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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과 지식인 - 프랑스의 사례
류 진 현1)
1940년에서 1944년에 이르는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프랑스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혹독한 비극을 경험한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이미 1914년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프랑스는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연속적인 충격들을 겪어야만 하였다. 1939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1940년 8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와 2백만 명의 포로를 남긴 채 독일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이러한 참담한 패배는 침략군에 의한 국토의 점령이라는 굴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광기 어린 전쟁의 폭력과 아울러 파시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이 나치 강점 시기가 남긴 후유증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는 인적, 물적 차원에서의 복구를 위해 숱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치 강점기의 위기와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중대한 충격은 이 기간 동안 프랑스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정체성의 위기이다. 1940년 6월 20일 페탱 원수가 나치 독일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외형상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적대적인 군사적 충돌은 종료된 듯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여론은 나치 독일과 비시 체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입장으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대혁명 이래로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공화국’의 이상을 간직해 온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이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공화국의 정체성이 자유 프랑스와 비시 프랑스 양 진영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마침내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상대로 적대 행위와 심지어 살육도 마다하지 않게 된 내전(la guerre civile) 상황은 1944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점차 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숙청작업(l’épuration)을 통하여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체성 분열의 체험은 50년이 지난 시점에도 프랑스인이 20세기의 가장 불행한 기억으로 꼽고 있는 정신적 상처로 남았다. 그리하여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집약된 너무도 비극적인 사건들의 와중에서 “벌어진 일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새로운 사건들의 소용돌이에 즉각적으로 휘말려야만 했던” 2)프랑스인들은 이러한 암울한 과거를 두고두고 반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성찰은 어쩌면 부역자 문제와 관련한 과거청산에 있어서 프랑스가 성공적인 예로 꼽히는 중요한 요인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의 미흡함을 거론할 때면 아직까지 반인류적 범죄자에 대한 색출작업이 종료되지 않았고 최근까지도 부역자 재판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프랑스가 흔히 모범적인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이렇듯 국외자의 시각으로 볼 때 성공적인 프랑스의 대독부역자 청산작업은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청산이 진행될 당시부터 이미 부단한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2) 실제로 해방 후 전개된 숙청과정에 대해 전적으로 만족하는 프랑스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혹자는 그 과정이 너무도 허술하고 미진하였음을 비난하고, 또 혹자는 그 과정이 너무도 난폭하고 지나쳤음을 지적하면서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지식인의 숙청』의 저자 피에르 아술린이 “이상적인 숙청 (l’épuration idéale)”3)의 요건들을 나열할 때, 그는 바로 이러한 미완의 청산, 혹은 실패한 청산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처럼 무성한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숙청작업, 특히 문화계의 부역자 숙청작업의 특수성과 함께 부역과 관련한 기억의 특징적인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프랑스에서의 나치 강점기 청산과정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2. 프랑스의 부역지식인 청산
1944년 8월 24일 파리가 해방되자마자 5년 동안 나치 독일의 지배 하에 협력을 강요당했던 프랑스는 비시 정부의 이념에 동조하고 ‘대독협력(collaboration)’에 앞장서서 활동했던 인사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한다. 경제, 정치, 군사, 문화계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숙청작업에서 특히 여론의 관심을 끌었던 분야는 문화 분야였다. 나치 점령기간 동안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이 구독하였던 친독 성향의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던 언론인, 나치를 찬양하고 비시 파시스트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던 문인들은 이러한 숙청작업의 주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활자화된 글마다 붙은 필자의 이름은 부인할 수 없는 부역의 증거가 되었으며, 단 몇 시간의 조사만으로도 부역지식인을 ‘적과의 내통’이나 ‘반역죄’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필요한 증빙서류들을 손쉽게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역지식인들이 쓴 저작들이 지니는 윤리적인 파급력으로 인해 문화계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분야였다.
