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재광동화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석
금강산 여행기
▶ 서문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라는 노래가 있듯이 민족의 명산 금강산을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마음대로 갈 수가 없던 차에 모임에서 부부동반 하여 갔다 오자는 제안이 있어 흔쾌히 동의하고 따라 나섰다.
다 알다시피 금강산은 북한에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갈 수가 없어 아직은 큰마음을 먹어야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통일이 되면 마음대로 갈 수가 있겠으나 나중에 나이를 더 먹어 산행을 할 수 없다면 아무리 가도 싶어도 갈 수가 없을 것이다.
▶ 금강산의 개관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에 걸처 있으며 동서로는 40㎞. 남북으로 60㎞. 면적은 530㎢로써 비로봉(1,639m)을 중심으로 영랑봉(1,601m), 옥녀봉(1,424m) 과 일출봉(1,552m), 월출봉(1,580m), 채하봉(1,588m), 집선봉(1,351m), 세존봉(1,132m), 상등봉, 상중하 관음봉, 수정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고 하는데 눈이 왔을 때는 설봉산이라고도 한다.
▶ 등산코스
@ 구룡연 코스
구룡폭포, 구룡연, 상팔담, 연주담, 옥류담, 등 유명한 폭포와 연못이 많은 코스로 왕복 4~5시간이 소요된다.
조선의 3대 폭포인 구룡폭포는 150m의 절벽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로 그 밑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깊이 13m의 구룡연이 있다.
@. 만물상. 수정봉 코스
웅장하고 기묘한 산악미가 있는 봉우리가 만물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만물상이라 하였으며 왕복 3시간이 소요되고, 수정봉은 온정리 북서쪽에 있는 773m의 봉우리로 왕복 3~4시간이 소요된다.
@. 삼일포. 해금강 코스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일포 호수는 옛날에 왕이 하루만 머물다 갈려고 왔는데 빼어난 풍광으로 3일 동안 머물렀다 하여 삼일포라 하였다 하고 해금강은 해안가의 기묘한 절벽과 소나무들이 우거진 바위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바다의 금강산이라 하여 해금강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왕복 3시간이 소요된다.
삼일포에 있는 봉래대는 삼일포 호수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써 시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 선생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하여 그의 호를 따서 봉래대라 하였고 연화대는 5개의 바위들이 연꽃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위에 연화각이란 정자가 있다.
와우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소나무가 많아 송도 또는 솔섬이라고도 한다.
@. 세존봉. 집선연봉 코스
세존봉(1,132m)과 집선봉(1,351m) 사이 계곡으로 백련폭포와 환선폭포의 수려한 경관을 바라보며 산행을 하는데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나 세존봉은 경사가 급하여 힘든 코스로써 동석동 주차장에서 왕복 15km로 약 6~8시간이 소요되며 세존봉 전망대에 올라가면 비로봉, 구룡대, 관음연봉, 고성항 등 동해바다가 바라보인다.
@. 내금강 코스
금강산 관광의 백미로 외금강은 남성적 산악미가 있는 반면 내금강은 여성적 산수미가 있다고 하고 버스로 4시간을 이동한 후 표훈사 만폭동 진주담 보덕암 묘길상 삼불암을 거처 내려오는데 약 4∼5 시간이 소요된다.
표훈사는 신라 문무왕 10년(서기 670년) 창건되어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사찰이며
묘길상은 대패로 민듯한 암벽에 높이 18.2m, 귀 1.5m, 손발의 길이가 각 3m인 거대한 마애불이다.
○. 첫째날 여행
우리는 금강산악회를 통해 나드리 여행사와 계약을 하고 갔는데 여행경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1박 3일 코스로 일정을 잡은 까닭에 8. 17. 22:00 염주체육관에 집결하여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잠을 자야 한다기에 출발 전에 옆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소주 2홉들이 한 병을 둘이서 나눠 마시고 22:10분쯤 출발하였다. 조금 가다가 술안주와 복분자주를 주기에 한잔을 더 홀짝하고 잠을 청했는데 처음에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다 중부고속도로로 들어가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들어가 홍천을 경유하여 진부령을 넘어 간성을 거처 대진 화진포 호수로 갔다.
