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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한 밥상
박 완 서
내시경이다, MRI다, 힘든 검사로 사람을 초주검을 만들어놓고 나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살날이 앞으로 석 달밖에 안 남았다고 했다. 남편이 먼저 저세상으로 간 지 삼 년 만이었다. 남편은 당시의 남자 평균수명을 겨우겨우 채우고 갔지만 여자의 평균수명은 남자보다 훨씬 길고, 나는 남편보다 다섯 살이나 손아래니까 그이보다 단명하는 셈이다. 육십보다는 칠십이 더 가까운 나이에 죽는 걸 단명, 어쩌고 한다면 아마 저승사자가 다 웃겠지. 그러나 나는 저승사자를 웃기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히 살았다고 여기고 있고, 따라서 몸부림 같은 건 지지 않을 테니까.
남은 석 달이 문제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 받아놓고 석 달은 쏜살같을 법도 한데 나에겐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망연했다. 그건 아마도 남편의 마지막 석 달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십대에 유방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근래에 몸이 갑자기 쇠약해져서 검사를 받은 결과 여러 장기로 전이가 돼 삼 개월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이는 멀쩡하던 사람이 건강진단 결과 췌장암으로 밝혀져 길어야 삼사 개월밖에 못 살 거라고 했다. 그런 그이에 비하면 나의 석 달은 예고된 석 달일 수도 있었다. 그이는 삼사 개월이 뭐냐고 삼 개월이면 삼 개월, 사 개월이면 사 개월이라고 정확하게 못을 박으라고 의사에게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꼭 해놓고 가야 할 일을 차질 없이 마치고 가려면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겠다는 태도일 뿐 분노의 기색은 없었다.
그이는 잘나가는 회계사였다. 천성이 그런지, 직업병인지, 그이는 매사에 정확을 기하는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평생 정확을 생명으로 하는 숫자하고 씨름해서 돈을 버는 그이가 안쓰러워서 나는 헤프게 쓰지 않고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자족할 만큼만 사는 데 만족해왔다. 그이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기계처럼 정확하고 재미없게 살아온 그이의 숨은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싶어 사별이나 병수발에 대한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그이는 남은 삼 개월, 아니 삼 개월하고 보름 동안을 숫자와의 씨름으로 꽉 채웠다. 우리 부부가 삼남매를 낳아 길러 다 출가시킨 후였다. 아이들은 부모 속 썩이지 않고 건강하고 심성 바르게 자라 좋은 직장 갖고 적령기에 제짝도 스스로 찾아내어 학비하고 결혼비용 대는 것 말고는 부모가 해줄 게 없었다. 그게 서운했던지 막내딸 시집보낼 때는 그이가 사윗감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분란이 좀 있긴 있었다. 나 보기에는 내 딸이 반할만한 청년이었는데 그이의 보는 눈은 외모가 아니라 능력이었고, 능력 중에도 오로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만을 보려들었기 때문에 눈 밖에 났다. 무얼 보고 전도양양한 청년의 앞날을 그렇게 단정지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반대는 완강했고, 딸애는 집을 나가 살림을 차리겠다고까지 부모를 협박했다. 언니 오빠가 중재에 나서 아빠를 설득했고 결국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쪽으로 그이의 고집도 꺾이고 말았다. 그런 자식이 더 잘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이의 사람 보는 눈은 숫자만큼이나 정확해서 막내네 집구석은 늘 뭔가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되는 노릇이 없어 항상 쪼들려 살았다. 자식을 여럿 둔 집이면 뉘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통속적인 이야기였다. 시집도 별 볼 일 없는 막내가 친정으로 구걸을 안 오고도 최소한의 앞가림이나마 하고 사는 것은 제 언니 오빠들의 도움이 크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막내가 불쌍하면서도 내 자식들의 동기간의 우애가 고맙고 대견했다. 이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이가 죽을 날을 받아놓고는 막내를 특별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이가 여기저기 사 모은 땅이 제법 된다는 걸 나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일부러 그이가 나에게 비밀로 한 건 아니고, 먹고살 만큼 집 안에 들여놓고 남은 돈으로 그이가 뭘 하는지 내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이는 마지막 남은 시간을 그 땅을 삼남매한테 공평하게 나누는 일로 꽉 채웠다. 그이가 생각하는 공평은 없이 사는 자식에게는 더 주고 넉넉한 자식에게는 덜 주어서 삼남매의 재산을 비슷하게 만드는 거였다. 그이가 나에게 그런 뜻을 먼저 의논해왔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늘 마음에 얹혀 있던 막내가 이제 고생을 면하게 된 게 기뻤고, 그이가 냉철한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기쁨을 넘어 감동이었다. 상속으로 했는지 증여로 했는지, 나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튼 사후에 자식들이 세금 한 푼 안 물도록 명의변경까지 완벽하게 끝내놓았다. 붙어 있는 땅도 아니고 전국 각지에 조금씩 흩어져 있는 땅의 평당 가격을 당시의 시가로 알아내어 평수에 곱하고 그 총액을 차등을 두되 그 누구도 감히 불평을 할 수 없도록 객관적으로도 정당한 차등을 두어 분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일을 뒤탈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느라 그이는 자기에게 남은 시간을 남김없이 다 바쳤다. 그이도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일 여행이나 음악회 같은 걸 같이 가고 싶어한다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금쪽같은 시간에 그럴 새가 어디 있어?
금쪽같은 시간을 다 바쳐 이룩해놓고 간 분재(分財)를 삼남매는 다들 만족스러워했고 그이는 마치 혹사당하던 회사를 정년퇴직하는 것처럼 홀가분하게 사무적인 태도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 할 일을 다 했다는 자부심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을까, 나에게는 일말의 석별의 정도 내비칠 겨를 없이 총총히 떠나갔다. 그러나 그이의 사후에는 뜻하지 않은 것 천지였다. 재산이 공평해지자 당장 내 새끼들의 우애가 전 같지 않아지는 게 느껴졌다. 노력 안 하고 부자가 된 막내를 업신여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막냇사위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땅을 팔아 사업을 시작하고 집어넣은 밑천을 한 푼도 못 건지고 빈털터리가 되는 데는 삼 년도 안 걸렸다. 아들과 큰딸은 땅을 팔아먹지는 않았지만 누구 땅값이 더 오르고 덜 오르는 걸 둘이서 비교해가며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이의 사후 삼 년은 마침 전국 땅값이 정신없이 뛸 때였다. 그러나 고루 뛰었으면 아무도 뛴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걷는 놈, 기는 놈도 있으니까 뛰는 놈이 눈에 띄는 것이다. 그애들은 그 땅 없이도 넉넉하게 살 수 있건만, 아버지의 사후에 벌어지기 시작한 각자의 땅값이 공평하게 오르지 않는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 적대시하고, 다시 못살게 된 동생의 불운을 고소해하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동생을 도와주지 않게 되었다. 그이는 당시의 시가로 계산해서 공평하게 나누었을 뿐 사후의 앞날까지 내다볼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지, 죽은 후엔 앞날이란 것이 있을 순 없으니까.
