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제의 제기
Ⅱ. 불교의식(佛敎儀式)의 성립(成立)
1)계율(戒律)
2)청규(淸規)
3)의식(儀式)
Ⅲ. 차례(茶禮)의 근거(根據)
1)차의 역사
2)차례(茶禮)의 효시(嚆矢)
3)차례 풍속의 변천
Ⅳ. 불교의 차례
1)불교 차례의 정신
2)차례의식의 위치
3)위패 쓰기와 상차리기
4)차례 의식
Ⅰ. 문제의 제기
3천만 명이 차례를 지내기 위해 옮겨 다니는 설과 추석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설은 한 해를 시작하는 날에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집안 및 마을의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는 날이다. 추석은 조상님께 새로 난 곡식으로 지은 송편을 올리고 차례를 지내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명절이다. 설과 추석에 다같이 차례를 지낸다.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설이나 추석 명절에 차례를 지낸다. 누구나 늘 지내는 차례이기에 별 생각 없이 지내지만 차례만큼 잘 모르는 것도 없을 성 싶다. 차례는 국어사전에 '음력으로 다달이 초하루, 보름, 또는 그 밖에 명절이나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간단한 낮 제사' 라고 나온다. 그러나 간단한 낮 제사라고 해서는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차례(茶禮)라는 말 속에는 차(茶)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禮)라는 뜻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차(茶)를 제수(祭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는 제사라는 뜻이 차례(茶禮)라는 말 속에 들어 있다. 하지만 현재 일반 가정(家庭)이나 사찰(寺刹)에서 또는 유가(儒家)의 사당(祠堂)에서나 서양에서 온 종교인들의 차례에서도 차(茶)를 올리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명절을 맞이했을 때 각 언론 또는 생활의 현장에서 차례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잘못 이야기 하는 것이 다반사(茶飯事)이다. 차례(茶禮)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차(茶)의 뜻을 쏙 빼 놓고 이야기 하거나 ‘기제사 보다는 낮은 수준의 제사’이기 때문에 ‘버금 차(次)’를 써야 한다는 몰지각한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심지어 언론에서 명절 특집으로 각 종교의 차례를 알아본다고 하면서 유교와 기독교, 천주교의 차례의식은 다루면서 불교의 차례의식은 생략하는 경우 1990년 9월25일자 종교신문.
가 자주 있었다. 그럴 리가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실상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불교의 의식집 안에 차례 지내는 의식을 담아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교의 의식집으로는 『작법귀감(作法龜鑑)』,『범음집(梵音集)』,『석문의범(釋門儀範)』등 예부터 내려오는 의식집이나 근대에 대한불교진흥원이나 각 종단 및 각 단체와 스님들이 편찬한 각종 법요집(法要集) 또는 의식집(儀式集)이라는 이름의 책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어느 책에도 차례라는 항목이 들어 있는 책이 없었다. 그런데다가 사찰에서 올리는 합동 차례 의식은 특별한 차례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이에게 49재(齋) 등 제사를 지낼 때 집전하는 의식인 시식(施食)의범을 차례에도 그대로 적용 대개의 사찰에서 관음시식 또는 상용영반을 시행하면서 축원의 내용이나 청혼의 순서에 추석 또는 설 차례임을 일깨우는 언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찰이 대부분이다.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 뿐 아니라 스님이나 불자도 불교에는 차례의식이 없다고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가 불교 차례의식을 찾아 볼 수도 없었고 기자에게 불교 차례의식의 소스를 알려주는 이도 없었기 때문에 언론에 불교만 빼 놓고 다른 종교의 차례의식을 다루게 된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종 의식집에서 차례의식을 다루지 않았지만 필자가 ‘설이나 추석 명절 차례에 반드시 차를 올리자’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불교 차례의식을 제안한 이래 불교계 신문과 방송 및 여러 책에서 불교차례의식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단체와 스님 나름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차례의식 3귀의 등 일반법회 의식을 삽입하거나 좌선 및 광명진언이나 경전 독송을 삽입하는 경우 등이 있다. 이 경우에도 필자의 의식을 모본으로 하면서도 아무런 해명 없이 다른 의식을 가감하는 경우가 많다.
을 싣고 있어서 혼란스럽다. 그리고 차례에 올리는 음식과 그 음식을 차리는 방법과 위패(位牌)를 쓰는 방법 위패 쓰는 법에 후인(後人)이나 유인(孺人)을 쓰고 신위(神位)를 써서 유교적인 것을 답습한 경우가 많다.
등에 관한 것이 제대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의식은 의식을 집전하고 따르는 이들의 행동양식과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사고(思考)의 형성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능한 노력을 기울여 통일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본다.
