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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애지 겨울호
----정해영, 유계자, 손택수, 박성우, 이순희의 시
압화
정해영
산을 올려놓은
가슴이었다
뱉어서는 안 될 말
가파른 높이로 쌓여
핏덩이일 때
작은 집으로 보낸 아들
남의 식구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천륜을 막아서는 그림자
밤마다 바닥에 업드려
호랑이처럼 울었다
퉁퉁 불은 젖을
눈물로 죄다 말려버리고
일생의 울음
눌리고 눌러
납작해진 아들
신산한 가슴에
눈감아도 지지 않는
꽃으로 박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누구인가? 많이 아는 자이다. 많이 아는 자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며,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가? 언어이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언어는 영원하고, 그의 언어는 영원불멸의 역사로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
시인은 언어의 창조주이며, 예술가 중의 최고의 예술가이다. 그의 언어는 상징과 은유의 날개를 달고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 다닌다. 상징과 은유는 최고의 수사법이며, 이 상징과 은유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시인만이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모든 아들은 전인류의 모델이며 최초의 아들이고, 모든 어머니는 전인류의 성모이며 최초의 어머니이다. 이 아들과 어머니, 이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육체적인 혈연관계를 떠나서 하늘이 맺어준 관계이며, 따라서 이 천륜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극단적인 고통을 가중시키게 된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최초의 하늘이고 대지이며, 그의 영원한 생명의 젖줄이 된다. 또한, 어머니에게 아들은 미래의 희망이자 아침 하늘의 태양이고, 그의 영원한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정해영 시인의 [압화]는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이며, 거기에는 양자로 보낸 어머니의 한과 양자로 입양된 아들의 한이, 마치 자연의 예술작품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압화는 꽃이나 입을 납작하게 눌러서 만든 장식품이지만, 그러나 이제는 조형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가 있다. 산이 풍만한 가슴이 되고, 풍만한 가슴이 압화가 된다. 핏덩이 아들이 산이 되고, 산이 납작 눌린 압화가 된다. 압화는 모든 어머니와 아들을 뜻하는 상징이 되고, 산과 가슴과 호랑이와 어머니와 아들은 은유가 된다. 은유는 인간과 인간, 이미지와 이미지에 구체적인 생명력을 부여하고, 그것들이 하나의 주제, 하나의 상징, 즉, [압화]라는 시를 극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철부지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아들을 작은 집의 양자로 입양시킨 것은 후회가 되고, 후회는 한이 되고, 한은 고통이 되고, 이 고통의 드라마는 아름답고 장엄한 서정시의 진수로 꽃 피어난다.
어머니의 가슴은“산을 올려놓은/ 가슴”이 되었는데, 왜냐하면“뱉어서는 안 될 말”들이“가파른 높이로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일생은 눌리고 눌리어 납작해진 울음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핏덩이일 때”“작은 집으로”보내져“남의 식구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가는 곳마다/ 천륜을 막아서는 그림자/ 밤마다 바닥에 업드려/ 호랑이처럼”울 수밖에 없었던 울음,“퉁퉁 불은 젖을/ 눈물로 죄다 말려버리고”“일생의 울음/ 눌리고 눌러/ 납작해진 아들”,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한 어머니의 울음,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한 아들의 울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압화]로 피어난 것이다.
정해영 시인의 [압화]는 상징의 꽃이며, 그 어떤 꽃보다 더욱더 싱싱하게 살아 있으며, 그 향기가 천리, 만리 퍼져나간다. 작은 집에 아들의 입양을 허락한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이성이지만, 그러나 이 천륜이 끊어진 것을 두고 어머니와 아들은“밤마다 바닥에 업드려/ 호랑이처럼”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천륜이고, 이 천륜은 불멸의 비이성에 기초해 있다. 정해영 시인의 [압화]는 유교적인 관습이 천륜의 목을 비틀어버린 것에 대한 반작용이자 이 천륜이 끊어졌을 때, 그 주체자들에게 그 어떠한 고통을 가했는지를 가장 구체적이고도 가장 웅변적으로 증명해준다. [압화]는 고통이고, 울음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하늘을 감동시킨 언어의 꽃이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머나먼 그 앞날에도, 수많은 벌과 나비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비극적인 삶을 산 어머니와 아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압화는 꽃 중의 꽃이며, 어머니와 아들의 가슴(마음) 속에 핀 꽃이자, 영원히 살아 있는 언어의 꽃이다.