○. 둘째날 여행
▶ 출국(월북)준비
한참을 자다가 일어나 보니 새벽 05:10분이 되어 강원도 고성군 소재 화진포 호수 옆에 있는 식당에 도착하여 황태국을 한그릇 주어 맛있게 먹고 세수도 하고 정신을 차린 후 06:30경 바로 옆에 있는 현대아산 휴게소에 가서 수속을 마치고 여행 중 주의사항을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남한에서 필요한 신분증은 관광증명서로 대체되고 차량번호는 종이로 가리워 진 후 붉은 삼각 깃발을 차 우측에 꽂도록 하였으며 핸드폰은 충전기나 예비 밧데리도 가지고 갈 수 없고 라디오, 칼, 고광도 카메라는 통관이 안 되니 전부 여행사에 맡기라고 하였으며 이동하는 지역이 모두 군사지역이니 이동중인 차에서 사진촬영을 하면 카메라 압수는 물론 벌금을 내고, 산행을 할 때 침을 밷거나 허용되지 않는 장소에서 소변을 본다든지 강에서 얼굴이나 발을 씻는 행위, 북한 사람과 손가락질을 하며 다투는 행위도 적발되면 벌금을 물게 되므로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은 후 나도 핸드폰과 칼을 여행사에 맡겼다.
▶ 남측 출국수속
07:10경 동해선 도로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외국에 나갈 때 공항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출국 수속을 하는데 사람과 물건 차량을 모두 분리해서 사열을 하기 때문에 차에서 내릴 때 자기 짐은 모두 가지고 내려야 하는데 비교적 간단한 절차로 끝났다.
▶ 휴전선을 넘다
다시 버스에 올라 북으로 방향을 잡고 진행 중에 옆을 보니까 좌측으로는 까치봉이 있는 산과 이번에 연결된 철도가 보였고 우측으로는 동해가 보였는데 바다는 검푸르고 망망대해였으나 간첩 등의 침투를 방지하는 철조망이 바닷가에 설치되어 있었고 지역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 마차진리, 명파리에 있는 남측 민통선과 군사분계선을 지나 DMZ(비무장지대)에 있는 휴전선을 지나고 있었다. 휴전선에는 시멘트 말뚝이 200m 간격으로 세워져 그 위에 휴전선을 알리는 표지가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표지는 없어지고 시멘트 말뚝만이 휴전선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휴전선을 넘어 조금 더 가니 북한 군인이 지키고 있는 군사분계선이 있었고 또 조금 더 가니 북측 출입국 사무소가 있었는데 그 중간에 고압전류가 흐른다는 전선. 철조망과 짙은 주황색 계통의 긴 팔 옷을 입고 붉은 깃발을 든 검게 탄 얼굴을 한 북한 군인이 있어 살벌한 분위기를 느껴 농담도 멈추고 북한으로의 입국을 위해 소지한 물품을 모두 들고 버스를 내려 사열장으로 들어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같이 간 일행들이 변소 간다, 버스에서 물건을 안 가지고 와서 다시 가지러 간다고 잠시 어수선하게 시간이 걸렸으나 곧 이어 입국심사를 받았는데 배낭에 있는 물건을 꼼꼼히 검열하고 얼굴과 관광증의 얼굴을 비교하며 화장품까지 꺼내어 무엇인지 일일이 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라디오를 가지고 갔던 사람이 적발되었다. 라디오는 현장에서 압수되고 나중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출발하기 전에 몇 번씩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단체행동을 할 때는 가이드의 안내와 지시에 잘 따라야 쉬운데 너무 개성이 강한 것인지? 가이드의 말을 귓전으로 들은 것인지 답답하다. 그 사람 때문에 전체 일정이 1시간 이상 늦어져 09:00가 되어서야 수속이 종료되었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이 보통 출입국이라는 말을 쓰는데 여기서는 출입경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국' 즉 나라가 아니고 '경계'를 넘어간다는 뜻에서 그렇게 쓰고 있는 것 같아 남한과 북한은 한 나라다 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 온정리 도착
09:40분이 되어서 온정리에 도착하였다. 온정리는 현대 아산에서 50년 동안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온정리 일대는 관광특구라 하여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남한 사람들이 범죄를 범하면 현대아산 관계인이 처리하는데 원만하게 합의되지 않으면 속초경찰서로 이첩을 하며 북한주민과 연관된 범죄는 북한 사회 안전원들이 처리하는 일종의 미군부대와 같은 개념으로 주요업무는 남한사람들이 올라가 처리하고 단순업무 등은 북한 주민들이 하고 있으며 화폐는 주로 달라가 통용되고 남한의 신용카드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원화도 사용이 가능한데 환전과정에서 1달라 미만은 손해를 보는 경향이 있으므로 가능하면 달러로 바꿔 사용하기를 권한다.
