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노루발
서 영 복
유난히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있다.
뭘 하나 잠깐 보기만 해도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들 말이다. 어린 시절, 겨울 저녁이면 언니들과 함께 엄마랑 바짝 붙어 앉아 떨어진 양말을 꿰매던 일이 종종 있었다. 깜냥에 정성들여 바느질을 하지만 내가 꿰매놓은 양말은 아무도 신으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바느질은 젬병이었다. 심지어 교복에 단추가 떨어져도 언니의 손을 빌어야 했다.
그래도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직장생활 하며 남편과 살면서는 풍신난 바느질 솜씨를 그럭저럭 써먹어야 했다. 은퇴하고 결혼 40년이 되어갈 때쯤 내 생활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정말 내 인생 중요 뉴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취미 하나가 또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바느질을 하다니, 그것도 재봉질을…….
벌써 십 년 전의 이야기다. 재봉을 취미로 삼게 된 것이. 그때쯤 시내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야간에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공부와 학부모교육을 계속하고 있을 때다. 방학을 앞둔 어느 날 특별활동 수업으로 바느질을 계획했다. 간단한 생활소품으로 목베개와 덧신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재료를 주문하고 만드는 방법도 혼자 열심히 익혀 샘플을 만들었다. 물론 그때에는 손바느질이었다.
그 무렵 내가 정기적으로 활동을 하던 여성장애인 연대에서 마침 재봉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좋은 기회를 만나 그들과 함께 재봉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외부에서 섭외해온 재봉 선생님의 보조역할을 맡아 학생들을 돕기로 하였지만, 뭐든 대충하지 못하는 성격에 누가 보면 그때부터 재봉에 목숨 걸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먼저 재봉에 관한 책을 사들여서 읽었고, 큰맘 먹고 거금의 재봉틀까지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나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 발동을 걸었다. 무엇에 한 번 빠지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습관 말이다. 재봉틀이 거실의 주인이라도 된 듯 온통 재봉틀의 주변에는 남편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고 재봉에 필요한 온갖 물건을 사 나르며 재봉틀과 급속도로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양말짝하나도 제대로 꿰매지 못하던 나에게 어떻게 이런 취미가 붙게 되었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통하기만 하였다. 몇 개의 생활소품을 손바느질로 고부라져 만들다가 재봉틀을 사용해보니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노루발’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원단을 위에서 눌러주어 옷감 속으로 바늘이 잘 관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옷감이 뒤로 착착착 밀려 나가게 해주는 재봉기의 장치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부품명칭이다. 몇 시간씩 노루발만 쳐다보며 재봉을 하고 나면 잠자리에 누워서도 머릿속에 온통 노루발만 생각났다. 노루의 발 모양으로 생겼대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재봉을 잘하는 사람들은 그까짓 일로 웬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나처럼 기계치에다가 재봉에 우둔한 사람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이 기계의 매력에 대해선 두말해 무엇하랴! 틀틀틀틀하며 경쾌한 소리를 내는 건 둘째 치고 몇 시간 만에 창작품이 척척 하나씩 생겨나는 게 무척 재미나는 일이었다. 누가 이렇게 훌륭한 기계를 발명하였을까 어느 날에는 재봉틀에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독일에서는 이미 200년이 넘는 역사가 있지만 순수하게 우리나라에서 재봉틀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6·25 이후이니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우리 조상들은 손바느질이 대부분 이었다. 어렸을 적에 내가 보았던 재봉틀은 지금 나오는 재봉틀과는 기능 면에서 천지 차이이다. 그때는 손으로 핸들을 돌리거나 발을 굴려서 재봉틀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봉틀은 가정에서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식으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고마워하고 있는 것은 자동으로 바늘에 실을 꿰는 장치이다. 가뜩이나 침침한 시력으로 바늘귀를 찾지 않아도 되니 참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누구나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는 바퀴를 천천히 움직이고 싶다. 하지만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그게 마음대로 안 되어 넘어지는 일이 많았다. 자전거 운전은 그래서 어려웠다. 오토매틱이 아닌 스틱으로 자동차운전을 배울 때도 그랬다.
