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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후고 폰 호프만스탈
초연 1916년 10월 4일 빈 국립극장(프란츠 샬크 지휘) - 국내 초연 2007년 10월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배경 고대 낙소스 섬과 근대의 빈
<2013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 121분 / 한글자막>
런던 필하모니 연주 /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지휘 / 카타리나 토마 연출
아리아드네........................크레타의 공주. 테세우스의 아내.....소일레 이소코스키(소프라노)
바쿠스...............................................................................세르게이 스코로코도프(테너)
나이아드, 드리아드. 에코.....님프
체르비네타........................서막에 등장하는 여가수................로라 클레이콤(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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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작곡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의 최신 프로덕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는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에 이어서 R. 슈트라우스가 호프만슈탈과 함께 완성한 세 번째 오페라다. 원래 몰리에르의 유명한 희곡 '서민귀족'의 극중극으로 계획되었지만, 이후 대본과 음악을 대폭 수정하여 독립된 오페라로 발표되었다. 단막 오페라지만, 서두에 거의 본편에 육박하는 규모의 서막이 덧붙여진 기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런 독특한 구성을 통해서 원래 의도였던 극중극의 특징이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장미의 기사>를 통해 모차르트를 연상케 하는 간결한 복고풍 극음악을 선보였던 슈트라우스의 변신이 여기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36명 규모의 소규모 악단을 활용한 단순명료한 반주가 이런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본 실황은 2013년 여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던 카타리나 토마의 프로덕션을 담았다. 토마는 극의 배경을 2차 대전 중의 한 영국 귀족의 저택으로 재치 있게 옮겨놓았다. 젊은 거장 블라디미르 유롭스키의 명쾌한 지휘와 이 시대의 정상급 슈트라우스 여가수인 소일레 이소코스키를 중심으로 한 탄탄한 캐스팅도 나무랄 곳 없다.
오페라의 초연은 1916년 10월 4일 프란츠 샬크의 지휘로 빈 슈타츠오퍼에서 이루어졌다. 오페라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귀족의 저택, 저녁에 있을 연회준비로 매우 부산하다. 작곡가도 연회를 위해 위촉받은 오페라 세리아인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마무리하기 위해 정신이 없다. 그는 자신의 작품 뒤에 경박한 희극이 이어진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해 있었지만, 희극의 주인공인 아름다운 체르비네타의 매력에 서서히 끌린다. 갑자기 집사가 나타나 오페라 세리아와 희극을 뭉뚱그려서 하나로 만들라는 귀족의 명령을 전한다. 날벼락과 같은 소식에 모두 놀라지만, 체르비네타의 주도로 작곡가는 작품을 개작한다. 그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극중극으로 이어진다. 테세우스의 버림을 받은 아리아드네는 외딴섬 낙소스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낸다. 체르비네타와 동료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라며 그녀를 위로한다. 이윽고 젊은 신 바쿠스가 이 섬에 도착한다. 아리아드네가 바쿠스와 맺어지면서 막이 내린다.
본 프로덕션에서 조역인 브리겔라를 노래한 테너 앤드류 스텐슨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가정으로 입양되었던 불우한 과거를 갖고 있다. 그는 2011년 리처드 터커 재단의 장학금 수혜자가 되었고, 같은 해에 시애틀 오페라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의 멤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젊은 성악도 육성 프로그램을 거쳐서, 2012-13 시즌에 <파르지팔> 중의 단역으로 처음 메트의 무대에 섰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 공연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로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도 데뷔하였다.
=== 작품해설 === <2015년 2월 13일 네이버캐스트 / 이용숙 글>
명곡 명연주
슈트라우스,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모차르트 풍의 오페라 세리아, 후기 낭만주의, 20세기 음악어법이 혼재
1912년 10월 25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하우스에서 첫 번째 버전이 초연
그리스 신화 속에는 명예와 성취를 위해 목숨을 거는 남자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들의 조력자 가운데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여자는 남자의 의지력과 도전정신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외모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통치권을 되돌려 줄 황금 양피를 이아손에게 가져다준 메데이아가 그랬고,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뒤 미로를 다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에게 명주실 타래를 쥐여준 아리아드네가 그랬다.
