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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최소한의 양심
―강상윤의 {너무나 선한 눈빛} 시 세계
권온
1.
강상윤의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단순한 문학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이고, 진실의 울림이다. 우리는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詩篇)의 배후에서 사회, 사건, 외세, 비극, 증언 등의 어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파란만장한 근대사와 현대사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시집을 읽으며 ‘일제강점기’→‘8‧15 광복’→‘한국전쟁’→‘남북 분단 고착화’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결절(結節)들을 다시금 인식할 수 있는 긴요한 기회를 얻게 된다. 필자는 강상윤의 시집 중에서 「아야떵어리 1」, 「한 방 쏴 주세요」, 「발작」, 「소 한 마리 값」, 「국물」, 「탁성록」, 「쌀 두 말」, 「이름을 빼앗기지 말라」, 「개들이 날뛰다」, 「4.3은 살아 있다」 등 10편의 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글을 진행할 것이다.
2.
시집의 서두에 위치한 ‘시인의 말’에서 강상윤은 “아직도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넘쳐나는 제주도와 한국에서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라고 언급하였다. 시인은 최소한의 양심의 산물로서 이번 시집을 상재했을 테다. 필자는 여기에서 ‘양심(良心)’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싶다. ‘양심’은 옳고 그름, 선과 악, 도덕 등과 연결되는 의식을 의미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양심의 가책 또는 죄책감은 고백할 필요가 있다. 예술작품은 고백이다.(A guilty conscience needs to confess. A work of art is a confession.)” 독자들은 이제부터 강상윤의 시를 읽으며 고백으로서의 예술작품과 만나게 된다. 그 고백은 양심의 가책 또는 죄책감으로서의 고백일 수 있다.
볼레 오름 근처에 숨어 있을 때는 기침도
제대로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였네
어떤 여자는 애기 둘을 데리고 다녔는데
한 번은 순경들이 숯 굽는 굴, 숯가마 집 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이제 애기가 울어 버리면 다 죽지 안 합니까
그래서 이불을 있는 대로 다 덮었더니 걸리지는
안 하고 무사히 살기는 살았는데
순경들이 가고 이불을 걷어 보니까는 애기들이
숨 막혀 죽었어요 아여떵어리 그럴 정도로
기침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였네
―「아여떵어리 1」 전문
“아여떵어리”라는 이 시의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여떵어리’의 뜻을 알고 있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시인의 주석에 의하면 이것은 ‘아, 어떻게 하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제주도 방언의 독특함을 새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강상윤이 이번 시에 ‘아여떵어리’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단순히 제주도 방언의 독특함을 환기하기 위한 것은 아닐 테다.
이 작품의 배경에는 ‘제주 4‧3 사건’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4‧3’에 대해서 한 번쯤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4‧3’에 대한 정보나 기록 중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4‧3’이 미군정기 또는 미군정 시대에 발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1990년대 이후 드러나기 시작한 진실에 의하면 ‘4‧3’은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2만5000~3만 여명의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을 테고, 강상윤은 이번 시집에서 이를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형상화였다.
인용한 시 「아여떵어리 1」에는 “어떤 여자”와 “애기 둘”이 등장한다. 그녀는 “순경들”에 쫓겨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볼레 오름 근처에 숨어 있”었는데, “애기가 울어 버리면 다 죽”을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애기들” 위로 “이불을 있는 대로 다 덮”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순경들이 가고 이불을 걷어 보니까는 애기들이/ 숨 막혀 죽었”고, 그녀는 “기침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에서 “아여떵어리”를 내뱉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감히 자신과 이웃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애꿎은 자식의 목숨을 불가피하게 희생시킨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76년 전에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 어떻게 하리’라는 의미를 담은 그녀의 탄식이 오늘날에도 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김종삼 시인의 시 「민간인(民間人)」의 어떤 대목을 생각한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부장님 나 안 죽었어요. 나 좀 한 방 쏴
주세요.” 당시 대전 형무소 교도관 이준영 씨는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으로 위와 같이 증언을 하였네
총을 맞아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살려 달라고
하지 않고, 총 한 방을 더 쏘아서 아예 죽여
달라고 할까
(중략)
―「한 방 쏴 주세요」 부분
도발적인 제목을 붙인 이 시의 제작 배경에는 “대전 형무소 교도관 이준영 씨”의 “증언”이 위치한다. 이준영 씨는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이다. 강상윤의 시집은 원칙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중심에 두고 기획되었으나, ‘4‧3’과 연결된 중요한 사건들도 적지 않다. 이 시에 언급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시인에 의하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보도연맹 관련자와 제주4.3관련자, 여수‧순천 사건 관련자 등 1,800여 명에서 7,000여 명”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 무차별 학살”되었다. 곧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은 1945년 광복과 1950년 한국전쟁 사이에 전개된 역사의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강상윤의 이 시는 총에 맞아 죽어가던 인물의 긴박한 음성을 담아냄으로써 독자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당긴다. 총에 맞은 그 인물은 이미 삶의 희망을 포기하고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요청을 하고 있다. “나 안 죽었어요. 나 좀 한 방 쏴 주세요.” 고통의 극단에 이른 자가 내뱉는 언어의 절실함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74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고통은 현재 진행 중이다.
