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 senior] ‘나이=나의 이야기’로 바꿔주는 시니어의 노트 한 권 가방 속의 노트
꿈·여행·사랑. 혈관의 아드레날린을 펄떡펄떡 뛰게 만드는 세 가지 단어다. 이 단어를 듣고도 무덤덤하다면 그는 이미 늙었다. 아무리 나이가 젊다고 해도 그렇다.
열정이 있는 사람을 분별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가방이다. 며칠 전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교에서 복도를 지나다 한 여학생과 마주쳤다. 그녀는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소지품이 와르르 쏟아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물건 줍는 것을 도와주다 색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연필로 쓰고 지우다가 몇 번이고 고쳐 쓴 노래 가사와 곡이었다. 치열한 내적 전투의 생생한 흔적이었다. 그녀는 실용음악과 학생이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작품인 듯 당황해 했다. 인사와 함께 총총히 사라지는 그 학생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흐뭇했다. 그녀는 언제일지 모르는 전성기, K팝의 주인공이 될 날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완성이 안 된 그녀의 작품은 분명 꿈을 실현시켜줄 마법의 도구가 될 것이다. 노트와 수첩은 정신적 결사체 나는 대학 강의와는 별도로 저녁 시간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일명 ‘파스텔’이라는 파워 스토리텔링 강좌를 이끌고 있다. 강연을 끝내면 지친 목을 달래기 위해 가끔 근처 카페로 가는데 그날은 적지 않은 수강생이 나를 따라왔다. 생맥주를 나누며 자연스레 트랜스 미디어 시대, 글과 말 그리고 이미지가 섞인 융합 스토리텔링으로 화제가 옮겨지자 여성 수강생 몇 명이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날로그 식 노트였다. 몰스킨 같은 브랜드 수첩도 있었지만 이름 없는 국산 공책도 있었다. 그들은 수첩의 빈 공간 위에 그림을 그리고 뭔가 글을 적어 놓고 있었다. 디지털 문명과 함께 죽어가던 종이 수첩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흐와 피카소, 헤밍웨이가 즐겨 사용했다는 전설의 수첩 몰스킨을 극적으로 살려낸 것은 극성스런 마니아들이었다. 몰스킨은 이제 할리 데이비슨과 어깨를 겨루는 가장 충성도가 높은 브랜드가 되어서 연간 1000만 권 이상이 팔린다. 디지털 시대라지만 어떤 아날로그 제품은 오히려 시장이 더 늘어났다. 하긴 꿈을 표현하는데 디지털이면 어떻고 아날로그면 또 어떤가. 그들에게 노트와 수첩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정신적 결사체인 것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플랫폼’이라는 몰스킨의 모토처럼 말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 젊은 남성의 소지품이었다. 개인 비용으로 참가하는 문화강좌에 가보면 압도적으로 여자 수강생이 많은데 놀란다. 술집에서 남자들이 호연지기를 뿜어내고 있을 때 여성들은 열심히 자기개발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 남성 수강생은 예외였다. IT회사에 근무하기 때문에 업무용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다니지만, 동시에 편지지를 항상 가방 안에 넣어 다닌다고 했다. 아날로그면 어떻고 디지털이면 어떤가
편지지? 의외였다. 지금은 편지를 잃어버린 세대가 아니던가. 커피를 마시다가, 또 누구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지면 그 자리에서 편지를 쓴다고 했다. 어느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림을 그리건 편지를 보내건 모두 남모를 꿈을 꾸고 있다는 의미다. 또 다른 피카소, 헤밍웨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수강생 가운데 가장 연장자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받았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60대가 아닐까 싶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강의실에 도착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과제를 해내는 분이다. “사실 몇 번이고 고민했습니다. 이 나이에 젊은이들에 섞여 뭔가 배운다는 게 어색해서 올까말까 망설였어요. 아, 그런데 지금 너무 행복해요. 뭔가 다시 배운다는 것 말이죠. 정말 잘한 결정입니다. 하하하!” 또래의 다른 이들이 골프가방 아니면 등산용 배낭이 전부일 때 그는 공부 가방을 챙겨서 강남에서 강북까지 달려왔다. 큼직한 옛 공책 위에 손 글씨를 써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멋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몰입한 얼굴은 흡사 쾌활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냥 얻어지는 2막 인생은 없다. 나는 중년들이 손가방에 영양제와 콜레스테롤 억제하는 약봉지만 넣어 다니지 말고 꿈도 함께 넣어 다녔으면 좋겠다. 나의 쾌활한 수강생처럼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방은 배움을 의미한다. 10대들의 백팩에는 무거운 입시용 책들로 가득하고, 20대의 가방에는 취업용 서적과 서류가 들어있다. 그러다가 직장에 들어가서 1~2년이 지나면 남자들의 손에서는 갑자기 가방이 사라진다. 손에서 가방이 떠나는 것과 함께 배움도 뚝 끊어진다. 평생교육 시대다. 제 2의 인생에 안착하는 비결은 새로운 몰입 대상을 빨리 확보하는 거다. 미술 작가들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은 더욱 섬세해진다고 한다. 게다가 미술은 근본적으로 육체운동을 수반하기에 건강에도 좋다고 권유한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한편 슬픈 일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평소 꿈꿔왔던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30년 모아두었던 자료를 다시 뒤져 책 쓰는 작업하느라 흥분되어 있다. 내 손길이 닿기만을 기다리며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자료들에게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서 좋다. He Story보다는 I Story에 더 공감
