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묻지마 폭행으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는 모습을 종종 본다. 오래된 아픈 상처와 나쁜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품과 성격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성품과 성격이 거룩하고 온유함으로 변화되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과거부터 시작된 나쁜 영향의 아픈 상처가 계속 내재하거나 잠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원망이 지워지지 않으면 그 성품은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잠재된 아픈 상처와 나쁜 기억 속에 계속 어두운 인생으로 맴돌게 된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하나님의 백성들은 애굽이란 거대한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유가 없었다. 삶의 의욕이 없었다.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고 그저 동물처럼 시키는 일만 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을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끌어내 자유를 주고 새로운 인생의 활력을 주셨다. 고통과 아픔의 상처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가나안을 앞두고 그들의 행동은 육신을 위해 먹고 마심의 부족함으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다.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원망’ rb'D; (1696 다바르 CW.VPIMZS rBed"y]w") 말하다. 선언하다. 위협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와 소망과 약속이 있는 은혜와 능력이다. 그 말씀에 감사하므로 좇아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원망으로 분명하게 선언하는 위협적 말뿐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아주 강하게 대항하겠다는 뜻이다. 사람은 평안함이 넘치면 작은 일에도 원망이 먼저 앞선다. 숨겨진 내면의 아픔과 고통의 소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범사에 감사함이 사라지고 원망에 의한 분노가 쉽게 나타난다. 원망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다. 상대를 위협하는 무서운 선언이다. 자기의 고집을 내세워 상대를 위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다.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원망하지 말라 하신다.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원망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불평을 품어 미워하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원망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기에 입술로 소리 내어 원망하지 않음을 선언해야 한다. 원망은 구원에서 벗어나 멸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원망에서 감사로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삶을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믿음의 본질은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하지 않으면 잘못 형성된 사고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자기중심으로 받아들인다. 자기중심의 삶은 감사보다 원망이 앞서게 한다. 만족보다 부족함을 더 많이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생명력이 있다. 이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며 원망보다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겠다.
민 21:5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광야’ rB;d]mi (4057 미드바르 P.D.NMS rB;=d]MiB') 황무지. 사막.
* rb'D; (1696 다바르) 말하다. 선포하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은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곳이며, 선포되는 곳이다. 세미한 음성으로 백성을 만나고 깊은 교제를 나눈다. 사람들은 광야를 아무것도 얻지못하는 황무지(거칠고 쓸모없는 땅)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축복의 땅 가나안을 보게 한다. 광야는 물이 없는 사막이다. 더러운 귀신이 물 없는 곳에서 쉬기를 원한다(마 12:43). 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의미한다.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 물이 없으면 더러운 귀신이 우리의 삶을 점령하는 것은 당연하다. 광야에 사는 우리는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원망의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창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난 곳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샘물 곁이다. 아무리 삭막하고 고통스러운 광야일지라도 그곳에 성령의 충만한 물이 솟는다면 축복의 땅이 된다. 하나님이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심은 새로운 축복과 영적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육신의 먹을 식물과 마실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고 원망한다. 은혜가 없으면 더러운 원망의 귀신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은 결과이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같은 현실과 상황을 볼지라도 부정적으로 보면 부정적 인생이 되고, 긍정으로 생각하면 긍정의 인생이 된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의심’이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 부정의 사람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포기한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은 부정의 생각과 태도를 정말 싫어하신다. 우리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여도 하나님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감사로 끝나게 하신다.
민 21:5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실어하노라’ $Wq (6973 쿠츠 VQAZFS hx;q;)
몹시 싫어하다. 강한 혐오감을 가지다.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 ‘만나’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처음과 달리 지금의 만나를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긴다. 몹시 싫어할 뿐 아니라 강한 혐오감을 가진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육신의 먹고 마심의 즐거움에 취하였기 때문이다. 오로지 먹고 마심의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이루었다. 성령과 말씀의 은혜로 기쁘고 즐거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은혜를 하찮게 생각하고 오직 육신의 먹고 마심의 부족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영혼의 구원은 날마다 양식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다.
신 8:3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육신의 먹고 마심의 문제보다 말씀으로 영혼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그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바라신다. 광야의 생활은 구원의 여정이다. 그 여정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말씀을 몹시 싫어하고, 말씀에 대한 강한 혐오심을 갖는다면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성령 충만은 말씀으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양식을 풍부히 먹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찬양하였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구원하여 주심, 믿음을 성장하게 하심, 영혼의 잘됨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원망보다 감사가 넘쳐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믿음이기를 축원한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