▶ 세존봉 산행시작
10:20분 우리 일행은 구룡폭포팀, 세존봉팀으로 나누어 관광을 시작하였는데 나는 세존봉(1,132m) 산행을 하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약 20분간 이동 중에 북한에 있는 주민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도 군인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주요 교차로 서서 우리의 통행을 감시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동석동 주차장에서 내려서는 또다시 인원점검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많아 인원점검 하는데 약 30분이 소요된 후에야 북한 안내원들의 선구로 산행이 시작 되었는데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으나 약 40분 정도 올라가다 이동식 간이 변소 2개가 있는 곳에서 쉬면서 볼일을 보게 한 후 다시 약 40분 정도 산행을 하다 계곡에 물이 있고 집선봉과 백년폭포가 바라보이는 장소에서 두 번째 휴식을 하고 또 약 40분 정도 올라 간 후 13:20분이 되어 계곡에서 배낭에 싸 가지고 간 도시락을 꺼내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좀 피곤해서 그랬는지 도시락을 개봉하니까 사용설명서가 있었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먹으려고 보니까 생쌀이었다. 형편없는 도시락을 주었다고 불평을 하며 자세히 보니까 도시락 밑에 물을 붓고 끈을 당기어 가열을 하여 먹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경솔함에 피식 웃고 창피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도 못하고 송편떡과 과일로 점심을 대신 하였는데 많이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13:50분쯤 세존봉 정상을 향해 출발을 했는데 마지막 남은 구간이 경사가 심하였으며 특히 정상 바로 밑 철제계단이 약 150m로 358계단 이었는데 여성들은 무섭다고 하였으나 제일 힘이 드는 구간인 것 같아 나도 마지막 힘을 다하여 올라가는데 오른다리에 쥐가 내려 계단에 앉으니까 부산에서 온 아줌마가 발을 맛사지 하여 준 후 스프레이를 뿌려 응급처치를 하여주었는데 그 분은 산을 정기적으로 자주 다니는 분 같이 철저하게 준비를 한 것 같았으며 너무 고마웠다. 15:00경 정상에 올라갔는데 북으로는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 동쪽으로는 동해바다와 해금강이 보여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잠시 쉬었다.
▶ 세존봉에서의 하산
15:20분쯤 하산을 시작했는데 하산 길은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으나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무척 힘들어했으며 내려오다 보니 낙오자들이 몇 명 쉬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산행 기권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더니 정상부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용인을 해 준 것 같았다. 원래는 산행 중 휴식은 산행하는 사람이 쉬고 싶을 때 쉬어야 하는데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쉬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으며 북측의 안내원보다 앞에서 쉴 수도 없고 먼저 갈 수도 없어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계곡으로 올라가니 물은 풍부하였으나 발을 씻거나 세수도 할 수 없고 수건도 빨 수 없었으며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물론 화장실도 없는데 소변도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아주 급한 사람들은 북측 안내원의 양해를 구하고 볼일을 보았다고 한다. 이런 사항을 위반했을 때는 북측 안내원에게 관광증을 빼앗기고 벌금을 물어야 하니 조심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현대 아산 안내원들도 그 사람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봐 달라고 사정을 할 뿐이다.