달빛
유계자
한밤중 오줌이 마려워 마당으로 나왔는데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이 마당에 흥건했다
사랑방 창호지를 열고 흘러나오는
-석탄 백탄 타느은데 연기만 풀풀 나구요
-이내 가슴은 타느은데 연기도 아니 나구요
굴뚝 뒤에선 소쩍 소쩍 소쩍......
눈꺼풀에 남은 잠을 갸웃거리며 살금살금 귀를 세웠다
열 살쯤 내 입속으로 흘러든 노랫가락은 머리와 꼬리도 모른 채 흥얼거렸다
달빛을 넘어
세상에 귀 기울이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할아버지 나이를 지나서야
할머니 없는 빈방의 적막함이 곡조로 타던 사발가라는 걸 알았다.
포릇한 추억은 시간의 보습에 찍혀 녹슬어가고
발목을 적시는 어둠에 비틀거리다가
아파트 사이에 낀 어스름 달빛에 문득,
연기 없이 애가 타던 그 봄밤을 만나곤 한다
----애지문학회 사화집 {문어文魚}에서
‘사발가’란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울분을 노래한 경기민요이며, 소리꾼 박춘재에 의하면 온정타령溫井打令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굿거리장단에 유절형이며, 후렴이 있고, 서양의 음계로 나타내면‘라, 도, 레, 미, 솔’의 5음으로 되어 있고, 노랫말은 약 20여 가지가 있는데 널리 알려진 가사는“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구요/ 이 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왜놈의 지원병 죽으면/ 개떼 죽음이 되구요/ 광복군이 죽으면/ 독립의 열사가 되누나" 라는 가사라고 할 수가 있다.
경기민요로서의 사발가란 사설에 쓰라림과 흥겨움이 있는 것이 그 특징이지만, 유계자 시인의 [달빛]은 할아버지의 나이가 지난 손녀가 그 옛날을 되돌아보며 부르는 사발가이며, 그 노래는 회고적이며 애상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회고적이라는 것은“열 살쯤 내 입속으로 흘러든 노랫가락은 머리와 꼬리도 모른 채 흥얼거렸다// 달빛을 넘어/ 세상에 귀 기울이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할아버지 나이를 지나서야/ 할머니 없는 빈방의 적막함이 곡조로 타던 사발가라는 걸 알았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것을 말하고, 애상적이라는 것은 그 시절 할아버지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너무나도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시가 훌륭한 시인가, 아닌가라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단어 하나와 토씨 하나에도 시인의 정신과 혼이 들어 있는가, 아닌가가 될 것이다. 언어는 생명이고, 피이며, 그의 숨소리와도 같다. 시인과 언어가 하나가 되지 않고 떨어져 있으면 그 시는 제아무리 뛰어난 두뇌와 지식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만인의 심금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유계자 시인의 [달빛]의 언어는 시인의 생명 자체이며, 그 어느 것 하나 상호 이질적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만물일여萬物一如, 즉, 유계자 시인의 생명과 언어의 일체화는 이 [달빛]의 아름다움을 가장 압도적으로 증명해준다.