2-1. 청산의 유형
부역지식인의 처벌로 국한하여 볼 때 숙청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 유형은 ‘법적인 청산 (l’épuration judiciaire)’으로 “독일 제국을 위해 고용되어 일했고 독일 편을 들었던 자들”4)을 기소하여 법정에 세우고, 반역행위를 규정한 형법 75조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문화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인 및 문화계 인사들이 법정에 서게 되는데, 극우파 국수주의자들의 사상적 아버지였던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1945년 1월 24일 재판, 노령을 감안한 종신형)를 위시하여, 조르주 쉬아레스 (Georges Suarez, 1944년 11월 9일 재판, 총살형), 뤼시엥 콩벨 (Lucien Combelle, 1944년 12월 28일 재판, 총살형), 앙리 베로 (Henri Béraud, 1944년 12월 29일, 총살형 언도, 감형 후 사면), 로베르 브라지약 (Robert Brasillach, 1945년 1월 19일 재판, 총살형), 뤼시엥 르바테 (Lucien Rebatet, 1946년 11월 재판, 총살형 언도, 사면) 등이 ‘적과의 내통(intelligence avec l’ennemi)’이라는 죄목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대표적인 지식인들이다. 뒤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법적 청산에서 주목할 사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브라지약이나 쉬아레스, 콩벨과 같이 해방 직후 부역에 대한 반감과 원한이 강했던 시점에 검거되어 재판 받았던 부역 지식인들은 어떠한 감형의 가능성도 없이 법정의 결정대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반면, 패주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의 지그마린겐으로 은신하였다가 체포되어 1946년에야 비로소 재판정에 섰던 르바테의 경우는 총살형을 언도받았으나 몇 달 후 감형되었고 1952년에는 특별사면으로 출감하게 된다. 이와 같은 극명한 대비를 통해 법적인 숙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여론이 불과 20여 개월 만에 격렬한 처벌의 요구에서 관용과 용서의 요구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문화분야에 특징적인 현상으로 문단 내의 자체 숙청작업이다. 그 주체는 나치 점령 기간 중 항독 비밀 결사단체로 결성되어 활동했던 전국작가위원회(CNE : Comité national des écrivains)였다. 항독 지식인 저항운동의 본산이었던 이 단체는 엄밀히 말한다면 공식적인 처벌권한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1944년 10월에 전국작가위원회가 발표한 금지작가 목록5)은 실질적인 구속력을 지닐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는 어떤 출판인도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 전국작가위원회의 요청을 소홀히 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 단체의 권위에 그 어떤 문인도 감히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목록에 오른 작가들은 그들이 저지른 부역행위의 경중에 상관없이 대독 부역작가로 간주되었고 어떤 출판사도, 어떤 신문사도 그들의 글을 출판하거나 게재할 수 없었다. 금지작가 목록에 오른 작가들은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건 침묵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드리외 라 로셸6)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든 작가가 있는가 하면, 장 지오노와 마찬가지로 몇 년간의 침묵을 감수한 뒤 다시금 작품 활동을 재개한 작가에 이르기까지 전국작가위원회의 주도로 수행된 숙청작업과 그에 따른 결과는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문인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excommunication)’의 방식을 따른 문단 내부의 청산은 그 효용성에 있어 만장일치의 동의를 이끌어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강요된 침묵이 해당 작가들의 활동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7) 어쨌든 금지작가 목록을 통한 문단 내부의 숙청작업은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에서 하나의 단절의 계기임은 분명한데, 그 이유는 이 목록이 향후 문화계의 지형이 재구성되는 데에 있어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2-2. 청산의 기준 : 윤리적 책임
법률적인 근거를 지닌 법적인 청산과는 달리 전국작가위원회에 의한 자체 청산작업은 평화시라면 그다지 관심을 끌지 않을 수도 있는 윤리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그 근거로 삼는다. 해방 후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쟁점이었던 윤리적 책임이란 ‘지식인이 자신의 정신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저작과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도덕적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질 것인가, 아니면 정신 활동의 결과물로부터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작가, 혹은 사상을 다루는 지식인은 창작의 순간에조차 자신이 쓴 저작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며, 체제와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장래에 자신이 쓴 문장들에 대해서는 추호도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지식인이 지녀야할 윤리적 책임의 근본 개념이 된다. 