그러나 영웅들은 곧 고마움을 잊었다. 이아손은 정치적 계산에서 메데이아를 버리고 새 여자와 결혼하려 했고,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에 낙소스 섬에 들렀다가 아리아드네를 그곳에 버려두고 떠났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치명적인 복수를 하고 도망갔지만, 아리아드네는 버림받은 채 탄식하고 있다가 오히려 행운을 얻었다. 포도주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가 그 섬에서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에게 절망과 비탄의 섬이었던 낙소스는 바쿠스의 출현으로 열락의 섬이 되었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살로메]와 [엘렉트라] 같은 파격적인 실험 오페라와 [장미의 기사] 같은 우아하고 유머 깃든 복고풍 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친 뒤, 신화와 현실을 극 속에서 혼합한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1912년에 슈투트가르트 궁정극장에서 초연했다. 오페라 [엘렉트라]와 [장미의 기사]로 이미 호흡을 맞춘 대본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1876-1929)과의 공동작업이었다.
원래 슈트라우스는 [아리아드네]를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30분짜리 소품으로 기획했고, 그보다 먼저 정식 오페라로 [그림자 없는 여인(Die Frau ohne Schatten)]을 작곡하려 했다. 그러나 호프만스탈은 아직 [그림자 없는 여인] 대본을 작업할 준비가 안 되었고 [아리아드네]라면 바로 작업할 수 있다고 슈트라우스에게 알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언어와 춤과 음악이 결합했던 ‘바로크 시대 종합예술작품’을 20세기에 다시 재현해보기로 했고, 그런 취지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수많은 바로크 시대 오페라 작품들처럼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가져온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였다.
호프만스탈은 몰리에르의 희곡 [평민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1670년)을 토대로 이 오페라의 독일어 대본을 썼다. 몰리에르의 작품에서는 교양 없고 돈 많은 부르주아 주르댕이 귀족 사회에 속하고 싶은 열망으로 예술을 배우려 애쓰는 과정이 희극적으로 전개된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는 모차르트 시대인 18세기 말이 배경이며, 역시 어느 부자의 저택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이 오페라의 개정판은 1916년 빈 왕립오페라극장에서 선보였는데, 오늘날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는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는 거의 모두 이 개정판이다.
감성적 비극을 뛰어넘는 이성적 희극의 승리
이 오페라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어느 부자의 저택에서 작곡가(Der Komponist. 소프라노 또는 메조소프라노)와 가수들이 오페라 [아리아드네]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집사(Der Haushofmeister. 노래하지 않고 말만 하는 대사역)가 나타나 집주인의 뜻을 작곡가의 스승이자 음악감독인 음악선생(Ein Musiklehrer. 바리톤)에게 전한다. 비극 오페라 때문에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침울해져서는 안 되니, 공연이 끝나자마자 뒤이어 이탈리아 전통 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공연하라는 지시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젊은 작곡가는 숭고하고 진지한 자기 작품이 우스꽝스러워진다며 길길이 뛴다. 공연을 당장 집어치우려는 작곡가에게 그의 스승이며 그를 이 집에 데려온 음악선생은 '이 공연으로 받는 돈이 작곡가에게는 반 년 간의 생계비'임을 일깨우며 참으라고 말린다.
그러나 집사가 거들먹거리며 다시 나타나, 집주인이 마음을 또 바꾸었다고 알린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제시간에 시작될 수 있도록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아예 아리아드네의 비극과 코미디를 한 무대에서 동시에 공연하라는 것. 젊은 작곡가는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돈으로 예술가를 사고 부리는 부자 집주인의 무지한 횡포에 분노하며, 이제야말로 공연을 그만두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곡가는 웃기는 즉흥극을 공연하려고 코메디아 델라르테 단원들과 함께 이 집에 온 희극 여배우 체르비네타(Zerbinetta. 소프라노)의 상냥하고 매혹적인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무엇에 홀린 듯 집주인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체르비네타에게 홀렸던 작곡가가 제정신이 들어 다시 저항하려는 순간, 벌써 손님들은 모여들고 오페라는 막이 오른다.
