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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비노쉬가 브루노 뒤몽 감독의 신작 <까미유 끌로델>에서 불운했던 천재 조각가의 광기 어린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현대 조각가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댕의 제작이자 연인으로 잘 알려진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이 천재 예술가의 비극적 삶은 1988년 이자벨 아자니가 열연을 펼친 작품 <까미유 끌로델>로 이미 대중에게 소개된 바 있다.
이자벨 아자니의 까미유 끌로델이 젊은 예술가의 열정과 광기를 낭만적으로 그렸다면, 줄리엣 비노쉬의 그녀는 타고난 예술가로서 그리고 사랑에 상처 받은 여자로서 느낀 깊은 고독의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번에 개봉한 작품은 그의 삶 전체가 아닌, 프랑스 남부의 한 정신병원에 수감됐던 1915년 겨울, 단 3일 간의 이야기다.
현대 여류 예술가의 상징적 존재, 사랑에서 파멸까지
부쉐는 동료이자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꼽히던 로댕에게 그를 소개했고, 그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본 로댕은 자신의 조수로 일해줄 것을 제안한다. 까미유 끌로델이 로댕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나이 열아홉, 로댕은 마흔 셋이었다.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라고 조각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까미유가 로댕의 작품세계를 능가할 소지를 보여줄 무렵 로댕은 그를 소원히 하기 시작했고, 또 그의 곁에는 3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해온 연상의 연인 로즈 뵈레가 있었다. 로댕은 결국 까미유가 아닌 로즈를 선택했고,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까미유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까미유의 곁을 떠난 로댕은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그와의 작품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을 의식한 듯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 결과 그는 더 큰 명성과 부를 얻었다.
젊음을 다 바쳐 로댕의 작품활동을 도왔던 까미유는 복수심과 슬픔을 창작의 열정으로 승화시켰고, '왈츠'(1893), '중년'(1902) 등의 작품을 내놓으며 창작에 전념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제약과 로댕의 방해로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작업실에 은둔하기 시작한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돼 끼니를 거르고 집세를 내지 못해 주인에게 매일 시달려야 했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채 오직 작품활동에만 몰두한다.
이러한 까미유를 친구들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그의 가족들은 그를 파리 근교 정신병원에 넣어버린다. 뒤이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는 프랑스 남부로 옮겨져 쓸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까미유 끌로델>은 이 시기 그의 고독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극단의 고독과 고통 속의 30년
메마르고 적막한 풍경과 병원 환자들의 절규가 하루하루 그의 숨통을 조여오는 가운데 남동생 폴 끌로델의 방문 소식은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려왔던 동생과의 만남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삶을 30년간 이어가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동생 폴은 그가 죽기 전까지 면회를 왔지만, 장례식엔 참석하지 않았고, 까미유는 집단매장 당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예수의 삶>, <휴머니티>, <플랑드르>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둘러싼 철학적 주제들을 치밀하고 집요한 연출력으로 파고든 브루노 뒤몽 감독의 재능은 신작 <까미유 끌로델>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감독은 메마르고 적막한 주변 풍경과 까미유 끌로델의 얼굴을 교차시키며 고립된 천재 예술가가 뿜어내는 강렬한 내면의 동요를 파고든다. 카메라가 포착한 건조한 풍경과 병원 환자들의 절규는 다름 아닌 까미유 끌로델의 심리 상태다.
"영화 <까미유 끌로델>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뒤엉키고 깨져버린 정신세계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단어들이 부재된 이유는 그 세계 안에는 오로지 절규와 고통, 시간, 지루함만 있을 뿐이며 정신병이라는 자체가 말로서는 존재하는 감정의 병을 일컫기 때문이다. 영화는 까미유의 극도로 치우친 감정의 중심에 서서 그녀의 고통이 다다를 수 있는 그 마지막 지점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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