특히 불교는 1천7백 년 동안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서 문화를 이끌어왔으며, 불교의례는 의례 그 자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3학(三學) 수행 중에서 첫 번째인 계학(戒學)이므로 수행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의례를 바르게 시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의 견문각지(見聞覺知) 모두가 수행 아닌 것이 없으며 일상생활 그대로가 의식이며 바로 깨달음의 도리라는 입장에서 의식의 중요성은 높이 인식하여야 한다. 그래서, 전 국민이 차례를 지내므로 꼭 차를 써서 바른 차례문화 예절을 정립하고,3학의 성취를 통해 해탈(解脫)을 얻어 붓다가 되기 위한 중요한 관문인 바른 의례의 정립을 위해 불교차례의식의 정립을 위해 노력 1990년대 초부터 불교 차례의식의 정립과 보급을 위해 노력해 왔으나 처음에는 많은 반응을 보이다가 해가 거듭할수록 법현 개인의 행사로 생각하고 동정란 정도로 취급하여 1997년에 천중사에서 제1회 불교차례의식 시연회를 열어 일반 언론까지 좋은 반을 보였으나 또 해가 지나자 마찬가지였다. 2005년도 9월 6일에도 열린선원에서 불교차례의식 특강법회를 열어 공영방송에까지 보도되었으나 아직 그 보급 정도는 미약하다.
해 왔다. 본 연구는 그 노력의 일환이다.
Ⅱ. 불교의식(佛敎儀式)의 성립(成立)
1)계율(戒律)
붓다의 밑에서 수행하던 비구들이 맨 처음에 할 수 있었던 행위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聞)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자기화 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에 앉아 골똘히 사유(思)하는 것 외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흔히 문(聞),사(思),수(修)가 3학으로 제시되지만 최초기에는 문(聞)과 사(思) 자체가 수행이었다.
. 즉 지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인 학문(學問)이나 예술(藝術)이나 기술(技術) 등을 하면 파계(破戒) 하는 것이 되었는데 그것은 출가(出家)와 출가자에게 생활필수품들을 제공하는 전통(傳統)이 누구에게나 있었기 때문에 출가자는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교단(敎團)의 구성 요건이 다양해지고 출가자의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지게 되면서 출가자로서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에 관하여 정해 놓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이 계율(戒律)의 출현이었다. 본디 계(戒)와 율(律)은 개인의 수행을 위한 것인 계와 교단(敎團)의 운영 및 유지를 위한 율로 나뉘지만 통상 함께 쓰이고 있다. 그리고 붓다의 깨달음 이전의 행위를 인행(因行)이라 하고 인행을 하던 때의 존재를 보살(菩薩)이라 했는데 보살로서 존재한 것이 어느 한 생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양한 존재로 살면서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이 인행(因行)으로 인식되고 그것이 출가자의 다양한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다양한 활동 가운데 어느 것이 성불(成佛)을 위한 수행(修行)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계율의 의미인 것이다. 즉 성불(成佛)을 위한 수행에 필요한 행위가 아닌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계율의 기능인 것이다. 이 계율을 출가 수행자들은 늘 지송(持誦)하여야 하지만 나머지 수행과목에 대한 중요성이 커짐으로써 일정한 시간에 지송하고 지킨 정도에 대한 반성과 지켜봄이 행해지게 되었다. 일정한 시간에 지송하는 것은 비단 계율만이 아니라 경장(經藏)도 마찬가지였다. 지송을 제대로 하는 것이 또한 소박한 수준의 의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2)청규(淸規)
붓다의 제자로 살아가는 수행자들은 붓다가 지은 계율을 지켜야 하는데 그 계율을 모아 놓은 것이 율장(律藏)이고 율장에 규정해 놓은 대로 살면 되었다. 하지만 계율도 시대에 따라 또는 부파(部派), 종파(宗派)에 따라 행동양식이 달라지게 되어서 조금씩 달라졌다. 더구나 아주 다른 형태의 불교인 선종(禪宗)이 중국에서 생겨나면서 새로운 계율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중국인의 사유구조를 잘 반영해 생긴 불교의 종파인 선종(禪宗)의 출현으로 인해 새로 생긴 일종의 계율이 청규(淸規)이다. 선종이 중국불교의 제 위치를 차지하기 전까지 선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선사(禪師)들은 율(律)을 수행하는 율사(律師)들이 사는 율사(律寺)에 깃들어 살았다.
당나라 중기에 이르러, 선종이 성행하였으니, 백장회해(百丈 懷海)선사는 선승이 율종의 사찰(律寺) 내에 거주함에 있어서 비록 별원(선승을 위한 별원)이 따로 있으나 다만 설법과 주지(住持)에는 법에 합치하지 않음을 통감하였다. 그리하여 元和 9년(814)에 선승이 거주하는 제도를 별도로 만들었다. 덕망이 높은 “長老”를 화주로 삼고 “方丈”에 거처하도록 하였으며, 불전(佛殿)을 세우지 않고 다만 “법당(法堂)”을 세웠으며, 공부하는 승려는 모두 “승당(僧堂)”에 거하도록 하고 수계의 년차에 따라서 안배하였으며, “장연상(長連床)”을 설치하여 여기에서 함께 좌선하거나 누워서 쉬도록 하였으며, 합원(閤院)에서 대중이 “朝參”과 “夕聚”를 가졌으며, 장로는 상당(上堂)하였으며, 일반 승려는 옆에 섰으며, 빈(賓)과 주(主)는 문답을 하면서 종요(宗要)를 드날렸으며, “공양(齋粥)”을 마련하여 2시에 고루 나눴으며, 또한 “울력(普請)”법을 시행하여 상하가 같이 일했다. 이렇게 선사들의 수행과 율사들의 수행이 다르다 보니 선사들의 수행양식을 규정할 필요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이 청규(淸規)가 생겨난 배경 林 子靑,淸規,中國佛敎 弟2集,中國佛敎協會編,1989 제3쇄,p348.
