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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송)나라
중국의 서주시대부터 존재하던 국가. 殷(은)의 왕족이자 주왕의 이복형 미자계가 분봉받
은 나라다. 수도는 상구로,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남쪽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왕족이 쓰는 국성은 상나라 왕실 때와 같이 子(자), 氏(씨)는 宋(송)이다.
주나라가 통일한 직후에 받은 땅이 중원의 제후국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
직위는 모든 제후국 중에서도 으뜸가는 공작이었다. 공신 제나라의 태공망이 후작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지위다.
春 秋 戰 國 時 代
宋 王 朝 世 家
春秋時代(춘추시대)
宋(송) BC. 11세기∼BC. 286 위치 河南省(하남성) 성: 子(자) 작위 공작
|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제1대 | 微子(미자) | 啓(계) | 商丘 | 河南省 商丘 | ||
| 제2대 | 微仲(미중) | 衍(연) | 미자의 동생 | (상구) | 하남성 상구 | |
| 제3대 | 宋公(송공) | 稽(계) | 미중의 아들 | |||
| 제4대 | 丁公(정공) | 申(신) | 계의 아들 | |||
| 제5대 | 湣公(민공) | 共(공) | 정공의 아들 | |||
| 제6대 | 煬公(양공) | 熙(희) | 민공의 동생 | |||
| 제7대 | BC. 859 | 厲公(여공) | 紨祀(부사) | 양공의 아들 | ||
| 제8대 | BC. 858∼BC. 831 | 釐公(희공) | 擧(거) | 여공의 아들 | ||
| 제9대 | BC. 830∼BC. 800 | 惠公(혜공) | 覵(한) | 희공의 아들 | ||
| 제10대 | BC. 800 | 哀公(애공) | 불명 | 혜공의 아들 | ||
| 제11대 | BC. 799∼BC. 766 | 戴公(대공) | 白(백) | 애공의 아들 | ||
| 제12대 | BC. 765∼BC. 748 | 武公(무공) | 司空(사공) | 대공의 아들 | ||
| 제13대 | BC. 747∼BC. 729 | 宣公(선공) | 力(역) | 무공의 아들 | ||
| 제14대 | BC. 728∼BC. 720 | 穆公(목공) | 和(화) | 선공의 아들 | ||
| 제15대 | BC. 719∼BC. 710 | 殤公(상공) | 與夷(여이) | 목공의 아들 | ||
| 제16대 | BC. 709∼BC. 692 | 莊公(장공) | 憑(빙) | 상공의 아들 | ||
| 제17대 | BC. 691∼BC. 682 | 민공 | 捷(첩) | 장공의 아들 | ||
| 제18대 | BC. 682∼ | 廢公(폐공) | 游(유) | 장공의 아들 | ||
| 제19대 | BC. 681∼BC. 651 | 桓公(환공) | 御說(어열) | 장공의 아들 | ||
| 제20대 | BC. 651∼BC. 637 | 襄公(양공) | 慈夫(자보) | 환공의 아들 | ||
| 제21대 | BC. 636∼BC. 620 | 成公(성공) | 王臣(왕신) | 양공의 아들 | ||
| 제22대 | BC. 619 | 廢公(폐공) | 禦(어) | 성공의 아들 | ||
| 제23대 | BC. 619∼BC. 611 | 昭公(소공) | 杵臼(저구) | 폐공의 아들 | ||
| 제24대 | BC. 610∼BC. 589 | 文公(문공) | 飽(포) | 소공의 동생 | ||
| 제25대 | BC. 588∼BC. 576 | 共公(공공) | 瑕(하) | 문공의 아들 | ||
| 제26대 | BC. 575∼BC. 532 | 平公(평공) | 成(성) | 공공의 아들 | ||
| 제27대 | BC. 531∼BC. 517 | 元公(원공) | 佐(좌) | 평공의 아들 | ||
| 제28대 | BC. 516∼BC. 469 | 景公(경공) | 頭曼(두만) | 원공의 아들 | ||
| 제29대 | BC. ?∼ BC. 469 | 啓(계) | 경공의 종손 | |||
| 제30대 | BC. 468∼BC. 404 | 昭公(소공) | 得(득) | 원공의 종손 | ||
| 제31대 | BC. 404∼BC. 396 | 悼公(도공) | 購由(구유) | 소공의 아들 | ||
| 제32대 | BC. 396∼BC. 363 | 休公(휴공) | 田(전) | 도공의 아들 | ||
| 제33대 | BC. 362∼BC. 356 | 桓公(환공) | 壁兵(벽병) | 휴공의 아들 | ||
| 제34대 | BC. 356∼BC. 329 | 剔成(척성) | 喜(희) | 환공의 아들 | ||
| 제35대 | BC. 328∼BC. 286 | 康王(강왕) | 偃(언) | 척성군의 자 |
제1대 미자(BC. ?∼BC. ?)
商(상)나라의 왕자로 이름은 계로, 주로 미자계라고 한다. 微(미)는 영지의 이름으로 아
버지는 상나라 제 29대 왕 제을이며,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이복형이 된다. 현명하
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정실 소생이 아니라서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주왕이 달기를 끼고 폭정을 다하자 주왕의 아저씨뻘 되는 기자는 간언하다가 노여움을
타서 미친 척하며 다니다 투옥되고 비간은 처형되었다. 이에 미자 계는 상나라에 천명
이 떠난 것을 알고 상나라의 종묘에 들어가서 祭器(제기)를 가지고 나왔다.
周(주)나라군은 목야 대전에서 商(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미자 계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주왕의 아들 武庚(무경)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형제인 管叔 鮮(관숙 선), 蔡叔 度(채숙 도), 霍
叔 處(곽숙 처)를 감시자로 보냈다. 이들을 삼인의 감시자라 하여 三監(삼감)이라 부른
른다.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주나라)이 즉위하자 주공 단(노나라 제후로 이름은 단
이다)이 섭정했다. 무경은 이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삼감은 주공단에 불만
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이들은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미자
계는 여기서도 주공단의 편을 들어서 삼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무경과 관
숙은 처형 되었으며. 채숙과 곽숙은 추방되었다. 그래서 미자 계는 무경이 다스리던 지
역의 제후로 봉해졌는데 이 지역을 宋(송)이라고 한다. 이후 미자는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동생 미중년이 제후직을 이어받아 이곳을 다스리게 되었고 이 후 송나라 제후는
미중 년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된다. 관숙, 채숙, 곽숙은 각각 관, 채, 곽의 제후라는 뜻
으로 각각의 이름은 鮮(선), 度(도), 處(처)이다.
제2대 미중 연(BC, ?∼BC. ?) 미자 계의 아우이며, 주왕의 형이다.
미자 계가 죽자 뒤를 이었다. 그가 죽고 아들인 자계가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공
계다.
제3대 송공 계(BC. ?∼BC. ?) 미중 연의 아들이다.