프랑스어에서 ‘지식인(intellectuel)’의 고유한 의미, 곧 지식의 담지자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토대로 끊임없이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는 이러한 책임의식이 내포되어 있다.8) 프랑스 역사를 통해 볼 때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문인들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왔는데, 18세기의 볼테르를 비롯하여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에밀 졸라, 20세기의 싸르트르와 부르디외 등은 이러한 지식인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의 윤리적 책임이 전후 부역 지식인 숙청기간만큼이나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경우는 아마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나치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가 한 지식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취한 선택의 결과가 단순히 명예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의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예외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9) 그러므로 윤리적 책임은 다양한 차원에서 이 시기 문인들의 행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지식인의 책임과의 관계 속에 글쓰기 행위의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입장들이 부각된다. 크게 나누어 본다면, 첫째 어떠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계속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치 치하에서라도 글을 쓰고 출판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 프랑스인임을 확인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대독 저항운동에 일조할 수 있다는 사명감을 내포한다. 나치의 검열을 받지 않았던 지하 출판사인 ‘자정 총서(Editions de Minuit)’와 여기에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던 베르코르, 엘뤼아르, 아라공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나치의 검열관에게 원고를 제출하는 것 자체를 부당하고 굴욕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공개적인 출판을 포기하되 집필을 중단하지는 않고 침략자들이 물러나 해방이 오기를 기다리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세 번째로 나치의 검열에 응하여 출판을 하되 창작 활동을 최소한으로 제한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저항운동에 참여한 작가들이 점령군의 검열을 받고 작품을 발표한다거나,10) 또는 나치 기간 내내 침묵을 지키다가 해방과 함께 비로소 작품을 출판한다거나, 또는 강점기 동안 익명으로만 글을 쓴다거나 하는 등 창작과 관계된 다양한 활동방식들은 이와 같은 입장 차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윤리적 책임은 부역행위 처벌을 둘러싸고 벌어진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에 있어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한다. 해방 직후의 숙청 기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작가가 스스로의 저작물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지녀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고 있었다. 심지어 부역지식인으로 지탄받았던 드리외 라 로셸 또한 “지식인은 일반인들의 의무와 권리를 뛰어넘는 의무와 권리를 지닌다. 벌어진 사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위험천만할 수도 있는 기회를 잡는 것, 역사의 여러 갈래 길들을 시험해보는 것, 이것들은 지식인의, 적어도 그들 중 몇몇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책임을 지고 불순한 무리들과도 뒤섞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11)라며 윤리적 책임을 원용하여 자신이 행한 부역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또한 부역지식인 청산과정에서 벌어진 논쟁에 있어서도 지식인의 역할에 내재된 윤리적 책임은 논쟁 당사자들 간에 합의된 전제 조건이었다. 다만 부역지식인 청산 논쟁에 있어서 적극적인 처벌 옹호론자에 맞서 예술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관용론자 혹은 처벌 반대론자들을 첨예하게 대립시켰던 요인은 책임의 정도에 있어서, 또한 책임의식을 느껴야 할 대상과 분야에 있어서의 차이점으로 국한되었다.
대표적인 처벌 옹호론자이자 『바다의 침묵』으로 저항 문학의 상징이기도 했던 베르코르는 “작가가 자신의 저작물들로 인하여 목숨을 바칠 만큼 그것들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작가의 명예란 치러야 할 대가와 글을 씀으로써 겪은 위험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부역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명확하게 표명하였다.12) 『전투』지에 게재된 시평들을 통해 청산론을 대변하였던 알베르 카뮈 역시 “청산 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개혁에 실패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13) 이밖에도 청산론 진영에는 싸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물론, 에밀 앙리오,14) 클로드 모르강, 가브리엘 마르셀 등이 참여하여 부역 지식인들을 처벌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숙청옹호론에 반하여 『피가로』지 (Le Figaro)의 프랑수아 모리악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작가들은 국민적 분열을 가져올 숙청의 범위를 가능한 한 축소하고 지식인에게 ‘오류를 범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용론은 숙청이 마치 제비뽑기 식으로 임의적인 처벌을 초래하는 데 대한 경계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즉 “단 한 명일지라도 무고한 사람이 청산의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15)에 차라리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장 폴랑은 ‘명백한 반역자’의 처벌은 인정하되 판단 착오에 의한 문인들의 오류는 용서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밖에도 조르주 뒤아멜, 폴 레오토 등이 용서를 통한 신속한 화합의 옹호자들이었다.