본극은 젊은 작곡가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공연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구해주었던 연인 테세우스에게서 버림받고 황무지 외딴 섬에서 눈물로 날을 지새는 그리스 신화 속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가 등장한다. 아리아드네는 프롤로그 부분에서는 ‘프리마돈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유명 소프라노 가수다. 님프인 나야드(Najade. 소프라노), 드리야드(Dryade. 알토 또는 메조소프라노), 에코(Echo. 소프라노)가 그녀를 위로하고 있다.
그런데 아리아드네의 절망과 탄식이 온 섬에 울려 퍼지는 진지하고 비극적인 장면에서 느닷없이 희극배우들이 등장해 오페라 내용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즉흥극을 펼친다.
이렇게 해서 젊은 작곡가의 본래 작곡 취지는 실종되고, 첫사랑에 실패한 고귀한 공주 아리아드네와 세상 물정에 밝은 연애의 고수(高手) 체르비네타가 한 무대에서 대결하게 된다. 극중 희극에서 네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구애를 받는 발랄하고 요염한 체르비네타는 아리아드네를 위로하며 '남자들한테 실망하는 건 나도 많이 해봤지만, 대체 뭐가 문제야? 새 남자를 찾아 인생을 즐기면 되지. 어느 남자에게서나 내가 빠져들 신성(神性)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니까'라는 나름의 철학을 아리아 ‘고귀하신 공주님’으로 강의하는데, ‘사랑은 생애에 단 한 번’이라고 믿고 절망에 빠진 아리아드네에게는 이런 철학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희극배우들이 체르비네타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에도 아리아드네는 깊은 배신감과 절망에 빠져 오로지 죽음만을 원한다. 그때 키르케의 마법에 빠질 뻔했던 바쿠스 신(Bacchus. 테너)이 낙소스 섬에 찾아오고, 그를 죽음의 전령이라고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스스로 바쿠스의 품에 자신을 맡긴다. 둘이 키스하는 순간 바쿠스 신은 미성숙한 상태를 벗어나 완벽한 신성(神性)에 다다르고 아리아드네는 새로운 삶의 희열을 깨닫는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가 황홀경에 빠져 이중창을 노래하며 신들의 세계로 날아갈 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체르비네타는 "새로운 신이 나타나면 우리는 넋을 잃고 자신을 맡기는 법이지"라며 이들의 열정을 조소한다.
오페라 세리아, 후기 낭만주의, 현대음악의 혼합
슈투트가르트에서 [아리아드네]가 초연되었을 때의 공연 형태는 1부 [평민귀족], 2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로, 1부는 연극에 노래와 발레를 부분적으로 가미한 형식이었고, 2부는 ‘평민귀족’인 부자 주르댕의 집에서 공연되는 것으로 설정된 본격 오페라였다. 그러나 슈트라우스가 애당초 생각했던 ‘30분’은 이런 다양한 형식의 복합으로 인해 엄청나게 길어졌고, 관객은 연극도 오페라도 아닌 이 독특한 형식의 작품에 그리 열광하지 않았다. 그러자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은 1부의 ‘평민귀족’을 아예 빼버리고 ‘프롤로그’라는 제목으로 성악의 비중이 커진 다른 극을 만들어 넣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다.
이 오페라에서 슈트라우스는 독특한 음악적 복합성을 보여준다. 1911년에 초연한 [장미의 기사]의 성공에 용기를 얻어 전작과 마찬가지로 18세기 모차르트 풍의 오페라 세리아 스타일을 사용했고, 여기에 후기 낭만주의 음악과 20세기 음악어법을 혼합해 다시 한 번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초연한 슈투트가르트 극장 오케스트라 피트가 작아 36명이 연주하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바로크 오페라를 재현한다는 원래의 취지에 합당한 조건이었다.