이다. 그동안 율사(律寺)에서 진행하던 예경(禮敬),공양(供養),참회(懺悔) 등의 수행법에다가 좌선(坐禪) 및 울력(勞動) 등에 관한 규정을 덧붙였다. 그것이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선사가 지은 백장청규(百丈淸規) 등 선종청규(禪宗淸規)이다.
3)의식(儀式)
그러한 청규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고 ,정토종(淨土宗)과 밀종(密宗)의 의식이 첨가되어 더욱 복잡한 의식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 의식을 모아 놓은 것이 의식집이다. 의식집은 청규와 마찬가지로 선사들에 의해서 편찬되는데 그 이유는 청규의 출현과 같은 것이다. 선사들의 사유구조를 통일하고, 계율을 늘 지송하는 율사들과 달리 참선을 주로 수행하는 이들이 책을 보고 할 수 있으며,초심자들을 일정하게 교육할 수 있다는 점이 의식집의 기능이다. 의식집은 『작법귀감(作法龜鑑)』,『범음집(梵音集)』등의 이름으로 편찬되었고 근대에 안 진호(安震湖)스님이『석문의범(釋門儀範)』이라는 의식집을 낸 이래 최근에는 의식집의 편찬이 각 종단과 단체 및 스님들의 생각과 노력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불교의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10대원(大願)을 중심으로 각종 수행방법을 의식화 한 것으로 석문의범에는 18가지 종류의 의식 安震湖,『석문의범(釋門儀範)』,경성,卍商會,1935.
예경,축원,송주,재공,각소,각청,시식,배송,점안,이운,수계,다비,제반,방생,지송,간례,가곡,신비 편 등.
을 채집하였다. 현대에는 일반 불자들의 의식수준(意識水準)이 높아지고 가정에서의 수행과 의식의 집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한글의식과 가례(家禮)의식 본격적으로 가례가 다뤄지게 된 것은 필자가 월간 봉은에 1997년1월부터 1999년 까지 약 3년간 ‘불자가례’라는 제목으로 일반 불자들이 스님이 안 계신 곳에서 직접 진행할 수 있도록 구성한 의식이 처음이자 가장 완성된 형태이다.
등이 편집되고 있다.
Ⅲ. 차례(茶禮)의 근거(根據)
1)차의 역사
차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다. 당나라 육우(陸羽. 727-803)가 쓴 『다경(茶經)』에 「 차를 오래 먹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있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신농(神農)씨가 썼다는 『식경(食經)』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당시의 사람들은 신농황제 때인 BCE 2737년 경에도 차가 쓰였다고 믿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鄭 英善 ,『한국 茶文化』,도서출판 너럭바위,P35(1998).
. 신농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백 가지 풀을 맛보아 약초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BCE 59년에 서한(西漢)의 왕포(王褒)가 쓴 노비매매문서인 동약(僮約)에 ‘무양에서 차를 사다 (武陽買茶)’‘차를 끓이다 (烹茶)’ 『중국의 다도』 김 명배 역저, 명문당,p22(1985) 재인용.
고 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BCE 2세기 무렵에는 이미 차 마시는 풍습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삼국사기』에, ‘차는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있었다’ 는 기록김 부식, 『삼국사기』제10권 신라본기 제10,42,흥덕왕3년 12월.
이 있고, 설총(薛聰)은,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茶酒以淸神)’고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년)에게 화왕(花王)을 비유해 간하였음이 『삼국사기』에 기록김 부식, 『삼국사기』제46권 ,열전 제6,薛聰 .
되어 있고, 원효도 굴 속 암자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61년 신라 문무왕 때 가야의 종묘에 시절제사를 지내는 음식으로서 떡, 밥, 과일 등과 함께 차(茶)三國遺事,卷第2,駕洛國記
가 놓였는데 다른 제수보다도 제일 앞에 목록이 쓰인 것으로 보아 가장 중요한 제수였으며 그것이 차를 중심으로 한 제사 즉 차례였음을 알게 한다. 이렇게 차 마시는 풍속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차를 활용해서 제사 또는 차례를 지내게 되었는데 가야의 종묘에 지냈던 시제에 올린 제수 중에서 차가 가장 먼저 올라 있는 것은 알려주는 바가 크다.
2)차례(茶禮)의 효시(嚆矢)
처음 차례를 올린 것이 언제였느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 삼국유사에 나오는 충담(忠談)스님의 이야기를 든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표훈대덕(表訓大德)」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경덕왕(景德王)이 즉위한 지 24년 되던 해(765) 삼짇날(음력 3월 3일) 귀정문(歸正門)에 올랐다. 왕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능력 있는 스님을 데려오라 하자 위의(威儀)를 갖춘 큰스님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왕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내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衲衣)를 걸치고 앵통(櫻筒) 혹은 삼태기를 걸치고 오는 모습을 보고 기쁜 표정으로 누상으로 인도했다. 왕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충담(忠談)이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삼화령(三花嶺)에서 오는 길입니다." "무엇하고 오시었소?" "저는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달여서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님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茶)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한 잔 주겠소?" "물론이지요."스님이 차를 달여 왕께 드렸는데 맛이 신묘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내 듣건대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가 뜻이 깊다는데, 나에게도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살 노래를 지어줄 수 없겠소."스님은 그 자리에서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임금은 아버지이고신하는 사랑을 하실 어머니요,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할지면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꾸물거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나라 안의 유지됨을 알리라.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나라 안이 태평하리라.“ 三國遺事,卷第2,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條,필자 재구성.