북측 안내원들은 나이를 좀 먹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게 20대 청년과 처녀들이었으며 등산화를 신은 사람은 3명 정도이고 나머지 5명 정도는 파란색 운동화에 짜리몽땅한 바지를 입었는데 70년도 남측 사람들과 유사하게 보였으며 주체사상으로 자존심이 강하여 자기에게 사정을 하면 용서하여 주기도 하는데 변명을 하며 대들면 엄한 처벌을 하고 남측사람들이 먹을 것 등 선물을 주면 보통 받지 않으나 혼자 있을 때는 받기도 하는데 나중에 몸수색을 당하여 모두 빼앗기고 혼난다고 한다.
내려오면서도 2번 정도 쉬었는데 쉴 때마다 인원점검을 하였으며 100명이 차야 출발을 시키는 등 조난자가 발생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는 것 같았으나 너무 통제를 하다보니 18:10분이 되어서야 처음 산행을 시작한 동석동 주차장에 도착 하였는데 우린 빨리 내려가야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묘기를 볼 수 있어 빨리 내려가자고 하였으나 웬일인지 출발을 시키지 않아 관광객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남측 안내원이 공연 관람을 하지 못하면 환불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조금 진정이 되었고 18:40분이 되어서야 출발 하였다.
내려오면서 들으니까 우리 일행 중 5명이 계곡에서 발을 씻다가 적발되어 2명은 사정을 하여 봐주고 3명은 발을 좀 씻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항변하다가 관광증을 뺏겨 벌금 30,000원을 물고 나오는 바람에 북측 안내원이 화가 나서 일부러 늦게 출발 시켰다고 한다. 단체행동을 할 때는 지켜야할 규칙은 서로 지켜주는 것이 기본인데 기본이 잘못된 사람 덕분에 우리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그것도 경남 마산사람, 부산사람, 광주사람들 약 300여명이 함께 갔는데 그 중에서 광주사람들은 약 120여명 이었으며 적발된 사람이 모두 광주사람이라고 하여 민주의 성지에 사는 사람들이 왜 법을 지키지 않는지.......
▶ 온정리에서의 1박
19:00시가 넘어서 온정리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 받고 샤워를 한 후 온정각 동관에서 식사를 하였다. 숙소는 콘테이너 박스 안에 남 여 각각 4명이 함께 자는데 조그마한 에어콘이 있고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남한방송이 나왔으며 이불과 베개는 하얀색으로 깨끗한 편이었으며 샤워장과 화장실은 각각 다른 콘테이너 박스에 시설이 되었다. 저녁식사를 하는데 고기전골이 나왔는데 육수와 라면사리, 공기밥은 그냥 주었는데 소주 2홉들이 한병에 3달러, 가정용 맥주 1병에 4달러를 받는데 우리 모임에서 간 사람들은 소주 2병과 맥주 4병을 시키고 라면사리 4개를 달라고 하여 술을 한잔 얼큰하게 먹은 후 바로 옆에 있는 면세점에 가서 둘러보니 담배가 싸서 3보루를 사 가지고 숙소로 들어 와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우리모임 일행이 와서 숙소에서 또 소주를 먹자고 하여 몇 잔 더 한 후 잠을 잤는데 피곤해서인지 세상모르게 골아 떨어졌다.
