을 제수하니 몇 년 안되어 귀총(貴寵)이 비할 바 없었으며 갑자기 옮아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러 삼사사(三司使)를 겸(兼)하니 백관(百官)의 여탈(與奪)이 다 그 손에서 나오고 친당(親黨)이 포열(布列)하여 권세가 중외(中外)를 기울였으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집을 일으킴이 300여 간(間)에 이르고 대수(臺樹) 원지(園池)가 극히 미려(美麗)하여 밤낮으로 태후(太后)와 함께 유희(遊戱)하여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또 농민을 역사(役事)시켜 사당을 동주(洞州)에 세우고 성수사(星宿寺)라 이름하고 또 궁성(宮城)의 서북쪽 한 모퉁이에 십왕사(十王寺)를 세우니 그 도상(圖像)이 기괴(奇怪)하여 형용하기 어려웠으며 가만히 딴 뜻을 품고 음조(陰助)를 구할 때 모든 기명(器皿)에 다 그 뜻을 새기니 종(鍾)에 새기기를,
ꡒ동방의 나라에서 살고 있을 동안 같이 선종(善種)을 닦고 뒤에 서방(西方) 정토(淨土)로 가서는 함께 보리(菩提)를 증명(證明)하리라.ꡓ
고 하였다. 목종(穆宗)이 항상 내치고자 하였으나 모후(母后)의 뜻을 상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다. 뒤에 태후(太后)가 아들을 낳으니 이가 김치양(金致陽)과 사통(私通)하여 낳은 바이라 김치양(金致陽)이 태후(太后)와 함께 왕의 후사(後嗣)를 삼기로 꾀하여 대량군(大良君 왕현(王顯) )을 꺼려 핍박해 중이 되게 하고 여러번 이를 해(害)치고자 하다가 왕이 병중(病中)에 있음을 타서 변(變)을 꾀하고자 하니 유충정(劉忠正)이 상서(上書)하여 변(變)을 고하여 왕이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비밀히 의론하고 빨리 대량군(大良君)을 맞이하게 하니 김치양(金致陽)이 이를 알고 어찌 할 수 없이 몇 일간 주저하다가 강조(康兆)가 폐위(廢位)하자 군사를 보내어 김치양(金致陽)과 아울러 그 아이를 죽이고 그 무리를 해도(海島)에 내쳤다. 장연현(長淵縣) 사람인 문인위(文仁渭)란 자가 있었는데 성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오래 천추궁 사(千秋宮使)가 되었다가 김치양(金致陽)이 죽자 궁료(宮僚)가 많이 연좌(連坐)되어 베이고 귀양갔으나 문인위는 홀로 강조(康兆)의 도움으로 면(免)함을 얻고 벼슬이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충격적인건, 김치양이 어머니쪽 일가였다는 것이네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족내혼이 외가쪽 까지 퍼져있었다는 뜻일까요?
어찌되었건, 제 개인적 판단으론, 아들 덕택에 편안한 삶을 유지한 여자일 뿐, 자식 교육에도 소홀했고, 외족인 김치양과 간통해 아들까지 낳았으며, 그 아들 때문에 태조의 손자인 대량군까지 핍박해 중이 되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죽이려까지 했으니, 야심이 많았다 뿐이지, 같은 성씨인 황보유의조차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별반 강력하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다면, 분명 강조도 이를 알았을 테고, 강조의 군대가 밀려왔으면 어느정도의 반항은 있었을 겁니다. 강조는 거의 무혈입성이나 다름없이 들어왔었죠.
헌애왕후를 좋게 봐줄 아무런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그저 김치양과 바람나 조카를 죽이려했던 야심있는 비정한 여인정도로 봐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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