남산은 물론 경주의 남산을 말한다. 이 자료를 여러 차 관련 서적에서 다도(茶道)의 비롯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자료에서 충담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모두들 '다도(茶道)' 또는 재주 예자를 써서 '다예(茶藝)의 효시'라고만 했지, 예도 예자를 쓴 '차례(茶禮)'에 주목하는 이 정 영선,김 의정 등은 차례로도 본다.
는 없었다. 또, 나중에는 차례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차례의 출발이라고 보거나 현재의 가정 차례에 접목하려 한 이가 드물었다. 하지만 부처님께 차와 향을 올리고 절하는 것을 예불(禮佛)이라 하는 것처럼 충담스님의 그것도 차례라고 불러야 하리라. 그리고 충담스님이 중요하고 좋은 날 부처님께 차를 올리고 나서 다른 일을 했듯이, 모든 후손들이 모여서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나서 다른 일을 하는 아주 중요한 행사가 차례이다. 충담스님이 차례를 삼짓날(3.3)과 중굿날(9.9)에 올렸듯이 대개 양이 겹치는 날이나 초하루, 보름 등에 올리던 차례가 1년 중 명절의 중요성이 설날과 추석으로 바뀌면서 설날과 추석 명절에 지내는 차례가 대표성을 띄게 되고 의례히 차례 하면 추석과 설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3) 차례의식의 위치
불교의 의례는 수행의 하나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순수한 공양의 의미에서 붓다의 인행 시 공양의 의미가 확대 해석되어 수행으로 승화된 것이다. 혼인(婚姻)을 뜻하는 화혼(華婚)의 연기(緣起)가 되는 선혜동자(善慧童子)의 연꽃 공양, 부처님 오신 날 연등공양의 연기가 되는 난다의 등공양(燈供養)이 대표적인 예이다. 차례는 근본적으로 공양의례에 속한다. 불교의 공양의례는 초기불교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육법공양을 말해 왔다. 그것은 향(香),등(燈),다(茶),미(米),화(花),과(果)의 여섯 가지로 불보살님께 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큰스님들의 탄신일에 지내는 제사를 다례(茶禮)라 하고, 아침에 올리는 예불에 차를 올리면서 하는 예불의 게송이라 하여 다게(茶偈)라 할 뿐만 아니라 낮에 올리는 불공에도 차를 올릴 때 하는 의식인 다게가 꼭 들어간다. 특히 4월8일 스님중의 큰스님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오신 날 차를 올린다는 기록이 선원(禪院)의 청규를 담은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권2 <불강탄조(佛降誕條)>에 나온다. 부처님오신 날 향화 등촉과 다과 진수를 올리고 공양한다는 내용 大正藏48,pp.1115~1116.
이다.
불교의 제반의식을 편집해 놓은 석문의범(釋門儀範)의 모본이라 할 수 있는 책이 백파(白坡: 1767-1852)스님의 『작법귀감(作法龜鑑)』이다. 작법귀감에 천도의식 전에 영가를 부르는 의식인 대령 진행방법을 담은 것이 <대령정의(對靈正儀)>편이다. 대령정의 가운데 다게(茶偈)에 "내 이제 청정수를 감로차로 만들어서 증명(證明)님께 올리오니 어여삐 여겨 받아주소서 (我今淸淨水 變爲甘露茶 奉獻證明前 願垂哀納受)" 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여기서 증명은 죽은 이의 영혼을 아미타부처님께 인도하는 대성인로왕보살(大聖引路王菩薩)을 이르는 말로 주로 지장보살이 그 역할을 담당하지만 관세음보살 등 다른 보살도 그 역할이 가능하다. 안 진호스님의 『석문의범(釋門儀範)』에도 부처님 오신날에 6법공양(六法供養)을 올린다는 내용 석문의범(釋門儀範)』,pp.126~128.
여기에서는 차(茶)를 감로차(甘露茶)라고 하였으며,향,등,화,과,미의 공양물도 각각 해탈향(解脫香),반야등(般若燈),만행화(萬行花),보리과(菩提果),선열미(禪悅米)라 하여 각각 그 상징하는 바를 나타내고 있음.
이 있다.
늘 부처님께 올리는 횟수 많은 예불에는 청정수를 올리고 나머지는 차를 썼음이 다른 모든 의식문제에 차를 올리는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 작법귀감의 다게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국혼청(局魂請)에도 법주(法主)가 차(茶)를 올리고 삼배 드리는 예식이 나와 있을 정도이다. 아쉽게도 다게는 오늘날까지 아침예불에 전승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일부 사찰과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에서 아침저녁 예불을 오분향례(五分香禮)로 단순화하면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렇듯 불교에 차례가 있다는 것을 뛰어 넘어 오히려 모든 차례 의식의 뿌리가 불교에 닿아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지만 불교의 아침예불이나 불공의식의 다게는 흉내만 낼 뿐 차를 쓰지 않는다. 그냥 물을 올리면서 다게를 젓순다. 그래서 아침예불이나 불공의 다게를 새기면서 “내 이제 청정수를 올리오니 감로차인 듯 어여삐 받아주시라”는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다게의 바른 뜻은 차를 올리면서 하는 의식이므로 “내 이제 청정수를 감로차로 다려서 삼보님께 올리오니 받아주소서”라고 새겨야 옳다. 맑은 물이 차 잎을 만나 맛있는 차가 된다는 것을 옛 스님들이 그렇게 표현한 것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진 이가 많지 않은데 정 영선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청정수가 감로차로 변해지이다’라고 새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차가 없거나 번거로워서 물만 떠 놓고 전해오는 다게를 그냥 읊었을 뿐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잘못이다. 정 영선,앞의 책 p362,주36.