이처럼 지식인이 져야 할 윤리적 책임의 범위를 규정하는 문제, 특히 부역지식인을 극형에 처하는 문제를 놓고 청산론자들과 관용론자들 사이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전투』지의 카뮈와 『피가로』지의 모리악을 대립시켰던 논쟁은 해방 직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대독부역자 처벌을 둘러싼 이 논쟁은 빠른 속도로 그 열기를 잃게 되는데,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재건하는 문제가 시급한 해결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인들은 내홍의 양상을 띠게 된 책임 논쟁에 싫증을 내고 부역지식인 숙청에 실망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침묵과 화합을 희구하는 목소리가 청산론 진영에서도 나오기 시작했으며,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애초에 큰 희망을 걸었던 부역자 숙청 작업은 완수되지 못한 채 일단락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나치 강점기의 역사는 ‘흘러가지 않는 과거’가 되어 기억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3. 부역에 대한 기억의 양상
해방 이후 프랑스에서는 마침내 나치 독일의 지배와 파시즘의 억압에서 풀려난 작가들이 정신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앙리 루소가 지적하듯 ‘애도의 단계’16)가 실은 온갖 모순적인 현상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러한 모순들 중의 하나는 해방 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점령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대개의 경우 혁혁한 전과를 남긴 레지스탕스 활동의 신화와 레지스탕스 전사들에 대한 기억으로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국내에 남아 있던 프랑스인들이 직접 눈으로 목격한 부역행위와 부역자에 대한 기억과 증언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승자의 논리에 따라 대독 부역자들의 행위가 일종의 금기로 여겨지고 그것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백안시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 이유 이외에 해방 직후의 문학적 기록 속에서 드러나는 의식적인 억압 기제, 혹은 의도적인 묵언법(黙言法)을 설명하는 다른 이유들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1. 의도된 망각
해방 직후 그리 길지 않았던 대대적인 숙청기간 동안에 집필되고 발간된 회고록17)들을 살펴보면 ‘암울한 시대’에 대한 온전한 재구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기억을 위한 글쓰기를 목표로 한 이들 회고록은 일부분의 과거만을 되살림으로써 마치 기억의 형성을 가로막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치에 대항하여 벌인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기억은 필요 이상의 상세함으로 기술되는 반면, 부역 행위나 부역자들의 신상에 관한 언급은 대단히 제한되어 있고 그나마 불충분하게 언급되어 있다.
『전쟁 중의 지성』을 쓴 루이 파로의 경우 “적에 봉사하는 진영으로 넘어간 소수의 지식인들은 우리나라를 평가하는 저울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18)라는 말로 부역지식인들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게다가 그에게 있어서 나치에 협력한 문인들이란 “스스로 문단에서 발을 끊은 만큼 더욱 단죄하기가 어려운 몇몇 작가들에 해당”19)한다. 다른 예로『암울한 시대의 일기』에서 장 게노는 나치에 협력하여 명성을 얻으려 했던 ‘삼류문사’들을 이름 대신에 ‘모(某) 씨’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허황된 공명심에 들뜬 부역자들에게는 ‘하잘것없는 익명의 천박한 무리’로 전락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굴욕적인 대접이기 때문이다.20)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프렌(Fresnes) 감옥에서 수감되었다가 처형당한 로베르 브라지약의 옥중 저서에서도 부역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60년 입대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스스로를 소신에 따른 대독 협력자로 규정한 브라지약은 “한밤의 청년 캠프, 조국과 완전히 일체가 된 느낌, 전체주의적인 축제” 등이 구성하는 ‘파시스트적인 서정(poésie fasciste)’21)을 언급할 뿐, 대독 협력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소위 ‘국민혁명’과 ‘신질서’, 그리고 나치즘을 선전하기 위한 자신의 활동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부역의 기억은 브라지약에게서 의식적으로 지워져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쓴 『프렌 감옥의 시』에서는 이러한 망각을 용이케 하는 이미지들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22)
이처럼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비시 정부 체제가 와해된 직후 부역행위와 부역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의식적인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현상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그 세부적인 사항과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 구태여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대독 협력의 기억은 프랑스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비시 체제의 선전과 대독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선 지식인들의 부역 행위는 나치 점령기 하의 친독 신문들과 비시의 선전 팜플렛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던 까닭에, 각종 회고록에서는 간단한 암시와 상징만으로도 암울했던 과거가 생생하게 재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전국작가위원회가 발표한 금지작가 목록으로 인해 비시 체제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던 지식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상당 기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대독 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식인들은 물론 비시 체제 하에서 침묵과 중립으로 일관하였던 평화주의자들 역시 이 목록에 포함된 까닭에 부역에 대한 해명과 정당화의 시도 자체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세 번째로 가능한 설명은 지하 레지스탕스 투쟁을 통해 목숨을 걸고 나치에 대항하였던 지식인들이 문단의 핵심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서 대독 협력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논의하기에 용이한 주제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비시 체제 하에서 살아남은 프랑스인들이 부역이란 문제를 마주하고 불편함 내지는 일종의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부역의 기억을 애써 축소하고 지우려는 시도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보인다.