체르비네타가 아리아드네를 향해 부르는 아리아 ‘고귀하신 공주님’은 고난도 콜로라투라 아리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곡으로 손꼽히고 있어 온 세상의 탁월한 소프라노 가수들에게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에르나 베르거, 리타 슈트라이히, 에디타 그루베로바, 나탈리 드세 등이 최고의 체르비네타로 불린다. 죽음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순수한 나라’를 열창하는 아리아드네 역도 결코 수월하지 않아, 로테 레만,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군둘라 야노비츠, 제시 노먼 등 걸출한 소프라노 가수들이 이 역으로 명성을 날렸다.
호프만스탈이 이 오페라에서 보여준 주제는 ‘대조적인 두 인생관의 혼합과 희극의 승리’였다. 작곡가와 아리아드네, 그리고 님프들이 속한 아리아드네 진영은 비극을 대표하며,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인 알레키노, 스카라무초, 트루팔디노, 브리겔라와 함께 구성된 체르비네타 진영은 희극을 대표한다.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는 16세기에 베네치아에서 탄생한 연극 형식으로, 확고한 대본이 갖춰지지 않은 채 전체적인 플롯을 요약해놓은 정도의 대본에 따라 극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배우들은 공연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대화를 만들어내며 연기했다.
추천음반
[CD] 제시 노먼, 에디타 그루베로바, 율리아 바라디 등, 쿠르트 마주어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988년 녹음
[DVD] 르네 플레밍, 제인 아치볼드, 소피 코쉬 등,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연주, 필립 아를로 연출, 2012년 젬퍼오퍼 실황
[DVD] 에밀리 매기, 엘레나 모슈크, 토마스 프랑크, 요나스 카우프만 등, 다니엘 하딩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스벤 에릭 베히톨프 연출, 2012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한글자막)
[DVD] 데보라 보이트, 나탈리 드세, 수자네 멘처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엘리야 모쉰스키 연출, 2007년 메트로폴리탄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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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2015년 12월 23일 네이버캐스트 / 조선일보 기자 김성현 글> 문학과 클래식 희곡 <평민 귀족>과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제 발등을 찍은 음악가, 무대에서 피를 토한 극작가 스스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에 흔히 ‘제 발등을 제가 찍는다’고 한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제 발등을 찍어서 사망한 음악가가 있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가였던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87)였다. 피렌체 출신 만능 엔터테이너, 륄리 륄리는 1632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났다. “이탈리아어를 계속 쓰고 싶으니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소년을 데려와달라”라는 오를레앙 공작(公) 가스통의 장녀인 마리 도를레앙(Anne Marie d'Orléans, 1627~1693)의 간청이 없었더라면, 륄리는 평생 피렌체에 남을 뻔했다. 피렌체의 마을 축제에서 어릿광대 복장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14세의 소년 륄리는 마리 도를레앙의 명으로 파견된 프랑스 궁정 기사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고 한다. 앙리 4세(Henri IV, 1553~1610)의 손녀였던 마리 도를레앙은 당시 유럽 왕정 최고의 상속녀였다. 음악과 춤에 재능이 많았던 이 소년은 파리로 건너온 뒤 ‘개천에서 용이 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엔 시종이었지만 바이올리니스트와 기타 연주자, 무동(舞童)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다. 루이 14세의 절대적 신뢰를 받다 1653년 당시 15세였던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밤의 발레]라는 작품에서 태양의 신 아폴로로 출연해 춤을 춘 것을 계기로 륄리는 왕실 작곡가로 발탁됐다. 