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기록상 차례의 효시는 충담스님이 미륵세존님께 차를 다려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가락국 김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가락국 종묘에 차례 지낸 이야기가 나오고, 문무왕의 아들인 보질도(寶叱徒)와 효명(孝明)이 오대산에서 날마다 산골짜기의 물로 차를 달여 1만의 문수보살에 공양한 이야기三國遺事,卷第3,臺山五萬眞身條
도 있다. 또 중국에서는 송 문제(文帝) 3년(426) 유경숙의〈이원(異苑)〉에 차례 지낸 내용이 나온다. 한편, 국교가 불교인 고려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 사신 영접, 왕자(녀)와 태후 등의 서임과 공주의 결혼식, 원자 탄생, 중형벌자 판결을 위한 문답의식에도 차례를 지냈을 정도로 차가 성행했다.
4) 차례 풍속의 변천
유교 예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주자(朱子: 1130-1200)가 차와 관련이 있는 고장에서 생활했고 뒷날 명나라의 구준(丘濬)이 편집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차를 쓴다고 적혀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충담스님의 차례에 이어 신라의 많은 이들이 차례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가야에서는 7세기에 세시 제사 즉 차례를 지낼 때 가장 중요한 제수를 차(茶)로 하였으며, 문무왕 때 김수로왕의 시제에 차를 올린 것은 종묘다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초에는 성종(成宗)이 최 승로 등의 부의(賻儀)에 뇌원차(腦元茶)와 대차(大茶)를 하사한 기록이 나온다. 팔관회(八關會)의 소회일(小會日) 즉 하루 전날에는 왕에게 다식을 올리고 태자와 신하들이 다식을 먹는다고 하였으며 그것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의식이었든지 최 승로가 ‘왕께서 손수 차를 갈거나 하여 성체에 무리가 되니 안타깝다‘고 할 정도로 차례에 힘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문물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인 『고려도경』32권 기명(器皿)3에는 고려의 조정에서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로서의 차마심과 관사에서의 차마심을 기록하고 있다.
요즈음 큰스님의 제사만을 다례(茶禮)라고 하는데 고려 말 이 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종의선로의 제사에 차와 과일을 올렸다고 하였으며, 역시 고려말 조선초의 스님이 함허(涵虛)스님은 진산스님께 드리는 제문이 남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고
한 조각 마음은 찬 잔 차 속에 있도다
한잔 차를 맛보고 나면
무량한 즐거움 일어나리 己和,『涵虛語錄』<薦珍山和尙祭文>,정 영선 앞의 책,p131에서 재인용.
23) 이 현,유림가의 제례와 봉다,1999년 9-10월호.차문화
“
조선 시대에는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왕세자가 스승과 시강원(侍講院)의 정1품 관리 및 빈객을 모아놓고 경서와 사기를 복습하며 강론하는 것을 회강(會講)이라 하였는데, 이때 다례를 행하고 술과 과일을 베풀었다. 『세종실록』에는 ‘더운 여름에는 회강을 없앨 것인가, 회강을 하더라도 다례만 행할 것인가’를 신하들이 의논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성종5년(1474)에는 ‘왕이 예조에 전하기를 봉선전의 대소제사에 술 대신 차를 써라’고 했으며 왕과 왕후의 기제사 때나 묘 제사 혹은 주다례(晝茶禮)때에 주로 ‘다탕’을 올렸다. 이렇게 술보다 차를 쓰라고 한 때도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주자학이 정치이념이 됨으로써 불교는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그러므로 절의 재정사정이 나빠져 차의 증산은커녕, 절 주변의 많은 차밭을 관리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생활불고와 더불어 번성했던 다문화는 퇴조하기 시작했고, 절이나 승려와의 교류도 적어져 차인구도 줄어들게 되었다. 다세는 너무 무거웠다. 조선 초 이목이 쓴 『다부(茶賦)』에‘차는 세금을 내어야 하니 도리어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는데도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가?’라고 했다. 정묘호란 이후에 천지차와 작설차를 후금(1636년부처 청나라가 됨)에 보내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에 대한 종속관계가 계속되어 해마다 차 1,000포 혹은 200짐씩을 청나라에 바치는 등의 수탈이 극심했으며 15세기에는 차 한홉과 쌀 한 말하던 것이 17세기에는 차 한말과 무명 30필을 바꾼 사실을 볼 때 차가 얼마나 비쌌는가 짐작이 간다. 그러다 보니 차가 나지 않는 지역이나 차를 마시는 것이 적어진 뒤에는 밤(栗)을 가루내어 점다(點茶)하거나 물이나 술 혹은 다식(茶食)을 차려놓기도 했다.