미중 연의 아들. 미중 연이 죽고 그 뒤를 이었고 송공 계가 죽고 그 아들인 신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 정공이다.
제4대 정공(BC. ?∼BC. ?) 송공의 아들이다.
계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었다.
제5대 민공(BC. ?∼BC. ?) 정공의 아들이며, 양공의 형이다.
여공의 아버지. 정공이 죽고 그 뒤를 이었고 민공 또한 죽고 그 아우인 자희가 뒤를 이
으니 그가 양공이다.
제6대 양공(BC. ?∼BC. ?) 정공의 아들이며, 민공의 아우이다.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공의 아들 조카인 부사가 양공을 시해하고 즉위했다. 즉
위 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내가 응당 즉위해야 한다. 그가 여공이다.
제7대 여공(BC. ?∼BC. 859) 민공의 아들이며, 희공의 아버지다.
숙부인 양공을 죽이고 즉위했다. 그가 바로 송 여공이다.
제8대 희공(BC. ?∼BC. 831) 여공의 아들이며, 혜공의 아버지다.
희공 17년(기원전. 840년), 周(주) 여왕이 국인들의 반란으로 彘(체) 땅으로 쫓겨나 공
화시기가 열렸다. 송 희공 28년(기원전. 831년), 송 희공이 죽고 아들인 한이 즉위했
다. 그가 죽고 자한이 뒤를 이으니 그가 혜공이다
제9대 혜공(BC. ?∼BC. 800) 희공의 아들이며, 애공의 아버지다.
혜공 4년(기원전. 827년), 주 선왕이 즉위했다. 혜공 31년(기원전. 800년), 혜공이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애공이다.
제10대 애공(BC. ?∼BC. 800) 혜공의 아들이며, 대공의 아버지다.
휘는 불명이다. 애공이 즉위 원년에 죽자 아들 대공이 즉위했다.
제11대 대공(BC. ?∼BC. 766) 애공의 아들이며, 무공의 아버지다.
대공은 정고보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대공은 백성들을 재해에서 구하기 위해
구제 사업을 실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조치와 선정으로 송나라는 춘추시대의 강국
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공 29년, 주 유왕이 견융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공 34년(기원전. 766년), 대공이 죽어 주 평왕이 대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는 아들
인 사공이 즉위했다. 그가 무공이다. 그에게서 이 성씨들이 갈라져 나왔다. 戴(대). 宋(
송), 武(무). 宣(선). 穆(목). 蕭(소). 樂(악). 石(석). 華(화). 皇(황). 皇甫(황보). 東鄕(동향)
桓(환). 鐘(종). 宗(종). 墨(묵) 등 여러 성씨가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제12대 무공(BC. ?∼BC. 748) 대공의 아들이자, 선공의 아버지다.
재위 기간중 장적이 침입이 있었는데 형제인 사도 皇父(황보)를 보내 장적을 토벌했다.
또한 노 혜공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노 환공을 얻었다. 송 무공의
이름이 사공 벼슬과 이름이 같았으므로, 이 당시에 사공이 사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무공 18년(기원전. 747년), 무공이 죽고 그 아들인 력이 뒤를 이으니 그가 선공이다.
제13대 선공(BC. ?∼BC. 729) 무공의 아들이며, 목공의 형이다.
송 선공 9년(기원전. 729년), 선공이 병이 들었으나 태자인 與夷(여이)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동생인 자화를 불러 물려주겠다고 하자 자화는 3번 사양했으나 결국 선공의 뜻이
완강하여 결국 자화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송 목공이다.
제14대 목공(BC. ?∼BC. 720) 무공의 아들이며. 선공의 동생이며, 장공의 아버지다.
선공 9년(기원전. 729년), 송 선공이 무거운 병이 들자 사마 孔父嘉(공보가)를 불러 태
자 여이 대신 공자 화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했는데 3번 사양하고 받아 들였다. 그리고
아들인 憑(빙)은 정나라로 보냈다. 송 목공 9년(기원전. 720년), 송 목공 또한 병이 들
자 형인 송 선공의 아들인 공자 여이에게 뒤를 잇게하니 그가 바로 송 상공이다.
제15대 상공(BC. 750∼BC. 710) 선공의 아들이다.
송 상공 원년(기원전. 719년), 衛(위)나라에서 주우가 衛 桓公(위 환공)을 시해하면서 주
우가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주우는 여러 제후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송나라에 사신
을 보냈는데, 사신이 송 상공에게 정나라에 가는 동안에 풍이 난을 일으킬 것이니, 위
나라와 함께 토벌하자고 제의했고, 송 상공은 위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편 주나
라 환왕이 정 장공을 공격하다가 정나라 대부 축담에게 어깨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
하고 대패하자, 송 상공은 정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곧바로 송나라 땅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은 뒤에 주 환왕에게 정나라를 정벌해도 된다는 윤허를 받았다. 하지만 송 상공
의 진짜 속셈은 정나라에 망명했던 사촌 공자 빙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송 상공은 衛(
위), 秦(진), 陳(진), 曹(조) 등 네 나라를 이끌고 정나라 역성을 점령하고, 수도 신정을
향하였다. 연합군이 신정의 동문까지 진격하였다. 정 장공은 송 상공의 속셈을 알고서는
공자 빙을 장갈로 보내서 송나라 군대를 유인하고 네 나라의 군사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송 상공 2년(기원전, 718년), 공자 빙은 정나라와 협공해서 정갈과 역성에서 승리를 거
둔 후에 송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송 상공 9년(기원전. 711년), 대사마 孔父嘉(공보가)의
아내가 미인이었는데 공보가의 아내가 외출하다가 太宰 華督(태재 화독)을 만났다. 화독
은 공보가의 아내에게 반하여, 공보가의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화독은 공보가
의 아내를 탐을 냈는데, 이에 사람을 시켜서 송 상공이 재위 기간에 전쟁을 11번이나
일으켜서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데, 그 일이 공보가가 저지른 것인데 하면서 공보
가를 처단하여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송 상공 10년(기
원전 710년) 화독이 공보가를 죽이고 공보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한편 송 상공이 화독
이 저지른 일에 분노하자, 화독은 송 상공이 자신을 죽이려 들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
다. 결국 송 상공은 화독의 자객들에게 시해당했다. 그 뒤를 정나라로 인질로 간 송 목
공의 아들 공자 빙이 귀국하여서 위에 올랐다.