륄리는 이 발레의 공동 작곡가로 추정된다. 1661년 륄리는 왕실 음악 교사와 총감독으로 임명됐다. 같은 해 루이 14세는 재상이었던 마자랭 추기경의 사망을 계기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프랑스 음악학자 롤랑 마뉘엘(Alexis Roland-Manuel, 1891~1966) 의 표현처럼 “루이 14세가 곧 국가라면, 륄리는 음악 자체”였던 태양왕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륄리의 서면 허가 없이 음악 작품 전체를 공연하는 행위에는 1만 리브르의 벌금을 물리고 무대와 집기를 압수한다”라는 왕명을 내릴 만큼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 륄리는 사실상의 독점권을 이용해 1673년부터 오페라를 쏟아냈다. 독창이 중요한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중창과 춤의 비중이 두드러진 프랑스 오페라 양식이 확립된 것도 이 즈음이다. 하지만 1680년대에 이르면 륄리에 대한 국왕의 신뢰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였다. 루이 14세가 서른을 넘어 무용을 그만두면서 왕실에서 발레가 위축된 것도 이유로 꼽힌다. 혹자는 륄리의 방탕한 애정 행각에 루이 14세가 넌더리를 냈다고도 한다. 제 발등을 찍어 부른 죽음 결국 1687년 루이 14세가 중병에서 쾌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테 데움(Te Deum)]이 륄리의 생명을 재촉했다. 륄리는 가수와 음악가 150명을 고용해 자비로 보수를 지급할 만큼 공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륄리는 당시 지휘 관습대로 리허설 도중에 긴 막대기를 바닥에 내리치면서 박자를 맞추다가, 그만 자기 발끝을 내리찍고 말았다. 괴저(壞疽)가 온몸으로 퍼질 것을 우려한 의료진은 발가락 절단을 권유했다. 하지만 륄리는 “그러면 춤을 출 수 없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그는 뇌수 감염으로 숨졌다. 귀족이 되고 싶은 평민, 평민 귀족 1660년부터 10여 년간 륄리와 호흡을 맞춰 10여 편의 작품을 함께 무대에 올렸던 극작가가 몰리에르(Jean Baptiste Moliere, 1622~73)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희극과 발레가 결합된 ‘코미디 발레’라는 양식이 유행했다. 사실상 이 양식을 창안한 최고의 콤비가 몰리에르와 륄리였다. 이 가운데 1670년 10월 14일 륄리와 몰리에르의 합작으로 샹보르 성(Château de Chambord)에서 초연된 작품이 [평민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이다. [평민 귀족] 초연 당시 몰리에르는 주인공 주르댕 역을 연기했다. 작곡을 맡은 륄리도 작품 말미에 이슬람 율법 학자로 출연해 춤을 췄다. [평민 귀족]은 제목부터 단단히 골치를 안긴다. 원제인 ‘부르주아’는 평민, ‘장티옴(gentilhomme)’은 귀족을 뜻한다. 이 때문에 작품은 흔히 ‘평민 귀족’이나 ‘서민 귀족’으로 번역한다. 귀족이 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평민 주르댕에 대한 풍자적 의미가 담긴 제목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으로 봉건적인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산업 혁명 이후 상공업자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부르주아’라는 단어에도 일종의 ‘신분 상승’이 일어났다. 이전까지 귀족보다 낮은 평민이라는 의미로 쓰이던 이 말이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와 대비되는 자산가(資産家)라는 의미로 격상된 것이다. 이전 지배층이 사라지자 신흥 부르주아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해석해도 좋았다. 프랑스판 『양반전』 작품의 주인공인 부유한 상인 주르댕의 평생소원은 신분 상승이다.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귀족의 옷차림을 고집해서 하녀의 비웃음을 사지만 귀족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라 한다. 재단사의 조수가 자신을 ‘귀족’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듬뿍 팁을 주고, 자신을 동등한 친구로 대접해주는 척하는 도랑트 백작에게는 아낌없이 거금을 빌려준다. 반면 자신의 딸 뤼실과 결혼하고자 찾아온 딸의 연인 클레옹트는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일언지하에 딱지를 놓는다. 이 때문에 클레옹트가 자신을 터키의 왕자라고 속이고 뤼실과 결혼에 성공한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주르댕은 끝까지 속은 줄도 모른 채 터키 귀족 ‘마마무시(Mamamouchi)’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좋아한다. ‘마마무시’는 ‘아무런 쓸모없는’이라는 아랍어를 몰리에르가 변형시켜 만든 조어(助語)다. 