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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방이동고분군>의 1호분 긴급보수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해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위의 틈이 벌어져 비가 오면 물이 새어들고 고분 훼손의 위험이 높아 임시 방편으로
가림천을 덮어 놓더니 이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나 봅니다.
이 곳에 복원된 8기의 고분 중 1호분만 널길과 널방 한 쪽을 볼 수 있게 개방했는데, 그나마 입구는 자물쇠로 잠가 놓아
철창 사이로 기웃거릴 수만 있어 관람객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입구도 물이 스며 든다고 천막으로 덮어
버렸으니 다른 곳에 있는 공동묘지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지난 해 11월쯤 공사를 맡은 시공사의 직원이 1호분의 문제점을 찾기 위해 1호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마침 해설 차 나와 있던 나도 그 뒤를 따라 널방 안에 들어가 잠깐이나마 고분을 살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
1단계 공사는 가림막 설치,
쇠파이프를 박고 가림막을 붙이는 간단한 공사 같은데 손 가는 곳이 많은지 세 사람의 일꾼이 붙었는데도 한 나절 이상
걸렸습니다.
봄입니다.
무덤의 마른 잔디 위에 벌써 파릇파릇 새싹들이 물감칠을 하고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체험학습을 하러 왔습니다.
선생님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손을 잡고 재잘재잘 어린이들의 밝은 웃음 소리 고분들 사이로 맑게 울려 퍼졌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집 앞에서도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천진난만한 어린이들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곳에는 선조의 흔적 찾아 다녀가는 일본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2001년, 아키히토 천황이 68회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에서 한 말,
“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한국과 혈연이 있습니다.”
일본 오사카나 교토에 가면 '백제百濟)' 라는 이름이 붙은 절과, 궁[
왕실은 물론 백제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고,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를 모시는 신사도 있고, 동성왕, 무령왕 모두 백제에
서 살다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의 왕이 되었으니 방이동고분군의 백제 굴식돌방무덤이 일본에도 많이 나타나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아닙니다.
작년 5월에도 가이드를 앞 세우고 이곳을 찾은 연세 높은 일본인에게 고분을 안내하며 해설할 때,
수첩 꺼내들고 꼼꼼하게 받아 적는 모습을 보면서 아, 당신도 백제계 일본인이구나, 친근감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백제식 굽다리접시(위)와, 방이동고분에서 출토된 투창이 있는 신라식 굽다리접시(아래)>
이 곳의 고분이 백제의 고분이냐 신라의 고분이냐를 놓고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초기(한성백제)의 묘제가 확실한데, 6호분에서 나온 굽다리접시가 투창이 3개 뚫린 신라식 굽다리이니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곳을 찾은 어떤 관람객은 안내판 위에 적힌 "통일신라"의 제작연대를 지우고 "신라"로 고치는가 하면,
다른 관람객은 아예 "백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해 곱게 잠든 망자들의 잠을 깨우기 일쑤였습니다.^^^
문화재청도 이 곳의 명칭을 <방이동 백제고분군>으로 했다가 "백제"라는 이름 빼고 <방이동고분군>이라 개명한 것을 보면
그 동안 민원이 잇달아 들어왔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이번에 안내판을 다시 세우면서 방이동고분군의 제작연대는 이렇게 고쳐져 있었습니다.
" 이 고분군은 발굴 조사하기 전에 이미 도굴되어 유물이 많이 출토되지는 않았으며, 제6호분에서 회청색 굽다리 접시를
비롯한 전형적인 신라 토기들이 출토되어 신라 시대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성백제지역이었던 서울 우면
동,하남 광암동, 성남 판교 등지에서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이 잇달아 발견됨에 따라 이곳 고분군이 백제시대의 것이라
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
여기 한강 지역을 처음 지배했던 한성백제의 역사는 493년간, 뒤이어 고구려가 76년간 차지했다가, 나제연합군이 고구려를 쫓아낸 후 신라가 백제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이 지역을 강점, 400년 가까이 살았던 역사를 감안하면,
"처음에는 한성백제가 무덤을 썼고, 이어 신라가 무덤을 썼다."는 이형구교수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꽃샘바람이 어지럽게 불지만 그래도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니 곧 꽃이 필 테고,
무덤 속의 주인이 백제인이건 신라인이건 가릴 필요 없이 이 곳은 따뜻한 봄볕 아래 평화롭기 그지 없습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둥바둥했던 파란만장한 역사도 다 땅 속에 묻혔으니 여기는 고즈넉합니다.
산 사람은 땅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은 땅 속에 묻히고, 세상 이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공평합니다.
1호분이 있는 북서쪽 구릉을 지나 7 8 9 10호분이 있는 동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덧널을 만들고 덧널 속에 관을 모신 후 돌을 덮고 봉분을 쌓아 만든 구덩식 돌덧널무덤 4기의 주인공도 땅 속에서 평화롭게 영면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11월이 오면 이 부근에 사는 주민 몇 분이 발의하여 이제는 이 곳의 터줏대감이 된 망자들을 위해 제[
정문 앞에 세운 안내판도 새로 바꿔 세웠고, 안쪽에 있는 두 개의 안내판도 신형(?)으로 바꿨고, 눈쌀 찌프리게 하던 1호분도 긴급보수공사에 들어갔으니 어째 해설 잘 할 자신감이 생깁니다. ^^^
돌이켜 생각하면 저 무덤 속의 주인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니까요. ****
첫댓글 방이동 고분군에 다녀오셨군요. 고분군 관련한 새소식 감사합니다. 종종 들려서 새로운 소식 전해주시고 늘 건강한 나날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