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7. 주일예배설교
마태복음 6장 9~13절
이 땅에 그 나라가 임하시며, 그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7)
■ 귀찮으시겠지만, 질문 하나 받으시죠.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해 불만은 없으십니까? 만족하십니까? 혹시 ‘난 워낙 긍정적인 사람이라 불만이 없어요!’이신가요? 혹시 ‘난 워낙 부정적인 사람이라 차라리 체념하고 살아서 관심 없어요!’이신가요? 답변으로 봐서는 워낙 부정적인 분이 더욱 긍정적인 분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이 땅에 대해 불만이 있냐, 없냐?’하는 질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따르면 문제가 있는 질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만·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만·불평을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비판 거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비판의 차원에서 불만을 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마저 발목 잡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것 참 난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옳지 않음을 두고도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불평·불만은 안 된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내 눈의 들보 때문에 비판으로서의 불평·불만도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헷갈린다고요? 아무래도 오늘 본문으로 가야겠습니다.
■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중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말하면, “이 땅에 그 나라가 임하시며, 그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입니다. 여기서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 이 기도를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이 땅의 것들이 맘에 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뒤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세상입니다. 그런데 삶의 방식과 태도를 포함해 사회제도, 사회구조, 그리고 법과 규칙들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틀어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뒤집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사랑’과 ‘정의’인데 이것들이 ‘전쟁’과 ‘불의’로 뒤틀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가 “이 땅에 그 나라가 임하시며, 그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바로 잡아 주시옵소서!’입니다. 틀어져 있고, 뒤집혀 있는 삶의 방식, 삶의 태도, 사회제도, 사회구조, 그리고 법과 규칙들을 바로 잡아 달라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오직 감사하라’는 말씀과 ‘비판을 금지하라’는 말씀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기도를 통해 +더욱 감사한 삶이자 더욱 겸허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때는 모든 사랑과 정의가 회복되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기도의 성격 때문에 더욱 겸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의 성격은 무엇일까요? 이 기도는 ‘맡기는 기도’가 아니라, ‘맡겨달라는 기도’입니다. 틀어져 있고, 뒤집혀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것을 믿는다며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정의가 온전히 회복되게 하는 일을 맡겨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많이 당황하셨죠? ‘맡기는 기도’가 아니라서 저도 당황했습니다. 당황스럽지만, 이 기도의 성격은 ‘맡겨달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지난 2천년 동안 이 기도를 ‘맡기는 기도’로 이해한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주십사하고 기도만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을 기도했는데 세상은 여전히 틀어져 있고, 뒤집혀 있습니다. 오히려 더 틀어져 있고, 뒤집혀 있습니다. 이유인즉, 이 기도의 성격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맡기는 기도가 아니라 맡겨달라는 기도를 드렸어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맡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는 이를 실천에 옮긴 분들도 있습니다. ‘유토피아’라고 하는, 이상주의 사회를 건설하셨던 분들입니다. 예컨대, 아미시 공동체나 공산주의 사회가 그렇습니다.
아미시 공동체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자 땅을 확보하여 국가와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자신들만의 규칙과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 하나의 국가처럼 살았습니다. 이들은 폐쇄적이고 은둔적 태도를 통해 이상사회를 건설하였습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 이들은 파괴적이고 과격하였습니다. 기존 질서와 구조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기존 질서는 자본주의이고,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필요와 형편에 따른 공평(公平)·공분(共分)의 세상이었습니다. 이에 자본주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이를 바꾸고자 하는 공산주의는 과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본주의의 태생도 과격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틀어져 있고, 뒤집혀 있는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수고가 역사상 수도 없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수고가 여전히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수고가 부족해서였을까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는 보다 긴장되는 이유인데, 앞의 기도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앞의 기도가 무엇인가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입니다. 바로 이 기도에 충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맡기는 기도이자 맡겨달라는 기도 아닙니까? 왜 맡기는 것인가요? 왜 하나님의 것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인가요? 유일하게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질적 차이가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존귀와 권세와 영광이 무한하신 분, 진리와 정의와 선과 아름다움에서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이 땅의 모든 것을 유일하게 맡길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을 저의 왕으로 모시기 원합니다. 저희를 받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한 채 일을 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일일이 그 뜻을 여쭙고 또 여쭙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맡은 일에 실패한 이유이자, 여전히 미완성인 이유입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라를 바꾼 사람입니다. 물론 이중국적자이지만, 하나님 나라로 국적을 바꾼 사람입니다. 나라를 바꾼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자신의 통치자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이 통치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 모든 공간, 모든 일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고백만 할뿐, 실제로는 맡기지 않았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여전히 미완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믿음의 태도에 일대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기도가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춘 수정을 가해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그 나라’와 ‘그 뜻’입니다.
첫째로, ‘그 나라’에 맞춰 수정된 믿음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만 이 땅의 모습이지, 생각하고 말하고 선택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치관이 아닙니다. 물론 이 땅의 법과 질서를 존중합니다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에 맞지 않으면 ‘거룩한 불순종’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순교를 요구할지라도 선택해야 하는 거룩함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른 삶을 살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거룩한 이방인’이자,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둘째로, ‘그 뜻’에 맞춰 수정된 믿음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만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꿈은 더 이상 옳지 않습니다. 혹시 그동안 내 뜻,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고백이고 다짐인 이 위험한 기도를 드린 여러분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든지 상관없이, 결국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진실입니다.
앞서 설명드렸다시피,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실패하고 여전히 미완성인 이유가 온전한 맡김의 실패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성하여 하나님의 뜻의 선하심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갖고 계신 계획은 구원입니다. 생명과 평안과 행복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우리가 매일·매번 간구해야 하는 거룩한 기도가 ‘그 나라’ 그리고 ‘그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하나님의 그 뜻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어떤 기도보다도, 이 기도는 쉬어도 좋고 건너뛰어도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기도는 ‘임박한’ 심판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절박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높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셔서 이 땅을 구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시도록 믿고 맡는 거룩한 나그네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위험하지만, 이 위대한 기도의 대열에 동참하고 계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