나에게는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와 얼마간의 현금과 꽤 거액의 생명보험금을 남겨주었다. 그이가 하고 간 일 중 그거 하나는 올바른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현금을 은행에 넣어놓고 곶감꼬치처럼 빼먹다가 돈 떨어지면 아파트 팔아서 자식들이 얼굴 못 들고 다니지 않을 정도의 유료양로원에 들어가기에 적당한 재산이었다. 씀씀이가 허황되지 않은 대신 재테크 능력도 전무한 나에 대한 그이다운 배려였다. 나는 그놈의 땅이라는 게 얼마나 요물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이가 나에게 그걸 한 평도 안 준게 조금도 섭섭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웠다. 이 나이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나서 맛있는 집 찾아다니고, 집안의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돈으로, 사람 수효로 부지런히 서로 품앗이를 다니는 여고
동창이 여남은 명 되는데, 이 친구들 또한 나더러 죽은 남편 고마워하라는 소리를 요즘 들어 부쩍 자주 한다. 병수발 오래 안 시키고 남들이 아깝다 할 나이에 죽었으니 얼마나 고마우냐는 거였다. 은퇴해서 잔소리만 늘고, 바치는 건 맛있는 거하고 마누라밖에 없는 영감들이 차차 지겨워지기 시작할 나이들이고, 몇 년째 중풍이나 치매로 한참 정을 떼고 있는 영감님을 가진 친구도 몇 되었으니까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그러나 네 팔자가 상팔자라느니, 중년에는 홀아비된 남자가 몰래 웃지만 노년에는 과부된 여자가 대놓고 웃는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풍파 없이 살아온 내 삶이 허전해서 뼈가 시려지곤 했다.
처방된 약 때문이겠지만 체중이 줄고 전신이 차츰 무력해지는 느낌 외에 아직은 그닥 고통스럽지는 않다. 만일 내가 감당 못할 통증이 온다 해도 그보다 앞질러 더 강한 진통제를 쓰면 될 것이다. 나는 삼남매를 다 자연분만을 했는데도 통증과 싸울 자신은 없고 그럴 의욕도 없다. 단지 그 걱정 때문에 남은 석 달이 주체할 수 없이 길게 느껴진다. 첫날 보내기도 지루했다. 병원에서 그 소리를 듣고 온 첫날부터 나는 심심할 게 두려워 고작 생각해낸 게 비디오를 빌려다 보는 일이었다. 머지않아 딴 업종으로 바뀌지 싶게 가게 꼬라지부터 의욕 상실이 역력한 동네 비디오 가게의 진열장을 훑다가 〈데미지〉에 눈길이 꽃혔다.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는 영화인데도 또 보고 싶었다. 못 본 영화 중에서 골라잡는 정도의 모험심도 동하지 않았다. 허술한 골목을 휘적휘적 걷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추레한 모습을 다시 한번 봐주고 싶었다. 다시 한번 보고 나서 그 장면만 리와인드시켜 또 보면서, 사련(邪戀)의 광풍이 휩쓸고 간 후, 반 넘어 폐허가 된 남자의 모습에 가슴이 짠하면서 울고 싶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고작 남의 인생이나 재생시켜 볼 만큼 내 인생에서 결핍된 건 뭐였을까. 아니면 데미지 없이 인생을 퇴장한 남편에 대한 연민이나 반감에서였을까.
그다음에 적당한 날을 골라 자식들에게 알리고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아마 온당한 어미 노릇일 터이나 나는 거의 일주일이나 그 일을 미루고 있었다. 시한부 인생을 다룬 연속극은 거의가 죽을 사람이 먼저 알거나 가족이 먼저 알거나 간에 서로 그 사실을 숨기는 걸로 시간을 끄는 게 정석처림 돼 있다. 하긴 그걸 쌍방이 동시에 알게 한다면 단막극이 되지 뭣하러 연속극이 됐겠는가. 늘려먹기 위한 연속극의 그런 진부한 정석을 경멸해마지않던 내가 지금 그 짓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짓이 너무 피곤해 지레 죽을 지경이다. 어떻게 안 피곤하겠는가. 남편처럼 나도 병원에서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렇게 경멸해마지않던 숫자와의 씨름을 시작했으니. 남편에겐 숫자가 평생 익숙한 상대였
겠지만 나에겐 생소하고 버거운 상대다. 앞으로 팔십 구십까지 산다면 내가 가진 게 빠듯하지만 석 달 안에 죽는다면 상당한 현금을 남기게 된다. 집도 내 집이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막내가 걸린다. 나는 세금을 어떻게 안 무는지는 잘 모르지만 현금은 생전에 찾아서 막내에게 건네면 감쪽같을 것 같다. 오빠나 언니나 제 서방에게도 알리지 말고 비자금으로 가지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그러고 싶지만 언 발등에 오줌 누기지, 그 집구석 씀씀이에 그게 며칠이나 가겠는가. 막내에게 급한 건 비자금이 아니라 내 집 마련이다. 그럼 이 집을 내 생전에 막내에게 명의변경을 해주거나 상속을 해줄까. 그러자니 세금도 무섭지만 아버지의 처사 때문에 삐지고 어긋난 삼남매의 우애가 영영 돌
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리라는 건 불을 보듯이 뻔하다. 시집 쪽으로 기댈 데가 전혀 없는 막내에게 그것 또한 어미로서의 할 짓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위의 큰애들도 섭섭지 않고 막내는 작은 집이라도 한 채 가질 수 있게 할 것인가. 결국은 남편의 전철을 밟아 내가 소유한 것을 삼남매에게 차등을 두어 분배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나에게 그런 수학은 너무도 어렵다. 예금 액수와 집값을 합한 몇 억이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키면서 토악질이 나지만 출구가 없다. 사람이 오죽 무능하면 전철을 밟을 생각밖에 못 하겠는가. 남편의 마지막 나날도 그러했겠지만 나도 끝까지 걸리는 게 자식들인데 돈이 걸린 문제는 자식들과도 터놓고 의논을 할 수 없다는 게 나를 꼬이고 꼬이다가 종영 시기를 놓친
티브이 연속극처럼 구제 불능 상태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와서 그걸 알아서 무엇에 쓸까마는 돈의 치사한 맛도 뜨거운 맛도 모른다는 게 사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죽는 데 있어서까지 중대한 결격사유처럼 느껴지면서 경실이가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경실이는 여고 동창이었지만 학교서 친하게 지낸 추억보다는 요새처럼 이사를 자주 안 다니고 한동네 눌러살던 시절, 같은 골목에 십 년을 넘게 같이 산 정 때문에 고향 사람 비슷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주거 환경도 바뀌고 서로 다른 사회생활, 결혼생활을 하면서 안부도 모르고 지내다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동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동창 모임에서였다. 전체 모임은 아니고 아이들도 잔손 안 가게 길러놓고 살림도 웬만큼 일궈놓은 비슷하게 사는 동창끼리의 계모임 비슷한 모임 에서였다. 계모임 비슷한 모임이라고 한 것은 계 하기에 알맞은 인원이 모여 돈을 모으긴 모으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고, 여행이나 취미 생활, 맛있는 집 순례 등 재미도 있고 그럴듯한 일에 아낌없이 쓰는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남는 돈은 해외여행을 목적으로 적립해놓고 있다. 해외여행 안 해본 친구도 없기 때문에 적립하는 액수에 조급한 친구도 있을 것 같지 않은 팔자 좋은 모임이었다. 그렇게 모인 상당한 액수를 처음 쓰게 된 것이 경실이네한테였다. 그 돈을 경실이네한테 조위금으로 내놓자고 체안한 것은 아마 나였을 것이다. 열 명이 넘는 멤버가 해외여행을 떠날 만큼 모이기엔 아직 먼 초기였지만 아무리 단체 조위금이라 해도 과하다 싶은 액수를 선뜻 내놓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한 것은 경실이 당한 불행이 워낙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외동딸을 곱게 길러 착실한 사위 보아 손자도 보고 손녀도 보고 한집에 같이 살고 있었다. 엄마 덕에 아직도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딸이 벼르고 별러 제 남편 해외출장과 날짜를 맞춰 휴가를 얻어내어 해외여행을 간 비행기가 착륙 직전 공중에서 폭파하는 엄청난 사고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시신조차 수습하기 어려운 대형 사고였다. 경실이네 딸, 사위도 시신을 수습했다고도 하고 유품만 몇 접 찾아냈다고도 하지만 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확실한 건 홀어머니를 모시고, 여섯 살, 세 살 어린 남매를 둔 젊은 내외가 이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뿐이었다.