○ 셋째 날의 일정
▶ 온정리와 금천리 주변 풍광
06:00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06:20경 온정각 서관에서 식사를 하는데 야채 비빔밥이 나와 맛있게 한 그릇을 비우고 07:40분경 다시 차를 타니 만물상 코스와 삼일포. 해금강 코스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한다. 난 어제 산행을 해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민가를 볼 수 있다고 하여 삼일포와 해금강 코스를 가 보기로 하고 08:00경 출발을 하는데 현대 아산 직원들과 금강산 호텔의 한복을 입은 북한 종업원들이 이 모두 나와 손님을 잘 모시겠다는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배웅해 주어 인상적이었다.
우리 일행은 5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온정리를 출발하는데 입구에 금강산 샘물이란 생수공장이 있었는데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자연수를 음용수로 사용한다고 하며 온정리 뒷산에 설악산에 있는 흔들바위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일명 닭알바위라 하며 온정리 입구에 이산가족 면회소 신축공사장과 눈썰매장이 보였고 그 밑에 골재채취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측에서 임대한 도로보수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금천리에는 비닐 하우스에서 주민들이 채소(남새)를 재배하고 있었고 산턱에 벙커 같은 차고가 있었는데 모두 탱크가 있다고 한다.
삼거리나 군부대 앞에는 어김없이 북한 군인들이 빨간 깃발을 들고 서서 북한 주민과 차량을 통제하였는데 마치 우리 남한에서의 경호경비 같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우리 일행이 차량 진행 중에 사진을 찍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수신호로 연락이 되어 모든 차량을 정지시키고 누가 사진을 찍었는지 검색을 하여 색출하여 압수하고 벌금을 물린 후 출발시키는 감시 역할도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수해로 제방이 무너져 주민들이 모두 나와 강에서 돌맹이를 주어다 제방을 쌓는 울력을 하고 있었고 강 가운데 트럭을 대놓고 삽으로 모래를 싣는 장면들도 보였다.
금강산과 온정리 주변은 관광특구라 하여 소나무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나 그 외 금천리 일대 뒷산 등은 산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는데 이곳 주민들은 아직도 난방과 밥을 모두 산에 나무로 해결하므로 그렇단다.
또 산에 묘지가 없었는데 명승지인 이곳 금강산은 우리 남한의 국립공원과 같이 관리되므로 절대 묘지를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의 묘지는 평장을 하고 비석도 눞혀서 설치하므로 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현대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 해금강으로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다리를 건너 봉화리 마을을 지나는데 봉화 우편국과 소학교, 중학교가 보였는데 북한에서의 학제는 탁아소 1년, 소학교 4년, 중등학교 4년, 고등학교 2년 도합 11년을 마치면 17세가 되는데 여기서 우수한 사람은 대학을 가든지 군대에 간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군은 희망자만 가는 일종의 모병제인데 7년을 복무해야 하고 복무 중 휴가는 없으며 선군정치의 일환으로 군에 간 사람의 부모에게는 많은 혜택을 준다고 한다.
한참 가다보니 차량번호가 금강산, 강원이라고 써 있어 안내원인 정성훈에게 물어 보았더니 금강산이라고 써진 번호는 금강산내에서, 강원이라고 써진 번호는 강원도 내에서만 운행할 수 있는데 평양이라고 써진 번호는 북한 전역 어디에나 갈 수 있으며 3km이상 여행을 할 때는 반드시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조금 가다보니 고성평야가 나왔는데 벼가 이삭을 피고 길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으며 황새와 개가 지나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사람과 자전거 차는 우리가 지나 갈 때까지 군인의 통제 하에 기다리고 있었으며 평야지대인데도 벼농사를 짓지 않고 옥수수와 콩을 많이 심어 놓았는데 안내원의 말로는 이곳이 6. 25때 함포 포격을 많이 받아서 지금도 화약성분이 많은 산성토양이라 벼농사가 잘 안되어 그렇단다.
남쪽에서는 군인들이 불심자를 검문할 때 정지. 시동 꺼(밤이면 라이트 꺼), 운전자 하차, 누구냐? 하는 식의 조사가 이루어 지겟지만 이곳은 간단하게 ‘섯’이란 한자로 입간판이 세워져 있고 철책이 처진 장소에서 군인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민통선(민간인 출입 통제지역)이라고 하여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인 것 같았다. 백사장 위에 소나무들이 있는 도로를 따라 조금 가다보니 해금강 주차장이 나왔는데 이곳에도 이동식 간이변소 밖에 없었다.