한밤중 오줌이 마려워 마당으로 나왔는데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이 마당에 흥건했고, 그때“사랑방 창호지를 열고”“석탄 백탄 타느은데 연기만 풀풀 나구요/ 이내 가슴은 타느은데 연기도 아니 나구요”라는 할아버지의 사발가가 흘러나왔다.“굴뚝 뒤에선 소쩍 소쩍 소쩍...”소쩍새가 울고 있었고,“열 살쯤 내 입속으로 흘러든 노랫가락은 머리와 꼬리도 모른 채 흥얼”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달빛을 넘어/ 세상에 귀 기울이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할아버지 나이를 지나서야/ 할머니 없는 빈방의 적막함이 곡조로 타던 사발가라는 걸”알게 되었다. 어느덧“포릇한 추억은 시간의 보습에 찍혀 녹슬어가고/ 발목을 적시는 어둠에 비틀거리다가// 아파트 사이에 낀 어스름 달빛에 문득// 연기 없이 애가 타던 그 봄밤을 만나게”되었던 것이다.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이 마당에 환했다를,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이 마당에 흥건했다라는 시적 표현,“굴뚝 뒤에선 소쩍 소쩍 소쩍...// 눈꺼풀에 남은 잠을 갸웃거리며 살금살금 귀를 세웠다// 열 살쯤 내 입속으로 흘러든 노랫가락은 머리와 꼬리도 모른 채 흥얼거렸다”라는 시적 표현,“달빛을 넘어/ 세상에 귀 기울이는 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할아버지 나이를 지나서야/ 할머니 없는 빈방의 적막함이 곡조로 타던 사발가라는 걸 알았다”라는 시적 표현,“포릇한 추억은 시간의 보습에 찍혀 녹슬어가고/ 발목을 적시는 어둠에 비틀거리다가// 아파트 사이에 낀 어스름 달빛에 문득// 연기 없이 애가 타던 그 봄밤을 만나곤 한다”라는 시적 표현은 제일급의 시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구이며, 대부분의 시인들이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언어와의 싸움에 지쳐있을 때, 그는 언어를 데리고 놀며, 그 언어와 함께, 너무나도 한국적이고 인간적인 춤과 노래를 온몸으로 연출해낸다. 유계자 시인의 [달빛]은 이제 지방적이고 변방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현대시의 경사이며,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달빛은 열 살쯤의 손녀이며 밤하늘의 달빛이 되고, 달빛은 유계자 시인이고 오줌이고 눈물이 된다. 달빛은 할아버지이며, 소쩍새가 되고, 달빛은 아파트 사이에 낀 어스름이고, 연기 없이 애가 타던 그 봄밤의 사발가가 된다. 이처럼 다종다양하고 그 울림이 큰 [달빛]이‘사발가’의 민요 속에 그 서사성을 얻게 되고, 과거와 현재,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그 애상적인 슬픔을 진정시키며 만인들의 사랑의 찬가로 울려 퍼지게 한다.
석탄 백탄이 타면 연기라도 풀풀 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없는 이 내 가슴은 석탄 백탄처럼 타들어가도 연기가 나지 않으니,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할머니 없는 빈방의 적막함을 사발가로 달랬던 할아버지, 연기 없이 애가 타던 그 봄밤을“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이 마당에 흥건했다”라고 표현했던 유계자 시인, 달빛이 오줌이 되고 눈물이 되었던 사발가----. 유계자 시인의 할아버지는 이‘사발가’를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얘야, 나는 비록 혼자 사는 할아버지이지만, 할머니를 향한 내 사랑은 이처럼 간절하니 내가 죽으면 꼭 할머니 곁에 묻어다오. 만수향도 피워놓고, 술잔도 따라놓고, 몇 송이 국화꽃도 꽂아놓고, 내 사랑, 그 아름다운 삶을 기억하고 추모해다오!”
“포릇한 추억은 시간의 보습에 찍혀 녹슬어가고/ 발목을 적시는 어둠에 비틀거리다가// 아파트 사이에 낀 어스름 달빛에 문득,// 연기 없이 애가 타던 그 봄밤을 만나곤 한다.”
열 살쯤 내 입속으로 흘러든 노랫가락은 어느덧 할아버지의 나이를 지나서야 내 머리와 가슴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나는 이 [달빛]이라는 최고급의 사모곡思慕曲, 즉,‘조부송가祖父頌歌’를 부르게 된 것이다.