아버지는 술을 한 잔 하거나 하면
소나무밭을 가리키면서 저기 군인들이
총을 메고 나를 죽이러 온다
아버지는 돌멩이를 줍고
어머니와 내가 안 주우면
저 군인들이 날 죽인다
죽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저 군인을
죽여야 한다.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 술 마신 기분을 맞추어 드려야지
그러나 아버지가 탁 잡는 건 어머닌데
어머니를 군인으로 알고
얼마나 두드려 패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소리를 막 지르고,
한참 후에 아버지가 눈을 떠서 두리번거리며
군인이 어디 갔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게 아닙니다
밤에 집에 들어오다 깜깜한 곳에만 가면
그게 다 군인입니다 저 소나무도 군인,
전봇대도 군인, 집안에 있는 가구도 다
군인입니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그 이유를 알았는데, 그 때 아버지를 잘
치료받게 해드렸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아버지는 그 때 원동 마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두 분을 한꺼번에 잃으시고
아버지도 여러 군데 총을 맞았지만
간신히 살아나셨습니다
―「발작」 전문
이 시를 이끄는 인물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시적 화자 ‘나’ 등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양창석 씨”이다. 그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의 무대 중 하나였던 ‘원동 마을’에 거주했다. 이 시는 ‘양창석 씨’의 ‘딸’인 ‘나’가 관찰한 이상한 ‘아버지’를 묘사한다. 어린 소녀로서의 ‘나’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술을 한 잔 하거나 하면”, 온갖 사물에서 “군인(들)”을 찾아냈다. 곧 ‘아버지’는 주위의 다양한 대상들을 적대적인 ‘군인(들)’로 이해하고 그들에게 대응했다. ‘아버지’는 “총을” 멘 “군인들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생각해서 “돌멩이를” 줍고 아내와 딸에게 “우리가 먼저 저 군인을/ 죽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놀라운 점은 ‘아버지’가 ‘군인(들)’로 이해한 것들이 사실 “소나무(밭)”, “전봇대”, “집안에 있는 가구” 등이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왜 ‘아버지’는 ‘술’을 먹거나 “깜깜한 곳에만 가면” 주변의 다양한 대상들을 ‘군인(들)’로 오해한 것일까?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 “어머니를 군인으로 알고”, “두드려 패”게 된 것일까? ‘아버지’의 이와 같은 이상한 행동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일종의 “발작”일 수 있다. 그것의 근원에는 ‘아버지’의 어떤 두려움, 공포, 트라우마(trauma) 등이 내재하고 있을 테다. 딸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그 때”, “여러 군데 총을 맞았지만/ 간신히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그 때’는 1948년을 가리킬 것이다. “아버지는 그 때 원동 마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두 분을 한꺼번에 잃으”셨다. ‘제주 4‧3 사건’은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1949년 1월로 접어들자 구좌면 세화지서에서는
금품을 갈취하느라 소개민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일단 잡아 놓고 죽이다 보면 뭐가 나오거든요
우리 마을 송당리 출신 우익 청년단장이 거간꾼
노릇을 했는데 소 한 마리 값을 바치면 풀어
준다고 했습니다
송당리 일등 부자인 김성사(金聖仕, 당시 30세)
는 금품 요구를 거절했다가 죽었습니다 우리 형
(채권병 蔡權柄, 당시 36세)이 끌려간 후에도 청
년단장으로부터 흥정이 들어왔어요
아버지는 부랴부랴 소 한 마리 값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풀어 주기로 한 날인 1949년 1월 31일에
마침 월정리 주둔 군인들이 지나가다가
감금돼 있던 형을 죽였습니다
―「소 한 마리 값」 전문
‘제주 4‧3 사건’은 7년7개월 동안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곧 2000년 1월에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2조)’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4‧3’이 단순히 1948년 4월 3일이라는 특정 시점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 사이에 넓게 분포하며 움직이는 대상인 것이다.