조선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弔義祭文) 사건에 연루되어 참형당한 한재(寒齋) 이목(李穆)선생의 5백주기 추모제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던 이들이 이목선생의 부조묘(父祖廟)에 제사를 지낸 홀기(笏記)에서 “철갱봉차(撤羹奉茶)” 즉 “국을 내리고 차를 올렸다”는 내용이 발견한 일
이 있었다. 한재(寒齋)의 종중(宗中)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종전대로 숭늉을 올릴 것이냐 한재선생이 조상님께 올린대로 차를 올릴 것이냐를 논의한 끝에 조상님이 하신대로 차를 올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재선생은 경기도 김포출신으로 김종직(金宗直) 선생에게 수학하여 25세 때 장원급제하고 영안남도(함경남도) 병마평사를 거친 인물로 참형 당하고 부관참시가지 당했다가 중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 등을 추중받기도 한 곧은 인물이다.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선사(草衣禪師)보다도 3백여 년이나 앞서서 1300여자의 다부(茶賦)를 그의 문집인 『한재문집(寒齋文集)』에 남겨 ‘차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차와 관련이 많은 분이다.
1632년 한글로 간행된 신식(申湜: 1551-1623)의『가례언해』에는 삭망차례에 대해 『주자가례』와는 달리 1일에는 술과 과일을 쓰고 보름에는 차를 쓰라고 했다. 같은 시기 영조(英祖)도 비싸고 귀한 차 대신에 술이나 뜨거운 물 즉 숭늉을 쓰라고 명을 내린다. 이후 점차 차를 쓰기 보다는 술과 숭늉을 스는 풍속이 늘어나게 되었다.
Ⅳ. 불교의 차례
1) 불교 차례의 정신
우리 선조들은 차를 대단히 귀하게 여겨서 며느리가 들어왔을 때 사람됨을 알아보는 데에도 차를 썼다. 며느리가 들어왔을 때 조상님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며느리가 직접 달인 차를 사당에 올렸다. 그것을 고묘(告廟) 또는 묘견례(廟見禮)라고 했다. 며느리의 솜씨로 직접 달인 차를 조상의 사당에 올리고 조상님이 맛있다고 판단하면 그 며느리는 좋은 가문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들어 온 집안의 대들보라고 보는 것이다. 차를 달이는 솜씨가 바로 모든 교육, 문화, 예절의 총화(總和)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조상님은 말이 없으므로 말이 없는 조상대신에 그 차를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나눠 마시는 것을 에서의 회음(會飮)이라 했다. 그렇게 회음하는 찻잔이 커다란 찻잔이어서 가족들의 단합을 도모하기도 했다. 같은 찻잔으로 차를 마심으로써 동질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제사 지낸 뒤 제주로 썼던 술을 마시는 음복(飮福)문화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온갖 일에서 차를 빼 놓지 않고 썼으며 이름 자체에 차가 들어있는 차례에는 반드시 차를 올려야 한다. 단, 모든 것이 민주적인 현대사회에서 가족 구성원 중 어느 개인의 의견대로만 해서는 안 되므로 회의를 통해 의견을 일치해서 차를 꼭 쓰도록 해야 한다. 요즘은 누구나 차를 가지고 있는 시대이며, 제사에 쓰는 술 종류가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차의 사용은 설득력을 얻기가 쉬울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유무와 종류에 관계 없는 것이다.
불자라면 불교의식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사찰에서 시행하고 있는 모든 불공(佛供), 시식(施食) 등의 의례문을 살펴보면 불경의 핵심사상과 선조사(先祖師)스님의 오도(悟道)의 경지와 경책(警策)말씀 그리고 진언(眞言)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내용을 알기만 하면 기가 막히게 좋고 그야말로 깨달음의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진행하는 스님도, 따라 가는 신도도 다 같이 내용을 모르고 있어서 답답한 현실이다. 그것은 의식의 구성이 인도어의 변형인 진언과 한문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별도의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 춤을 추듯 변화하면서 한문교육을 하지 않음으로써 근래에 출가한 승려는 일반인들과 똑같이 한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게다가 염불을 많이 하고 있는 승려들은 강원 등의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현대 불교의 질곡시기에 의식에 대한 이해를 잘못해서 가볍게 본 것 또한 큰 원인이다. 그리고 불교의 핵심사상이 ‘욕탐을 없애고 해탈을 얻어 붓다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바라문교의 제사장처럼 또는 기독교나 천주교의 성직자처럼 스님이 아니면 의식을 봉행할 수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 또한 문제이다. 또한 일반 재가불자들에게는 불교적 교학이나 수행체계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했고 의식은 더더욱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도 모르고 그저 가만히 있다가 자기 가족의 주소가 읊어지면 그 때 나가서 불전 올리고 절하고 나서는 점심공양하고 가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하는 승려나 그렇지 못한 승려 모두가 보현행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예경제불원(禮敬諸佛願), 칭찬여래원(稱讚如來願), 광수공양원(廣修供養願) 등 대승보살의 최고 계위에 있는 보현 보살이 하는 열 가지 수행 중에서 많은 부분이 의식을 통한 수행임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현재 불교식 차례를 올리는 사찰도 거의 모두가 옛 시식문 그대로 스님이 시식 염불을 하고 신도들을 절만 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것이 불교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實有佛性)의 정신에 맞는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다만, 현재 스님들이 하고 있는 의식은 ’송문관의(誦文觀意)‘라 해서 입으로는 글을 읽되 그 뜻을 관할 수 있는 스님이 염불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맞는 것이다. 그것은 일러서 ’교화의식(敎化儀式)‘이라 할 수 있고, 스님이나 신도가 다 같이 하는 염불은 ’수행의식(修行儀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위패 쓰기와 상차리기
위패와 상차리기도 고민하는데 정신만 바로 알면 문제가 없다. 일반 가정에서 위패(지방)를 쓸 때는 관직이 없는 아버지의 경우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어머니의 경우는 '현비유인(본)(관)(성)씨신위(顯孺人本貫姓氏神位)'로 쓴다. 유인은 본래 종9품 벼슬을 한 이의 부인을 일컫는 내명부의 직위인데 돌아가신 분께는 올려서 쓰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아버지의 보기를 들면 '선엄부(본)(관)(성)공(이)(름)영가(先嚴父本貫姓公이름靈駕)'라고 쓴다. 조금 더 불교적으로 하면 ‘선 엄부 청신사 본관 성공 이름영가’라고 할 수 있다. 이름대신에 법명을 자주 썼다면 법명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선 엄부 청신사 박 보현 영가’, ‘선 자모 청신녀 백 연화 영가’라고 하면 될 것이다.