제16대 장공(BC. 750∼BC. 692) 목공의 아들이며, 민공. 공유. 송 환공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자기 대신 사촌 상공에게 군위를 물려주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정나라에서 살
게 되었다. 상공 10년(기원전. 710년), 태재 화독이 상공을 시해하고 그를 맞아 들이니
그가 장공이다. 장공 원년(기원전. 709년), 화독은 郜(고)나라에서 보내온 큰 솥을 노환
공에게 주고 齊(제)나라. 陳(진)나라. 정나라에 예물을 보내고 송나라의 실권을 장악하
게 되었다. 장공 9년(기원전. 701년), 송 장공은 제나라, 衛(위)나라, 정나라와 회맹했
다. 여름에 정 장공이 죽자 제중은 세자 홀을 정백으로 모시니 그가 정 소공이다. 정
소공의 아우 공자 돌이 송나라 여자 옹씨가 어머니였기 때문에, 송 장공은 정나라에 영
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신으로 온 제족을 협박해 공자 돌을 세우라고 했다. 제족은 어
쩔수 없이 공자 돌을 세워줬다. 그가 바로 정 여공이다. 정 여공은 자신이 정나라의 백
작이 되면, 송 장공에게 성과 예물을 주기로 약속했던 바가 있었다. 그러나 즉위하고 나
서는 입을 쓱 닦았다. 송 장공 10년(기원전 700년) 여름 노 환공이 송나라와 정나라의
강화를 돕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가을에 그것을 실행했으나 송 장공은 그것을 역정을
내며 씹었다. 겨울에 구 땅에서 회맹했으나 송 장공은 약속한 물건이 오지 않았다는 이
유로 강화 제의를 거절했다. 노 환공은 정 여공과 함께 송나라를 쳤다. 송 장공 11년(기
원전 699), 송 장공은 약속한 물건을 주지 않는 정나라와 노나라 연합군에 맞서고자 제
나라, 위나라, 연나라와 함께 정나라와 싸웠으나 탈탈 틀렸다. 송 장공 12년(기원전 69
8년) 겨울, 송 장공은 그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제나라, 채나라, 衛(위)나라, 陳(진)나라
등 4개국과 연합해 정나라를 쳐 정나라의 동문에 이르러 그 문을 불사르고 신정성에
들어왔다. 그리고 동쪽 교외를 쳐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정나라 궁전의
까래를 약탈하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정나라는 한번의 거한 패배로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린 것이다. 송 장공 13년(기원전. 697년) 겨울, 송 장공. 노 환공. 위 혜공. 陳
莊公 (진 장공)이 이 땅에서 정나라를 치려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각각 회군했다. 장공
14년(기원전 696년) 정월, 송 장공은 노 환공, 채 환후, 위 혜공과 조나라에서 만나 회
맹하며, 함께 정나라를 칠 것을 맹세했다. 4월에 송나라, 노나라, 위나라, 陳(진)나라,
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송 장공 15년(기원전 695년), 송 장공이 위나라와 함께
邾(주)나라를 쳤다. 장공 19년(기원전. 692년) 12월 을유일, 장공이 죽고 그 아들 첩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 민공이다.
제17대 민공(BC. ?∼BC. 682) 송 장공의 아들이다.
송 민공 원년(기원전 691년), 4월 송 민공은 아버지 송 장공의 시신을 안장했다. 민공
3년(기원전. 689년), 겨울 민공은 齊(제)나라. 陳(진)나라. 蔡(채)나라와 연합해 위나라
를 쳤다. 민공 8년(기원전. 684년). 노나라는 제나라를 장작 전투에서 이기고 2월에 그
기세로 송나라를 쳤다. 3월에 송나라 사람들이 숙읍에 옮겨 살았다. 6월 송나라 제나라
와 힘을 합쳐 노나라를 쳤다. 이들은 승구 땅에서 전투를 벌렸다. 제나라와 송나라 연
합군이 패해 장군 南宮萬(남궁만)이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이에 송나라에서 남궁
장만을 풀어줄 것을 요청해 남궁장만은 풀려나게 되었다. 송 민공 9년(기원전 682년),
여름 송 민공이 노나라를 치니 노 장공이 친히 맞서 싸워 진 땅에서 송군을 이겼다. 가
을에 송나라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노나라의 장문중이 그것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송 민공이 남궁장만이 포로가 된 것을 두고 놀려서 남궁장만은 그것에 앙심을 품
고 송 민공을 시해할 마음을 먹었다. 송 민공 10년(기원전 682년) 남궁장만은 송 민공
을 蒙澤(몽택)에서 바둑판으로 쳐죽였다. 대부 仇牧(구목)이 남궁장만을 치면서 그를 꾸
자 구목마저 죽여버렸다. 남궁장만은 태재 화독마저 죽이고 공자 유를 세웠다.
송나라의 공자들은 소읍으로 달아나고 송 민공의 아우인 禦說(어열)은 亳(박) 땅으로 달
아났다. 남궁장만은 동생인 南宮牛(남궁우)을 시켜 박나라을 치게 했으나 송나라 공자들
이 남궁우를 쳐죽이고 송 민공의 동생 어열을 옹립했다. 그가 송 환공이다. 그 후 남궁
장만은 陳(진)나라로 달아났으나. 송나라의 뇌물을 먹은 진후가 남궁장만에게 미녀들에
게 술을 권하게 하여, 남궁장만은 크게 취했고, 그런 남궁장만을 단단히 포박해 송나라
보내 송 환공이 그를 처형하므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제18대 송공 유(BC. ?∼BC. 682) 송 장공의 아들이고, 송 민공의 사촌 아우다.
남궁장만이 노나라에게 한번 패해 포로로 잡힌 일을 가지고 놀린, 송 민공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였다. 이것은 송 민공 10년인 기원전 682년의 일이었다. 남궁장만은 유를
공작으로 세웠다. 그리하여 공자들은 蕭(소)나라로 달아나고. 공자 어열은 亳(박)나라로
달아났다. 남궁장만은 후환을 끊기 위해 남궁우를 시켜 소나라를 쳤으나 오히려 당하자
陳(진)나라로 달아났다. 당연히 송공 유는 공자 어열이 송나라로 왔을 때 죽었고, 그가
군주가 되니 그가 송 환공이다. 송 환공은 陳(진)니라에게 뇌물을 주어 미녀를 시켜 남
궁장만에게 술을 먹여 대취한 상태에서 송나라에 보냈고, 송 환공은 그를 처형해 송나
라의 분열은 종결되었다.
제19대 환공(BC. ?∼BC. 651) 송 장공의 아들이고, 송 민공의 동생이다.