3-2. 기억의 내면화
해방을 전후하여 쓰여진 회고록들에서 나치 점령기의 어두운 과거가 불완전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특히 부역에 대하여는 의식적으로 침묵하는 이러한 현상만을 본다면 불행한 역사의 청산에 있어서 문화적 형상화를 통한 기억은 별다른 효용성을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프랑스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 부역의 기억은 온 프랑스 국민이 대독 저항투쟁에 일사불란하게 참여했다는 신화적인 담론이나 ‘레지스탕스 만능주의 (résistantialisme)’23)가 요란스레 울려대는 팡파르와 승전가에 묻혀 영원한 망각으로 빠져들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정이 그렇다면 과거, 특히 부역의 기억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 운명일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망각되었던 과거의 기억은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금 문화적 형상화의 전면으로 부각된다.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를 전후하여 부역 행위를 포함한 나치 강점기의 일상 생활이 문학과 영화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24) 이점에 주목한다면 기억을 통한 과거의 성찰은 정신적 충격을 일으킨 역사적 사건이 종료된 후 일정한 시간 동안 일종의 휴지기를 거친 다음 작용을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역사학자인 앙리 루소가 해방 이후 비시 체제에 대한 기념과 기억의 빈도와 강도를 따라 그린 ‘온도 곡선’25)은 이러한 기억의 움직임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일정한 휴지기를 갖는 기억의 양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은 과거에 대한 기억, 특히 의도적으로 감추고 지워버리고 싶었던 부역에 대한 기억이 집단적인 의식의 내면 깊숙이 침잠하였다가 다시금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마치 석회암 지형에서 표면수가 지하로 스며들어 지하 물줄기를 형성하여 흐르다가 일정한 시점이 지나 하류에서 솟아오르는 용출 현상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어두운 부분은 정신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한 세대, 혹은 그 이상의 잠복기를 거친 다음 다시금 의식의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일련의 움직임을 따라 시간을 가로질러 존속하게 된다.
부역의 기억과 관련한 침잠과 용출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설명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역사적 사건, 특히 정신적 충격을 초래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충격을 흡수할 일정한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비단 나치 강점기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이와 유사한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870년 보불전쟁에서의 패배에 대한 기억이 18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되었던 것 역시 이러한 애도 기간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로는 프랑스 사회의 틀을 송두리째 바뀌게 했던 68혁명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전후 세대의 욕구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반발이 분출하는 과정에서 기성 세대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어떠한 환상도 없이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형성되었고, 아버지 세대가 억압하였던 어두운 과거의 기억이 이러한 세대간의 단절을 통하여 표면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치 강점기가 남긴 심각한 상처의 원인이었던 부역의 기억이 망각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과거를 타인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의 형성이 주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집단 무의식의 차원으로 전이된 기억은 공식적인 기념과 추모의 방식과는 무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특성을 지닌다. 말하자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시점에 솟구친다는 것은 비시에 대한 기억이 지니는 특성 중의 하나”26)인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부역의 기억이 비단 세대간 단절의 시점인 70년대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이르기까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나치 강점기의 암울한 역사, 특히 부역행위에 관한 기억의 양상이 시사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시간과 그에 대한 기억의 시간 사이의 관계유형이다. 전자가 즉각적이고 일회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후자는 간접적이고도 반복적인 속성을 갖는다. 또한 양자는 반드시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관계 유형으로부터 우리는 기억을 매개로 한 과거청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데, 형상화된 기억은 경우에 따라 충격과 상처를 남긴 과거에서 멀어질수록 그 과거를 보다 충실하게 조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4. 결론 : 미완의 청산 혹은 청산의 시작