우리가 조위금을 전달하러 간 곳은 일주일 넘어 끌던 유족과 항공사 간의 보상금인지 위자료인지 하는 돈 문제가 원만하게 타결되어 마침내 치르게 된 합동장례식장이었다. 통곡, 몸부림, 혼절 등 유족들의 애통이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장례식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우리는 주위의 침통하고 삼엄한 분위기와 들려오는 곡성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댔다. 다들 머믓거리고 심장이 약한 친구는 꽁무니를 빼면서 차마 못 들어갈 것 같은 시늉을 하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나하고 혜자가 앞장서자 다들 뒤따랐다. 나는 경실이하고 가장 가까워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고, 혜자는 우리보다 먼저 한 차례 문상을 다녀와서 어느 정도 분위기에 익숙한 것 같았다. 혜자가 먼저 문상을 간 건 경실이 때문은 아니고 친척 중에 이번 일로 참척을 당한 이가 있어서였다. 그때 잠깐 만나보고 온 경실이에 대한 혜자의 묘사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우스갯소리처럼 들렸고, 그 마당에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는 혜자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유족들의 애통 속에서 경실이만이 눈이 초롱초롱해가지고 밥을 아귀아귀 먹더라고 했다. 초롱초롱과 아귀아귀가 그렇게 그로테스크하게 들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혜자가 입이 좀 헤프기는 해도 뒤끝은 없는 친군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렇게 친구를 고약하게 말했는지 이해가 잘 안 됐다. 그러나 막상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경실이를 보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초롱초롱과 아귀아귀였음을 부인 못 하겠다. 경실이의 눈이 초롱초롱한 건 아니었고, 물론 무얼 먹고 있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티브이 화면으로 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유족들의 오열과 몸부림, 심지어는 예서 제서 까무러쳐 실려가는 일까지 벌어지는 장례식 장에서 그들은 그 정적인 단아한 모습으로 단연 눈에 띄었다. 경실은 혼자가 아니라 어린 외손자 남매를 데리고 있었다. 이 어린 상주들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손을 잡고 있는 또하나의 어른은 아이들 친할아버지일 것이다. 경실이가 딸을 출가시킬 때 무남독녀 외동딸을 역시 딸도 없는 집 외동아들에게 시집보내는 걸 꺼려 한동안 반대하다가 보낸 걸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사람이 친할아버지라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보았다. 여섯 살, 세 살 어린것들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손을 꽉 잡고 있는 네 사람의 구도는 너무도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어서 마치 옛날 가족사진처럼 보였다. 순간 우리는 다들 배신감에 가까운 실망감을 느꼈다. 잔뜩 기대하고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서였을까. 아무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경실이 사돈영감은 상처한 지가 일 년도 채 안 되니,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삿대질을 해도 누가 뭐랄 사람 없는 처지였다. 저렇게 침착하고 꿋꿋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침착할 뿐 아니라 젊어 보이기까지 했다. 입 싼 혜자가 기어코 한마디 내뱉었다.
재네들 저래도 되는 거니? 늦둥이를 낳은 중년부부라고 해도 곧이듣겠네.
듣고만 있을 우리들이 아니었다. 다들 한마디씩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고작 떠오른 게 경실이네 집이었다. 경실이가 우리 곁을 떠난 게 몇 년 전이더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도 그걸 헤아려보려고 애써보지만 잘 안 된다. 그녀는 그 항공 참사 후 곧 서울을 떴고, 우리 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무던하고 수수한 경실이는 말주변도 좋은 편이 못 되어 우리 모임에 꼬박꼬박 나올 때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멤버는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곁을 떠나고 나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근래에는 좀 시들해졌지만 모임 때마다 그녀가 화제에 오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주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었지만 돈과 섹스에 관한 소문처럼 흥미진진한 게 또 있을까. 나는 맹세코 소문보다는 경실이를 믿었기 때문에 듣기만 하고 화제에 끼어들기는 삼갔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없었다고는 맹세하지 못하겠다. 죽을 때까지 얘 재 할 수 있는 흉허물 없는 여고 동창끼리라지만 육십보다도 칠십이 더 가까운 나이에 그 자리에 없는 친구의 스캔들에 입안에 군침이 돌고 상상력까지 왕성해진다는 것 자체가 경실이 우리 사이에 일으킨 물의 못지않은 우리들의 스캔들이 아니었을까.
