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뻐서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듣는다. 저는 거듭났는걸요,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죄를 용서받고 회개의 경험을 통해 다시 태어난 기쁨과 감격스러움 속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외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을 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빠지게 되는 갈등과 좌절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리고 이것이 다만 진정한 그리스도인 경험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신앙의 완성을 다 이루었다고 기뻐 외치는 소리라면, 거기에는 조금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거듭남의 뿌듯하고 행복한 경험을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죄의 소욕과 욕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깜짝 놀라서 부르짖는다. 아니, 다 회개하고 거듭났는데, 왜 이런 욕심과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드는 걸까? 거듭남은 중요하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 거듭난 후에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난 후에 어떻게 그 거듭남을 유지하는 신앙생활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죄에 승리하며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이유로 혼란스러워한다.
먼저,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듭났다. 라는 것은 마음이 거듭난 것이지 육신이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 점을 알아야 거듭난 이후에 올바른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거듭났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과거와 같이 육신의 타락한 정욕과 욕심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우리의 육체가 더는 육신의 소욕과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 새로운 육신으로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 거듭난 것으로 믿음의 도를 다 이룬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첫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아기 라는 말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먼저 기는 법을, 그리고 일어서는 법을, 그리고 걸음마를 떼는 법을, 후에는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거듭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가, 어떻게 그 순결하고 깨끗한 회개의 상태를 보존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거듭남을 유지하는 삶이란 죄에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말한다. 옛 자아는 죽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자신과 세상과 죄에 승리하는 생활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공부하여 보기로 하자.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 승리하는 삶의 비결
1. 올바른 선택을 해라
올바른 선택을 해라! - 거듭남을 유지하며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이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8).
거듭난 사람은 매일의 삶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즉, 매 순간 성령을 좇고 따르는 선택을 해야 한다. 성경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육신이 여전히 영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주지하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개심하여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갈 때에, 우리가 가진 육체에서 분리되어 더는 시험받거나 갈등과 투쟁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뜻이다.
비록 거듭났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주님께서 계시고 성령의 지배 아래서 산다 할지라도, 육체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고 또 타고난 유전자나 후천적으로 배양된 습관들이 계속 남아있으므로 육신에 속한 죄의 욕심이나 소욕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이럴 때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올바른 선택 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 (롬 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거듭났어도 이 모든 죄악이 육신 안에 있으므로 만일 육신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한다면 과거에 우리를 다스리던 그 모든 죄된 성질들이 우리를 다시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굴복하면 육신의 모든 것이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과 죄에 승리하는 비결은 올바른 선택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곧 성령을 좇아 행하는가 육신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가 하는 관건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던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던 헌신을 늘 기억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매일 자신을 주님께 바치며, 매 순간 성령을 따라 사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은 죄의 힘보다 훨씬 능력이 있다. 주님께 나아와 그분의 손을 붙잡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결단코 그들의 손을 놓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한 말이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라! -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 죄에 승리하는 두 번째 비결은 이것이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별로 생각하지 않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주제 중의 하나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처럼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2,3,4,11).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난 사람 즉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경험을 한 사람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 로 여기라는 뜻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육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이나 생각 자체가 자신인 줄로 여긴다. 그래서 그 끓어오르는 감정에 휘말리고 육신의 생각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머지, 감정이 느껴지는 대로, 또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 버리거나 떠오른 그 생각이나 감정 때문에 고민하거나 좌절을 하며 고뇌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아야 한다. 왜 바울이 그런 권면을 했는지를.
비록 우리가 거듭났다 할지라도, 죄된 육신을 가진 한, 육신의 감정이나 생각, 또는 유혹들을 떠오르지 못하게 하거나 생기지 않도록 막을 수는 없다. 이런 육신의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올라오는 모든 육신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부인하고, 곧 죄에 대하여는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동조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에 더 나아가 이제는 죄의 사슬에서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또한 예수님과 합하여 새롭게 태어난 나, 주님에 대하여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살기로 작정한 새로운 나를 진정한 자신으로 여기며 주님과 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뿐이다.그러므로 육신의 끓어오르는 감정이나 생각 자체는 진정한 나 가 아니다.