한 역사학자가 ‘미완의 애도(deuil inachevé)’27)라고 명명하였듯이 해방 직후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망라한 모든 부문에서 이루어진 프랑스의 숙청 작업은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많은 문제점들과 아쉬움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현대』지에서 레몽 아롱이 시의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숙청 작업이란 “법적인 형식을 취한 혁명적 행위로, 본질상 혁명가도 법률가도 만족시킬 수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는”28) 조치였다. 부역 지식인들의 숙청을 통한 과거 청산의 노력 역시 이러한 보편적인 숙청 개념에 내포된 문제점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로 전국작가위원회를 구성하였던 저항 문인들이 숙청의 주체로 활약함에 따라 일정 부분 엄정한 규명과 처벌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단 대독 부역과 관련된 혐의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이 금지작가 목록의 작성에 영향을 미쳤던 사실은 이러한 한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문제점으로 법적인 청산에 있어서의 엄정성과 형평성이 지켜지지 않았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부역지식인들을 처벌한 법적인 근거가 진정 나치 강점기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였는가 하는 점, 또한 글을 쓰는 작가들과 기자들이 준엄한 심판을 받은 데 반하여 그들의 글을 실었던 잡지들과 그들의 책을 발간한 출판사들 역시 그에 준하는 심판을 받았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청산의 강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너무 급격히 변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해방 직후에 재판을 받은 부역지식인과 도피 생활로 몇 년, 혹은 몇 달 후에 재판에 회부된 부역지식인 사이의 운명이 판이하게 달라진 것은 현재까지도 지식인 숙청에 관한 논란이 잦아들지 않고 있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한계들은 숙청과 처벌을 통한 제도적인 청산의 노력만으로 불행한 과거를 극복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의 양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야 말로 직접적이지만 제약적인 인적 청산을 넘어서 과거청산이 그 역사적 진실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머뭇거림, 무의식적인 침묵과 안정의 희구는 보다 충일한 기억의 재구성을 위한 준비 단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의 영속성이 배태되는 곳은 바로 이러한 토양이며, 탈신화적인 역사인식 또한 이러한 토양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처:역사와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
1)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 Henry Rousso, Le syndrome de Vichy de 1944 à nos jours,
2) 1947년 모리스 바르데슈가 프랑수아 모리악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은 그것(숙청)이 오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죄악이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사면이라 말하지만 우린 보상이라 말합니다”라고 항변한 것은 그가 로베르 브라지약의 매부였고 극우주의에 경도된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문제제기일 수도 있다. (Maurice Bardèche, Lettre à François Mauriac, p. 57) 반면 대표적인 숙청 지지파였던 알베르 카뮈가 이미 1945년 8월 30일자 『전투』지에서 다음과 같이 숙청에 대한 회의를 표명한 것은 부역자 청산의 성패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의 중대한 진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함을 독자들은 양해하시라. 이제 프랑스에서 숙청작업은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용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숙청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젠 상황이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Albert Camus, Camus à Combat, Gallimard, 2002, p. 594.)
3) Pierre Assouline, L’Epuration des intellectuels, Editions Complexe, 1996, p. 147.
4) Pascal Ory, Jean-François Sirinelli, Les intellectuels en France, de l’Affaire Dreyfus à nos jours, Armand Colin, 1986, p. 144.
5) 나치 강점기 동안 내적 청산을 위한 부역작가 ‘블랙 리스트 (liste noire)’는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해방 후 전국작가위원회가 공식적인 단체로 활동하게 된 이래 몇 차례의 진통을 거쳐 최종적인 목록인 1944년 10월 21일 『프랑스 문단』 (Les Lettres françaises)에 발표되었다. 이 목록은 총 158명의 부역 작가를 망라하고 있는데, 1차 목록에서 17명의 빠졌고 81명의 이름이 새로 올라있다. 목록이 전적으로 ‘문단 내부용임’을 명시하고 있는 서문과는 달리 실제로 이 목록은 부역 지식인 처벌의 준거자료가 되었다. (Gisèle Sapiro, La guerre des écrivains 1943-1953, Fayard, 1999, p. 577.)
6)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은 극우 파시즘에 경도되었고 나치 강점기 동안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발간되던 문예지인 『신 프랑스지』(Nouvelle Revue Française)의 편집장으로 활동했고 친독 잡지들에 기고했다. 해방 후 그는 직접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부역지식인들이 처벌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1945년 5월 15일 자살한다.
7) ‘내부적인 유폐’가 정신적 집중과 성찰에 유익하였으며 마르셀 에메 (Marcel Aymé)나 장 아누이 (Jean Anouihl)의 경우에는 과도한 숙청 자체가 문학적 창작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Pierre Assouline, op. cit., p. 144.)
8) intellectuel이란 단어는 원래 ‘피상적인, 모호한’ 등 다소 경멸적인 의미를 지닌 형용사였으나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을 즈음하여 명사로 사용되면서 현재 통용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Bernard-Henri Lévy, Les Aventures de la liberté, Bernard Grasset, 1991, p.9.)
