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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제는, 개나리도 피었고, 진달래도 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2020년의 봄 안에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공원마다 거리마다,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와 함께, 청년들과 청소년들의 함성으로 거리가 채워질 시기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집집마다 발이 묶인 아이들은 보면, 애처롭습니다. 인터넷에서 짧은 글을 보았습니다. 6살 아이가 엄마에게 밖에서 놀고 싶다며 내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밖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어서 아직은 안 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코로나는 밖에서 노는 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야”라면서,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소식들이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속히, 일반화가 되어, 밖에서 놀고 싶은 6살 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이 만발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된 우리는, 해마다 이 봄과 함께 맞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순절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활기찬 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는 사순절의 인기가 없습니다. 시대가 갈수록, 사순절의 의미도 서서히 사라져 갑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을 우리의 가슴에 담고 있습니까? 사순절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했기 때문입니다. 훗날, 빌라도가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의 끝을 보면, “십자가 옆에서 십자가 처형 현장을 지휘하였던 백부장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저는 진실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요 19: 12을 보시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정치적 야망”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총독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야망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가이사에게,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함으로, 그를 풀어주는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말하길,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는 말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곧,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면서까지, 죄 없는 예수님을 살려줄 마음은 없었던 겁니다. 그러기엔 자신이 부담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습니다. 찬 522장 “웬일인가 내 형제여”의 1절을 보시면,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 값으로 지옥형벌 너도 받겠구나”라고 합니다. 보고서의 끝에서, 교회역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몇 년 후, 파면당하여, 다음 황제인 칼리굴라 황제 때 자살했다고 합니다. 본문 속에서, 빌라도는 느끼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을 받는 순간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본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재판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여기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앞에서 이어, “네가 왕이 아니더냐?”,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들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서도 울립니다. 이때까지, 빌라도는, 진리에 대한 갈망, 영생에 대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의 물음은 오직, 정치적인 문제에 대조될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유대 총독이 아니었더라면, 빌라도에게 사형언도의 재판권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빌라도에게 이러한 갈망이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고소한 유대인들의 청을 거절했을 겁니다. 미국의 “린든 존슨”대통령이 급한 일로, “갈브레이스”교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갈브레이스 교수가 오침을 할 때였기에, 가정부인 “에밀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백악관입니다. 급한 일로 교수와 통화할 일이 있으니 교수 좀 바꿔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밀리는, “교수님은 지금 피곤하셔서 낮잠을 주무시기에, 지금은 바꿔드릴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거친 소리로, “나 대통령이오. 지금 급한 일이니, 어서 깨워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에밀리는,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제 주인은 ‘갈브레이스’ 교수님이시고, 저는 그를 위해 일하도록 고용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앞뒤가 꽉 막힌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후에, 존슨은, 갈브레이스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교수님은 가정부를 참 잘 두었습니다. 그 사람을, 백악관에서 고용하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물으면,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아닌, 우리의 삶으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의 세 가지 물음을 상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본문 35 – 36을 보시면,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본문을 새 번역으로 보시면, “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말은, 비록, 빌라도의 물음이지만,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물음이기도 합니다. 창 4: 10을 보시면,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과 대조해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무엇을 했기에, 너의 동족 유대인들이 나에게 와서, 너를 고발했느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앞선 행위를 묻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는 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거나 “신앙이 있다”는 것의 유무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제게, “너는 목사로서 무엇을 하였느냐?” 또, 장로님들께는, “너는 장로로서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본문을 통해,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물음으로, 자문자답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빌라도가 이렇게, 예수님께 물은 것은, 앞의 30절을 보면,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행악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 선동자로 가정했고, 그 속에서, 로마에 대항하려 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평화는, 소수의 특권층들만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그들의 행복은, 다른 이들에게, 고통이자 굴욕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의 안일을 위해, 예수님의 행적을 확인했던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합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이해했을까요? 이 말을, 이원론적으로 보면, 빌라도는 육적으로 물었고, 이에 예수님은 영적으로 대답을 한 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며, “아가페”로 물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제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며, “필레오”로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본문 36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오직 정치적 권세로서의 왕위를 생각하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왕위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와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며, 두 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보면, 이해는 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곧,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것과 무관하게 됩니다.