모래인간
손택수
초등학교 일학년 나의 첫 미술수업은 모래인간 그리기
4B 연필로 윤곽선을 그리고 선을 따라 풀칠을 한 뒤
풀이 마르기 전 얼른 모래를 뿌리면
모래인간이 태어나는 것이었다
풀기가 다한 모래알이 떨어져서 서걱이는 소리가 들려오면
울음소리인가 하고 새 풀을 발라주었다
고향 마을 떠나 도회로 올 때도 응당
책가방 속에 담겨 따라온 모래인간
어머니는 유산한 사내아이를 평생 잊지 못했는데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동생이라도 생긴 듯이
보살피던 그를 잃어버린 것이 언제였을까
먼 훗날 티벳의 모래 만다라 이야기를 들었다
만다라가 완성되면 스님들은 애써 공들인 색색의 그림을
바람에 흩어 지워버린다고 했다
그림 너머의 세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시원하게 무너지는 모래의 해방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우는 일로 만다라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까맣게 잊고 지낸 모래인간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유골가루를 흙에 버무려 풍장을 하였을 때다
그때 내 몸에서도 모래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오래 전 함께 서걱이며 놀던 모래인간은 한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자와 원자가 결합하면 생명체가 탄생하고, 원자와 원자들이 분리되면 그 생명체를 이루던 형체들이 산산이 흩어진다. 윤회사상은 한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들로의 변모(탄생)를 뜻하지, 동일한 생명체의 반복을 뜻하지는 않는다.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다. 하루를 살았거나 천년을 살았거나 아무런 차이도 없고, 인간으로 태어났거나 모래가 되었거나 아무런 차이도 없다.
손택수 시인의 [모래인간]은 인간 존재론의 진수이며, ‘나는 모래인간으로 태어나, 모래인간의 삶을 살다가, 모래인간의 삶을 완성했다’라는 매우 깊이 있고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도화지는 삶의 터전이 되고, 풀칠은 생명력이 되고, 4B 연필은 모래인간의 창조주가 된다.
초등학교 일학년 나의 첫 미술수업은 모래인간 그리기였고, 4B 연필로 윤곽선을 그리고 선을 따라 풀칠을 한 뒤 풀이 마르기 전 얼른 모래를 뿌리면 모래인간이 태어났던 것이다. “풀기가 다한 모래알이 떨어져 서걱이는 소리가 들려오면/ 울음소리인가 하고 새 풀을 발라주었”고, “고향 마을을 떠나 도회지로 올 때에도 응당/ 책가방 속에”는 모래인간이 따라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유산한 사내아이를 평생 잊지 못했는데” 어느덧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동생이라도 생긴 듯이/ 보살피던 그를 잃어”버렸다.
그 모래인간을 까마득하게 잃어버리고 지내다가 “먼 훗날 티벳의 모래 만다라 이야기를 들었다/ 만다라가 완성되면 스님들은 애써 공들인 색색의 그림을/ 바람에 흩어 지워버린다고 했다/ 그림 너머의 세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시원하게 무너지는 모래의 해방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우는 일로 만다라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만다라는 무엇인가? 만다라는 우주를 뜻하고, 신들이 사는 장소이며, 우주의 힘이 응축된 장소를 말한다. 만다라는 태장계와 금강계로 구분되고, 태장계는 하나에서 여럿을 향해 움직이고, 금강계는 여럿에서 하나를 향해 움직인다. 만다라는 만물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만물이 되는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지만, 그러나 만다라는 그림 그리기의 과정 속에 있지, 그 만다라의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만다라를 그리고, 끊임없이 만다라를 지우는 것, 이 삶과 삶의 과정들을 “유골가루를 흙에 버무려 풍장을 하였을 때” 그는 또다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골가루를 흙에 버무려 풍장했을 때, “내 몸에서도 모래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났고, “오래 전 함께 서걱이며 놀던 모래인간은 한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다라와 현실의 세계도 아무런 차이가 없고, 인간과 모래인간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래인간이 만다라의 주인공이고, 모래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이며, 이 세계의 창조주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만다라를 그리는 것이고, 만다라를 완성하는 것은 만다라를 지우는 것이다.
