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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9일 평화목 교회 주일예배 설교
대림절 1주 * 홍지훈 목사
누가복음 3:1-14
주님,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안 되겠지요?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대림절(待臨節)이 시작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대강절(待降節)이라고 불렀는데,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부르다가 요즘에는 대림절로 정착되었습니다. 가다릴 待자와 임할 臨자를 쓰는데, 내릴 降자를 써서 대강절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는데, 한자세대가 사라지면서 어감이 “대강대강”이라는 느낌을 주기 되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강림절로 바뀌었는데, 강림이라는 말은 내릴 강, 임할 임이라서 “기다린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또한 거기에 성령강림절과 혼동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다릴 대와 임할 임을 사용하는 대림절이라고 최근에는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원문으로 어드벤트(Advent)인데, “다가오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기다리다”는 의미가 역사 속에서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차이가 지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가까이에 “다가오신” 사건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 예수의 탄생을 통해서 실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다시 오심)이 약속되었고,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이 매년 돌아오는 성탄절을 기념하며 교회의 절기가 된 것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이란 “이미 오신 예수님과,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 사이에서 기다리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 재림의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만큼 종말의식이 강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망하는 재림은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 세상의 삶에서 해방되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다가오기 3-6주 전부터 성탄을 준비하며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6세기경에 대림절은 공식적인 교회력으로 선포되었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참회의 기간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중세교회에서는 재림은 무서운 심판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의 절기라는 의미는 퇴색하고,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속죄의 절기로 변질했습니다. 그러다 종교개혁 시대에 다시 대림절의 의미가 회복되었고, 가톨릭교회도 20세기에 들어서서 금식이나 금욕의무를 취소하였다고 합니다.
대림절에 촛불을 켜는 것은 19세기 독일교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매주 하나씩 초를 추가해서 4개를 켜고 나면 성탄절이 되는데, 그 의미는 그만큼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멀리서 집을 찾아 돌아오는 자녀들 기다리면서 집에 불을 밝혀놓는 것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보통은 색깔을 달리해서 자주색, 연자주색, 분홍색, 흰색의 초를 켜는데, 우리교회는 양초의 색소에서 혹시라도 해로운 물질이 나올 것을 염려해서 천연 밀랍으로 만든 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 연 노란색입니다. 향기도 꿀 냄새가 납니다.
동시에 교회력에 따른 예전 색깔이 있는데, 대림절에는 보라색 제단보를 사용합니다. 11세기가 지나갈 때까지 교회는 다양한 색깔의 제단보를 사용할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부유해지면서 다양한 색과 질감의 원단을 사용하면서 사제들의 화려한 복장도 증가하고, 예배당 장식에 여러 색깔의 천들이 사용되었습니다. 흰색은 경축하는 일에 쓰이고, 순교애도에는 붉은 색을 사용하고, 참회의 절기에 검은 색을 쓰기도 했습니다. 보통의 절기에 사용하는 색은 초록입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보라색은 준비와 참회 그리고 기다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너무 지나치지 않은 시각적 장식은 예배와 기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 시각예술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그 효과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목소리 하나만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오늘날 멀티미디어 시대에 비교하면 그 당시는 그때 선포된 그 말씀은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말로 선포되고 기억에 의한 구전(말)로 전달되는 시대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장애로 인해 듣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접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장애가 아니더라도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문서로 된 성경이나 책자로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성성과 화상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담은 조각품이나, 예수와 성인들을 그린 화상, 즉, 이콘(icon)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신앙심을 키우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요한이라는 사람은 신약성서시대의 전형적인 “이콘”(형상)입니다. 무엇을 상징하는 형상인가하면 <회개>를 상징하는 형상의 전형입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가 티베리우스 황제 15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서력기원으로 바꾸면 주후 26년쯤 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함께한 섭정기간을 제외하면 15년째가 주후 28년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애타게 기다리던 시기였습니다. 요한의 설교에서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고,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서 불속으로 들어간다.”는 내용만 보아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 요한의 의식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요한은 제사장 집안의 아들이면서도 광야로 나아가 금욕생활을 하는 일종의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금욕과 참회의 삶을 산 것입니다. 들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으며, 옷은 낙타털로 만든 거친 옷이라고 마태복음에서 설명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온 요한은 그야말로 참회의 아이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3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요한은 광야에 나가서 혼자 참회의 삶을 살았지,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요단강 주변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남긴 요한의 말이 구약성서 이사야 40:3-5절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눅3:4-5)