소문을 물어들이는 건 여전히 혜자였다. 사고 당시 경실이 사돈영감은 지방도시 C시에 인접한 C군 군청 주사였다. 나는 주사라는 직위가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 가늠할 수 없는데 혜자가 만년 6급이라고 얕잡아 말하는 투로 봐서는 그다지 높은 자리는 아닌 듯했다. 경실이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사돈집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 홀아비 사돈영감하고 살림을 합쳤다는 것이었다. 그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우리끼리니까 말이지 하도 해괴망측해서 입에 담기도 뭣하다. 그러면서 주위를 살피는 시늉까지 하면 세상에서 제일 고독하고 불쌍해 보이던 과부와 홀아비 사이에 느닷없이 썩어가는 과일 냄새 같은 부도덕의 낌새가 감돌기 마련이었다. 그런 망측한 속내 때문인지 경실이는 장례식 후에도 우리의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록 금전적인 것일망정 최선을 다해 조위를 표했고, 그후에도 번갈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안부를 묻고 무얼 도와주면 될지 알아내려 했지만 슬픔이 무슨 금조각이라도 되는지 마치 없는 것처럼 감추려만 들었다. 그러다 홀연 시골로 사라진 것이다. 만약 혜자가 아니었으면 경실이는 곧 우리 사이에서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상 거의 잊혀졌을 무렵 혜자의 아들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임자리를 얻은 대학이 서울에 본교를 둔 대학의 지방 캠퍼스였는데 그 소재지가 C군이었다. 서울에서 출퇴근하기에는 좀 먼 거리여서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고 그게 경실이가 가서 살고 있는 사돈집과 한동네라고 했다. 경실이가 혜자한테 그런 얘기를 했을 리는 만무고, 아마 얻어들은 소문 아니면 반기지 않아도 주책없이 들렀다가 눈치껏 보고 들은 것에다 살을 붙인 것에 불과할 터이나, 두 사람은 정말 부부로 살고 있더라고 했다. 그것도 아주 떳떳하게 깨가 쏟아지게.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이건 상피 붙는 것보다 더한 스캔들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서 그러고 살고 있다면 모를까 몇십 년을 눌러살았다는 보수적인 시골 동네에서 그게 과연 가능할까. 얼굴 가죽이 너무 두꺼우면 얇은 쪽에서 질려버리는 것도 모르니. 이렇게들 의견이 분분하자 나는 그래도 경실이를 두둔한다고 한다는 소리가 너 경실이가 그 영감하고 같이 자는 거, 봤니, 봤어? 였다. 혜자는 내 직설적인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천박하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아리까리하게 가다듬고는 전혀 딴소리를 했다. 한번은 영감님이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읍내로 난 길을 가는 걸 봤는데 경실이는 대문 밖까지 나와서 그들이 멀어져가는 걸 마냥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영감님은 위태롭게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면서 하니 안녕, 안녕 하니, 하더라는 것이었다. 자는 건 못 봤어도 그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한 폭의 그림이더라. 평화가 강물같이 흐르는. 그럼 됐냐?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다들 한마디씩 했다. 늙은이들이 하니라니 미쳤군 미쳤어. 미쳐도 더럽게, 아이고 닭살이야. 나는 암말도 못했지만 이미 등줄기에 닭살이 돋고 있었으므로 몸으로 동의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혜자가 C군에 드나들기 시작할 무렵 이었으니 아마 사고 당시 세 살이었던 손녀가 열 살은 되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 양가 부모가 그 정도로 안정을 찾았다면 다행한 노릇이나 ‘하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괴망측했다. 오히려 혜자는 사돈끼리의 망측한 동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기회 있을 때마다 들르고 그 식구들의 사는 모습을 전해주곤 했다. ‘하니’가 워낙 자극적 이어서 그뒤에 전해들은 소리는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지방에 살면서도 손자 공부를 잘 시켜 미국의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부러움까지 샀고, 손자가 이제부터 누이동생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면서 같이 유학을 떠나고 싶어해서 둘을 한꺼번에 떠나보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시 한번 억측이 구구해졌다. 두 늙은이가 눈치볼 거 없이 깨가 쏟아지게 됐을 거라고도 했지만, 대학생이 됐으면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제 앞가림도 어려운 나이인데 친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동거가 오죽 창피하고 견디기 힘들었으면 동생까지 데리고 떠나려 했겠냐고 가엾어하는 마음이 조실부모한 남매에게로 모아졌다. 그리고 마치 보물찾기처럼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에 추리력이 모아졌다.
실은 처음부터 우리의 관심은 돈, 거액의 보상금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끔찍한 참척을 겪고도 눈이 초롱초롱해서 밥을 아귀아귀 먹은 것도 거액의 보상금 때문일 거라고 했고, 그후에도 외가 친가의 두 늙은이가 아이들 손목을 양쪽에서 부여잡고 한시도 놓지 않은 것도 그 아이들에게 지급될 돈에 대한 후견인의 권한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행동으로 이미 자리매김한 뒤였다. 상식에 어긋난 이 일련의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모두 다 돈 욕심으로 풀자, 매듭을 잘 드는 칼로 내리친 것처럼 세상만사는 의외로 간단하고 어이 없어졌다.
두 늙은이가 깨가 쏟아지게 살게 된 지 얼마 안 있다 사돈영감이 먼저 세상을 떴다. 지금은 경실이 혼자서 그 집을 지키고 있다. 그녀가 살던 아파트는 아직도 서울에 있다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그 집에 남아 있는 것도 혹시 그 집에 대한 욕심이 아닐까, 의심나는 점이 없지 않지만 다들 경실한테 시들해진 지 오래다. 아이들을 유학 보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현장중계를 하던 혜자가 아들이 결혼한 후 더는 C시에 내려갈 구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후에는 도리어 내가 가끔 전화로라도 안부를 묻곤 했다. 전화로 듣는 경실이의 참한 목소리는 소문으로 듣던 그녀의 인상을 서서히 밀어내고 한동네의 오래 같이 살던 여고 동창의 친밀감을 회복시켜주었다. 말수가 적고 거짓말을 잘 못하는 그녀에게 돈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다는 게 사실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팔자가 좋아서였는지 세상물정 에 어두워서인지 돈에 농락당한 적도 돈 때문에 수모를 겪은 일도 없다. 마치 내 팔자에 작은 옹달샘을 타고난 것처럼 먹을 만큼 퍼내면 그만큼 고이려니 하고 살아왔다. 돈이 어느 만치 중요한지 잘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그렇게 안 기른 줄 안 내 자식들이 돈 때문에 다투고 돈 때문에 의가 상하는 꼴이 실망스럽고 마음이 안 놓여 이대로는 편히 눈을 못 감을 것 같다. 돈 때문에 인면수심이 되는 것도 마다한 경실이의 말년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기도 하고 돈에 관한 한 도사가 다 돼 있을 그녀로부터 자문이나 하다못해 암시라도 받고 싶다.
아니 벌써 가을인가. 버스에서 내려서 논둑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계절을 느꼈다. 황금색과 녹두색 중간 정도로 여문 망망한 벼이삭에 파도를 일으킨 소슬바람이 부풀린 치마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급히 다둑거리며 흙 속에 누운 그이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많이 상했을 육신은 잘 떠올릴 수 없지만, 이승이 많이 고달팠으리라는 생각은 늦게 든 철처럼 가슴속을 쿵 울리고 지나간다.