나는 나이를 ‘나의 이야기’의 준말이라고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들려줄 나만의 이야기가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흔히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권’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 구슬도 꿰매야 보석이니까.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이다. 이제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때다. 뒷담화하고 살기에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남의 이야기인 히스토리(He Story)보다는 아이 스토리(I Story)에 사람들은 더 공감하는 법이다.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공간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다. 동시에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우선 필요한 부문만을 뽑아서 초록으로 담아도 충분하다. 글을 쓰든 스케치를 하던 그것은 자유다. 소중한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담아보는 거다. 무에서 유로 창조자가 되는 연습을 해보자. 어떤가. 수퍼 시니어의 수퍼 스토리. 멋지지 않은가.
[super senior] 고독이란 …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마음의 ‘비타민E’ 정신의 근육 키우기 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 “아, 백수가 과로사할 지경이야. 자유인으로 지내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냥 놔두지를 않네.”
그 마음 누구보다 공감한다.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과 밀려오는 약속으로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서너 달이 훅 지나간다. 퇴직을 실감하기 어려울 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과 같은 적막감이 찾아온다.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없고 문자와 카톡조차 쥐죽은 듯 고요하다. ‘전화기가 고장 났나’ 하고 여기저기 만져보지만 멀쩡하다. 오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이다. 새벽형 인간들에게 그 고통은 두 배다. 그때부터 안절부절,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보지만 상대방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어, 어떻게 하죠. 요즘 바쁩니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깨닫는다. 조만간 연락하겠다는 것은 곧 만나고 싶지 않다는 우회적 표현이라는 것을.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차가운 거절이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어금니를 꽉 물지만 치아만 아플 뿐이다.
회사 그만 둔 뒤 절실하게 느낀 ‘쓰리 걸’
하지만 되돌아보면 나 역시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터다. “바쁜데요”라는 단 한 마디로 말이다. 물밀듯 후회가 몰려온다. 실패를 통해서 사람은 많이 배운다고 했던가.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쓰리 걸’이 쓰라리게 그리워졌다. 선배들에게 좀 더 잘해드릴 걸, 직장 후배들에게 말 한마디 잘해 줄 걸,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조금 더 가질 걸. 그 ‘쓰리 걸’ 가운데 어떤 걸이 가장 아쉬웠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내시걸’이라고 답하고 싶다. “내 시간을 가질 걸.”
CEO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때는 내가 조직을 리드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표와 조직에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가지고서야 무슨 창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경영자와 리더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다. 무형에서 유형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집단지성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하겠지만, 때로는 독창적인 리더십도 필요하다. 조직의 도그마, 고정관념, 지금까지 갇혀 있던 프레임을 깨지 않으면 새로운 성장 동력은 기대하기 힘드니까. 홀로 있는 시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가 많다고 자랑할 일은 절대로 아니다. 직위 때문에 맺어진 인간관계는 휘발성이 너무 강해서,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금방 생명력이 증발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인간관계를 챙기는 열정의 10분의 1 정도라도 빈 공간으로 남겨놓으면 좋겠다. 구조조정 해야 할 것은 조직만이 아니다. 리더의 일정표부터 과감히 다이어트 해야 한다. 멋진 아이디어를 낸 젊은 친구들에게 점심 사주고 싶어도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면 무슨 창조적인 리더십이 가능하겠는가. 경영도 타이밍의 예술인데, 김 빠진 맥주가 되지 않을까. 비어 있어야 생각이 고이고, 생각이 고여야 새로움이 생긴다. 여백 없이 새로운 리더십은 생기지 않는다. 단지 리더놀이, CEO 흉내만 하다 갈 뿐이다.