강상윤의 이 시는 1949년 1월의 어느 날을 포착함으로써 ‘제주 4‧3 사건’의 지속성을 제시한다. 독자들이 이 시를 읽으며 놀라게 되는 이유는 ‘4.3’에서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되는 과정의 불합리성과 무관하지 않다. 곧 “구좌면 세화지서에서는/ 금품을 갈취하느라 소개민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일단 잡아 놓고 죽이다 보면 뭐가 나오거든요”라는 “채희주”의 증언에는 당시 희생된 제주도 주민들의 억울함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소 한 마리 값을 바치면 풀어/ 준다”라는 “우익 청년단장”의 “거간꾼/ 노릇” 또는 “흥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아버지”가 “소 한 마리 값을 마련했”으나 결국 “지나가”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우리 형”의 운명을 위로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제주 4‧3 사건’이라는 비극은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의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어쩌면 ‘소 한 마리 값’을 위한 ‘흥정’의 무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월정리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 때리기를 시키기도 했어요
심지어 할아버지와 손자간에도 강요했지요
세게 때리지 않으면 그놈들이 달려 들어
죽도록 때렸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행위입니다 왜 그러냐면,
그래야 뭔가 국물이 나오거든요
이장이나 만보단장이 돈을 모아 가든지
소를 끌고 가든지 해야 그 짓이 끝났습니다
―「국물」 전문
이 시는 위에서 살핀 「소 한 마리 값」과 같은 계열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월정리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 때리기를 시”킨 “서북청년단”은 「소 한 마리 값」에 나오는 “우익 청년단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우익 청년단장’이 “소 한 마리 값”을 흥정했듯이 ‘서북청년단’은 제주도 주민들에게서 “국물”을 요구한다. ‘서북청년단’은 “돈”이나 “소” 등으로 구체화되는 ‘국물’을 얻기 위해서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곧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서로 뺨 때리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서북청년회’ 또는 ‘서북청년단’은 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극우 반공단체 또는 우익청년단이다.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기득권을 잃고 남하한 지주 집안 출신의 청년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서북청년단’은 월남 청년들이 좌익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한편 능률적인 체제를 갖추기 위해 설립한 청년 단체였다. 그들은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돕는 등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우익 진영의 선봉을 담당하였고 ‘제주 4‧3 사건’에도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상윤의 이 시에 제시되는 서북청년단의 실상은 ‘좌’와 ‘우’라는 이념의 허망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략)
“서북청년단 이 놈들이 고얀 놈들이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 놈들이 사건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것이다.”
탁성록은 원래 작곡가이고 나팔수인데 진주
논개의 노래를 작사 작곡할 정도였네.
그러나 진주 CIC대장을 할 때도 민간인들을 많이
죽였네. 얼마나 마약 주사를 많이 맞았는지 주사
바늘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고 하네.
영화 ‘지슬’의 마약쟁이 군인이 바로 탁성록
대위를 모델로 한 것이네.
―「탁성록」 부분
강상윤이 이 시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탁성록 대위”다. “윤태준”의 “증언”에 의하면 “9연대 정보참모”였던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다 죽었다.” ‘탁성록’은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았으며,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르도록 유도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진주 CIC”와 관련하여 진주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하면서 “민간인들을 많이/ 죽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죽이는 ‘탁성록’의 잔인성은 ‘아편’ 또는 ‘마약’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마약 주사를 많이 맞았는지 주사/ 바늘이 들어갈 곳이 없었”을 만큼 ‘탁성록’은 심각한 “마약쟁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탁성록과 관련된 특이 사항으로는 그가 “원래 작곡가이고 나팔수”였으며 “진주/ 논개의 노래를 작사 작곡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떠올리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그림과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컸으며 화가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히틀러와 그림, 미술의 관련성은 탁성록의 노래, 음악과의 관련성에 대응될 수 있다. ‘탁성록’이라는 특정한 개인의 내면에서 진행된 예술과 전쟁의 연결은 차후의 흥미로운 연구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4.3이 무서운 것은 혐의를 밝히고, 시시비비를
가려 죄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토벌대에게 밉보이면 죽이는 판이었네
김태수(金泰守, 당시 37세)는 서귀면 신효리의
유지였는데, 힘도 세고 결코 호락호락하게 당할
인물도 아니었네 그러나 1948년 11월 22일, 한
순경이 찾아와 “형님, 꿩사냥이나 하러
갑시다.”며 그를 끌고 가 총살해 버렸네
이듬해 그의 아내, 박인화(당시, 38세)도
경찰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네 김태수의 딸
김정자 씨가 여섯 살에 겪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네 “하루는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경찰 스리쿼터가 와서 어머니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옷을 갈아
입고 순경들을 따라갔습니다. 나는 차에
매달리면서 하소연을 했지만, 경찰들은 계속
밀쳐 내고 밀쳐 냈어요. 어머니는 나에게
‘큰 아버지 집에 가 있어라. 나는 일본에
다녀오는 것이다’고 하셨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에게 닥칠 일을
직감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주위에서는 “아이고, 불쌍한 것! 네 어머니는
그 때 쌀 두 말만 주지 않았어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했습니다. 산 쪽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총살당할 만큼의
죄가 될 수 있습니까?”