이제는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된 새로운 나 가 진정한 나 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대로 지닌 육신에서 옛날과 같은 감정과 생각과 습관들이 올라와서 우리를 지배하려 하고 넘어뜨리며 휘두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육신의 감정 그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육신의 변덕스러운 감정들과 생각들은 진정한 나 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고, 죄에 속한 육신의 자아는 죽은 것으로 간주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사는, 그리고 주님의 임재 속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새로운 나 를 진정한 나 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사도 바울의 말이다.
3.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게 하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게 하라 -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 죄에 승리하는 세 번째 비결은 이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롬 5:5, 빌 2:13). 우리가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죄를 이기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알고, 성경의 이론적인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또한 올바른 편을 선택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들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또한 과거의 크게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매 순간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역사 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능력이나 활력이 모자랄 것이며, 거듭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힘들어지거나 선을 행하는 일에 피곤하고 낙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묵상해야 한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속에서 한 번이라도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늘 하늘을 향하여 열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늘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랑으로 좌정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육신의 소욕이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과 기쁨을 맛본 사람에게 그 세력은 힘을 잃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에서 얻는 무한히 충만한 기쁨과 행복은 죄악이 주는 잠깐의 낙과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아무 가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쏟아부으신 그 깊은 사랑과 하늘 구원의 선물들을 우리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자아를 매 순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쉬워지며 죄를 이기는 일이 쉬워진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속에 소원을 일으키셔서 행하게 하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므로, 거듭난 사람들 즉 성령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부어진 바 된 사람들의 생애에서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 계명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속에 기록하여 주시는 경험이다(히 10:15,16 참조).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마음에 기록된 사람은 매 순간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여 바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게 되며, 그리하여 매일 죄에 승리하는 거듭남의 경험이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 찾아오는 참된 변화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그 감격스럽고 기쁨에 찬 순간이 항상 지속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원한다. 거듭남의 순간에 느끼던 환희와 희열이 늘 신앙생활을 지배했으면 하는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감정에 별다른 느낌이 없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을 이해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착각 속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거듭남이란 어떤 황홀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강력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과거의 모든 죄를 뜨거운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기쁨을 체험할 때, 또 하나님 앞에 다시는 옛 생애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결심으로 헌신할 때, 마음이 뜨겁고 감격스러운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났다고 해서 그런 환희에 찬 감정이 지속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이 거듭났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거듭남과 즐거운 투쟁의 생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마음을 바치고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는 들뜬 환희의 감정보다는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말미암아 오는 지속적인 평안과 변덕스럽지 않은 거룩한 사랑과 계속적인 헌신과 순종이 나타난다. 사실 거듭남의 생애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친 상태에서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생애이기 때문에, 환희와 감격이 계속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 순간 자신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거룩한 헌신을 계속 주님께 드리려고 자신과 싸우는 영적인 투쟁의 생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애에 당연히 수반되는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행복한 일이 될 것이며, 거듭난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겪는 그 과정은 기쁨이 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거듭난다는 것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분리되는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거듭났다고 해서 더는 시험이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 영적인 싸움이 그친 편안한 상태에서 품성을 계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험이 있는 곳에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을 계발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목적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율법을 지키시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온전한 순종과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순종의 생애를 본보기로 보여 주시고 구원의 능력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신 예수의 믿음을 배워서 늘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거듭난 생애를 계속 유지하며 살 때, 우리의 생애는 예수님의 생애처럼 승리의 생애가 될 수 있다.
마음에 이르러온 참된 변화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은 우리를 죄에서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며 계속 주님을 향한 헌신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헌신의 생애를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참된 변화가 이르러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임재하셔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에 항상 복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의 생애에는 변화가 따르게 되어 있다.
언제나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 늘 최상권을 잡으려는 야심이나 사단의 대표적인 품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사랑, 질투, 이기심, 그리고 자존심 등이 사라지고, 그 대신 겸손과 사랑과 온유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려 깊음, 그리고 화평과 조용한 기쁨이 마음속을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또 주님과 혼연일체가 되어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대의 낙이 될 것이다.