남궁장만이 자신을 놀린 송 민공을 바둑판을 던져 죽인 뒤 송공 유를 세웠다. 이때 다
른 공자들은 소나라로 달아나고 공자 여열은 박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소나라로 달아
난 공족과 힘을 합쳐 남궁장만이 공자들을 죽이려 보낸 남궁우를 물리치고 오히려 송나
라를 쳐서 남궁장만은 陳(진)나라로 달아났다. 송 환공은 진나라에 뇌물을 보내 남궁장
만을 속여서 포박한 뒤 죽였고 衛(위)나라로 달아난 猛獲(맹획)을 잡아 죽였다. 공자 어
열이 송나라 군주가 되니 그가 바로 송 환공이다. 송 환공 3년(기원전 679년), 봄 송환
공과 제 환공, 陳 宣公(진 선공), 뤼 혜공, 정 여공과 견 땅에서 다시 회맹했다. 가을에
제후들이 송나라와 함께 郳(예)나라를 쳤다. 정나라 사람들은 송나라를 쳤다. 송 환공
4년(기원전 678년), 여름 송나라, 제나라, 위나라, 제후 연합군은 송나라를 치는 정나라
를 쳤다. 겨울에는 정나라와 화해했다. 송 환공은 노나라, 제나라와 陳(진)나라, 위나라
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송 환공 14년(기원전 668년), 송 환공은 노나라, 제나라
와 함께 徐(서)나라를 쳤다.송 환공 15년(기원전 667년), 송 환공은 제나라, 노나라, 陳
(진)나라와 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송 환공 16년(기원전 666년), 초나라가 정나
라를 치니 송 환공은 제나라, 노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구원했다. 송 환공 20년(기원전
662년), 제 환공은 초나라가 정나라를 쳐서 제후들에게 회맹을 요청했다. 여름 양구 땅
에서 비공식 회맹을 가졌다. 송환공 23년(기원전 659년), 송 환공, 제 환공, 조 소공은
섭북에 이르러 형나라를 구하러 갔다. 그런데, 형나라가 북적에게 망해보렸다. 여름 형
나라를 위해 성을 다시 쌓았다. 7월 초나라가 정나라와 가까워졌다. 제나라가 회맹을
배신한 정나라를 쳤다. 8월 송 환공, 노희공, 제 환공, 정 문공, 주(주)나라의 자작을 낙
에서 회맹해 정나라를 구원하려 했다. 송 환공 24년(기원전 658년), 강나라, 황나라가
제나라에 귀의했다. 제 환공, 송 환공, 강나라와 황나라의 군주가 관 땅에서 회맹했다.
송 환공 25년(기원전 657년), 송 환공은 제나라, 강나라, 황나라, 3국의 군주와 만나 초
라를 치려했다. 송 환공 26년(기원전 656년), 정월 제 환공, 송 환공, 노 희공, 진 선공,
위 문공, 정 문공, 허 목공, 조 소공과 함께 채나라를 치니 채나라가 패했다. 그리고 초
나라를 치기 위해 형 땅에 주둔했다. 여름 초 성왕이 屈完(굴완)을 보내 제후군 진영으
로 가서 회맹에 참여했다. 12월 노나라의 공손자가 제나라, 송나라, 위나라, 정나라 군
대와 함께 陳(진)나라를 치니 陳(진)나라가 화평을 요청했다. 송 환공 27년(기원전 655
년), 송 환공이 노 희공, 제 환공, 진 선공, 위 문공, 정 문공, 허 희공, 조 소공과 함께
수지에서 회맹했다. 주 혜왕의 태자 희정(희정)을 만났다. 그 이유는 주 왕실의 안정이
었다. 송 환공 28년(기원전 654년), 여름 송 환공은 제 환공 등 여러 제후들과 함께 정
나라가 회맹에서 배신한 죄를 묻기 위해 정나라의 신밀 땅을 포위했다. 이에 초 성왕은
허나라를 포위해 정나라를 구했다. 제후들은 허나라를 구하러 가서 초나라는 회군했다.
송 환공 30년(BC. 652년), 정월 송 환공은 주 왕실에 사자, 노 희공, 제 환공, 우 문공,
허 희공, 조 공공, 정나라 세자 관과 조 땅에서 회맹했다. 겨울에 송 환공이 병이 들자
태자 자보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주려 하니 태자 자보는 서형인 공자 目夷(목이)에게 양
보하려 했다. 3번이나 그랬음에도 공자 목이는 끝끝내 거절했다. 환공 31년(BC. 651년)
3월 정축일 송 환공이 병으로 죽어 태자 자보가 그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양지인으
로 유명한 송 양공이다.
제20대 양공(BC. ?∼BC. 637) 환공의 아들이며, 춘추오패의 하나
환공 31년(기원전 652년) 봄, 환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송나라 군주가 되자, 이
복형 目夷(목이)를 재상으로 삼았다. 송 양공이 송 환공의 장례가 끝나기 전에 제 환공
이 규구(규구) 땅에서 제후들과 회맹을 한다고 하자, 그곳에 가서 회맹에 참가하였다.
송 양공 7년(기원전 646년), 하늘에서 유성이 비처럼 내렸는데, 동시에 큰 비도 내렸다.
그리고 鷁鳥(익조) 6마리가 세차고 빠른 바람으로 인해서 뒤로 날아가는 일이 있었다.
송 양공 8년(기원전 645년), 송 양공은 제 환공에 이어 패자를 되려는 꿈을 키웠는데,
문제는 송나라가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楚(초)나라, 晉(진)나라, 秦(진)나라, 齊(제)나라 보
다는 훨씬 국력이 처지는 2류 국가였던 것이다. 한편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였던 제
환공이 사망하면서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제나라 공자들은 옥좌 계승을 둘러싸고 다
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패한 제나라 공자 소는 송나라로 망명하여 도움을 청했다.
송 양공은 소를 도와 공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제 효공이다. 그렇게 해서 송 양공은 패
자국이었던 제나라의 정변에 개입하여 보위를 결정하는데 한 몫하자 스스로 패자가 되
었다고 자부하고, 회맹을 자주 소집했다. 송 양공 12년(기원전 641년) 봄, 송 양공은 鹿
上(녹상) 땅에서 회맹하고자 초나라한테 제후들을 소집해달라고 요구하니, 초나라는 이
를 응하였다. 공자 목이가 작은 나라가 회맹을 다투면 화를 불러온다고 간하였지만, 송
양공은 목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훨씬 작은 나라인 증나라 군주가 여기
에 늦게 오자, 송 양공은 증공을 삶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송 약공은 이로서 신망
을 잃었고, 曹(조)나라 공공은 송 양공을 비난하며 그냥 가버렸다.(혹은 말도 없이 달아
났다고 하지만 당시 조나라 군사력은 송과 차이가 없었다) 이에 송 양공은 군대를 동원
해 조나라를 치지만, 조나라도 송나라에 떨어지지 않는 군사력을 가진지라 6달 동안 여
럿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정벌하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얻자 못한채 철군해야 했다.
같은해 가을, 강대국인 초나라, 제나라와 여러 제후들과 盂(우)나라에서 회맹을 열었고.