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서 데면데면해 보이는 동네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어서 외딴집처럼 보이는 집 앞에 경실이가 나와 있다. 미리 전화를 결었더니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나오겠다는 걸 내가 극구 말렸는데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나보다. 나는 내가 바로 찾아왔다는 표시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경실이도 같은 동작으로 알은체를 했을 뿐 달려나오지는 않는다. 나 역시 걸어오던 보폭을 빠르게도 느리게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처럼 걸어들어갔지만 마음은 충분히 따뜻해져 있었다. 주황색 지붕이 쌩뚱맞아 보이게 집은 허름했지만 양지 발라 구질구질해 보이진 않았다. 토담 밑에 세워놓은 자전거 바퀴가 은빛으로 빚나는 게 이물스러워 보일 만큼 구태의연한 집이었다. 마루에 앉으면 하늘이 많이 보이는 재래식 기역자나 디귿자 집이 살림하는 여자들에게 불편한 건, 부엌을 드나들려면 마루에서 내려가 신발을 신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거 하나는 제대로 개량해놓은 것 같았다. 안방에서 꺾여 부엌이 있던 자리는 창호지문이 달린 방으로 개조돼 있었고, 부엌은 꽤 넓은 대청마루의 반쯤을 차지하고 안방과 연결돼 있었다. 마루 뒤 유리 분합문을 통해 보이는 뒤란에는 창고 같기도 하고 별채 같기도 한 부속 건물도 보였다. 전기 보일러로 고쳤더니 그렇게 자리를 많이 차지하네. 내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경실이가 그렇게 설명을 했다. 돌솥에서 밥이 노릇노릇 뜸이 드는 냄새가 났다. 시골에도 음식점은 있으려니, 나가먹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마룻바닥 겸 부엌 바닥에 방석 깔고 앉아 그녀가 이것저것 밑반찬도 꺼내고 나물도 조몰락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시골집도 이렇게 개조하니까 아파트 못지않네. 안주인이 음식 장만하는 동안 객이 구경하며 수다도 떨 수 있고.”
“시골 사람들도 다들 이 정도는 하고 살아.”
“그래도 뭐 사 먹긴 불편하잖니.”
“사 먹을 게 뭐 있나. 널린 게 먹을 건데. 텃밭도 있고, 마당 댓돌 밑에 시퍼런 거 저거 다 먹을 거야. 나도 잘 모르다가 서울 사람들한테 배운 것도 많아. 성인병이나 암에 좋다는 건 시골 사람들보다 도시 사람들이 더 잘 알더라. 내 동생들 다 서울서 잘살잖니. 혼자 사는 동기간 생각한다고 주말마다 번갈아가며 먹을 거 바리바리 싸가지고 드나드는데 내가 이루 다 먹을 수가 있어야지, 동네 사람들 사는 사정 뻔하니까 저런 집엔 이런 게 아쉽겠구나, 이런 집엔 이만저만한 것이 필요하겠구나, 대강 어림짐작으로 나눠주면 그 사람들도 거저먹지 않고 꼭 뭐로든지 갚으려고 든다니까. 준 거보다 더 많이 받으면 여기선 흔하지만 서울사람들한테는 귀한 거니까 내가 또 바리바리 싸줄 수가 있고. 요즘 서울 사람들 아무리 보잘것없는 푸성귀라도 자연산, 무공해 어쩌구 하면 껌벅 죽잖니. 돈 안 들이고 실컷 인심쓰고, 이러다 나부자 될 것 같다.”
“그렇게 부자가 되고 싶니?”
“아니 지금도 먹고 남으니까 부잔데 더 부자가 돼서 뭣하게.”
“그건 내가 할 소리고, 지금 너 프라이팬에 볶고 있는 거 그거 뭐니? 냄새가 나쁘지 않네.”
“곤드레라나, 만드레라나 그런 웃기는 이름인데 이것도 혼자 사는 노인네한테서 얻은 거야. 예전엔 흉년 든 해에나 먹는 구황식품이었는데 암에 좋다던가, 당뇨에 좋다던가 소문이 나고부터 이것만 전문적으로 파는 음식점이 다 생겼다네.”
“그럼 나도 많이 먹어야겠다.”
“그래 많이 먹어. 뭐든지 걸리기 전에 예방이 제일이야.”
“돌솥에 지어서 그런가, 잡곡을 많이 두었는데도 밥이 조금도 안 거칠고 혀에 착착 붙는다.”
“그래? 돌솥에 짓기 잘했네. 영감님 돌아가시고 거의 안 썼어. 지키고 있어야 되니까 귀찮아서.”
“설마 했는데 너 정말 사돈영감하고 같이 산 것 같다. 회상하는 폼이.”
“넌 왜 내가 사돈영감하고 한집에 산 걸 지금 처음 안 것처럼 말하니?”
“너무 부자연스러우니까. 망측하기도 하고.”
“내 동생들은 한술 더 떠셔 엽기라고 하더라.”
“그럼 너도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었단 말이니?”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내 친동기만 해도 사남매나 되고, 혜자가 우리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곤 했는데.”
“왜 그랬어? 한창 나이에 혼자되고도 딸내미 하나 바라고 스캔들 하나 없이 씩씩하게 잘도 살더니만 그 와중에 실성을 해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사돈하고 그렇게 될 수가 있냐 말야.”
“어떻게 됐는데?”
“시침떼지 마. 이제 와서 명예 회복이 될 것도 아니고. 웃지도 말고, 기분 나쁘니까.”
“기분 나쁘게 하려고 웃은 건 아니고 진짜로 우스워서 웃었어. 나에겐 선택의 여지없이 자연스러웠던 일이 남들에겐 그렇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는 게 웃기지 않니.”
“변명을 하려면 좀 그럴듯하게 해라. 안사돈끼리도 아니고 예전 같으면 대면하기도 조심스러운 안사돈과 바깥사돈이 이런 외딴집에서 한살림을 차린 게 엽기가 맞지 어떻게 자연스럽다고 우길 수가 있냐?”
“사람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이 저절로 돼가는 거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처음 그 일 당했을 때, 세 살, 여섯 살, 저 어린것들 어쩌나, 그 생각 때문에 눈물도 안 나더라구. 사람들마다 불쌍해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혀를 차지를 않나, 눈물을 흘리지를 않나, 눈치가 빤한 어린것들이 즈이들 처지가 얼마나 달라졌다는 걸 왜 모르겠어. 그때부터 세 살짜리는 내 손을 한시반시 안 놓고, 찰싹 붙어 있으려고 그러지, 그뿐인 줄 알아. 다른 손으로는 즈이 오래비 손을 꽉 쥐고 안 놓지, 사내놈은 사내놈대로 누이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는 즈이 할아버지 손을 꽉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지, 쇠사슬도 그런 쇠사술이 없더라고. 그게 아이들 나름의 생존전략이었을 거야. 두 아이들에게 묶인 우리 두 늙은이는 꼼짝 못하고 그런 모습으로 장례식 치르고 그후에도 같이 이동해 처음엔 우리 집으로 왔지. 그때까지 그애들을 내가 데리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친할아버지가 원한다면 둘 다 친가 쪽으로 줄 마음이었어. 애정으로는 외손 친손 차이가 없다지만 아직은 나의 구식 관념상 아이들은 그 성을 따르게 돼 있는 친가 쪽에 속해야 떳떳하게 자랄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얘, 너 딴 반찬도 좀 먹지 그 군둥내 나는 짠지 국물은 뭣하러 다마셔버리냐? 나중에 물 키려고.”
“글쎄 나도 모르게 그 군둥내가 비위에 땡기네. 이거 어떻게 만든 거니?”
“만들고 말고가 어딨어. 무를 통째로 왕소금에 푹 절인 거지.”
“그건 아는데 짠맛 말고 군둥내가 꼭 요만큼만 나게 하는 레시피 말야.”