주르댕의 속물근성과 허영심이야말로 이 작품에 웃음을 불어넣는 동력이다. 프랑스 판 『양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했다. 주르댕의 ‘귀족 놀이’에 극적 장치로 쓰이는 것이 음악과 무용, 검술과 철학이다. 주르댕은 귀족들이 지니고 있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 과목 별로 과외 선생을 모시고 속성 과외를 받는다. 난생처음으로 수사학과 문법을 배운 주르댕이 “맙소사! 40년 동안 내가 한 말이 산문(散文)인지도 몰랐다니”라고 한탄하는 대사는 당시 최고의 유행어였다. 이러한 작품 설정은 지식, 교양, 취미, 감성과 같은 문화 자본(capatal culturel)이 사회적 계층이나 교육 수준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 갈파했던 20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의 분석과도 닮아 있었다. “음악 취향만큼 한 사람의 ‘계급’을 분명하게 확정해주고 틀림없이 한 사람을 분류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라는 부르디외의 말은 흡사 몰리에르의 희곡을 사회학적으로 풀이한 것만 같았다. 륄리와 몰리에르의 결별과 몰리에르의 죽음 이후 루이 14세가 륄리에게 공연 독점권을 하사하면서 불거진 갈등으로 몰리에르와 륄리는 결국 결별했다. 몰리에르는 작곡가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를 새로운 파트너로 맞아서 1673년 [상상병 환자(Le Malade imaginaire)]를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몰리에르는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네 번째 공연 도중 무대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뒤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륄리와 몰리에르의 결별과 몰리에르의 사망 이후 프랑스의 연극과 음악, 무용도 서서히 분화의 길을 걸었다. 몰리에르의 연극은 대체로 륄리의 음악 없이 공연되고, 륄리의 음악도 무대 상연용이 아니라 별도의 관현악곡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20세기에 이르러 연극과 음악의 통합을 다시 시도했던 독일의 콤비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와 대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이었다.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의 [평민 귀족] 오페라 [엘렉트라(Electra)]와 [장미의 기사]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들이 후속작으로 고른 작품이 몰리에르의 『평민 귀족』이었다. 이들은 원작에서 터키 풍의 발레로 끝나는 5막을 걷어내는 대신, 극중극(劇中劇) 형식으로 새로운 오페라를 추가하기로 했다. 호프만슈탈은 『평민 귀족』을 각색했고, 슈트라우스는 극 부수 음악을 작곡했다. 이들은 낙소스 섬에서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았던 여인 아리아드네의 후일담을 단막 오페라의 소재로 골랐다. ‘20세기의 륄리와 몰리에르’와도 같았던 이들의 야심 찬 구상에는 허점이 있었다. 연극과 오페라를 한 무대에 올릴 경우, 공연 시간이 5~6시간으로 턱없이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연극 극단과 오페라 성악가, 오케스트라까지 지나치게 거대한 공연 규모도 단점이었다. 191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궁정 극장에서 슈트라우스의 지휘와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로 초연됐지만, 관객들의 불평만 사고 말았다. 당초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목을 빼고 기다렸던 관객들은 1막이 끝나자 야유를 퍼부었다. 개정판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참담한 실패를 맛본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은 전면 개작에 착수했다. 결국 이들은 몰리에르의 원작을 빼는 대신, 오페라 앞에 짧은 프롤로그를 새롭게 써넣기로 했다. 1916년 빈 오페라극장에서 다시 공연된 개정판이 지금도 주로 공연되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다. 당초 몰리에르의 『평민 귀족』을 위해 슈트라우스가 작곡했던 극 부수 음악은 륄리의 작품처럼 별도의 관현악 모음곡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전면 개작을 통해 다시 두 작품으로 분리된 셈이었다. 당초 연극과 음악의 통합을 꿈꿨던 이들의 예술적 야심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의 ‘전술상 후퇴’에도 소득은 적지 않았다.