회맹의 장이 되어 패자로 등극하려고 했지만, 공자 목이는 송 양공의 욕심이 너무 지나
쳐서, 화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초나라 사람은 믿을 수 없으니
군사를 이끌고 가라며 조언했지만, 송 양공은 자신이 먼저 군사를 대동하지 않을 것을
제안했으니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군사를 거느리지 않았다. 목이의 걱정처럼, 군사를
이끌고 온 초나라 성왕은 이에 딴지 걸었다. 송 양공은 초 성왕을 모욕했으나, 도리어
초 성왕을 빡돌게 하여 초나라 군에 사로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송나라에
서는 공자 목이가 공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겨을, 초 성왕은 송나라의 내분
분을 조장하기 위해서, 亳(박)나라에서 회맹을 열어 여러 제후의 의견을 듣고서 소 양
공을 풀어줬다. 풀려난 송 양공은 씩씩거리며 분노를 가득쌓아서 돌아왔으나, 공자 목
이는 다시 송 양공에게 송나라 군의를 순순히 넘겨주었다. 사실 목이가 왕위에 오른
것은 송 양공을 석방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 12년(BC. 641년), 양공은 鹿上(녹상) 땅
에서 회맹하고자 초나라 한테 제후들을 소집해 달라고 요구하자 초나라는 이에 응하
였다. 공자 목이가 작은 나라가 회맹을 다투면 화를 불러온다고 간하였지만 양공은 목
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보다 약하고 작은 나라인 증나라 군주가 늦게 오자
송 양공은 증공을 삶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양공은 이로써 신망을 잃었고 曹(조)
나라 공공은 양공을 비난하며 그냥 가버렸다. 이에 양공은 조나라를 치지만 6개월 동
안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철군해야 했다. 양공 13년(기원전 638년), 양공은 초나라
에 한을 품었지만 강대국 초나라를 건드릴 수 없고, 다만 초나라의 동맹국이었던 정나
라를 치게 된다. 초나라는 동맹국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泓水(홍수)에
서 초나라와 대치한다. 초군은 강을 건너서 송군을 치려고 했고, 송군은 이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었으나, 송 양공은 스스로 패업을 이룬 패자이여, 패자는 인의로
서 정정당당히 싸워야한다고 고집하며, 재상인 목이와 군사들과 장수들의 의견을 물리
치고 초군이 강을 온전히 건널수 있도록 그냥 둔다. 초군이 모두 강을 건너고 제대로
군을 추슬러 확실히 싸울 준비가 다 된 다음에야 송 양공은 돌격 명령을 내렸으나, 강
력한 초나라에 송나라군은 대패했고, 자신도 크게 부상은 입었다. 그럼에도 정정당당하
게 싸웠으니 후회는 없다고 말하다가 목이에게 전쟁은 ‘그런 예의랑 다르다면서 적에게
그런 예의를 치룰려면 차라리 항복을 미리 할것이지!’라는 비난을 듣고 송나라 각지에
서도 애꿏은 병사들을 무더기로 죽여놓고 이따위 망발로 자기만족하는데 소중한 가족을
잃은 백성들에게도 무라고 할것이냐며 매섭게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런 명분론을 후세
사람들은 고사성어가 바로 적에게 동정을 베푸는 인정을 뜻하는 宋襄之仁(송양지인)이
다. 송 양공 14년(기원전 637년) 여름, 홍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에 상태가 악화되
어서, 송 양공은 사망하였다. 그 뒤를 아들인 왕신이 즉위했다.
제21대 성공(BC. ?∼BC. 620)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양공의 아들이자, 공어의 형이다.
성공 4년(기원전 634년), 초나라가 晉(진)나라와 가까이 지냈는데, 그 이유는 楚 成王(
초성왕)이 晉 文公(진 문공)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송 성공은 그것을 두고 불
안하게 여겼는데, 진 문공이 그것을 의식했는지 당시 초나라에게 曹(조)나라 衛(위)나라
를 쳤다. 송 성왕 4년(기원전 633년) 초 성왕이 송나라를 치자 송 성공이 그것을 晉(진)
나라에 알렸다. 성공 5년(BC. 632년), 진 문공이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성북에서 초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초 성왕은 명장 成德臣을(성덕신) 보내 맞섰다. 그런데 성덕신이
진 문공이 90리를 물려주는 것을 보고 진나라 군대가 약하리라 판단해 덮쳤으나 거꾸로
晉(진)나라의 명장 先進(선진)의 계략에 넘어가 패하여 성득신은 돌아가 초 성왕의 명령
으로 자결했다. 그리고 진 문공은 패자가 되었다. 송 성공 9년(기원전 628년), 진 문공
이 세상을 떠났다. 송 성공 11년(기원전 626년), 초 성왕이 태자 상신에게 죽고, 태자
상신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楚 穆王(초 목왕)이다. 송 성공 16년(가원전 621년), 秦 穆
公(진목공)이 죽었다. 송 성공 17년(기원전 620년), 송 성공이 죽고 그 아우 御(어)가 태
자 급과 공손고를 죽이고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곧 공자 杵臼(저구)에게 죽고, 그 공자
저구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 소공이다.
제22대 어(BC. ?∼BC. 619) 송 성공의 아우.
태자 급과 사마 공손 고를 죽이고 군주가 되었으나 송 성공의 아들인 공자 저구에게 죽
었다. 그리고 공자 저구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송 소공이다.
제23대 소공(BC. ?∼BC. 611)송 성공의 아들이며, 송 문공의 형.
송 성공이 죽은 뒤 그 아우 어가 송 성공의 태자 급과 사마 공손 고를 죽이고 군주가
되었으나 곧 송나라 사람들이 송공 어를 죽이고 태자의 동생인 공자 저구를 세우니 그
가 송 소공이다. 송 소공 원년(기원전 619년), 송 소공은 송 양공의 부인 즉 송 소공의
할머니인 왕희에게 예우를 하지 않았다. 이에 왕희는 분노하여 대씨 일족의 힘을 등에
업고 송 양공의 손자 공숙, 공손 종리와 대사마 공자 앙을 죽였다. 이들은 송 소공의
파벌이다. 송 소공 2년(기원전 618년), 초나라가 병사를 보내 정나라를 치자 정나라가
사신을 보내 노나라의 공자 수, 晉(진)나라, 송나라, 衛(위)나라, 허나라와 함께 정나라
를 구원하러 갔다. 송 소공 3년(기원전 617년), 겨울 초 목왕과 채 장후는 군사를 거느
리고 송나라를 치려했다. 송나라의 사구 화어사가 말했다. “초나라는 저희가 초나라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이 먼저 주도적으로 복종 의사를 표시했습니까? 그들이 하필
그 일 을 들어 왜 저희들을 핍박하겠습니까? 저희들이 능히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그
러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무슨 죄입니까? 이에 송 소공은 초 목왕을 맞이해 초나라 군
대를 위로 하며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초 목왕은 망저 땅으로 데려가 사냥을 했다. 송
소공은 오른쪽, 정 목공은 왼쪽 진을 맡겼다. 그러나 송 소공은 그것을 따르지 않자 초
나라에서 송 소공에게 치욕을 주었다. 송 소공 4년(기원전 616년), 송나라 군대는 장구
에서 장적을 물리쳤다. 그런데 사기에서는 이것이 송 무공 때의 일로 잘못 기록 되어
었다. 송 소공 7년(기원전 613년), 6월 계유일 송 소공은 노 문공, 陳 靈公(진 영공), 위
성공, 허나라 남작, 조 문공, 晉(진)나라의 조돈(조돈)과 신성에서 회맹했다. 그 이유는
邾(주)나라를 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송나라의 고애가 소 땅을 지키는 장수인데 송
소공은 고애를 경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애는 송 소공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
고 사양하며 노나라로 달아났다. 송 소공 8년(기원전 612년), 3월 송 소공은 사마 화우
를 보내 노나라와 회맹했다. 11월 송 소공과 陳 靈公(진 영공), 정 목공, 허 소공, 조
문공과 호 땅에서 회맹했다. 그것은 소성의 회맹의 우호를 다지고 齊(제)나라를 치기 위
해서였다. 제나라 사람이 진 영공에게 뇌물을 바치자 철군했다.
