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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식(式) 글쓰기'가 한 장르가 될 법한데 웬 의학도가 그렇게 팔리는 글을 씁니까.
"처음 신문 칼럼을 쓴 건 경북대 의대 교수로 있을 때였습니다. 대구매일에 썼는데 '제법 잘 쓴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서울로 올라와 YMCA에서 '신부(新婦)교실'이라는 데 출강해서 강의한 걸 샘터 기자가 글로 옮겼어요. 그게 인연이 돼 샘터에 상당 기간 연재를 했습니다."
―그러다 단행본은?
"샘터에서 저와 관계했던 두 사람이 출판사를 따로 차렸는데 '책을 써보자'는 거예요. 대구에서 습작해 놓은 것을 줬어요. '배짱으로 삽시다'였습니다. 1주일 휴가를 얻은 뒤 경주 한국콘도에 들어가 뚝딱 완성했지요."
―요즘도 출강(出講)을 1주일에 3번씩 하지요? 특히 중년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데.
"제가 말을 제법 재미있게 합니다. 그리고 잘생겼잖아요, 하하. 젊었을 때는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절 보겠다고 환자로 가장해 들어오는 분들까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유명하면 부인 속이 썩지 않을까요.
"마누라가 오해도 많이 했지요. 주변에 기자에 아나운서, 화가들까지 많았으니까요."
―혹시 스캔들은?
"한번은 아내가 어디 다녀온다고 나가더니 오밤중에 들어왔어요. 알고 보니 '이시형의 아이를 가졌다'는 괴(怪)전화를 받고 자기 딴에 해결해보겠다고 나간 거래요. 대전의 한 다방까지 갔는데 전화가 오더니 옆 다방으로 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다방엘 가면 다시 원래 다방으로 오라고 하고. 마누라가 그제야 겁을 먹고 서울로 돌아온 거예요. 그 얘길 듣고 그랬어요, '아이구 이 마누라쟁이야'라고요. 루머가 많았습니다만 자기관리는 철저히 합니다."
―샘터 시절 3대 글쟁이가 이시형, 법정(法頂) 스님, 소설가 최인호(崔仁浩)였지요.
"법정 스님을 직접 뵌 건 딱 두 번이에요. 강원도 봉평의 '허브나라'라는 곳에서 제 집필실을 줬어요. 거기서 우연히 법정 스님을 만나 3시간 동안 대화했습니다. 관광객들이 몰리고 난리가 났지요. 그 다음이 작년 봄이었어요. 산책하다 길상사에 들렀습니다."
―법정 스님이 알아보던가요.
"일부러 표시 낼 것도 없다 싶어 맨 뒤쪽에 서 있었는데 제가 키가 크잖아요. 법정 스님이 법문을 하다 절 봤나 봐요. 법문이 끝난 뒤 다가와 '이 박사도 소승의 법문을 듣습니까'라고 해요. 이미 그때 스님의 병색(病色)이 깊어 보였어요. 손을 잡아 보니 굉장히 찼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스님도 이제는 고기 좀 자셔야 합니다'라고요. 의사로서의 처방이었습니다만…, 참 아까운 분이에요."
―공교롭게도 최인호씨 역시 요즘 건강이 안 좋다고 합니다.
"최인호씨와는 오랜 연분이 있어요. 옛날 임국희씨가 진행하던 MBC '여성시대'라는 프로그램에 최인호·김주영·한수산씨와 함께 출연한 인연도 있고요. 제가 그분 소설을 참 좋아합니다. 책 읽다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면 금방 전화도 드렸고. 동부이촌동에 '예전'이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서 연극배우 오현경씨, 돌아가신 이해랑씨, 김동원씨와 함께 최인호씨와 자주 어울렸어요. 함께 연극 구경도 많이 다녔고요."
―의사로서 좀 돕지 그랬습니까.