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 희극과 비극 등 지극히 상반된 성격이 공존하는 드라마의 본질에 대해 되묻는 기회가 됐던 것이다. 이 작품의 서막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의 막이 오르면, 빈 최고 부호의 저택에서 젊은 작곡가가 정극(正劇)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무대 뒤의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적인 희가극도 준비 중이다. 당초 두 공연을 하룻밤에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불꽃놀이를 거행하기 위해 공연에 배정된 시간이 줄어들자 오페라와 희가극을 한꺼번에 공연하라는 부호의 명령이 떨어진다. 한 작품이 된 오페라와 희가극 이때부터 무대 뒤편은 뒤죽박죽이 된다. 젊은 작곡가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오페라를 고칠 수 없다고 버텼지만, 그의 스승인 음악 교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마지못해 수정에 나선다. 이 작곡가는 1912년 초연 실패 이후 개정판을 써야 했던 슈트라우스 자신의 초상이기도 했다. 결국 비극적인 오페라와 희가극은 한 작품으로 합쳐진다. 서막에 이어서 공연되는 극 중 오페라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다.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 아리아드네와 장난기 많은 희극 여배우인 체르비네타도 이 오페라에서 만나게 된다. 실제로 오페라의 여주인공 아리아드네는 서정적인 리릭 소프라노, 체르비네타는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맡는 경우가 많다. 이 오페라에서 부르는 아리아드네와 체르비네타의 아리아마저 지극히 대조적이다. 모든 것이 정결한 나라가 있지. 그곳의 이름은 저승. 여기는 모든 것이 순수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기만 하지.” 아리아드네의 아리아 [모든 것이 정결한 나라가 있다] 남자들이란 정절을 지키지 않아요! 이 괴물들에겐 도대체 끝이 없어요! 짧은 밤과 한나절, 한줄기 바람, 흘긋거리는 눈빛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은 바뀐다고요.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이 잔인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변심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나요?” 체르비네타의 아리아 [위대한 왕녀님] 결국 술의 신 바쿠스가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와 입 맞추면서 오페라는 해피엔드로 끝난다. 이전에도 극 중 극 형식을 지닌 작품은 적지 않았지만, 드라마의 본질을 주제로 삼은 오페라는 사실상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처음이었다.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뒤엉킨 이 오페라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희극과 비극,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에 예술의 우열은 존재하는 것일까. 원작자 몰리에르라면 너털웃음을 지으며 예의 이렇게 답했을 것만 같다. “모든 법칙을 넘어서는 위대한 법칙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네이버 지식백과] 희곡 『평민 귀족』과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 제 발등을 찍은 음악가, 무대에서 피를 토한 극작가 (문학과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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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16년 개정판에 따른 공연으로, 초연 당시의 연극적인 요소들은 오페라로 다 흡수된 버전입니다.
<불멸의 오페라 3 / 박종호> ★★★
토마의 창의적인 연출이 빛나는 프로덕션이다. 배경을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저택으로 만들고 본편 오페라의 무대는 아전 병원으로 설정했다. 전쟁 중에 병원에 버려진 아리아드네를 부상으로 후송된 공군 조종사 바쿠스가 구해준다. 이소코스키(아리아드네)의 우아함도 좋고 클레이콤의 재기 넘치는 체르비네타 역도 훌륭하다. 모든 성공에는 런던 필을 이끌면서 기품 넘치는 슈트라우스 사운드를 완성해 내는, 대가에 가까운 유롭스키의 솜씨가 있다. 장대한 피날레의 연주는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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