브람스의 F.A.E. 바이올린 소나타 악보 표지. ‘자유롭지만 그러나 고독하게 … ’ 음악가들에게 브람스의 인생은 F.A.E.로 유명하다. F.A.E란 ‘Frei aber Einsam’(프라이 아버 아인잠)의 줄임말이다. 독일어로 ‘자유롭지만 그러나 고독하게’란 뜻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그에게 위대한 작품이 되어 돌아왔다. 원래 브람스가 좋아했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좌우명이었지만, 그를 위해 바이올린 소나타, 일명 ‘F.A.E’를 만든 까닭에 지금은 브람스가 자유인의 아이콘이 되어있다.
여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를 ‘외로운 비타민 E’라 표현하고 싶다. 브람스의 작품 F.A.E가운데 E를 딴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가끔은 홀로 있어야 한다. 일정표의 중간을 비워두어야 한다. 원래 비타민 E는 흔히 젊음을 지켜주는 비타민이라 부른다. 노화를 방지하며 특히 여성들에게 효과가 좋다고 한다. 비타민은 몸 안에서 스스로 생기는 호르몬과 달라서 반드시 몸 바깥에서 섭취해야 한다. 제2의 인생에서 외로운 비타민 E 역시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종합비타민을 챙겨 먹듯, 외로운 비타민 E도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저항력이 생긴다. 인간은 물론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 필요하고 모임도 당연히 나가야 한다. 그러나 잠시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독이다. 지나치면 ‘사회독(社會毒)’이 되어 돌아온다. 내 영혼과 인생을 해치는 독소가 된다는 뜻이다. 외로운 비타민 E는 그 독소를 줄이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삶의 여백’은 필수 늘 일정표가 빡빡한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되기 힘들다. 모든 것이 꽉 차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는 10가지, 100가지 말할 수 있다. 시간을 내야 할 이유 역시 10가지, 100가지도 가능하다. 애인을 만들 때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지 않던가. 여백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된다. 가끔 이런 사람들을 본다. 식사약속 해놓고, 당일이 되어서는 ‘우리 둘이서만 밥 먹는 거야? 부를 사람 누구 또 없나?’ 이렇게 황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1대 1 소통에 훈련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더욱 두려워한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은 45세를 정점으로 사회관계가 꺾인다고 미국 의학저널에 발표되지 않았던가. 새로 사귀는 것보다 잃는 사람 수가 많아지는 네트워크의 변곡점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된다. 어떤 조직이든 끝까지 챙겨주지는 못한다. 홀로 있는 연습을 충분히 해둬야 한다.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캘린더의 여백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인의 자세가 아니다. 헬스클럽에서 근육 키우듯 홀로 이겨낼 수 있는 정신 근육도 키워야 한다.
일정표가 비었더라도 외롭다고 투덜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홀로 낯선 커피숍에 들어가 황금빛 거품으로 덮인 에스프레소 한잔 주문해보자. 강렬하고 매혹적인 쓴맛이 목안에 넘어올 것이다. 이어폰이 있다면 조용히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2악장을 들어보자. 고독하면서도 자유로운,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브람스의 마음이 전달되어 오는가. 수퍼시니어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사람이다.
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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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ms String Sextet No. 1 in B flat Major, II. Andante, ma moderato - Pablo Casals, Isaac Stern
Johannes Brahms: String sextet in B flat Major, Op. 18, II. Andante, ma moderato Stern, Casals, Foley, Schneider, Katims, Thomas (1952)
Visuals from the film Les Amants (1958), directed by Louis Malle
이 양반이 고독에 빠진게 아녀. 분명 사랑에 빠진거지. 연애를 하신다는 말씀.^^ 그래서 Brahms F.A.E. 자유롭고 싶은거고. "브람스의 눈물" 이라는 이런 노래가 가슴에 찌르르 와 닿는거다. 왜 그럴까? 비타민 E 보다 더 좋은게 "사랑" 아닌가
사랑에 빠지면 더 고독해지고, 외롭고, 세상만사 허무해지는 법이라~. 차마 세레나데는 못부르고(체면상) 이런 노래가 딱이다^^
에구 슬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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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