"그분 소식을 진작에 들었어요. 힐리언스 선 마을에 들어오면 참 좋을 텐데, 여러 번 연락을 취해도 연락이 되질 않아요."
■오리와의 악연
이시형의 전공(專攻)은 '사회정신의학'이다. 그는 1934년에 태어났다. 중학생 때 6·25를 맞은 세대다. 그런 그가 지금도 아는 이 별로 없는 첨단 정신의학을 필생의 업(業)으로 삼은 것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에게 '남에게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하는데 본인은 어떠냐'고 물었다. 이시형이 말했다. "즐겁게 살자는 게 목표입니다. 치료할 때는 환자, 강연할 때는 관객 칭찬을 받으며 사니 신이 나지요. 안 그랬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그리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제가 7남매의 둘째 아들입니다. 형은 컴퓨터를 전공했어요. 얌전한 성격이었지요. 전 무당끼가 있었다고나 할까, 하도 제가 설치니 할매가 절 감나무 밑에 매달아 놓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걸 피하려 손님 오는 날이면 새벽부터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고향이 대구지요.
"지금의 대구 비행장 한복판이 제 생가였어요. 일제 때 땅을 절반쯤 뺏기고 6·25 나면서 나머지가 전부 비행장이 돼버렸습니다. 아버님은 '양현고'라고, 일본인들이 팔도(八道)에서 2명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해 명륜전문학원에 보내는 제도가 있었는데 거기 선발된 분입니다. 옛날로 치면 과거 급제한 격이지요. 나중에 유림(儒林)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의 문화재청과 비슷할 겁니다."
―선친께서 교사를 했다고 하던데, 어떤 이는 이 박사 집안이 가난했다고도 하고요.
"그건 해방 후의 일입니다. 중학교에서 역사·윤리·한문을 가르치셨어요. 제가 고1 때부터 선친이 병석(病席)에 누우셨어요. 화병에 당뇨병, 폐결핵, 말초신경염으로 7~8년 고생하다 돌아가셨지요. 형이 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제가 가장(家長)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형 빼고 형제 6명에 조실부모(早失父母)해 우리가 거두고 있던 사촌 2명까지요."
―학생이 어떻게 가장 노릇을 합니까.
"제가 이래 봬도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를 3년이나 했습니다. 하우스보이가 뭔지 아세요? 미군 구두 닦아주고 우편물 찾아다 주고 세탁물 맡기는 일을 합니다. 그때 배운 '하우스보이 영어'를 한참 했어요. 아이 캄, 유 캄(I come, You come), 뭐 이런 식으로요."
―오리고기를 싫어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어? 그 얘길 어떻게 알죠? 하우스보이하면서 모은 돈으로 오리를 40마리 가까이 사 수성천변에서 기른 적이 있어요. 오리가 냄새가 많이 나잖아요. 지금은 그걸 제거하는 조리법이 나왔는데 그때는 냄새가 난다고 사람들이 먹질 않았습니다. 너무 아까워 냄새 나는 오리를 다 먹으니 나중엔 질려서. 지금도 오리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오리뿐 아니에요. 동생들과 만년필 장사도 해봤고 아이스케키 장사도 해봤어요."
―그렇게 가난한 환경에서 어떻게 의대 진학할 생각을 한 겁니까.
"대학 진학할 때 형님이 제대했으니 사정이 조금 나아졌지요. 문사(文士) 기질이 강한 집안이었어요. 의대를 택한 건 창피하지만 '히포크라테스 정신' 때문은 아니었어요. 의대 가면 마구잡이로 군에 끌려가지 않을 것 같았고 전쟁통에도 의사 아들은 꼭 도시락을 싸오는 걸 봤기 때문이에요. 선생 아들은 분필 놓으면 굶는데…. 친구들이 전부 의대를 택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윱니다."
―경북대 의대를 나왔지요.
