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 계승한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관현맹인전통예술단
- “시각장애인 악사는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종 13년의 기록이다. 우리 역사상 성군이자 현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은 장애인복지에도 관심이 많은 왕이었다. 자신도 안질을 앓고 있어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현맹인 제도를 만들어 시각장애인 악사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주며 궁중악사로 기용했다. 장애에 차별 없이 그저 백성으로 품고자 한 세종대왕의 마음이 깊게 묻어나는 이 제도는 일제치하를 거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었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창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원 전원이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전문 연주단인 그들은 지난 11월 10일 예술단 창립 10주년을 맞아 경복궁 수정전에서 ‘세종의 뜰에서 놀다’라는 주제로 기획공연을 성황리에 끝낸 바 있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맡고 있는 최동익 단장을 만났다.
Q. 만나서 반갑습니다.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A.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단장 최동익입니다. 중요한 공연 일정을 계획하는 등 예술단의 전체적인 방향을 잡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한 번 꺾였던 꽃, 우리 얼이 스민 국악문화와 연주를 되살리는 과정은 지난하고도 어려웠지만 각 기관의 지원과 단원들의 꾸준한 노력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국내 활동에 그치지 않고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등 세계로 뻗어나가며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함과 시각장애인의 뛰어난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약 150여 건의 공연을 진행했는데, 꽤나 벅찬 일정에도 불구하고 매 공연마다 설레하며 연습에 최선을 다하는 단원들을 보면서 피로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지쳤던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Q.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특징을 꼽는다면요.
A. 저를 포함한 단원 모두 ‘중증 시각장애인’이라는 부분일 거예요. 현재 단원은 9명인데 시각장애 정도 및 양상과 관계 없이 단원들 전원의 실력과 열정은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매일 8시간,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하고, 스스로의 기량을 갈고 닦는 데 최선을 다해요. “음악은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린다”고 하죠. 공연마다 박수갈채가 울리는 건 혼신을 담은 국악 연주가 감흥을 불러일으킨 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 저희가 소속된 이름도 저희 예술단의 특징이자 ‘아이덴티티(정체성)’라고 할 수 있겠죠.
Q. 우리의 역사를 계승한 명칭이죠.
A. ‘관현맹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와닿는 부분이 미비해서 ‘전통예술’을 덧붙였습니다. 직관적으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목적성을 알 수 있도록요. 예술단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각장애인들의 퀄리티 높은 공연을 통해 자연스레 장애인인식개선을 이루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 문화 및 국악에 대한 인식을 함양하는 것이죠. 그래서 학교 초청 공연 등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행사에 더욱 신경을 기울입니다. 국악 장르도 그렇고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아직 부족한 면이 많아요. 낯설기 때문이죠. 이럴수록 자주 보고 즐겨야 가까워진다고 생각해요.
Q. 단원을 모집하거나 양성하는 과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A. 단원 모집은 공개채용을 통해 상시 진행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전통음악아카데미나 국악캠프 등을 통해 국악에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을 예비 단원으로 눈여겨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과 더불어 시각장애 국악인을 양성 및 지원할 목적으로 추진한 사업이죠. 시각장애 학생은 국악에 관심을 가졌더라도 시각장애인을 지도해본 경험 있는 강사, 점자 악보 수급 등 배울 여건이 부족해 부득이 흥미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점이 안타까워 전통음악아카데미와 국악캠프를 기획하게 됐어요. 심화반을 통해 입시를 준비해 목표로 한 학과에 합격하고,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예비․정식 단원으로 입단까지 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대견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단장으로서 이 친구들이 더 많은 무대에 서 볼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어요.
Q. 전통음악 분야는 가르침을 받는 과정이 엄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요.
A.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하루 대부분을 함께하는 단원들, 그리고 지도 선생님들인데, 딱딱한 관계로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 리 없죠. 단원들끼리는 같은 시각장애를 갖고 또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교류하는 분위기가 큽니다. 둘이나 셋씩 합주 무대를 준비할 때 보면 서로 투덕이며 잘 챙겨주더라고요. 지도 선생님들은 학생의 성장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데, 예를 들면 판소리를 배우는 학생에게 연기를 지도할 때가 그랬어요. 판소리는 창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 등을 통해 풀어내는 예술인데, 시각장애인에게는 그 부분이 어려울 수밖에 없죠. 그래도 잘 따라와줘서 제11회 대한민국 서봉 판소리 민요대제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저희 단원 중 김지연 친구의 사례죠.
Q. 퓨전 국악의 길도 모색하는 것 같습니다.
A. 국악을 좀 더 친근하게 표현해보려는 시도입니다. 학교나 지역 복지관 등에서 공연할 때 정통 국악만을 선보이면 관객들 입장에서는 낯설음과 난해함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좀 더 대중적인 동요나 민요, 혹은 가요 등을 국악 버전으로 연주하거나 피아노와 함께 공연함으로써 장벽을 허물곤 합니다. 이준호 작곡가의 생황협주곡 <풍향>을 생황과 피아노 이중주로 편곡했던 일화가 좋은 예시겠네요. 저희 단원들이 재주가 많아서 국악만 잘하진 않거든요. 또 우리 전통의 소리는 자연적인 맛이 있는데, 현대인의 귀에는 살짝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런 부분을 보완한다는 측면도 있죠.
Q. 가장 인상적인 공연이 있다면요.
A. 역시 2014년과 2019년의 카네기홀 공연이 기억에 남네요. 보통 기획사와 함께 움직이지만 그 공연들은 저희가 주도적으로 기획한 행사라 더욱 그런 것 같아요. 한․캐나다 수교 50주년 기념 캐나다공연, 주한이스라엘대사관 초청공연 등 국가적 행사로 쌓인 경험과 그를 통해 맺은 인연이 관현맹인전통예술단만의 독자적인 공연으로 이어졌고, 능력 있는 실무진 덕분에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어요. 한편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던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비대면 공연이 늘면서 새롭게 모색한 돌파구죠. 연주 영상만 올리는 건 시각적 자극이 부족하기에 대중적인 콘텐츠로의 한계가 있어요. 그 대안으로 <얼음연못>, <그린슬리브즈 변주곡> 등 경관 좋은 자연과 국악 연주가 어우러진 11편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어요. 예산 등의 문제로 우려를 표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비대면 문화가 정착된 오늘에서는 시각장애 예술인들의 새로운 공연 모델이자 콘텐츠 유형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걱정보다는 격려와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Q. 앞으로의 방향성, 바라는 목표가 궁금합니다.
A.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고 이어가는 예술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은 장애인을,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자 한 시선입니다. 그 먼 옛날에도 시각장애를 장애가 아닌 가능성으로 보았던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되살려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건, 그만큼 관현맹인의 가치가 높다는 방증일 거예요. 이런 정신과 가치가 600년 후까지 이어지도록 관현맹인의 자리를 더욱 공고하게 다지고 싶습니다. 우리 국악문화를 세계에 알릴 원동력인 콘텐츠 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꾸준한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신혜령 기자
* 본 원고는 2월 <손끝으로 읽는 국정> 172호에 쓸 목적으로 작성된 인터뷰 기사 초안입니다. 가필첨삭을 거치기 전의 원고라 실제 <손끝으로 읽는 국정> 172호에 실린 내용과는 조사, 문맥 등 다소의 차이가 있습니다.
- 아래 기사 원고에서 소개한 뮤직 비디오 링크를 첨부합니다. 제목은 <얼음연못>입니다.
https://youtu.be/JVyOqnrpoN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