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는 태조부터 현종 이전까지의 기록을 거란이 침공때 불타버려 8대임금 현종에 이르러 다시 수찬했다.
태조 왕건의 이름을 빌어 대광 박술희에게 유시했다는 <훈요십조>,그내용 중에서 제8훈은 지금까지도 이를 이용하는 정치가와 민속에 퍼져 동서를 가르는 민족분열의 원천으로 만들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때 극치에 달했었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㗸統合之怨, 犯蹕生亂. 且其曾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姦巧言語, 弄權亂政, 以致災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여덟째, 차현 이남과 공주의 금강 바깥쪽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배역으로 뻗어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나 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사를 잡게 되면,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며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 또 일찍이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역의 잡척이 권세가에게 투탁하여 신분을 옮기거나 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왕후나 궁원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력을 희롱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재앙에 이르게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왕건이 내렸다는 경고문에서 키워드는 ‘차현 이남’과 ‘배역’이다. 이것을 후대에 사가들이 차령이남 사람들은 배신을 하므로 삼가 등용하지 말라고 해석한다. 차현 이남이 한반도 지명이 틀림없으나 배역은 배신이라는 해석은 틀린 것이다.
이를 다시 살펴보면 현종의 출생과 결혼후 왕가의 생성과정을 먼저 살펴보아야한다. 현종의 출생과정이야 알려져있다 시피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사통하였고 헌애왕후의 여동생인 헌정왕후도 시숙 안종과 놀아났다가 몸종의 방화로 급하게 외지에서 낳은 사람이 현종이었다.
현종은 태조왕건의 친손자여서 그 왕위계승 서열이 큰이모 헌애왕후의 사생아 보다 높았기에 큰이모에게 유폐당하여 살다가 김치양, 목종이 강조의 시군사건으로 살해당하자 이틈을 타서 경주 출신 최항이 그를 재빨리 왕으로 옹립시키고 결혼시켰는데 그 여인 역시 신라왕통이었다.
삼국사기 敬順王 史論
我太祖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即寳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隂德之報者歟.
우리 태조께서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 역시 번창하였지만, 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의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의 응보가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고려는 현종이후 신라의 혈통과 그 출신 권신들이 장악하게 되었다.조선말까지도 그것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그의 일생에서 가장 고난의 시절이 2번에 이르는 거란과의 전쟁과 이로 인한 피난생활이었는데 거란의 남침 속도에 맞추어 더 남쪽인 나주까지 도망갔는데 피난도중에 그 지역 관리들에게 소위 말하는 ‘개망신’을 당한다. 그 전모를 본다.
고려사 열전94 지채문
至參禮驛, 全州節度使趙容謙, 野服迎駕. 朴暹奏曰, “全州卽古百濟, 聖祖亦惡之, 請上勿幸.” 王然之, 宿長谷驛. 容謙謀欲止王, 挾以號令, 與轉運使李載·巡檢使崔檝·殿中少監柳僧虔, 以白幟揷冠, 鼓噪而進. 蔡文使人閉門堅守, 賊不敢入. 王與后, 乘馬在驛廳事. 蔡文登屋問曰, “汝等何得如是, 柳僧虔來否?” 賊曰, “來矣.” 又問, “汝爲誰?” 賊曰, “汝亦爲誰?” 蔡文答以他語, 賊曰, “智將軍也.” 蔡文認其聲曰, “汝是親從馬韓兆也.” 仍以王命召僧虔, 僧虔曰, “汝不出, 吾不敢入.” 蔡文出門呼僧虔, 引至王前, 僧虔泣奏曰, “今日之事, 容謙所爲, 臣不知也. 請奉旨召容謙來.” 王許之. 僧虔出, 遂逃. 王命良叶召容謙·載, 旣至, 諸將欲殺之. 蔡文呵止之. 使二人牽大明宮主馬而行, 旣而遣還全州.