▶ 해금강에서
09:00경 해금강에 도착했는데 우리를 따라 고성횟집 차가 따라 와서 무엇 하는 차인가 궁금했는데 우리를 따라 다니며 금강산 안내지도 등이 있는 물건을 파는 차란다. 안내원의 말로는 횟집의 성수기에는 횟집을 하는데 여름에는 하지 않고 장사를 한다고 한다. 우리는 기념으로 수건을 7장 산 후 약 1km 정도 되는 산책로를 따라 관광을 했는데 바닷가에 기암괴석의 바위섬들이 있고 정자가 있었으며 멀리는 군부대 포가 어렵풋이 보였는데 그곳을 향해서만 사진을 찍지 말고 다른 곳은 찍어도 좋다고 하여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나오면서 해금강이라고 해서 크게 아름다운 곳은 아니구나 하는 실망스런 생각을 했다.
남한 같으면 먹거리 장사가 많겠지만 이곳 관광지에는 그런 장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 삼일포로
09:50경 우리는 버스를 타고 삼일포로 가는데 길옆에 마을이 있어 유심히 살펴보니 집은 똑같은 모형이었고 집마다 바람개비가 달린 풍차가 있어 용도가 무엇이냐고 안내원에게 물어 보자 자기도 잘 모른다고 하여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이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집집마다 하루밤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자가발전 시설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이 발전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삼일포리에는 삼일포 중학교라는 2층 건물이 있었으며 길옆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의 이름이 삼아제 과수원이란다. 삼은 삼일포, 아는 현대 아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며 이곳은 남쪽에 많이 개방되어 남쪽의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장비를 가지고 와서 노력봉사 활동으로 벼도 심고 과수원 일도 한다고 했다.
들녘에는 전주들이 서 있었는데 시멘트로 만든 것도 있었지만 옛날 70년대 우리와 같이 나무 전주가 많았으며 볼품이 없었다.
“가는 도중에 현대 안내원이 작년에 자기가 이산가족 면회장에 안내원으로 가서 가슴아픈 사연을 보았다고 하며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인 즉 70세가 다된 남쪽의 아들이 90세가 넘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북으로 갔는데 만난 첫째날 만나자마자 김일성 장군이 위대하고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 하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자랑을 하여서 아들은 좀 서운했지만 그냥 듣기만 하고 끝이 났는데 그 다음날도 만나서는 똑같은 이야기만 하여 아들이 화가 나고 실망하여 자기는 이제 아버지를 안 만나겠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겠다. 차라리 안 만났으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이 있었을 텐데... 하며 후회하는 것을 간신히 말려 마지막 세 번째 1시간의 만남을 위해 현장에 갔는데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50분 정도 바라만 보다가 10분 정도 남았다고 안내방송을 듣자 늙은 노인이 정말 닭똥 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더니 마지막으로 딱 3마디를 했는데 ‘아들아 ! 보고 싶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모두 눈물바다가 된 적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북한에서는 이산가족 면회가 있으면 미리 2달 전부터 사상교육을 철저히 시킨다고 하는 말을 듣다 보니 삼일포에 도착하였다.
▶ 삼일포에서
10:02분 우리는 삼일포에 도착하였는데 삼일포는 처음에는 바다였으나 모래가 밀려와 호수를 만들고 오랜 세월을 지나다 보니 물은 완전한 민물이 되었으며 민간인이 출입하지 않는 지역이라서 고기 반 물 반의 호수라고 하여 고기를 찾아보았으나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삼일포는 약 4km 정도의 산책로가 있어 산책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니 좌측으로 북측 안내원이 서 있었는데 애국열사의 묘지라고 하였다. 그 묘지는 6. 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한 72명의 애국열사 시신을 수급만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규모는 보통 우리네 묘지같이 보였다.