승리하는 생애
계시록 14장 12절은 마지막에 나타날 하나님의 남은 백성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은 거듭난 사람의 성품을 가리킨다. 거듭난 사람의 생애와 성품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아름다운 변화가 이루어지며, 예수님과 같은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처럼 승리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주님의 귀중한 피의 힘으로 우리는 승리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타고난 못된 성벽들을 이길 수가 있으며,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으며, 자신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거듭난 사람은 매일의 생애에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의 성품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 성령의 능력이 육신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 거듭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매일 새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으며, 우리를 매일 다시 살리시는 일을 이루실 수 있다. 거듭남의 생애를 지속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 죄에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매일 자기를 굴복시키고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실제적인 경험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누구든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언제나 티끌 같은 존재로 여기며 겸손하게 성령을 좇아 살기로 선택하고 굴복하는 한, 거듭남은 지속할 것이며 우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신앙: 4부 - 늑대를 양으로 만드는 방법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인간에게는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인간은 태어날 때 죄의 성향이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과는 거리가 먼, 죄된 품성을 가진 인간이 정말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늑대와 양 이야기
성경은 늑대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 양같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늑대와 양의 이야기를 통해 참된 변화, 즉 어떻게 의롭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È 양 우리 속의 늑대 : 시골에 한 농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산속을 걷다가 무슨 소리가 나서 길 옆 숲 속을 살펴보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늑대 새끼가 울고 있었다. 불쌍한 생각에 그는 늑대 새끼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잘 길렀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농부는 늑대 새끼를 양 우리 안에 풀어 주어서 자유롭게 풀밭을 뛰어놀도록 하였다. 늑대 새끼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멀리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에게 달려갔다.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늑대 새끼는 자신을 양으로 착각하였다. 양들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생겼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풀밭에 이리저리 뒹굴고 풀을 함께 먹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에 늙은 양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냐? 라고 물었을 때, 늑대는 나는 양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늙은 양이 말하기를 네가 양이라고? 너는 양이 아니라 늑대란다. 자신이 늑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늑대는 너무나 놀랐다. 그래서 늙은 양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원을 말하였다. 나는 정말 양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늑대가 되기 싫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양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새끼 늑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양을 열심히 흉내 내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정말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는가? 결코, 양으로 변할 수 없다. 인간의 방법과 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거듭나기 전에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È 늑대의 본성 : 참 이상하게도 늑대가 양이 되고 싶어서 양이 먹는 음식을 먹고, 양들처럼 울고 양들처럼 뛰려고 애썼지만, 발톱은 여전히 날카로워지고, 이빨은 점점 뾰족하게 자라났다. 양들을 늑대로부터 지켜주는 울타리를 보면 마음이 놓이고 안전감을 느껴야 하는데 울타리를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마음은 양이 되고 싶었지만, 육신의 본능은 늑대였다. 마치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육신의 본능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상태와 같이&. 그러던 어느 날, 양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늑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 양의 목을 물어 죽였다. 피를 본 늑대는 너무나 놀라서 울타리를 넘어서 산으로 도망하였다. 늑대는 그제야 자신은 양이 아니고 양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모태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도 거듭나지 않으면 늑대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살게 된다. 유모차에 실려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지만 양이 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늑대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교인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부터 양처럼 식사하고 양처럼 옷을 입고 자랐지만, 참 신앙을 배우는 대신, 양의 흉내를 내는 일에 능숙해진다. 양의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고 양의 목소리로 기도하고 양처럼 말하는 기술을 일찍부터 터득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양 우리 밖의 세상을 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가 나이가 들게 되면 어렸을 때부터 늘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었지만, 주변의 눈치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과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 억압과 귀찮은 굴레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늑대와 같은 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해 주는 생활과 취미를 즐기면서 살고 싶어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세상을 즐기려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È 늑대의 시각 : 양은 목자가 쳐놓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거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양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안전하게 보존해 주는 울타리인 율법과 계명을 결코 무겁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늑대의 눈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너무나 재미없는 삶처럼 보인다. 성경이 요구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늑대의 본성에 지배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늑대는 자신의 본성을 즐겁게 하는 쾌락과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굉장한 손해와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양을 죽이고 울타리를 뛰어넘어 숲으로 달려간 늑대, 밤이 되면 숲 속을 다니면서 힘없는 토끼와 사슴들을 해치는 늑대를 생각해 보라. 늑대는 그러한 일들에 쾌감을 느끼고 생의 환희를 느낀다. 늑대는 그러한 종류의 일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푸른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그들과 같은 평화로운 삶을 생각해 보지만, 그러한 생각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운다. 나는 저 양들처럼 울타리에 갇혀서 살 수 없어. 거기에는 아무런 낙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 왜냐하면, 나는 양이 아니고 늑대이기 때문이지. 그리스도인은 계명이 하라고 명한 것을 행하고, 하지 말라고 금한 것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참된 행복을 소유하게 된다. 양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벽으로 보이지만, 늑대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가두어 놓는 교도소의 높은 장벽처럼 보인다.