천천히 움직이다가는 시동을 꺼뜨리기 일쑤였고 빨리 달리는 건 장애물이 금방 나타나 너무 무서웠다. 노루발도 그렇다. 전원을 켜놓고 페달을 밟는 강도로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지만 초보자에게는 그게 쉽지 않다. 그런데 요즘 재봉틀에는 재봉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으니 노루발은 얼마든지 천천히 갈 수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뿐 아니다. 전진도 후진도 가능하고 단추 구멍도 만들고 패턴 모양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예쁘게 수를 놓을 수도 있다. 좀 더 수준을 높여 배워보려고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기초단계부터 체계적으로 하나하나 배우다 보니 내게도 어딘가에 재봉소질이 숨어 있음을 알았고, 그에 자신감을 가지며 열심히 배웠다. 수업시간마다 다른 정신은 쏙 빼놓고 배우다 보니 때론 시침 핀에 찔려 옷감에 피가 묻는 것조차 모르고 지나칠 때가 있었다. 치마와 바지까지, 아니 블라우스며 조끼며 코트까지 여성의 옷이라면 어떤 종류든지 척척 만들어나갔다. 명절에 내려온 손자 손녀에게 덧신도 하나씩 만들어 신겨주고 패딩 조끼도 만들어 입혀보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백화점에서 사다 입힌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남편의 바짓단 줄이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요 좋은 천을 사다가 잠옷도 만들어주니 편하게 잘 만들어졌다며 즐겨 입었다. 그토록 바느질 솜씨가 없는 걸 스스로 인정했었는데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 게 남편도 나도 놀랐다. 이제는 재봉에 흠뻑 빠져 다른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그러다가 그해 여름에 드디어 병이 나버렸다. 허리가 아프거나 목덜미가 뻐근한 것은 참을 만했다. 한데 엉덩이에 종기가 나버렸다. 오랫동안 꼼짝도 안 하고 몇 시간씩 앉아서 재봉질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급기야 내게 재봉 금지령을 내렸다. 당분간 밤에는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밤에 재봉틀을 곁에 두고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남편을 일찍 재우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저녁 식사 후 함께 나란히 앉아 TV를 보다가 우선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하기 위해 절전을 핑계로 거실의 등을 끄고 주방 쪽 불만 켠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TV의 프로그램은 될 수록 재미없는 거로 바꾸고 볼륨을 점점 낮춘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중요하다.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심심해진 남편은 꾸벅꾸벅 졸다가 소파에 눕게 된다. 매일 저녁 나의 전략은 성공이다. 친절하게 안방으로 모셔 편히 잠자리에 들게 한다. 그이가 코를 골며 꿈나라에 입성할 때쯤 나는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새벽까지 재봉질을 한다. 때로는 아침까지도 할 수 있지만, 일찍 일어나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으려 자제했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 못 가서 정말 더 큰 병이 났다. 눈이 뻑뻑하며 자꾸 아프고 글씨도 잘 안 보이게 된 것이다. 안과병원을 찾아갔다. 일상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정 시간 눈을 자주 깜박여줘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봉을 할 때 노루발을 뚫어지라 보면서 눈을 깜박이는 횟수가 정상치에서 한참 모자랐다는 것이다. 노루발 위에서 바늘이 움직일 때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눈을 크게 뜬 채로 혹사했으니 안구에 핏줄이 터져 드디어 안과 쪽에서 적신호가 울린 것이다. 한두 살 어린애도 아니고 젊은 나이도 아닌데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취미도 좋고 여가선용도 좋다. 돈벌이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 무슨 미련한 짓인가? 시아버지 살아계실 때 심부름으로 자주 사드렸던 인공누액을 내가 사용하게 되다니…….
십년이 지난 이제는 쉬엄쉬엄 취미삼아 재봉틀을 사용한다. 내 친구 노루발은 좋은일을 하라며 고장도 안 나고 기쁘게 제 할일을 한다. 코로나 시대에는 시골살이까지 따라와 수백 개의 마스크도 만들어주고, 현수막을 잘라 시장 가방도 만들어 마을 마다 나누었다. 그뿐인가 일 년 동안 시골 노인들의 옷 수선을 맡아주었다. 새삼 옛날 어려운 시절에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공부시키던 어머니들이 생각난다. 그때의 어머니들은 낮에는 농사일하고 밤에 손바느질하였을 것이다. 먹는 것도 형편없었을 터이니 영양 상태가 오죽했을 것이며 눈이 아프다고 인공누액 이름이나 들어 봤을까? 촉수 낮은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에서 삯바느질로 여러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낸 어머니들에게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형편은 좀 나아졌겠지만, 오늘날에도 열악한 환경의 공장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어깨에 지고 온종일 노루발을 응시하며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도 힘찬 박수와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내게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해준 노루발에도 큰 박수를 보낸다. “고맙다 노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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