차례상은 각 가정에서 준비한 대로 차리되 생명을 존중하는 불교정신에 따라 고기와 생선은 가급적 덜 쓰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순서는 유가에서 홍동백서(紅東白西)니, 두동미서(頭東尾西)니, 조율시이(棗栗柹梨)니 하는 원칙을 이야기 하지만 조상님이 맛있는 것부터 잡수기 좋도록 진설하면 된다. 조율시이는 씨앗의 개수가 1,3,6,8의 순서여서 임금,3정승,6판서,8방백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홍동백서와 조율시이는 원칙이 서로 어긋난다. 색깔의 진행 정도가 고르지 못한 것이다. 조는 붉은 대추인데 조율시이는 왼쪽, 홍동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조상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된다. 음식집에 가서 전식(에피타이저)을 먼저 먹고, 본 음식 먹고, 후식( 디저트)을 먹듯이 조상님이 잡숫고 싶어 할 것으로 생각하는 순서대로 진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자손들이 먹지 않는 것을 모양내듯이 진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외국 농산물 안 쓰기는 애국심의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상님께 드려서 좋은 것이라면 국내산, 외국산을 가릴 것이 아니다. 다만 요즘은 국내산이 질이나 보관 면에서 훨씬 낫기 때문에 국산을 애용하자고 해야 한다.
3)차례 의식
유교의 차례의식은 축문을 읽지 않고 잔을 한 번만 올리는 무축단헌(無祝單獻)으로 지내게 되어있다. 그것은 간단한 제사라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인 설과 추석에 조상님께 고하고 감사하는 의식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교식으로 차례를 지내는 의식을 제안하는 필자로서는 스님이 가기 어려운 가정에서 가족들끼리 지내야 하는 의식임을 감안해서 기제사와 차례를 구분하지 말고 지낼 것을 제안한다. 즉, 제사의 명칭을 알려드리면 차례나 제사에 같은 내용의 의식을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양물(제수)과 위패의 내용만 바뀌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찰에서 진행하는 의식도 교화의식 보다는 수행의식으로의 방향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스님이나 신도나 스스로 주체의식을 갖고 의식을 봉행하되 먼저 그리고 잘 공부하신 스님이 지도하고 이끌어 주시면 더욱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제사 때 쓰는 시식(施食)을 기본으로 하되 우선은 스님이 없어도 불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참여할 수 있도록 한글로 하고, 그 길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왜냐하면 대개의 제사나 차례가 상차림을 빼면 거의 10분~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끝나는데 불교의 의식은 많이 길어서 지루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공양진언은 보통 불, 보살님 등에게 공양 올릴 때 쓰는 것이나 상용영반에도 그 보기가 나오고 조상님의 영가가 업식(業識)을 맑혀서 불보살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라고 보 공양진언(普供養眞言)을 썼다.
먼저 극락세계의 불보살님을 모시는 거불(擧佛)의식을 진행하며 큰 절을 세 번 한다. 절은 부처님께 하듯이 오체투지례로 한다.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 (큰절) 나무 좌보처 관세음보살 (큰절) 나무 우보처 대세지보살 (큰절) 이어서 차를 올리는 게송(偈頌)인 다게를 한다. 다게는 시식문의 다게를 한글로 번역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청정 미묘하신 법과 삼승사과의 해탈 얻으신 승가에 공양하오니 자비를 베푸사 감응하여 주옵소서. 이어서 조상님 영가를 청해 모시는 청혼(請魂) 또는 창혼(唱魂)을 한다. 금일 고조, 증조 할아버님과 할머님 영가시여 저희들이 모시는 추석(설) 차례에 강림하시어 감응하여 주시옵소서. 이 때 조상님께 차를 올리고 재자들 모두 2번 절한다. 차는 한 잔이지만 4대까지 모시게 되므로 4잔 또는 8잔을 올린다. 부모를 합쳐서 올려도 되고 따로 나눠서 올려도 된다. 다음에는 공양을 권하는 의식이다. 저희 자손들이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5분향을 공양하오니 자성의 대지혜 를 발하고 반야의 밝은 등을 켜서 3계의 어둠을 밝히사이다. 조주스님의 맑은 차를 드리오니 목마름이 아주 없어지이다.