송 소공 9년(기원전 611년), 소공은 포악무도하여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소공의
아우 공자 포가 인재를 아끼고, 능력과 야심이 뛰어났다. 공자 포가 외모가 준수해 왕희
(송 양공의 부인)가 정을 통하려 했으나 공자 포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애정은 남
아 뜻을 이루지 못해도 적극 후원했다. 그녀는 화원을 통해 공자 포와 위백과 함께 송
소공을 쳤다. 그리고 송 소공은 그들에게 죽었다. 그리고 아우인 공자 포가 즉위하니 그
가 바로 송 문공이다.
제24대 문공(BC. ?∼BC. 589) 송 성공의 아들이며, 송 소공의 아우.
문공 원년(기원전 610년), 봄 晉(진)나라의 장수 筍林父(순림보). 衛(위)나라의 공달. 陳
(진)나라의 공손 령. 정나라의 석초가 송나라를 쳤다. 그 구실은 바로 송 문공이 문공이
송 소공을 살해한 죄를 묻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안 송 문공은 그것이 합법적이었음을
말하니 연합군은 철수했다. 송 문공 2년(기원전 609년), 송 무공. 송 목공. 송 대공, 송
장공. 송 환공의 후예들과 송 소공의 아들은 송 문공의 동복 아우인 사성 공자 수를 내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12월 송 문공은 공자 수와 송 소공의 아들을 죽이고 송 대공,
송장공. 송 환공의 자손과 사마 자백의 빈객들은 송 무공의 일족을 쳤고 송 무공. 송 목
공의 일족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공손사를 사성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공자 조가
죽자 악려를 사구로 봉해 민심은 안정되었다. 송 문공 4년(기원전 606년), 봄 정나라의
공자 귀생이 초나라의 지령으로 송나라를 쳤다. 송 문공은 화원 악려를 보내 막게 했다.
2월 10일 양군이 싸워 송군이 패배했다. 정 나라 군대는 화원을 포로로 잡았다. 덤으로
악려의 수급도 얻었다. 전차 460량, 포로 250명, 100명의 항복한 송군의 귀를 얻었다.
화원이 그 꼴이 난 까닭은 병사들에게 양고기 국을 줬으나 그 마부에게 돌아오는 몫이
없어 그의 원한을 산 까닭이다. 송 문공은 화원을 구하기 위해 전차 100량, 400필의
아름다운 얼룩진 털을 지닌 명마와 화원을 교환하려 했으나 화원이 감시가 소홀한 틈
을 타 도망쳐 돌아왔다. 송 문공 5ㄴ녀(기원전 605년), 송 무공, 송 목공의 자손들이 曹
(조)나라 군대와 함께 송나라를 쳤다. 가을에 송 문공이 보복으로 조나라를 포위했다.
송문공 11년(기원전 600년), 가을 송 문공은 등나라에서 상을 치르자 그 틈에 등나라를
포위했다. 송 문공 12년(기원전 599년), 등나라가 晉(진)나라에 의지하며 송나라를 따르
지 않자 6월 송 문공이 등나라를 쳤다. 송 문공 15년(기원전 597년), 초나라의 왕인 초
장왕은 송나라가 소나라를 구원하자 송나라를 쳤다. 송 문공 16년(기원전 596년), 초나
라의 사자 申舟(신주) 즉 申無畏(신무외)가 제나라로 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자 송나
라의 오랜 원수인 초나라가 미워 신주를 포박했다. 9월 초 장왕이 크게 노해 송나라를
포위했다. 송 문공 17년(기원전 595년), 초군은 송나라를 5개월간 포위했다. 송나라 도
성은 식량이 떨어져 대 위기에 봉착했다. 송 문공은 악영제를 사신으로 晉(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晉(진)나라의 군주인 晉 景公(진 공경)은 송나라를 구하려 했으나 대
신 백종의 건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송나라는 초나라에 투항했다. 5월
초 장왕이 항복을 받아들여 철군하려 했으나 신주의 아들인 申犀(신서)가 그 철군에
반대했다. 그리고 계책을 내서 초 장왕이 포진을 하며 버텼다. 이에 송 문공은 더 버
틸수 없어서 화원을 초군 진영에 밤중에 몰래 보내 초의 재상인 자반에게 사정을 전해
주고 그 자반은 초 장왕을 찾아가 보고했다. 이에 초 장왕이 화원에게 물었다. “성 안
사정은 어떠하오?” 화원이 대답했다. “인골을 땔감으로 쓰고, 각기 자녀를 교환해 먹을
지경입니다.” 초 장왕이 말했다. “자반의 말이 틀림없구먼. 아군도 실은 식량이 2일 밖
에 없소.” 그리고 화원을 믿고 포위를 풀어주었다.
송 문공 22년(기원전 589년), 8월 송 문공이 죽고 그 아들인 자하가 즉위하니 그가 바
로 송 공공이다.
제25대 공공(BC. ?∼589) 송 문공의 아들이며 송 평공의 아버지다.
공공이 즉위한 뒤 수해를 피하고자 도읍을 상구에서 상성(섬서성 화양)으로 옮겼다. 이
당시 華元(화원)이 정권을 장악했다. 공공 10년(기원전 579년), 송나라 대부 화원이 楚
(초)나라 장수 자중. 晉(진)나라의 장수인 欒書(란서)와 친했다. 그래서 진나라와 초나라
의 화해를 주도했다. 이것이 弭兵之盟(미병지맹)이다. 송 공공 13년(BC. 576년), 송 공
공이 죽고 사마 탕택이 반란을 일으켰다. 태자인 자비를 죽이고 실권자인 화원도 죽이
려 했다. 그러나 화원은 晉(진)나라로 망명하려고 하는데, 어석의 말을 듣고 힘을 모아
역공해 탕택을 죽이니 탕택의 일족은 초나라로 도망갔다. 화원은 공공의 작은 아들인
자성을 세우니 그가 송 평공이다.
제26대 평공(BC. ?∼BC. 532) 송 공공의 아들이며 송 원공의 아버지다.