“레시피 좋아하네. 그거 작년 것도 아니고 아마 재작년 걸 거야. 김장 때가 쉬 돌아올 것 같아서 뒷마당에 묻어둔 항아리를 살피다가 밑바닥에 골마지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무가 서너 개 남았기에 버리기도 뭣해서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손님 맞을 준비한답시고 나박나박 예쁘게 썰다가 맛을 보니까 어찌나 소탠지 몇 번 물에 울궈내고 나서 다시 물 부어놨던 거야. 가미한 건 초 몇 방울하고 실파 썬 것하고 고춧가루 솔솔 뿌린 것밖에 없어.”
“그럼 또 만들려면 한참 걸리겠네.”
“왜 더 먹으려고? 물 부어놓은 거 한 대접이나 냉장고에 더 있어. 거기다가 가미만 하면 되는데 그만 먹어. 요새 짜게 먹지 말라고 난리더라.”
“난리 치라지.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 즈네들끼리. 근데 넌 혼자 살면서 뭣하러 김장까지 하냐? 심란스럽지도 않아?”
“그럼 어떡하니. 텃밭에 배추가 잘된걸. 영감님이 전에 하던 대로 약도 치고, 화학비료도 아주 안 준 게 아닌데도 서울 식구들은―동생네들 말야―벌써부터 무공해 배추라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배추로 줘도 제대로 담가 먹지도 못할 화상들이 그러니 양념 갖춘 데서 아주 담가서 보내줘야지. 그래도 동기간이 고맙지 뭐니? 돈으로 따지면 몇 곱으로 갚아주려고 그렇게들 벼른다는 거 다 알아.”
“넌 그럼 지금은 수입원이 전혀 없니?”
“왜 없어. 서울에 내 아파트 있잖아. 거기서 월세 나오는 거. 많지는 않아. 십 년 넘게 한 번도 올려달란 적이 없으니까. 그 대신 다달이 월말이면 칼같이 내 통장으로 입금이 돼. 아이들 미국 보내고 곧이어 영감님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 번도 찾아 쓴 적이 없으니까 그동안 좀 모였겠지. 땅이 화수분이야. 내가 물물교환을 잘해서 그런지 학비가 안 들어서 그런지 돈 들어갈 데가 거의 없네.”
“이 집 말고도 영감님 땅이 많아?”
“몇천 평 되나봐. 마나님 돌아가시고 묘 쓰려고 샀다는 산 쬐금까지 포함해서 그렇다니까. 얼마 안 되지. 산도 재밌어. 너 온다고 해서 부잣집 마나님한테는 뭘 좀 싸줘야 시큰둥해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밤 때가 된 것 같아 산에 갔다가 아람을 곧 많이 주웠다. 얼마나 반들반들하고 예쁜지 몰라. 이따가 들고 갈만큼 싸줄게.”
“네 눈이 더 반짝인다. 너 여기 내려와 산 지 십 년이 넘는데 지긋지긋하지도 않아? 마치 올해 처음 전원생활 해보는 사람처럼 신기해하고 감동까지 하는 거 보면.”
“하긴 그래. 영감님 살아 있을 때는 밭일은커녕 문밖에도 별로 안 나갔어. 나갈 일 없이 다 해다줬으니까. 참 자상한 양반이었어.”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스러워서 못 나간 건 아니고? 이쪽이 얼마나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고장이라는 걸 너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더군다나 그 영감은 여기 토박이였다며. 철판 깔지 않고는 언감생심 이 집 안주인으로 들어앉을 엄두를 낼 수 있었겠어?”
“철판은커녕 의식도 안 하고 이 집 안방에 들어앉게 됐다면 어쩔래. 정말이야. 내 동기간들도 처음엔 나를 죽기 살기로 말리다가 나중엔 내가 실성한 줄 아는지 한동안 연을 끊고 살다가 관계가 회복된 지금까지도 그동안의 내 행적을 무슨 미스터리처럼 궁금해하니까 너도 나한테서 뭘 알아내고 싶어하는지 왜 모르겠어. 군둥내 나는 짠지 국물 그만 마시고 딴 반찬도 좀 먹어봐라. 곤드레나물도 괜찮지만 씀바귀 민들레잎도 된장에 찍어 먹으면 별미야.”
“씀바귀 민들레 그거 봄에 나는 거 아니니?”
“양지바른 데서는 한겨울에도 나. 시퍼런 채로 겨울을 나기도 하고 새로 돋기도 하고.”
“그래서 몸에 좋다는 건가.”
“몰라, 독초 빼고는 약초 아닌 게 없더라. 암에 좋지 않으면 당뇨에 좋다 고혈압에 좋다 아무튼 말도 잘 만들어내.”
“넌 하나도 안 믿는 눈치다.”
“믿고 말고가 어딨어. 뜬소문 같은 건데. 그렇지만 밀가루도 소화제라고 속이고 먹으면 어느 정도 듣는다는 플라시보 효과라는 건 있겠지.”
“너 이런 것만 먹어서 건강한 거 아니니? 하나도 안 늙었어. 서울서 우리 자주 만날 때는 내가 너보다 십 년은 더 젊어 보였었는데, 아니지 십 년이 뭐야, 언제더라? 그때 너하고 갤러리아 명품관에 갔을 때 우리 사이를 모녀 사이로 봤잖니.”
“그건 넌 명품을 살 것같이 보이고 난 아니올시다, 로 보였으니까 그것들이 너한테 아부부터 하고 본 거지. 고런 것만 기억하는 걸 보면 너도 참.”
“속물이다 이거지, 그래 좋아 속물의 천박한 호기심도 채워주라.”
“뭘?”
“아까 얘기하다 말았잖아. 아이들이 중간에서 쇠사슬이 되어 사돈영감하고 널 묶은 것처럼. 그 쇠사슬은 유치원도 안 가고 놀이터도 안 가고 두 늙은이를 잡고 안 놓아주던?”