한참을 가다보니 호숫가 반환점에 단풍관이란 건물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돼지고기 꼬치구이와 막걸리를 팔아 우리 청우회 회원들은 막걸리 2홉들이 한병에 3달러, 멧돼지 꼬치구이 하나에 2달러, 묵 한 접시 2달러씩을 주고 총 19달러 치를 사서 맛있게 목을 축였는데 막걸리는 약간 시고 달큼한 옛날 우리 농주 같았는데 종이컵으로 2잔 밖에 안나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호숫가를 따라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 호수위로 철제 와이어로 놓은 130m 정도의 흔들다리(현수교)가 있었고 그 위로 봉래대란 전망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호수 가운데 와우도, 연화대 위의 연화각, 울창한 소나무 숲, 검푸른 동해바다 등이 한눈에 들어 왔으며 시원한 바람이 우리들의 땀을 식혀 주어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오려고 하는데 북한 여성 안내원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삼일포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해 주는데 특이한 악센트와 북한 말씨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조금 밑에 있는 바위에 ‘붉은 기발을 들고 투쟁을 맹세하고 지키겠다.’는 내용의 적기가가 큰 글씨로 세겨져 있었고 또 조금 밑으로 오니까 ‘김일성 장군을 도와 혁명을 완성하였다.’ 는 김정숙 여사를 찬양하는 비문이 있어 조금 묘한 감정과 함께 북한 땅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삼일포 입구에 배 과수원이 있었는데 배가 하나도 안 열려 우리 일행들은 ‘해 갈이를 하나 왜 안 열렸지? 잘 가꾸어 배를 팔면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하고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북한 안내원이 ‘남한 사람들은 왜 팔려고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잘 가꾸어 나라에 바치면 국가가 잘 살게 될 텐데...’ 하고 핀잔을 하는 소리를 듣고 ‘아 !이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생각의 차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11:40분경 버스를 타고 온정리로 돌아와 바로 점심식사를 했다.
▶ 금강산 온천의 목욕
온정각 서관에서 야채부패로 점심식사를 하는데 값은 10달러로 기름지지는 않았으나 그런 대로 먹을 만하였고 냉면도 먹어 보았는데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으며 같이 간 아줌마들이 음식을 많이 가져와 조금 남기려니 좀 미안했다.
식사 후 바로 버스를 타고 김일성장군의 동상이 있는 곳을 지나 온천으로 들어갔는데 물은 뜨거운 게르마늄 성분으로 시설이 깨끗하였으며 남한에서의 화장실은 위생실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노천탕이 있어 그곳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는데 시원한 소나기가 한줄기 쏟아져 밑에는 뜨겁고 위에는 차가우니까 아주 기분이 좋았으며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 면세점에서의 쇼핑
14:35 온천을 마치고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면세점에 가서 쇼핑을 하는데 담배 에세 25,000원이 17달라, 바렌타인 30년산이 243달라하여 한 병을 사고 아들선물로 밸트, 딸 선물로 콤팩트와 립스틱을 사서 배낭에 넣고 버스에 타서 인원점검을 한 후 15:50분경 온정리를 출발하였다.