공공이 죽은 뒤 화원은 우사. 어석은 좌사로 있었다. 사마인 탕택이 태자 비를 죽이고
화원도 죽이려 했으나 화원이 진나라로 달아나려고 하다가 어석이 말리자 반격을 시도
해 탕택을 죽이자 탕택의 일족이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화원이 공공의 작은 아들
인 공자 성을 세우니 그가 바로 평공이다. 평공 3년(기원전 573년). 초 공왕이 송나라
의 팽성을 쳤다. 그러자 송 평공은 좌사 어석을 그곳에 봉했다. 송 평공 4년(기원전 5
72년), 제후들과 함께 어석을 죽이고 팽성을 되찾았다.(어석이 팽성에서 반란을 일으켰
기 때문이다). 송 평공 35년(기원전 541년), 초나라 공자 圍(위)가 그 왕인 겹오를 죽이
고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楚 靈王(초 영왕)이다. 송 평공 44년(기원전 532년), 평공이
죽고 아들인 자좌가 뒤를 이어니 그가 송 원공이다.
제27대 원공(BC. ?∼BC. 517) 송 평공의 아들이며 송 경공의 아버지다.
송 원공은 원래 사인 유를 미워했다. 그래서 그를 죽일 마음을 품었는데 송 평공이 죽
자 사인 유는 송 원공이 머무는 지방에 숯불로 송 원공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송 원공 원년(기원전 531년) 2월 송 원공은 송 평공을 안장한 뒤 사인 유를 용서하여
썼다. 송 원공은 華亥(화해)를 보내 노나라, 晉(진)나라 제나라, 衛(위)나라, 정나라의 사
자로서 궐흔에서 회맹해 채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송 원공 8년(기원전 524년), 6월 邾(
주)나라의 군대가 鄅(우)나라를 쳐서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회군했다. 우나라 군주의
부인이 송나라의 대신 상술의 딸이었다. 송 원공 9년(기원전 523년) 정월, 상녕이 송
원공에게 우나라를 구원하자고 요청했다. 2월, 송 원공은 병사를 보내 邾(주)나라를 쳤
다. 그리하여 충 땅을 포위했다. 3월 충 땅을 점령해 주나라에 잡힌 우나라 포로들을
모두 석방했다. 5월 주, 郳(예)나라, 서나라 3개국 사신이 송 원공에게 입조했다. 5월
12일, 송 원공은 충 땅에서 회맹을 개최했다. 송 원공은 사람됨이 의심이 많고 사심이
가득했다. 그는 송나라의 화씨와 상씨 일족을 미워했다. 송 원공 10년(기원전 522년),
화정. 화해. 상녕이 반란을 도모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도망가서 죽느니 차라리 선수
를 치는게 좋지 않겠나?“ 화해는 병들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송나라 공자들을 유인했다.
공자들이 병문안에 참여했다. 6월 9일 화해는 공자 인, 어융, 주, 고, 공손 원, 공손 정
을 유폐시켰다. 상승. 상행은 곡창리에 가두었다. 송 원공이 그리로 가서 그들을 풀어
달라고 했으나 화해가 씹었다. 그리고 거꾸로 송 원공을 압박하려 했다. 화해는 또 태
자 관과, 그 친동생 공자 신, 공자 지를 인질로 잡았다. 송 원공은 화해의 아들 화무척,
상녕의 아들 상과, 화정의 아들 화계를 인질로 잡았다. 그러다가 힘을 기른 송 원공이
화씨 일가를 제거할 준비를 해 10월 화씨와 상씨 일가의 인질를 쳐서 죽였다. 화씨와
상씨 일족의 생존자들은 陳(진)나라로 화동은 吳(오)나라로 달아났다. 송 원공 11년(기
원전 521년), 화비수에게 아들이 3명이 있었는데, 화추,화다료, 화동이었다. 그런데 화
추와 화다료의 사이가 매우 나빠 화다료가 화추를 참소했다. 그래서 송 원공이 그 아버
지 화비수에게 알리니 화추를 추방하려 했다. 화추가 달아나려 할 때 화추의 부하 장개
가 화다료를 죽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상수와 화해를 불러 송 원공을 몰아내려 했다
이 일로 초나라의 태자 선은 정나라로 망명했다. 초나라가 화씨를 도우러 나섰다.
송 원공 12년(기원전 520년), 송 원공은 화씨일가를 쳐부수고 화씨일가를 용서 했지만
화씨일가는 더 송나라에 살 수가 없어서 초나라로 갔다. 송 원공 15년(기원전 517년),
송 원공은 노 소공이 계씨를 피한 것을 알고 노나라로 돌려 보내려다가 죽었다. 그 뒤
태자 란이 이으니 그가 바로 조나라를 멸망시킨 송 경공이다.
제28대 경공(BC. ?∼BC. 469) 송 원공의 아들. 송 공계의 종조부.
송 경공 원년(기원전 516년) 정월, 아버지 송 원공의 장례식을 치렀다. 송 경공 2년(기
원전 515년), 가을 송 경공은 대부 樂祁(악기, 일명 樂祁犁)와 晉(진)나라, 조나라, 衛
(위)나라, 邾(주)나라, 등 5개 나라와 호 땅에서 회맹했다. 다시 회맹할 때는 성주 근처
에서 수자리 사는 일에 대해 논의했다. 동시에 계손씨에게 내쫓긴 노 소공에 거취에 대
해서도 논했다. 송나라, 위나라 등은 노 소공이 노나라로 돌아가는게 이롭다고 여겨 강
력하게 의견을 밀었다. 晉(진)나라 대부 士鞅(사앙)은 계손씨의 뇌물을 먹고 노 소공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 송 경공 13년(기원전 504년) 8월, 대부 악기가 송 경공에게 말했
다. “제후들 중 저희만큼 晉(진)나라를 잘 섬기는 나라가 없습니다. 지금 晉(진)나라는
사신을 보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나라가 저희에게 한을 품은 것이 원인인 듯 합니다.
악기는 그것을 재상인 陳寅(진인)에게 말하고 진인은 송 경공에게 말했다. 송 경공이 악
기에게 말했다. “과인은 로로지 그대와 대화하면서 크게 기뻤소, 그대는 과인에게 득이
되오.” 진인이 말했다. “그의 멸망이 머지 않았습니다. 구누에게 희망을 주면서 실상은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악기는 晉(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간자 趙鞅(조앙)에게 갔
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악기는 秦(진)나라에서 받은 버드나무 방패를 조앙에게 주었다.