변화를 가져오는 완전한 복음과 실패를 가져오는 불완전한 복음
성경은 어떻게 늑대로 태어난 인간이 양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란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방법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현대 기독교에는 성경의 복음과 다른 여러 가지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다. 변화를 가져오는 복음과 그 반대의 가르침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여 보자.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방법을 설명하는 가르침 중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다.
1. 율법주의 또는 완전주의
이것은 늑대도 양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가르침이다. 늑대를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늑대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먼저 양의 탈을 씌우고 목소리를 비슷하게 만들며 발톱도 부드럽게 깎아 주고 털을 하얗게 물들인 다음에 파마를 해주면 진짜 양은 아니지만, 양과 마찬가지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겉모습과 행위를 완전하게 다듬어가면 언젠가는 늑대가 양이 되어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 중에는 늑대의 본성이 올라오지 않도록 굶기면 힘이 없어져서 맥을 쓰지 못하게 되어 말을 잘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늑대는 굶겨도 늑대일 뿐이다. 늑대를 양으로 만들려고 늑대에게 피와 고기를 끊고, 양이 좋아하는 풀과 채소를 먹임으로써 성격을 온순하게 만들 수 있다고 노력하게 하는 가르침이 이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율법주의나 완전주의를 가르친다. 만약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하늘에 가면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할까?
하나님, 드디어 저는 해냈습니다. 그동안 이곳에 오려고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입을 것도 입지 못하면서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늘에 와보니 괜찮네요. 제가 저 아래 세상에서 듣기에는 저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셨다고 하던데 제 집은 어디입니까?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태도이다. 자신의 희생과 공로를 내세우면서 이웃과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는 말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2. 자유주의 복음
이 가르침은 늑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늑대를 양이라고 칭의해 주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늑대는 어차피 늑대일 수밖에 없는데 채식을 하면 뭐하고, 시골로 가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뭐합니까? 어떻게 늑대가 양처럼 순종할 수 있나요? 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늑대는 결코 양이 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이것을 신신학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하늘에 가면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할까? 하나님, 늑대로 살던 나를 이렇게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 같은 늑대도 구원해 주시면서 왜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구원해 주시지 않나요? 그들이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변화되지 않은 성품 때문에 하늘은 또다시 선과 악의 대쟁투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3.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이것은 신신학의 일종인데, 늑대도 믿기만 하면 양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는 더는 늑대가 아니고 양이라고 우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가르침이다. 비록 성품과 생애는 늑대이지만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다. 한 번 믿기만 하면 내 생애와 성품이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고 믿는 가르침인데, 이런 가르침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Once saved, always saved ,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이런 사람들도 하늘에 가면 신신학을 믿는 사람들과 비슷한 말을 한다. 하나님,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하늘 생활이 좀 지루할 것 같습니다. 좀더 재미있는 곳은 없습니까? 하나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나요? 어차피 양들과 늑대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구원해 주실 것인데 쓸데없이 십자가에서 고생하실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의와 선이 가득한 하늘에서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거룩하지 않은 것들을 퍼뜨리게 될 것이다.
4. 성경의 복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아무리 잔인한 늑대라고 할지라도 양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예수께서 니고데모라고 불리는 늑대에게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다. 네가 진정 양이 되고 싶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라는 가르침이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세리처럼 기도하게 되고, 옥합을 깬 마리아처럼 회개하며, 삭개오처럼 죄로부터 돌아선다. 성경의 복음은 늑대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온전한 복음이다.
신앙: 5부 - 오직 한 가지 방법
거듭나는 공식, 물과 성령으로
어떻게 하면 늑대가 양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오직 한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늑대를 다시 양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는 유일한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다시 태어나야, 곧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예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이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는 다시 태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물과 성령 으로 거듭난다는 대답으로 설명하셨다. 왜 물과 성령인가? 물과 성령이 거듭남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를 좀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도록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구절을 읽어 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물)에 운행하시니라 (창 1:1~2). 창조의 과정에는 항상 성령의 역사가 존재한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역사를 우리 구원의경험, 곧 거듭남과 마음에 이르러 오는 변화에 영적으로 적용시켜 보자.