니체가 바그너를 삼류작곡가로 비판했다고 해서 바그너가 죽었는가? 쇼펜하우어가 그의 스승인 헤겔을 최고의 사기꾼이라고 비판했다고 해서 헤겔이 죽었는가? 헤겔이 그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칸트를 인정사정없이 비판했다고 해서 칸트가 죽었는가? 이 비판의 생산성과 이 비판의 위대함을 생각해보라! 비판만이 아름답고, 비판만이 또, 아름답다.
황홀한 수박
박성우
잘 읽은 수박은 칼끝만 닿아도 쩍,
벌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혀끝만 닿아도 쩍,
벌 어 진 다
수박물이 떨어져 젖은 삼각 티슈처럼
붉은 속살에 스민 황홀한 팬티, 입을 쩍,
벌려 혀끝으로 벗겨낸다
수박씨처럼 음모를 뱉어내기도 하면서
마른 침만 삼키곤 했던 수음의 사춘기를 서른에 버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기쁜 일은 무엇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일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영속적인 일은 무엇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일은 무엇일까?
성교는 종을 창조하는 일이며, 우리는 이 성교를 통해서 아이들을 낳고 종의 건강과 종의 역사를 발전시켜 나간다. 성교는 자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이 성교가 끝나면 그는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된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고, 그 식물이 죽는 것과도 같다.
성교는 더럽고 추한 것도 아니고, 도덕과 법률로 규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나 자기 짝을 찾으려는 경쟁 때문에 성교에 대한 선과 악을 정하고, 온갖 불륜과 추문들을 단죄하지만, 그러나 이성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온갖 폭력과 음모가 이루어지는 것도 성교 때문이고, 심지어는 사생결단식의 결투와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성교 때문이다. 그는 크게 어리석어 지고, 그는 수치심을 모르며, 오직 단 하나의 목적, 즉, 자기 짝을 찾아서 사랑의 깃발을 꼽는 일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 읽은 수박은 칼끝만 닿아도 쩍” 벌어지고,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혀끝만 닿아도 쩍/ 벌어진다.” 이 세상에 태어나 젖을 먹고 말을 배우는 것도 자기 짝을 찾는 것이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하는 것도 자기 짝을 찾는 것이다.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자기 짝을 찾는 것이고, 서로가 몸과 몸을 맞대며 춤을 추는 것도 자기 짝을 찾는 것이다. 이 자기 짝을 찾는 소리가 그 대상을 만나면 “수박물이 떨어져 젖은 삼각 티슈처럼/ 붉은 속살에 스민 황홀한 팬티, 입을 쩍/ 벌려 혀끝으로 벗겨낸다”라는 시구처럼, 너무나도 격렬하고 황홀한 성교를 하게 된다.
박성우 시인의 [황홀한 수박]은 성교의 상징이며, 그 황홀함의 강도가 붉디 붉은 수박으로 나타난 것이다. 붉디 붉은 수박은 황홀함의 강도를 뜻하고, 칼끝만 닿아도 쩍 벌어지는 수박은 성숙한 여인의 그곳을 뜻하고, “수박물이 떨어져 젖은 삼각 티슈처럼/ 붉은 속살에 스민 황홀한 팬티, 입을 쩍/ 벌려 혀끝으로 벗겨낸다”는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야성적인 성교 행위를 뜻한다.