“정말 그랬어. 자식새끼 장례 치르고 난 두 늙은이 심정이 오죽했겠냐. 어린것들 때문에 실컷 울지도 못하고, 영감님이라도 시골집에 내려가서 통곡을 하든지 말든지 하고 나서 하루빨리 직장으로 복귀해야 할 것 같았지만 아이들이 놓아주지를 않아 우리 집으로 같이 왔지. 사돈집에서 하루 이틀 유할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러니? 거기까지는 우리도 상식이 통하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밤에 잘 때가 문제였다. 장례 동안 네 사람이 붙어다닌 것처럼 그렇게 남매가 가운데 눕고 두 늙은이가 양옆에 누워 자기를 바라는 거야. 아이들이.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 계집애가 빤히 쳐다보면서 왜 안 되냐고 묻는 거야? 아녀석은 뭐 좀 철이 난 줄 알았는데 역시 더 무서운 얼굴로 왜 안 되냐고, 즈네들이 안 보는 사이에 도망갈 거냐고 따지는 거야. 왜 안 된다는 걸 설명할 수가 없었어. 그때 우리는 그애들이 절박하게 원하는 거면 다 옳은 일이었으니까. 아이들이 잠든 후에 우리 두 늙은이 중 한 사람이 딴 방으로 옮겨갈 수도 있었지만 안 그랬어. 우린 둘 다 생때같은 자식이 별안간 이 세상에서 사라진 느낌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에 못지않을 어린것들의 공포감을 될 수 있으면 덧들이고 싶지 않았어. 혹시 아이들이 자다 깨면 얼마나 놀라겠어. 줄창 붙들고 있으려고 해서만 쇠사슬이 아니야. 좀 안정된 후에는 유치원도 가라면 갔지만, 전엔 유치원 버스만 태워주면 혼자 다니던 애가 꼭 할머니 할아버지 중 한 사람이 따라와서 지키고 있길 바랐고, 가끔 놀이방에 맡기던 계집애도 놀이방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하려고 하고. 이게 쇠사슬이지 이보다 더한 쇠사슬이 어딨냐. 그렇지만 집 안에 마냥 묶어둘 수만 없는 게 남자 아니겠어. 그 양반은 그때 아직 현직이었거든. 그래도 좀 철이 난 아녀석을 붙들고 설득했지. 할아버지는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빠도 없으니 할아버지라도 돈을 벌어야 하고, 할아버지 직장은 서울에서 다니기 멀다고. 그랬더니 글쎄 아녀석이 선심쓰듯이 흔쾌히 승낙하면서 다 같이 시골로 내려가자는 거야. 어미 아비 생전에 주말마다 시골에 다녀오더니 그때 정이 든 것도 있고, 다니던 유치원도 싫었던 모양이야. 유치원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저한테 전보다 더 친절하게 해주는 게 싫다는 거야. 너희들이 할아버지하고 같이 살고 싶은 건 좋은데 그러면 할머니하고는 같이 살 수 없게 되는 거라고 했더니 또 왜 안 되냐는 거야. 아이들이 말간 눈으로 두 늙은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왜 안 되냐고 따지니까 대답할 말이 없고.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 상식은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생각이 단순하게 정 리가 되더라고. 그래서 내려온 거야. 집 정리도 하고 말고 없이 몸만 내려왔으니까. 세간은 한방에 몰아넣고 나머지 방은 월세로 주는 것도 부동산에서 다 해주더라. 나는 월세 받아 수입 생기니 좋고, 영감님은 군청에 다시 나가 월급 타오니 좋고 아이들 하자는 대로 하니까 만사가 편하고 걱정이 없더라고.”
“그렇게 돈이 좋디? 느이 두 늙은이 옭아맨 게 쇠사슬이 아니라 금사슬이 었구나.”
“근심이 없어졌다고 했지 슬픔이 없어졌다고는 안 했어.”
“혼동해서 미안해. 여기 내려와서도 한방에서 네 식구가 잤냐?”
“한동안은, 애녀석이 초등학교 갈 때까지. 이제 학교 학생이 됐고 너는 남자니까 할아버지하고 같이 자면서 책도 읽어달래고 공부도 봐달라고 해야 한다고 타일렀더니 그때는 순순히 듣더라. 그래도 가끔 베개 들고 안방으로 스며들곤 했어. 그애한테는 할미가 엄마였으니까.”
“영감님은 몰래 스며들지 않고?”
“처음부터 네가 궁금한 게 그거였다는 거 알아. 한방에서 잠만 잤을까, 딴짓은 안 했을까. 잠만 잤어. 그렇지만 영감님이 딴 짓을 하고 싶어 했다고 해도 거절하지 않았을 거야. 그 짓이라도 그 영감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말야. 그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못 내주냐 못 내주길.”
“목석처럼 살았다는 건지 성인처럼 살았다는 건지 나 같은 속물은 못 알아먹겠네. 네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에 여보 당신도 아니고 하니가 뭐냐? 닭살 돋게.”
“하니? 으·응. 세 살짜리가 말 배울 때부터 할머니는 하니, 할아버지는 하지라고 하는 걸 고쳐주지 않고 그냥 따라했을 뿐이야. 하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하니한테 빠이빠이 해야지, 하는 식으로. 매사에 그런 식이었어. 그애의 어린양은 마냥 받아주고 싶어했고, 그애도 그걸 알고 우리 품을 떠나는 날까지 혀 짧은 소리로 하지, 하니, 했으니까. 그뿐인 줄 알아. 막내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고 학원이고 하지가, 영감님이 자전거에 태워가지고 다녔어. 학교도 그렇지만 학원도 다 읍내 나가야 있잖아. 조기유학시키려고 학원이다 과외공부다 온종일 아이를 조리를 돌렸으니까. 당신이 오래 못 살 거라는 걸 알았는지 줄창 끼고 다니고 싶어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떼어내고 싶어 조바심을 하더라고. 보통 부모들 같으면 자식이 독립할 시기를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 때나 시집 장가 갈 즈음으로 잡을 텐데, 이 양반은 큰애한테는 일찍부터 대학은 미국 가서 다녀라. 그래야 자립이 빠르다. 동생은 그때부터 네가 책임져야 한다. 이런 식이었어.”
“둘 다 유학 보내는 건 도시에서도 웬만한 부자 아니면 힘든 일인데 영감님 이 그렇게 돈이 많았니?”
“아이들 돈이 있잖아. 즈이 어미 아비 죽으면서 받은 보상금이 거액이었을걸. 그것 가지면 두 아이 대학 졸업시킬 만하다는 건 영감님만의 주먹구구는 아니었을 거야. 영감님 동기간들은 다들 미국에 사는데 그쪽에다가 후견인 부탁도 하고 학비 의논도 했을 거야. 여동생 하나는 부부의사로 잘산다니까, 아이들 돈을 떼먹지 않을 거란 믿음도 갔을 테고. 유학 간 데도 그이들하고 같은 도시 학교래.”
“그럼 아이들을 그만큼 기를 동안 그 돈은 축내지 않았단 소리네.”
“쓸 일이 있어야 쓰지.”
“사교육비만 해도 적지 않았을 텐데.”
“우리 돈으로 시킬 만했으니까 시켰겠지. 다 영감님이 알아서 했어. 이 싱크대 맨 아래 서랍 있잖아. 제일 깊은 서랍, 내가 거기다가 월말이면 서울서 월세 부쳐오는 걸 은행에서 찾아다가 현금으로 넣어놓고 아이들이 돈 달랠 때마다 거기서 꺼내주는 걸 보더니 영감님도 다달이 월급 타는 걸 찾아다가 거기다 넣어두더라. 당신 용돈이나 아이들 과외비도 일단 거기 넣었다가 그때그때 쓸 만큼 가져가데. 수북하던 현금이 거의 바닥날 만하면 또 월말이 돌아오고. 아껴 쓰지도 헤프게 쓰지도 않으니까 저절로 수입과 지출이 맞아떨어지더라. 영감님이나 나나 한 번도 돈문제 가지고 의논한 적도 걱정한 적도 없어.”
“그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살았냐?”