―「쌀 두 말」 전문
이번 시는 ‘제주 4‧3 사건’의 핵심 시기인 ‘초토화 작전 시기’ 또는 ‘강경진압 시기’를 다룬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 사이의 기간에 다수의 제주도 주민들은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 끼어서 희생되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인 “김태수”는 당시 “서귀면 신효리의 유지”였고 “박인화”는 ‘김태수의 아내’였다. ‘김태수’와 ‘박인화’는 ‘초토화 작전 시기’에 “경찰” 또는 “순경”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들 부부가 총살당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딜레마(dilemma)’에 빠졌기 때문이다. ‘김태수’와 ‘박인화’는 ‘4.3’ 당시 제주도를 먼저 장악했던 “산 쪽” 곧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서 “쌀 두 말”을 제공하였는데, 이것이 결국 나중에 ‘진압군’ 또는 ‘토벌대’에 의한 총살이라는 결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김태수’와 ‘박인화’가 “산 쪽”에 ‘쌀 두 말’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들 부부는 ‘무장대’에게 희생되었을 수 있다.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좌’와 ‘우’ 사이에서 이념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좌’도 잘 모르고 ‘우’도 잘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결코 “총살당할 만큼의/ 죄”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 사건’의 실상에 관한 강상윤의 다음과 같은 판단은 주목된다. “4.3이 무서운 것은 혐의를 밝히고, 시시비비를/ 가려 죄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토벌대에게 밉보이면 죽이는 판이었네”
(중략)
그러나 그 명단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네 양경수 씨는 그 명단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네 “난 소개
내려온 후 이쪽저쪽에 시달리는데 지쳐서,
경찰에 지원하기로 하고, 서귀포 경찰서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비명 소리가
귀를 찢었고, 갖가지 고문은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 여자들은 일단 홀랑 벗기고 고문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즉 끌려가는
사람이 있을 때, 그를 앞서거나 근처에 있어서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매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되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이니까요. 그러면 졸지에 폭도가 되는
겁니다.”
―「이름을 빼앗기지 말라」 부분
“현기상 씨”에 따르면 그의 동생 “현기호”는 “토벌대가 확보한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초토화 작전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시에서 “서귀면 신효리/ 사람들”은 “총살을/ 당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어떤 명단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 명단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이 “매”를 맞거나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아무 이름이나” 언급한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이름”이 “고문”을 당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면 그 누군가는 ‘무장대’가 되거나 “졸지에 폭도가 되는” 것이다.
토벌대가 확보한 명단은 이른바 삶과 죽음을 나누는 기준으로서의 “살생부”가 되었다. 그러나 강상윤에 의하면 ‘살생부’ 또는 “그 명단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고문’에 시달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신뢰할 수 있을까? ‘매’를 맞는 사람이 당장의 괴로움을 회피하기 위해서 머릿속에 떠오른 아무런 이름이나 언급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므로 우리는 ‘4.3’ 당시 총살당한 민간인들 중 상당수가 “이름을 빼앗”긴 억울한 희생자들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중략)
“난 수기동 청년 20명과 함께 바늘오름 남쪽에
있는 ‘궤’에 숨어 지냈습니다. 사건이 나던
날, 오름 중턱에 올라 주변을 살피는데 오전
7시께 군인들이 교래리에서 와흘 2구로 들어가는
것이 훤히 보이더군요. 군인들이 집집마다 불을
붙이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는 것도 보였습니다.