왕이 삼례역에 이르자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평상복 차림[野服]으로 어가를 맞이하였다. 박섬이 아뢰어 이르기를, “전주는 바로 옛 후백제〈의 수도〉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장곡역에 유숙하였다. 조용겸은 왕을 머물게 하여 그에게 기대어 위세를 부려보려고 꾀하여, 전운사 이재·순검사 최즙·전중소감 유승건과 함께 흰 표지를 관에 꽂고서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나왔다. 지채문이 역졸을 시켜 문을 닫고 견고히 지키게 하였더니, 적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왕은 왕후와 함께 말을 탄 채 역의 청사에 있었다. 지채문이 지붕에 올라가 물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느냐? 유승건은 오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적들이 말하기를, “왔다.”라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는 누구냐?”라고 하니 적들이 이르기를, “너는 또 누구냐?”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다른 말소리로 대답하니 적들이 말하기를, “지장군이구나.”라고 하였다. 지채문도 그 음성을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너는 바로 친종마 한조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왕의 명령으로 유승건을 부르자, 유승건이 말하기를,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나도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문을 나와 유승건을 불러서 데리고 왕 앞으로 갔더니, 유승건이 울면서 아뢰어 말하기를, “오늘 일은 조용겸이 한 일이니, 저는 알지 못합니다. 청하옵건대 주상의 뜻을 받들어 조용겸을 불러 오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유승건은 나가자, 결국 도망하였다. 왕이 양협에게 명령하여 조용겸·이재를 불러오게 하니, 그들이 오자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지채문이 꾸짖어 이를 제지하였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명궁주의 말을 끌고 가게 하였다가, 곧 전주로 돌려보내었다.
전쟁이 끝나고 조용겸은 큰 소란을 지은죄로 유배당한다.
고려사 현종2년 (1011)
八月 癸卯 刑部奏, “趙容謙·柳僧虔·李載·崔檝·崔成義·林卓, 當南幸之時, 驚動行宮, 請除名支配.” 從之.
8월 계묘 형부에서 아뢰기를, “조용겸·유승건·이재·최즙·최성의·임탁이 〈왕이〉 남행하실 때 행궁에서 경거망동하였으니, 이름을 삭제하고 유배 보내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왕이 거둥하는데도 신하가 야복을 입고 나타난 것은 죽임을 당할 만큼의 무례인데 이때 왕을 호종하는 박섬이 애둘러 말하길 전주를 태조가 견훤 때문에 싫어했다고 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장화왕후가 나주지방의 권문세가로 이들 사이에서 낳은 왕자가 혜종이고 왕건이 전라도를 싫어할 이유가 없기때문에 그것은 후대에 지어낸 말이다.
두번째로 배역의 의미를 살펴보면 현종 이후 신라계가 권력을 잡기 시작하는바 980년간 신라계가 권력을 잡은후 현종이후 다시 권력을 잡은 신라계에 대한 배역이지 고려에 대한 배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대에 이런것을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이론적 논리로 일반화 시켜버렸다.
이러한 내용은 태조가 원래 훈요십조를 만들어낸 것이긴 하겠지만 그 실제 내용은 현종때 7대실록을 수찬하면서 피난 당시 패주(敗主)에 대한 반성없이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현종의 경험과 뜻이 훈요십조에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2019.6.19.
첫댓글 고려 현종 때 수찬된 것이 소위 '7대 실록'이 아닌 '고려사'인가요?
이조 사람들이 수찬한 '고려사'와 혼란이 옵니다...
조선초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에 7대실록으로 불리는데 고려사의 모태가 된것으로 보입니다. 공민왕때 제대로 괸리가 안되 사고에 흩어져 있었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南堂遺稿(高勾麗)本紀新編列傳
高麗史 卷九十五 列傳八 黃周亮
登第顯宗朝,進門下侍郞平章事.九年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特進守太保兼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上柱國. 卒謚景文.
初,契丹兵陷京城燒宮闕,書籍盡爲煨燼,周亮(監修國史)奉詔訪問採掇撰集,太祖至穆宗七代事跡共三十六卷以進.配享靖宗廟庭,宣宗贈開府儀同三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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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黃周亮)等謹按 皇朝旧史;神明丁亥正月尙仁修三代鏡至太祖壬子六月成五十七卷,师大鏡百八十卷,白面芻牟鏡五十七卷,西川鏡七十卷,李文真刪修新集五十卷芻牟鏡七卷.而字多難觧,古碑亦有如此字,不可讀久矣.不得已以今字究其可讀而改修如書,謹上笺而進.
중국의 지명을 한반도로 옮겨 온 것이기에 한반도에는 호남이 없지 않나요? 중원에도 전라도 중에 호남(동정호 이남 )에 광주 전주도 없는 걸로 압니다만...전라좌도에 광주, 전라 우도에 전주가 있기는 한데 당시는 지도를 한양에서서 남쪽을 보고 그린 것이라 중국 동해안 쪽이 좌도가 되지요. 한반도이 있지도 않은 호남을 전라도라고 우겨 정치판에서 전라도를 악용했다고 보는데...고려는 사천성부터 서남부??!!! 신라의 고토, 백제는 중원의 동쪽, 신라와 백제의 위치가 좌우가 다르죠.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동쪽,백제가 서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