“직접적으로는 아무 얘기도 한 것 같지 않네. 오늘 저녁에 뭐해 먹을까도 아이들을 통해 물어보고, 영감님도 오늘 점심땐 하니한테 수제비 해달랄까, 이런 식으로 말했으니까. 깊은 속내는 말이 필요 없는 거 아니니? 같이 자는 것보다 더 깊은 속내 말야. 영감님은 먼 산이나 마당가에 핀 일년초를 바라보거나 아이들이 재잘대고 노는 양을 바라보다가도 느닷없이 아, 소리를 삼키며 가슴을 움켜쥘 적이 있었지. 뭐가 생각나서 그러는지 나는 알지. 나도 그럴 적이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 가슴을 저미기에 그렇게 비명을 질러야 하는지. 그 통증이 영감님이나 나나 유일한 존재감이었어. 그 밖의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더라. 남이 뭐라고 하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아닌데. 소문뿐 아냐. 요새 산이 좀 예쁘냐. 저 앞산을 좀 봐라. 어쩌다 서울 가면 그 야경은 또 어떻구. 성탄절, 연말연시가 돌아오면 더할 거야. 동생네 가면 일부러 야경 보러 광화문 나가자고 내 기분을 부추긴 적도 있으니까. 산의 단풍이나 빛의 축제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내가 있을 뿐 거기 실체가 존재한다는 실감은 안 들어.”
“네가 거액의 보상금 때문에 사돈네하고 합치게 됐다는 소리가 정말이 아니라고 쳐도 아이들을 미국 보내고 나서 영감님하고 단둘이 남게 된 후까지도 여길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는 건 변명의 여지없이 흑심이 있는 거 아니었을까.”
“글쎄다, 마음이 무슨 빛깔인지 본 적은 없지만 흑심이라면 무슨 뜻일까 짐작이 안 되네. 아이들 보내고 나도 곧 여길 떠날 생각이었지만 월세 든 사람한테도 시간 여유를 줘야 할 거 아니니? 은퇴한 영감님이 집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노인정이다 게이트볼이다 밖으로만 떠도는 게 좀 미안하긴 해도 월세 든 이가 기다려달라는 동안을 못 참고 보따리 싸들고 동생네 객식구 노릇 하긴 싫더라고. 근데 그동안에 영감님이 돌아가섰어. 자전거 타고 고개 넘다가 구르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졌는데 발견됐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어. 남들은 사고사라고 하지만 난 자연사라고 생각해.”
“어째서?”
“그때 까만 옷을 입고 있어서 그랬던지 하도 말라 부피가 안 느껴져서 그랬던지 낭떠러지 위에서 바라본 그 양반의 모습이 꼭 나뭇가지 위에서 떨어진 까마귀 같았어. 김현승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있잖니. 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라는.”
“다다랐다고 했지 떨어졌다고는 안 했어. 총이나 맞으면 모를까 새가 어떻 게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냐?”
“총은 안 맞고 자연사해도 죽으면 떨어질 거 아냐. 상처 하나 없는 고운 자연사였어. 어머, 밥 한 공길 다 먹었네. 더 먹을래? 호박잎쌈을 좋아하는구나. 이따가 호박잎도 좀 싸줘야겠다. 호박이 끝물이야. 저번에 호박넝쿨 걷으면서 연한 잎으로 따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거야.”
“밥은 됐어. 눌은밥이나 줄래? 네가 이렇게 이 집과 농토를 차지하고 앉았다고 네 거 되는 것 아니잖아.”
“이렇게 살면 내 거지 예서 더 어떻게 내 걸 만드냐?”
“그래도 이 세상엔 소유권이라는 게 있잖니. 네 소유로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들 몫으로 지분은 확실하게 해둬야 뒤탈이 없을 것 같은데. 영감님이 유서나 유언 같은 거 안 남겼어?”
“아니, 하루도 안 앓고 노인정에 가다가 굴러떨어져 죽은 양반이 어떻게 유언을 남겨. 유서 같은 거 쓸 사람은 더군다나 아니고.”
“유선 어떤 사람이 쓰는데?”
“그따위 건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심을 못 버리는 사람이 쓰는 거 아닌가?”
“정신적 영향력은 과욕이라 쳐도 물질적인 건 교통정리를 해놓고 죽어야 할 것 같아. 그 양반이 안 해놓았으면 너라도. 넌 여기 말고도 서울에 아파트도 있잖아.”
“재산은 더군다나 이 세상에서 얻은 거고 죽어서 가져갈 수 없는 거니까 결국은 이 세상에 속하는 건데 죽으면서까지 뭣하러 참견을 해. 이 세상의 법이 어련히 처리를 잘 해줄까봐. 손자들 말고 그거 가로챌 사람 아무도 없어. 손자들이 너무 잘나거나 너무 못나서 제 몫을 못 챙겨도 그게 이 세상에 있지 어디로 가겠냐?”
“세금 엄청나게 뜯기고 아이들한테 제대로 차례가 갈 것 같아?”
“법이 정한 대로 뜯겨 야지 어쩌겠어. 법 때문에 아이들이 보상금도 그만큼 받았으니까. 여기서 서울 가는 거 다 거저다. 버스값 정도는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되지 버스 한 번 타고 C역까지만 가면 노인표 한 장으로 서울까지 갈 수 있고, 서울서 이 집 저 집 동생네로 이동하는 것도 전철을 이용하니까 다 거저잖니. 누군가가 세금을 내니까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애걔걔, 그까짓 쥐꼬리만한 혜택.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것들이 털도 안 뜯고 삼켜버리거나 즈이들끼리 왕창 인심쓰는데 유용하는 액수에다 대면 그까짓 거 조금도 고마워할 거 없다, 너.”
“쥐락펴락이 아니라 들었다 놨다 하던 인간도 죽으면 이 세상의 있는 것 털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잖아. 그거 하나라도 확실하면 됐지 뮐 더 바라.”
“넌 그럼 그렇게 열심히, 온갖 소문 무시하고 키운 손자들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요새 내가 하는 짓을 보면 영감님이 그애들을 이 땅에서 떠나보내려고 돈 지키랴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면서 과외공부시키랴 온갖 주접을 다 떤 것과는 역으로 그애들을 끌어당기려고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내가 하는 짓을 수상쩍게 바라보곤 하니까.”
“무슨 짓을 하고 있는데.”
“교신(交信), 디카 들고 다니면서 앞산의 아기 궁둥이처럼 몽실몽실 부드러운 신록부터 자지러지게 붉은 단풍까지, 마당의 일년초가 피고 지는 모습, 숨어 사는 작은 들꽃들, 아이들하고 장난치던 시냇물 속의 조약돌들, 무당벌레, 풍뎅이, 지렁이, 매미 껍질, 뱀 껍질, 아이들하고 같이 보면서 가슴을 울렁거린 추억이 있는 것만 보면 닥치는 대로 디카로 찍어서 즉시즉시 아이들에게 보내곤 하니까. 이 할미는 잊어도 너희들을 키운 이 고향산천은 잊지 말라고, 주접떨고 싶어서 여길 못 떠나나봐. 피곤해 보인다, 너. 과식한 거 아니니. 늙으니까 시장한 것보다 과식이 더 힘들더라. 푸성귀는 곧 소화되니까, 안방에 좀 누울래? 그동안에 너 줘 보낼 것 좀 챙기게.”
“어쩐지 이 집 들어올 때부터 마당의 자전거하고 안방의 구닥다리 컴퓨터하고 동격으로 이상스러워 보이더라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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