그런데 사신으로 온 것을 술에 취해 보고하지 않자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긴 晉 定公(진
정공)은 악기를 체포해 죽여버렸다. 송 경공 16년(기원전 501년) 봄, 송 경공은 樂大心
(악대심)을 보내 晉(진)나라와 회맹했다. 그리고 악기의 시신을 되찾았다. 악대심은 병을
핑계로 상소를 대신 보냈다. 그리고는 악기의 영구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 일로 악대
심은 경공의 미움을 사 해고되었다. 노나라의 陽虎(양호)가 송나라로 도주했으나 송나라
에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 경공 17년(기원전 500년), 송 경공의 도생 공자 地
(지)는 총애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송 경공은 상추도 총애했다. 그러나 그들이 陳(진)나
라로 달아났고, 겨울에 동복 아우 공자 신, 공자 중타, 공자 석구 또한 陳(진)나라로 달
아났다. 송 경공 18년(기원전 499년) 봄, 공자 신과 공자 중타, 공자 석구, 공자 지가
옛 소나라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가을 악대심도 해고 당한 한 때문인지 모반에 참여
하여, 송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었다. 그것이 상추를 신뢰한 원인이었다. 송 경공 26년(기
원전 491년), 송군은 소주의 군주를 포로로 잡았다. 송 경공 30년(BC. 487년) 봄, 경공
이 친히 조나라를 치러갔다. 송군이 회군하려 할 때 송나라의 장수 저사 자비가 오자 조
나라 사람들은 저사 자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송 경공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해 조나
라를 쳤다. 조나라는 晉(진)나라를 배반해 진나라가 구원을 오지 않아 조나라는 결국 망
하게 되었다. 조나라 군주 曹 伯陽(조 백양)과 사성 공손 强(강)이 잡혀 죽임을 당했다.
송 경공 31년(기원전 486), 정나라의 무자 승이 총신 허하에게 봉읍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허하는 외국에서 취할 것을 청했다. 이에 무자 승은 송나라의 옹구를 포위했다. 송
나라의 황완은 정나라 군대를 포위했다. 매일 보루를 수리하는 등 대비가 철저해 송군이
패해 돌아갔다. 2월 14일 송나라군은 정나라를 다시 쳤다가 회군했다. 여름에 송 경공이
다시 정나라를 쳤다. 송 경공 32년(기원전 485년), 송군이 다시 정나라를 쳤다. 송 경
공 48년(기원전 469년), 경공이 죽고 그 종손인 공자 계가 그 뒤를 이었다. 사마천의 사
기에는 공자 특이 태자를 죽이고 바로 즉위했다고 전해진다.
제29대 송공(BC. ?∼BC. ?) 송 원공의 증손, 公子 단진의 손자
송 경공은 아들이 없어서 동생인 공자 서진의 아들인 공손 周(주)의 두 아들 得(득)과 계
를 궁중에서 길러 후계자를 뽑으려고 했다. 송 경공(기원전 469년), 송경공이 끝내 세자
를 세우지 않고 죽자 송 경공이 총애하던 신하 大尹(대윤)이 그를 옹립했다. 반대자는
右師 皇緩(우사 황완), 大司馬 皇非我(대사마 황비아), 司徒 皇懷(사도 황회), 左師 靈不
緩(좌사 영불완), 司城 樂茷(사성 악패), 大司寇 樂朱鉏(대사구 악주서) 등 6명의 대신들
이었다. 그리하여 그 힘을 못이긴 대윤과 송공 계는 초나라로 내쫓기고, 송공 계의 형제
인 공손 특을 대신해서 세우니 그가 바로 송 후소공이다.
제30대 후소공(BC. ?∼BC. 404) 송 원공의 증손. 공자 단진의 손자. 공손 주의 아들.
경공 48년(BC.469), 경공이 끝내 태자 자리를 세우지 않고 죽자 경공이 총애하던 신하
대윤이 계를 옹립했다. 어느날 득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궁으로 들어가는 큰 문
에 동생인 계가 누워서 자고있고 자신은 한 마리 까치가 되어 계의 머리 위에 앉는 꿈
이었다. 득은 깨어나서 자신이 장차 계를 대신하여 임금이 될 징조하고 여겼다. 여섯
경이 이에 반대하여 백성들에게 형인 득을 제치고 계가 선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자 백
성들이 동조했다. 대윤도 백성들에게 이미 세워진 군주를 다시 바꾸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고 했지만 백성들이 그를 비난했다. 여섯 경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대윤을 체포하라고 하
니 마침내 대윤과 계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제31대 도공(BC. ?∼BC. 396) 송 후소공의 아들. 송 휴공의 아버지.
송 후소공 47년(기원전 404년), 송 후소공이 죽자, 그 아들인 구유가 뒤를 이으니 그가
도공이다. 도공 8년(기원전 396년), 도공이 죽고 그 아들인 전이 뒤를 이어니 그가 휴공
이다.
제32대 휴공(BC. ?∼BC. 363) 송 도공의 아들이며 송 후환공의 아버지
송 도공 8년(기원전 396년), 송 도공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공자 전이 즉위하니 그가
송 휴공이다. 송 휴공 23년(기원전 363년), 송 휴공이 죽고 그 아들인 백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마지막 송씨 군주인 송 후환공이다.
제33대 환공(BC. ?∼BC. ?) 송 휴공의 아들,
송씨 송나라의 마지막 군주. 그는 송 대공의 자손인 대씨의 우두머리 척성군의 공격을
받아 폐위되어 서민으로 강등당한다.
제34대 척성군(BC. ?∼BC. ?) 송 강왕의 형. 자성 대씨의 첫 군주.
자성 대씨의 마지막 군주는 자신을 齊(제)나라로 몰아낸 동생인 송 강왕이다.
송 환공 7년(기원전 356년) 자성 대씨이자, 司城(사성)이라는 관직을 가진 척성군은 자
성 송씨인 송 후환공을 몰아내고 송나라 국군으로 즉위했다.
송 척성군(기원전 329년), 아우인 언이 그를 몰아내고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송 강왕이다
척성군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35대 강왕(BC. ?∼BC. 286)
적성군 28년(기원전 329년), 언은 척성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스스로 공작에 올랐다.
강왕 11년(기원전 318년), 그는 왕으로 자칭했고 같은 해에 제나라를 쳐서 이기고, 남
하해서 초나라를 쳐서 이겨서 300리의 땅을 얻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위나라를 쳐서
2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소국인 등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당시에 제나라가 한창 강
성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업적이었다. 이처럼 재위 초기의 강왕은 송나라를 전
국 칠웅과 동급과 동급의 강국으로 성장시킨 명군이었다. 그러나 송 강왕은 나라가 강
성해지자 서서히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송 강왕 42년(기원전 286년), 강왕의 이러한 행패가 계속되자 제 민왕은 그
폭정을 구실로 초나라. 위나라와 연합해 송나라를 쳤다. 강왕은 패하여 예후의 관사로
피하려 하다가 제나라 병사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송나라 땅은 위나라. 초나라. 제
나라가 서로 나눠 가졌다.
수도변천
微子(미자) 啓(계) 商丘(상구) 河南省 商丘縣 하남성 상구현
共公(공공) 瑕(하) 睡陽(수양) 河南省 商丘縣 睡陽(하남성 상구현 수양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左
丘明(좌구명)의 春秋左傳(춘추좌전), 또한 馮夢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와 司
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