황홀함, 황홀함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이성의 아름다움 앞에서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황홀함을 맛본 자는 자기 자신의 목숨마저도 더없이 가볍게 던져버린다. 박성우 시인의 [황홀한 수박]은 성교의 절정이고, 이 성교의 절정은 황홀함의 극치이다. 황홀함은 그 어떤 독약이나 마약보다도 더 힘이 세고, 이 황홀함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며, 오직 순간에 살고, 순간에 만족하며, 그 황홀한 순간을 위해 죽어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것은 성교의 향연 밖에는 없다. 수박씨처럼 수많은 음모를 뱉어내며 마른 침만 삼키곤 했던 수음의 사춘기를 지나면 붉디 붉은 수박이 쩍 벌어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성교의 향연이 펼쳐진다.
달 밝은 봄밤, 무논에서 개구리가 울듯, 한여름 숲속에서 매미가 울듯, 발정기를 맞이한 암소들이 입에 게거품을 흘리며 산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며 자기 짝을 찾듯----.
황홀함은 성교의 극치이며, 이 황홀함이 모든 미학의 기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 옛날의 성은 사랑이며 생산적이었지만, 오늘날의 성은 대부분이 불륜과 타락의 도구이며, 생산과는 관계가 없다. 현대사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성이 타락한 사회이며, 몰락과 종말이라는 두 바퀴로 인간의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있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시詩 죽비
이순희
그대에게 잘 보이려
온갖 미사여구로
아첨하고 아양 떨었다
그대의 본적지는 절(寺)인 걸
나는 한참을 몰랐다
참다못한 당신
말 삼가하라
시로 죽비를 내리친다
이순희 시인의 [시詩 죽비]를 읽다보면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즉심시불卽心卽佛, 이심전심以心傳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들이 떠오른다. 예술 중의 예술인 시가 언어의 사원(言+寺)인 것도 바로 그 말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말은 경전 밖에 있으며, 그것은 언어로 기록할 수가 없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의 마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들의 마음으로 지어낸 것이다.
이순희 시인의 [시 죽비]는 언어의 사원에 대한 성찰의 소산이며, 그 성찰의 결과로 자기 자신을 ‘죽비’로 내려친 대오각성의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시는 경전 밖에 있으며, 온갖 미사여구로 화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시는 돈과 명예와 권력 밖에 있으며, 온갖 아양과 아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삶과 삶의 진실이 없는 시는 공허하고, 시를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인식하게 되면, 온갖 아첨과 아양으로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어지럽히고, 모든 미덕들을 다 질식시켜버린다.
시는 마음이고 생활이며, 진실이 없으면 이 세상의 삶을 살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기교의 산물도 아니고, 인간의 심장과 붉디 붉은 피는 그토록 더럽고 추한 욕망의 산물도 아니다. 시는 모든 기교의 총체이면서도 그 기교를 떠나 있고, 시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주재하면서도 돈과 명예와 권력을 떠나 있다. 온갖 미사여구로 시를 쓰는 사람은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백치와도 같고, 시인의 월계관만을 생각하며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어대는 사람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백치와도 같다.
시는 사상과 이론의 꽃이고, 사상과 이론은 시의 열매이다. 사상이란 인간 존재의 근거이자 목적이고, 이론이란 그 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정책(진리)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공산주의 등은 나의 말대로 낙천주의의 토대 위에서 그 이상세계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상과 이론이 없는 시인은 전인류의 스승이 될 수 없다. 시인이란 새로운 언어의 창조자이자 모든 가치의 창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대의 본적지도 절이고, 나의 본적지도 절이다. 이 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꿈을 꾸고, 그 꿈의 내용을 시로 쓰는 것이다. “말 삼가하라!”, “말 삼가하라!” 이 세계는 당신의 마음이 지어낸 것이고, 이 새로운 세계(시)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매미가 껍질을 벗고, 뱀이 허물을 벗는다.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통해 사유의 혁명과 함께 새로운 미래의 인간이 탄생한다.
시 죽비: 온몸으로, 온몸으로 시를 쓰며, 새로운 이상낙원을 창조하려는 이순희 시인의 채찍----.
너무나도 경건하고, 너무나도 엄숙한 큰 깨달음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