"그때는 서울대학이 그리 좋은 학교인지 몰랐어요. 전공을 택하려 하는데 당시 우리 학교 정신과 교수님은 무슨 사건에 휘말려 강의도 못할 정도였어요. 전 워낙 사람 만나길 좋아했으니 궁리를 하다 '사회정신의학'을 택하기로 한 겁니다."
―평소 성격에 따라 전공을 결정했군요.
"미국 유학을 예일대로 간 것도 립튼 교수라는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전쟁 때 중공군(中共軍)의 포로가 됐다 풀려난 사람들의 사례를 연구해 유명해졌어요. 포로들은 전부 브레인 워싱(Brain washing·세뇌)당하잖아요. 우리도 나중에 통일이 되면 공산주의에 세뇌된 사람들을 다뤄야 하는데 그걸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시절 유학생이면 고생도 꽤하셨겠습니다.
"장학금 월 300달러로 강의료 내고 집세 내면 남는 게 없지요. 밥은 환자들이 남긴 걸 간호사가 냉장고에 놔둔 걸로 해결했어요. 졸업할 때 빚이 5000달러 정도였어요. 은사께 '돈 제일 많이 주는 병원 소개해달라'고 했습니다. 버지니아주립병원에서 일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해 빚을 다 갚을 무렵 경북대 총장, 학장님이 절 찾아왔어요. 학생들 탄원서까지 가지고요. 그래서 경북대 교수가 된 겁니다."
―그러다 옛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으로 옮겼지요.
"처음엔 몰랐는데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너무 컸어요. 연구비부터 외국 손님이 와도 밑으로는 내려오질 않았으니까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학생들의 유신(維新) 반대 데모 때문이었어요."
―유신 반대 데모?
"의과대생들이 남들은 진작에 끝낸 데모를 뒤늦게 시작한 거에요. 당시 총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는데 매일 문교부 데모 상황판에 '경북대 의대'가 1등으로 올라가니 못 견뎌했어요. 그러다 27명이 퇴학이나 무기정학을 당했어요. 전 그때 학생과장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기물파괴라는 걸 해봤어요. 총장실 창문을 다 부수고, 정말 못 견딜 시간이었습니다. "
■평생 현역
그때 이시형은 '교수라는 게 한국사회에선 도저히 버텨낼 직업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직(補職) 사표가 아니라 아예 '교수 사표'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경북대는 1년 넘게 그가 낸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버텼다.
이시형이 서울로 오게 된 데는 경북대 출신의 대(大)선배 조운해씨의 역할이 컸다. 그는 강북삼성병원의 전신(前身)인 고려의료재단 이사장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인희 한솔그룹 회장,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의 맏사위였다.
―예전에 낸 베스트셀러의 내용에 지금도 자신이 있습니까.
"제가 했던 예견보다 빠른 것도 있어요. 중년 여성들에게 전 '돈을 모아서라도 고급 식당에 가보라'고 외쳤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통적 여성상이 많이 남아 있었거든요. 지금 보면 제가 생각했던 진도(進度)보다 훨씬 더 나간 것 같아요. 고령화 추세도 그렇고."
―2015년까지는 세로토닌과 '창조성'이라고 했는데 그 이후는 뭘까요?
"고령화(高齡化) 문제가 중요해질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최근에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낸 것도 그것과 관계가 있어요. 몇 년 전에 '80세 현역(現役)'이란 말이 나왔는데 지금은 '평생 현역'이잖아요. 뒷방에서 기침한다고 며느리가 밥상 차려주는 시대는 지났어요.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럼 결국 공부밖에 없거든요."
―그것보단 재산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100억원이 있어도 일이 없어 자꾸 줄어들면 사람은 불안해집니다. 1000만원이 있어도 일해서 조금이라도 늘면 행복해지는 게 인간입니다. 벌어놓은 돈을 쓰는 건 노후대책이 아닙니다. 뭐라도 해서 용돈이라도 벌어야지요."
