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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눅 2:25-33절
제 목 : 시므온의 성탄절
일 시 : 2022. 12. 21.
눅2:25-33/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성탄절이 될 때마다 화려한 장식과 성탄축하발표회와 같은 다양한 행사들로 사람들과 교회들마다 바쁩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돌아보면 좋은 추억거리였고 그 당시에는 교회중심으로 재미 있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성장과정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런 성탄절 행사를 마치고 나면 허전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행사중심의 성탄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되시는 예수님 없이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거룩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성탄절을 보내기를 원하시는지 그것 때문에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된 선지자 시므온에 관한 말씀입니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었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경위는 매우 특이합니다. 어떤 점에서 시므온의 성탄절이 특이했습니까? 오늘 거기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번 성탄절이 복되고 뜻 깊은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먼저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나 장소가 특이했습니다.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있으니라는 단어는 엔이라고 하는데 계속을 의미하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시므온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니 라는 뜻입니다. 누가가 동작이 완료되지 않은 뜻을 가진 미완료 동사를 사용한 이유는 그가 일부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시므온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시므온이 하나님의 약속 즉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느라고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에 관한 다른 기사를 보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그들의 목장을 떠났으며,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을 떠났지만 시므온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므온이 언젠가는 아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의 믿음 속에는 예루살렘이 장차 복음의 성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2:3/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는 말씀처럼 시므온은 장차 예루살렘이 복음의 성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곳에서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행1:4-5/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복음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에만 예수님이 계셔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고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성전에서 전파되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두 번째는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난 방법이 특이했습니다.
25절에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의롭다는 말은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씻고 범죄하지 아니하려는 거룩한 생활을 했다는 뜻이며, 경건하다는 것은 내적 성품이 겸손하여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함부로 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는데 그것은 당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봐 주시기를 갈망하는 애절한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가 얼마나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살던 시대에 유대인들 중에는 열심당원이라 해서 몸에 칼을 품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나라를 사랑했지만 그런 방법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서 모든 것이 인간의 죄 때문임을 생각했습니다. 열심당원들과 방법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도 처음에는 칼을 품고 다녔지만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는 그 칼을 버렸습니다. 삶의 방법이 바뀐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고 정권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꾸시고 정권을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과 교회가 바로 서면 절대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남의 죄를 탓하지 말고 나부터 바로 서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다 아름답게 해결해 주십니다. 칼을 품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3.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이 특이했습니다.
26-27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라 말씀하시고 특별히 처음 태어난 남자 아이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초대생이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서 율법의 관례대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성전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산모의 결례가 마쳐진 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남자를 낳은 산모는 33일 동안 부정하고 여자를 낳은 산모는 66일 동안 부정하게 여겨 그 기간 동안에는 바깥을 출입하지 않고 자기를 정결케 하다가 해당 기일에 하나님 앞에서 결례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7일간은 몸조리를 하고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33일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7일 + 33일을 합치면 40일 지난 뒤에 결례를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이 맞은 성탄절은 상당히 뒤늦은 성탄절이었습니다. 요즘 이단들이 성탄절 날짜 가지고 말이 많은데 기독교는 탄생일에 집착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탄절 날짜를 찾아 지켜야 구원을 받거나 아니면 정확하지 않은 날짜를 지켰다고 잘못된 종교가 되거나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의 탄생이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잘못된 것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이 아기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탄생은 참으로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기념할 만한 일이며, 어느 때든지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은 대단히 복되고 권장할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느 한 날을 정해서 성탄절을 지키든지 아니면 365일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억한다고 해서 잘못될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경배하면 그것은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4. 시므온은 사명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특이했습니다.
28-29절/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재여란 데스포테스라고 하는데 종의 주인을 의미하는 큐리오스라는 말과는 달리 절대적 소유권과 비할 바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낼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놓아주시는 도다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종의 해방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로 오랜 임무에서 놓이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메시아를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소망이나 꿈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놓아주시는 도라 라는 말씀 속에는 시므온이 얼마나 주님의 오심을 갈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이고, 또한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을 전해서 그들도 예수님을 만나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시므온이 예수님을 보는 눈이 특이했습니다.
30-33절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보았습니다. 즉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아기에 불과한데도 미래에 나타날 구원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므온은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보았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보아야 할 것은 지금 현재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이루실 미래의 구원과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길 위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고후5:16-17/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을 볼 때 새로운 피조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만났다면 육신의 시각이 아닌 믿음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 한 분만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까지 새로운 피조물이며, 존귀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복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이스라엘의 위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그분을 더 깊이 만나기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갈망보다 예수님을 더 가까이서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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