잠깐 이사야 예언서의 분위기를 보겠습니다. 39장까지는 유대왕국이 외세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다가 40장에 와서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39장과 40장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건너가는 변곡점이라는 뜻이고, 이 사이에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의 역사가 아무런 기록 없이 숨겨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해방될 희망을 소식을 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요단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도래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조건이 나옵니다. “골짜기를 메우고, 굽은 것을 평평하게 만들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한은 회개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화를 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라고 소리 지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 즉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해도 불속에 던져지는 장작 신세를 피하게 어렵다고 경고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산과 골짜기는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고, 구부러진 길도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입니다. 또 걷다보면 험한 길도 당연히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메꾸고, 평평하게 하고 평탄하게, 만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하던 대로 그냥하면 안 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 유대교가 제시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가지고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눈앞에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열리는데, 그냥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거짓예언자는 언제나 손쉬운 희망만을 줍니다. 값싼 은혜로 유혹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말귀를 알아들은 무리가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쩌면 무리들은 요한의 외모(형상)을 통해서 그 답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요한을 따라 광야로 나가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면서, 금욕하고 참회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다리면 된다는 말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대답은 예상 밖의 대답입니다. “속옷 두벌이 있으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이 있으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말합니다.
지구의 멸망을 그린 영화들이 꽤 많습니다. 그리고 거의 파괴된 상황에서 생존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흥미롭게 영화를 꾸밉니다. 영화내용은 허구(fiction)이지만, 영화도 사람이 만들기 때문에 그 속에는 반드시 사람의 공통적인 심리가 묘사됩니다. 다수는 위기의 순간에 자기만 살려고 합니다. 종말이 닥쳐와서 더 살아봐야 겨우 며칠 더 살 수 있을 텐데, 그 며칠을 더 살기 위해서 자기 것이 넉넉한데도 남의 것을 더 빼앗으려고 싸웁니다. 아주 소수의 깨달은 무리들은 부족한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함께 생존의 길을 모색합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그 소수의 무리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냅니다. 요한이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도래하는데, 여전히 자기 생각만 하며 살면 하나님 나라를 맞을 준비가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번에는 세리무리가 다가와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군인들도 다가와 질문합니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 비교적 잘사는 사람들인 세리도, 비교적 권세가 있었던 군인도 내심 크게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에게 준 요한의 대답은 달라 보이지만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대답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대로 살면 안 된다는 대답입니다. 세리는 정한 세금에 과도하게 덧붙여 징수해서 먹고살았고, 군인은 힘을 이용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봉급보다 더 많은 부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 것을 정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세리와 군인에게 그다지 큰 희생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동안 남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도 되던 관례들을 깨야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성경의 단락이 바뀌면서 누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14절까지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14절이 진행되는 동안에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나 바리새파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요한의 선포는 아직 그 정도 높은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 이후에도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을 보아, 요한 정도의 선포에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반대로 요한의 선포를 듣고도 마음에 울림이 없다면, 그 마음은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래를 기다리는 대림절은 우리 마음이 변할 가능성이 있는지 스스로 자가 검진(Self-Diagnose)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탄이 되어 주님이 오셔도, 주님이 세상에 오신 그 의미를 모른다면, 성탄은 성탄이지만, 내 영혼 안에 주님은 영원히 탄생하지 않으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평화목 교우 여러분,
눈에 보이는 형상이 그래도 필요한 것은 듣지 못하거나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과 귀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낡아집니다. 잘 안보이고 잘 들리지 않게 되는 당연한 노화현상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우리의 이해심이 노화한다면, 눈과 귀가 안보이고 안 들리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경험과 연륜이 많을수록 우리 마음의 감각이 더 열려야하는데, 오히려 더 닫혀버리면 오늘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시는 주님의 도래를 느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연륜과 신앙의 연륜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의 마음의 눈이 더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대림절을 맞아 제단 위에 피운 대림절 양초 불빛이 하나 더 늘어갈 때마다, 그 촛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더 열리고 더 따듯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메워야할 골짜기는 무엇인지, 우리가 평평하게 만들어야할 굽고 험한 길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대림절 첫째 주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