―그 '뭐'가 뭘까요.
"흙이라고 생각해요. 농촌에 가보셨어요? 농번기엔 일당이 10만원씩 합니다. 농촌에는 버려진 땅도 있고 하니 가꿔가면서 살면 수입도 얻고 일도 할 수 있다고 전 생각해요. 태양 아래 바람을 맞으며 흙을 밟고 사는 삶이 최고지요."
―이야길 듣고 나니 앞에 한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힐리언스 선 마을에서 습관을 바꿀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도 환경이 그렇지 못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건축과 의학의 만남 포럼을 하는 거고요."
―의사가 자꾸 태양, 바람, 흙을 이야기하면 선후배들이 싫어하지 않나요?
"홍천 캠프에 의사가 300명이 왔다 갔어요. 못마땅한 표정들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평점 5점 만점에 의사집단의 만족도가 4.6점으로 가장 높았습니다. 만성병이 전체 질병의 80%인데 그건 의사가 완치시킬 수 없는 겁니다. 의사는 수선(修繕)과 관리만 하는 거지요."
―만성병의 수선·관리가 말만큼 쉽진 않지요.
"홍천에 제일 많이 오는 분들이 40~50대 중역(重役)들이에요. 자기 건강은 자기가 보살펴야 하는데 그들은 절대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마냥 '달러 박스 관리소'인 줄 아는 거죠. 지금부터라도 자기 관리들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전 의사들이 싫어하겠지만 '병원 없는 마을'을 짓는 게 꿈이에요."
―'병원 없는 마을'?
"이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근처에서 시작했어요. '파인힐'이라고, 환경이 꼭 설악산 같아요. 그곳에 입주할 사람들은 50대 이상일 텐데 그들은 꿈이 있습니다. 초가집이나 항아리 같은 것에 향수를 갖고 있고 텃발을 갖고 싶어합니다. 자연적인 집을 짓고 좋은 공기 마시며 일하면 병원이 필요 없어지지요. 그 일을 쌍용건설에서 하고 있는데 제가 간여한 건 쿠퍼 박사와의 약속 때문입니다."
―쿠퍼 박사와의 인연이라는 게 뭡니까.
"에어로빅을 창시한 분입니다. 텍사스 휴스턴에 쿠퍼빌리지라는 걸 지었어요. 분당(盆唐)같은 신도시 한켠에 '쿠퍼빌리지'를 지었는데 8000가구가 다 팔렸어요. 거기서 평소의 생활습관과 태도를 고치며 사는 거죠. 절 초청해 가봤는데 텍사스 허허벌판보다는 아무래도 환경이 우리가 낫겠다 싶더군요."
―술·담배는 전혀 안 합니까.
"술은 예나 지금이나 1~2잔 정도고 담배는 원래 하루 3갑씩 피웠어요. 중1 때부터 피우다 예일대에서 정신과 수련 받던 시절 끊었어요. 국무성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보낸 환자를 의무적으로 치료해야 하는데 존이라는 마약환자가 왔어요. 어느 날 그 녀석이 마스크를 쓰고 와 창문을 다 열어 자욱한 담배연기를 빼면서 호통치더군요. '선생님도 치료가 필요합니다'라고요. 얼굴이 뜨거워졌어요. 그날로 끊었지요."
―대단합니다.
"3년 동안 담배 피우는 꿈을 꿨어요. 지금도 담배는 쳐다보질 않아요. 만지기만 해도 다시 피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평생 현역' 이시형은 한국 주부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 중 한명이다. 1999년 이 박사가 스키강습서를 낸 아들과 함께 출판기념회에 나와 '공부하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아들은 카자흐스탄에서 발전소를 만들고 있습니다. 딸은 대전에 있어요. 사위가국방과학연구소에서 일합니다. 딸은 유아교육과에 강사로 나가고 있고요. 전 진짜 아이들을 방임하지도 않았지만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