창조와 물과 성령과 바람의 영적 적용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를 이루실 때 물과 성령 이 함께 하였다. 창조의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신(성령)이 물 위에 운행하였던 것처럼, 이것을 영적인 창조, 즉 새로운 탄생인 거듭남으로 적용시켜 보면, 거듭날 때도 성령과 물의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는 항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성경에서 바람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를 설명해 주면서 성령을 바람으로 표상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6-8).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성령과 물이 함께 하는데, 성령은 또 바람으로 표상되기도 했으므로, 창조의 역사와 물과 성령, 또는 물과 바람은 서로 연관될 수 있다. 영적인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물과 성령 또는 물과 바람이 필요한 것이다.
창조와 성령의 역사
우리는 창조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와 같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 역사를 영적으로 거듭남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령의 역사로 생명이 창조함을 받는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생명이 탄생한 경우들을 살펴보면서 영적으로 교훈을 얻어 보자.
성령의 역사와 생명의 창조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떤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영이 너를 덮으리니 라는 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전해 주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은 창조의 역사이다. 성령께서 마리아를 덮으심으로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다. 성령께서는 마치 창조 당시에 수면 위에 운행하시듯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시고 마리아의 양수를 덮고 계셨다.
2. 침례 요한 : 수태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엘리사벳이 침례 요한을 낳은 것도 같은 창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침례 요한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능력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다. 천사가 와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사가랴는 자신과 늙은 부인을 보면서 불신의 마음을 품었다가 벙어리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신이 역사 하시므로, 늙은 여인이 침례 요한을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이삭 : 수태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어머니 사라에게 태어난 이삭 역시 성령에 의한 창조로 태어났다. 이삭은 사라와 아브라함의 행위와 노력으로 태어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의 경우들처럼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생명이 창조되어 탄생하였듯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 그리하여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의 본성
여기서 잠깐 인간의 본성과 예수님의 타고나신 인성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은 예수께서 성령의 기적을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인성을 지닌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적과 창조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생각들이 천주교회의 가르침이다(무염시태설).
침례 요한과 이삭이 부모의 수태 능력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의해서 탄생했을지라도 보통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예수님도 마리아의 수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성령의 기적으로 태어난 분이셨지만, 침례 요한이나 이삭과 같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물론 하나님이신 신성을 함께 겸하셨지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1).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4~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이유는,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함께 취하셔서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아시며, 또 우리를 동정하시고 시험과 유혹에서 건지시기 위하여서이며, 그리고 나아가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과 합해질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하여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
우리는 예수께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 라는 사단의 거짓을 반박하시고 실제적인 그분의 생애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주신 데 대하여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은 사단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그의 지배를 되찾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오직 그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고, 인간의 순종을 드림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의 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많은 잘못을 범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인성에, 사람이 사단과의 투쟁에서 갖출 수 없는 그러한 능력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인성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셨다. 라는 진리를 반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순종하려고 오셨으며 이러한 면에서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말하면, 신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반박한다. 왜 그러한 주장을 하는가? 왜냐하면, 신신학에서는 타락한 인성 자체를 죄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신학하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죄된 인성을 취하셨다고 하면 예수님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언한다. 우리와 같으나 죄는 없다 (히 4:15)고.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한결같이 우리와 같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말하지만, 신신학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으면 죄가 없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망가진 원본
그러면 이제부터 좀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가?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라고 하신 것이다. 어떤 상태로 태어났기에 잘못 태어났다고 하는가? 늑대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늑대로 태어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첫째,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둘째, 왜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치러야 하는가?
1의 답: 원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아무리 많이 복사해도 계속해서 잘못된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복사기에서 복사한다고 할지라도 원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불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원본이 망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형상을 담고 나온 인류는 모두 망가진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죄로 말미암아 몸의 유전자가 퇴화하였고 그 본성도 늑대의 본성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아담의 복사본인 인류는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는 존재가 되었고, 태어나서 한 번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2의 답: 우리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며, 또한 유전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 단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도 아담에게 물려받은 연약한 유전인자 때문에 죽게 된다.