9) 1944년 싸르트르는 『프랑스 문단』에서 이러한 예외적 상황을 특유의 논리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나치 점령기보다 더 우리가 자유로웠던 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막강한 경찰이 우리를 침묵 속에 묶어두려 했고, 한 마디의 말은 마치 원칙의 천명과 마찬가지로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박해당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행위 하나 하나가 참여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0)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1942년 점령군의 검열을 통과하여 출판되고, 싸르트르의 연극 『닫힌 문』과 『파리떼』가 점령기간 동안 상연되었던 것은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1) Jean-Marie Goulemot, “L’intellectuel est-il responsable (et de quoi)?”, Dernières questions aux intellectuels, Olivier Orban, 1990, p. 96.
12) Pierre Assouline, op. cit., pp. 85-86. 또한 베르코르는 다음과 같이 부역 작가의 위험성을 고발한다. “기업가를 작가와 비교하는 것은 카인을 악마와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카인의 죄악은 아벨로 그치지만, 악마의 위험은 한이 없기 때문이다.” (Arianne Chebel d’Appollonia, Histoire politique des intellectuels en France 1944-1954, t. I, Editions Complexe, 1991, p. 75)
13) Albert Camus, Camus à Combat, p. 433.
14)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작가는 당연히 침묵해야 한다”라는 에밀 앙리오의 주장은 모리악을 포함한 관용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인 ‘오류를 범할 권리 (le droit à l’erreur)’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Assouline, op.cit., p. 87.)
15) Ariane Chebel d’Appollonia, Histoire politique des intellectuels en France 1944-1954, t. I, Editions Complexe, 1991, p. 80.
16) Henri Rousso, op. cit., p. 19.
17) 우리가 참조로 한 회고록은 다음과 같다. Jean Guéhenno, Journal des années noires 1940-1944, Gallimard, 1947 ; Louis Parrot, L’Intelligence en guerre, Le Castor Astral, 1990 ; Robert Brasillach, Ecrit à Fresnes, Plon, 1967.
18) Louis Parrot, L’Intelligence en guerre, Le Castor Astral, 1990, p. 20.
19) Ibid.
20) Jean Guéhenno, Journal des années noires 1940-1944, Gallimard, 1947, p. 11.
21) Robert Brasillach, Lettre à un soldat de la classe 60, Plon, p. 142.
22) 예를 들어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두움과 밝음, 정적과 소란의 대비는 이러한 관점을 잘 부각시킨다. 밤과 어둠의 이미지는 ‘외부에서 벌어지는 바보짓’으로부터 시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시인이 애타게 부르는 밤은 ‘모든 간막이를 허물며’, ‘감옥이 세워놓은 벽들로부터 (그가) 멀리 떠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반면에 가을날의 아침은 ‘썩어 들어가며’ 새벽은 습기에 젖어있다. 또한 ‘안개’와 ‘고요’는 ‘폭풍우’와 ‘비’, ‘바람소리’와 대비되면서 ‘진정 (apaisement)’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상징한다. (Robert Brasillach, Poèmes de Fresnes, La Table Ronde, 1991, p. 19.)
23) 레지스탕스 만능주의(résistantialisme)는 숙청과정에서 표적이 되었던 극우 파시스트 세력이 만들어낸 신조어로 종전이 임박하여 항독 무장 투쟁에 막차로 합류하였으면서도 숙청 작업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지칭하는 경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점에서 레지스탕스 중심주의 (résistancialisme)와 구별된다. (Cf. Henri Rousso, op. cit., p. 43.)
24) 이러한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미셸 캥( Michel Quint)의 『처절한 정원』(Effroyables jardins) (2000)이나 사라 파레츠키 (Sara Paretsky)의 『기억의 거부』 (Refus de mémoire) (2003)와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25) Henri Rousso, Le syndrome de Vichy de 1944 à nos jours, Seuil, 1990, p. 251. 루소는 공식적인 기념 사업, 영화, 역사학 이렇게 세 부문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온도 곡선’을 구상하였다.
26) Ibid., p. 254.
27) Henri Rousso, Op. cit., p. 29.
28) Pascale Goetschel et Emmanuelle Loyer, Histoire culturelle de la France de la Belle Epoque à nos jours, Armand Colin, 2002, p.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