선계의 진품과일을 올리오니 맛보아 주소서. 진수를 올리오니 허기가 영원히 없어지이다. 오늘 조상님 영가께 올린 모든 진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요 저희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올린 것이오니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시식문에는 후손들이 직접 마련한 것을 강조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는 자연으로부터의 수확이라고 보면 ‘하늘에서...아니요’까지는 생략하고 바로 ‘저희들이 작은...’부분을 진행하는 것도 좋으리라. 이 때 유가에서는 조상님께 공양을 할 시간을 잠시 드리는 것으로 밖으로 나가 잠시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때 잠시 쉬면서 조상님을 추모하는 담소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제사가 내용도 모르고 산소의 형식이나 성묘의 방식이 바뀌는 현대 사회에서 제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조상님의 교훈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담소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어서 보공양 진언을 한다. 보공양진언 옴 아아나 삼바바 바아라 훔 (3) 보 회향진언 옴 사마라 사마라 미마나 사라마하 자가라바 훔 (3) 마지막으로 원을 세우고 조상님에 대한 추모의 생각을 키우는 의식인 발원의 순서를 가진다. 오늘 저희들이 올린 공양을 받으시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으시어 아미타부처님 의 국토인 극락세계에 태어나시고 저희 후손들이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올바른 삶을 영위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발원하옵니다. 나무아미타불(10념) 그리고 다같이 큰 절 두 번 하고 헌식하고 위패를 사른다. 새롭게 구성한 불교 차례 의식은 다음과 같다.
작은 번호 ①~③은 기제사로 지낼 때 세 번 차를 올리는 곳을 나타낸 것이다. 차례에 한 번만 올리려면 ②의 위치에 해당하는 순서에 올리면 된다.
목탁을 내리면서 염불조로 같이 하면 더욱 좋고, 그것이 쉽지 않으면 목탁 없이 그냥 문장 읽듯이 같이 읽으면 된다. 인례가 혼자서 읽고 가족들은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다같이 읽고 다같이 잔 올리고 다 같이 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차례의식(茶禮儀式)
1) 미타거불(彌陀擧佛): 부처님을 모시는 의식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 (큰절)
나무 좌보처 관세음보살 (큰절)
나무 우보처 대세지보살 (큰절)
2) 다게(茶偈): 차를 올리는 시
시방삼세 부처님과 청정 미묘하신 법과 삼승사과의 해탈 얻으신 승가에 공양하오니 자비를 베푸사 감응하여 주옵소서 ①
3) 청혼(請魂): 조상님 영가를 모시는 의식
금일 고조, 증조 할아버님과 할머님 영가시여 저희들이 모시는 추석(설) 차례에 강림하시어 감응하여 주시옵소서 (차를 올리고 재자들 모두 큰 절 2배) ②
4) 공양: 공양을 올리는 의식
저희 자손들이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의 5분향을 공양하오니 자성의 대지혜 를 발하고 반야의 밝은 등을 켜서 3계의 어둠을 밝히사이다.
조주스님의 맑은 차를 드리오니 목마름이 아주 없어지이다. ③
선계의 진품과일을 올리오니 맛보아 조소서
진수를 올리오니 허기가 영원히 없어지이다.
오늘 조상님 영가께 올린 모든 진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요) 저희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올린것이오니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쉬면서 조상님을 추모하는 담소 시간을 가짐)
5) 보공양진언: 조상님과 다른 영가께 모두 공양되도록 하는 진언
옴 아아나 삼바바 바아라 훔 (3)
6) 보회향진언: 마무리하는 진언
옴 사마라 사마라 미마나 사라마하 자가라바 훔 (3)
7) 발원: 원을 세우고 조상님에 대한 추모의 생각을 키움
오늘 저희들이 올린 공양을 받으시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으시어 아미타부처님 의 국토인 극락세계에 태어나시고 저희 후손들이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올바른 삶을 영위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발원하옵니다.
나무아미타불(10념) (큰절 2배후 헌식하고 그릇의 뚜껑을 닫고 위패를 사른다.)
<참고문헌>
白坡,『작법귀감(作法龜鑑)』
己和,『涵虛語錄』<薦珍山和尙祭文>
安震湖,『석문의범(釋門儀範)』,경성,卍商會,1935.
一然, 『三國遺事』
김 부식, 『삼국사기』
鄭 英善 ,『한국 茶文化』,도서출판 너럭바위,P35(1998).
김 명배 역,『중국의 다도』 김 명배 역저, 명문당,p22(1985) .
문 상련(정각),불교 제의례의 설행 절차와 방법,1996.
林 子靑,淸規,中國佛敎 弟2集,中國佛敎協會編,1989 제3쇄
첫댓글 보조사상연구원에서 10월학술발표회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동국대 교수 정각스님의 부정적 논평이 있었는데 근거가정확하지는 않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