우리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며, 또한 유전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 단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도 아담에게 물려받은 연약한 유전인자 때문에 죽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는 첫 번째 죽음은 영원한 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일정한 삶의 기간을 가진 후에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하심으로써, 그리하여 그의 사는 동안 하나님을 더듬어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또 한 번의 영생의 기회를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영생은 사람이 자신의 수(나이)를 채우고 죽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담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물려받는 것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대표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런즉 한 범죄(아담)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예수)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아담)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8,19).
죄를 범한 첫 번째 아담에게 일어났던 것은 무엇이나 그가 대표했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이, 그리스도의 경험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그저 개념적인 것이 아니요, 실재적인 것이었다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께 받는 것도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어야 한다.
첫째 아담은 무엇을 물려주었는가? 육체적인 태어남을 통하여,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고 타락한 육체와 죽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무엇을 물려주는가? 영적인 태어남을 통하여 신의 성품, 승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당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물려주셨다. 첫째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발생한 모든 결과와 영향들이, 둘째 아담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거듭남을 통하여 얻는 새 족보
모든 사람은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만 아담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으로 옮겨갈 수 있다. 물과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재창조가 일어나야 희망 없고 속절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거듭남을 통하여 아담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족보로 바뀌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은 어떤 어려운 이론이 아니며 신비적인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경험이다. 가족들이 서로 닮은 성격을 가지는 것처럼,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닮게 된다. 우리가 하늘 가족에 입적될 때, 우리는 새 아버지와 맏형님을 닮기 시작한다. 이 아버지를 닮듯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았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닮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으니 (창 5:1~3). 그래서 아담의 아들은 하나님을 닮을 수 없었으며, 죄를 범한 아담을 닮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죄를 범한 아담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며, 자기를 새로 지으신 예수를 닮기 시작한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과 맏형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데, 바로 이 새로운 영적 출생으로 말미암아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늑대적 본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의 족보가 늑대 가족에서 양의 가족으로 옮겨지는데, 족보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족보가 옮겨지면서 성품과 생애 또한 실제로 양의 특성이 있게 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지만 단순한 물이 아니다. 말씀 위에 성령이 운행하실 때 그것은 생명수가 되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적셔 준다. 창조의 역사가 실제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전혀 새로운 책이 된다.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겼던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애굽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광야 생활을 하기로 했던 모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며,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말과 심령이 마음에 와 닿게 된다.
물과 성령을 통하여 성경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서 마음에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면, 하나님은 내게 시작과 끝이 된다. 마음은 행복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며, 어두운 밤에도 외로움과 허무함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포근한 수면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고, 병든 사람의 귀에 위로의 말을 들려 줄 수 있으며,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은, 다른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생명수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게 하는 거듭남, 성령과 물과 바람의 역사, 창조의 역사가 당신에게도 일어났는가? 우리 모두 이 새로운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자!
질문과 답변 : 착하게 살면 구원받나요?
많은 사람들이 죄와 구원에 대한 감정적인 가르침들을 많이 듣고 있지만, 왜 죄에 대한 피의 희생 제물이 반드시 요구되는가에 관한 성경적인 논리와 이유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라고 선고할 때에 여러분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왜 두려움과 죄책감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롬 3:23)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은 율법 즉 십계명을 범하였으므로 율법이 범죄자에게 죽음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죄인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범한 율법 앞에서 옳다(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사형 선고가 번복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기의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자기 죄를 속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아무도 오해할 수 없는 언어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롬 3:20).
행위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진리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십 년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언도를 받았다면, 그는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선고받은 연한만 채우면 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언도된 형을 감옥 속에서 마침으로써 자신을 행위로 구제해 내었기 때문에, 죄 없이 의롭다는 인정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어떤 살인 죄수가 50년의 선고를 받았다면 행위로 의롭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언도가 50년이 아니라 사형이라고 간주한다면, 그 죄인이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습니까? 결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100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법은 아직 죽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히 9:22-28).
이것이 바로 죄인이 결코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죄의 값은 10년 징역이나 50년의 강제 노동이 아닙니다. 선고는 죽음이요, 피를 흘리는 일 없이 법의 요구가 충족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뒤엎어질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선언한 사형 선고 역시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허용하는 것은 우주를 영원히 파멸시키는 길입니다. 과거의 죄를 미래의 선한 행동으로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법이 죽음을 요구하는 한, 죄인은 자기의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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