▶ 귀향
왔던 길을 되돌아 와서 그런지 돌아 올 때는 쉽고 빠르게 오는 것 같았다. 16:10 북측 출입국사무소에서 출경신고 수속을 하고 16:36 남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를 한 후 완전하게 남한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여행이 끝나서 인지 교외단 공연을 못 본 것에 대한 환불과 경비문제가 도마에 올라 관광비용도 경남에서 온 팀은 35만원, 부산에서 온 팀은 27만원. 우리는 36만원이어서 제일 비싸게 갔다고 했는데 싸게 온 팀은 산행 중간에 간식도 안주고 심지어는 밥도 개인별로 사 먹으니까 그렇단다. 교외단 공연은 개인별로 3만원씩인데 구룡폭포에 다녀온 팀은 빨리 와서 관람을 했고 우리만 못 보았는데 누가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확인도 불가능하고 하여 나드리 관광 사장의 말을 들어보니 40명 정도 환불을 받았는데 100% 환불을 못 받아 전액 환불을 해 줄 수 없다고 하며 안 본 사람 손을 들어 보라고 하니까 우리 차에서 20명이 나와 다른 차도 조사를 해 보아야겠다고 한 후 다른 차로 이동을 해 갔는데 ‘전액을 환불을 받아야 한다. 버스 기사 팁도 10만원 정도 주어야 한다.’ 여러 가지 말이 나오다가 나드리 사장이 37만원을 내 놓아 우리 일행 중 선배 한명이 사회를 보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 한 후 한 가족 2사람당 1만씩 10만원을 가져가고 기사팁을 10만원주고 나머지는 가면서 술을 먹자고 결의하여 모자에 돈을 담아 돌리는데 어떤 사람은 1만원을 가져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2~3만원을 가져가고 공연을 본 사람은 기사팁을 주라고 돈을 내놓고 하여 난장판이 되었는데 결론은 15만원 정도가 남아 그것으로 술을 사 먹기로 하고 일단락이 된 듯 보였으나 나중에 피곤하여 술을 못 사먹자 남은 돈에 대해 또다시 시비가 발생하였다. 기사팀을 주라고 돈을 냈던 사람들이 다시 돈을 돌려 달라고 하여 가져가 버리고 남은 돈의 분배에 대해 논의를 하는데 또 다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일을 잘 해결해 보겠다고 나선 선배 입장이 난처하게 되어 기분 나빠했다.
정말 남의 일에는 가능한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인 것 같았다. 특히 이번 일은 뚜렷한 자금도 해결책도 없으면서.... 꼭 나서야 한다면 나드리 관광회사 사장이 직접 나서 안 본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을 적고 환불받은 돈이 얼마니까 몇 % 보상을 하겠다고 제시하여 해결되어야할 문제였다. 나드리 사장의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를 다른 사람에게 띠어 넘기고 버스기사 팁도 주게 되었으니 얼마나 멋진 해결책이었는가? 만약 환불을 안 해 준다면 금강산악회 회장이 나서서 해결을 보든지 아니면 사후에 클레임을 걸어 소송을 하든지 해야 했다. 특히 우리 차에 탄 사람들은 같은 일행이 아니므로 잘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많아 해결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 결론
여러 사람이 단체 행동을 할 때는 규율을 잘 지켜야 서로가 편하므로 각자가 자기가 하여야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남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아도 잘 되어 갈 것이다. 또한 간섭을 한다면 그 단체의 사장이나 회장 등 책임 있는 사람이 나서서 해결해야지 구성원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선다면 해결될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문제로 심기는 불편한데 고속도로는 꽉 막히어 차는 슬슬 기어가는 것 같았고 내일 당장 출근은 해야 하니까 걱정스럽고 몸은 피곤하고 마지막이 모두 불편한 것 같았으나 나는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그냥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자다보니 03:50분이 되어서야 한국병원 앞에 내려 집에 들어오니까 04시가 되었다. 결국 1박 3일 여행이 1박 4일이 된 셈이었으나 내가 가보지 못 했던 곳,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알아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10. 2 이면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최대 소원은 통일이라고 누구든 공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인지 잘 모른다. 남북 민족의 동질성 회복, 남북체제 간 상호 체제인정, 신뢰회복, 경제협력 및 교류, 문화. 예술. 학술 종교간 교류 등이 있겠으나 나도 이번에 여행을 한 것이 어쩌면 조그만 통일의 주춧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여행을 주선해 주고 같이 관광을 했던 일행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첫댓글 사진이 첨부되지 않아 다시 올렸습니다.
글로 읽고 사진을 보고 가보지 않아도 가본듯한 글 감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