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는, “육신은 영혼의 감옥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일부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이, 무관한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들로 인해, 신앙에 대한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우리의 신앙을 공허하게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는가?”입니다. 이에 대해, 이원론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서, “내 나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것은,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 14: 26을 보시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문 속의 빌라도나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받지 않았으나,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찬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의 3절과 후렴을 보시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속의 빌라도는,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본문 37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본문을 우리말 역으로 보시면,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란 말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거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라고 합니다. 빌라도에게 왕이란 직분은, 세상의 권력을 한 손에 잡은 권세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보시면,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했던 겁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물음에 대해, 세상에서 갖는 예수님의 직분과 예수님의 사명과 예수님의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관심을 갖은 빌라도가 이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눅 17: 20 – 21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기를 보면,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빌라도의 관점과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 앞에 있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거기에 순종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속에 있는 사건과 경험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단지, 추상적으로 들릴 뿐입니다. 마 6: 31 – 33을 보시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책, “사람의 아들”에서, 예수님과 처음 대면한 빌라도의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두 팔을 뒷짐지워 노끈으로 꽁꽁 묶인 채 재판정으로 끌려왔었습니다. 나는 단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나를 향해 큰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곧게 버티고 서서 고개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내게 무엇이 일어났던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갑자기 나는 일어나 단에서 내려가서 그 앞에 엎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바로 가이사가, 바로 로마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재판정 안에 들어온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심문을 했지만 그는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빛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내 통치자요 재판장이거나 한 것처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전해지는, “내가 지금 거룩한 분 앞에 서 있구나”하는 느낌은, 성경과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의 한결같은 느낌입니다. 빌라도는,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빛의 관복을 입은 자신 앞에, 한없이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그의 마음은 이미 부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물은 것은, 이미, 33절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반복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4절에서,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네게 한 말이냐?”라며, 대답대신 물으셨던 겁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은, 마 16장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본문에 와서, “내가 왕이니라”고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그의 마음을 물었지만, 그는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빌라도가 원하는 대로,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답변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왕이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앞에 모였던 군중들 가운데는, 펑펑 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라거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라며 조롱하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어떻게 보입니까? 본문 34절에서, 예수님이 정녕, 몰라서, 빌라도에게 물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에게도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의 말이냐?”라는 질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가장 최근에 예수님 앞에서 대화했던 것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을 진실로, “나의 왕”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신 나라입니다. 시 2, 5, 44, 68, 74, 84, 145편에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라고 합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8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앞의 37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반대는,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는 내 음성을 듣지 않는다”입니다.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빌라도에게 선언한, 예수님의 재판 선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대답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반박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재판정을 나가 유대인들을 만났습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경력, 경제적 이득, 권세의 흐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 안에서,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는, 자유자인 것 같으나, 야망의 노예였습니다. 여러분, 빌라도는 듣기를 거절했지만, 우리는 청취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 17: 17을 보시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합니다. 또, 시 119: 151을 보시면,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 14: 6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진리는 추상개념이 아닙니다. 진리는 “조변석개”하듯,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다음 장인 19: 9을 보시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다시, 재판정으로 불러서 묻지만, 예수님은 일체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침묵을 지키실 뿐이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빌라도에 대해, 유대인에 대해,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이나 빌라도는, 자신들의 관심분야인 법에 대해서만, 정치에 대해서만 물었을 뿐, 하나님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께 질문하고, 성경 속에서 질문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 기도를 들으십니까?”,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예수님, 정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예수님, 정말 살아나셨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주변의 지식에서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으며,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면서, 지금까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얼만큼의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다른 때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어려운 환경만 탓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 하나님께 질문하며, 대답하는 가운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