저녁 때 마을로 와 보니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여동생(고성순高性順)은 이마에 총을 맞아
즉사했고, 아내(현정돈玄貞敦)는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아침에 먹은 음식이 밖으로
흘러나왔습니다. 그날 수기동에서만 16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불에 탄 시신들은 배가 터져
창자가 다 나와, 개들이 그걸 보고 날뛰었습니다.
우린 개들을 쫓아내고 시신들을
가매장하였습니다.”
(중략)
―「개들이 날뛰다」 부분
“고성춘 씨”의 증언에서 출발하는 이 시는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젊은 남자들” 또는 “청년 20명”의 일원으로서 “토벌대가 와흘 2구”의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숨어 지”내거나 “피신”할 수 있었다. 젊은 남자들을 제외한 주민들은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군인들” 또는 ‘토벌대’는 “오전 7시” 무렵 마을에 들어서자 “집집마다 불을/ 붙이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고성춘 씨’가 “저녁 때 마을로 와 보니 처참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여동생’은 “이마에 총을 맞아/ 즉사했고”, ‘아내’는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아침에 먹은 음식이 밖으로/ 흘러나왔”으며, “불에 탄 시신들은 배가 터져/ 창자가 다 나”왔다. 그리고 시신들을 “보고 날뛰”는 “개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 현장은 시각, 청각, 후각 등 거의 모든 감각을 강렬하게 활성화하는 장소였을 테다. 젊은 남자들을 제외한 여자, 노인, 아이 등 “불가항력의 노약자들”을 향한 토벌대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독자들의 마음은 가늠하기 힘든 슬픔으로 차오른다. ‘4.3’ 당시 “방화하고 학살한 군인”에 대한 단죄는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유족은 말을 한다
4.3은 살아 있다
그러므로 피해자 유족들은
영혼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
(중략)
제주의 모든 마을을 모으면
엄청난 큰 부피의 피해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라산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한숨과 눈물과 한의 기록일지라도 후세에 남기고
지금은 모두가 화합의 손을 맞잡을 때일 것이다
―「4.3은 살아 있다」 부분
강상윤의 이번 시집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다. 이 시는 시인이 고민하고 탐색한 핵심 대상으로서의 ‘4.3’을 향한 넓고 깊은 제안이다. 그에 의하면 ‘4.3’은 “제주의 살아 있는 말이며/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기록이고/ 먼 훗날에 있을 제주인의 슬픈 이야기이다”
강상윤에 따르면 “죽은 자가 있고 죽인 자가 있지만/ 죽임의 가늠과 책임자가 없는 것이/ 4.3의 특징이”다. “그 수다한 죽음”, 그 무수한 죽음은 왜 발생했고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는 게 현실일 수 있다. 시인에 의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 있는 유족은 말을 한다” “엄청난 큰 부피의 피해”를 남긴 “4.3은 살아 있다” ‘4.3’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 흔적을 찾아보는 일은 어쩌면 “한숨과 눈물과 한의 기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상윤의 시를 읽으며 “진실”과 “화합”의 계기로서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3.
강상윤의 시집을 함께 점검하였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집중한 테마는 ‘제주 4‧3 사건’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주 4‧3 사건’이 ‘여수‧순천 사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긴밀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건은 일제강점기,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남북분단 고착화와 같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사이에 위치한 숨기고 싶은 진실이다.
우리는 이번 시집을 읽으며 우리나라와 민족에게 가혹하게 다가왔던 역사의 한 시절을 정직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독자들은 강상윤의 시 세계를 접하고 과거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충실한 현재를 설계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강상윤의 시에 담긴 ‘4.3’의 비극을 확인하면서, 그러한 비극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향한 열강(列强) 또는 외세(外勢)의 거대한 압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본, 미국, 소련, 제국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의 영향을 20세기 전반기에 직접적으로 받은 우리나라는 스스로의 운명을 주체적이거나 자율적으로 개척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수십 년 동안 치욕적인 식민지 기간을 견뎌야 했고, 광복 이후에도 남과 북으로 분리되어 민족상잔으로서의 한국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현재까지도 남북의 분단 상황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은 ‘남한’과 ‘북한’, ‘우익’과 ‘좌익’, ‘토벌대’와 ‘무장대’ 등의 대립, 대결이 첨예화되면서 촉발되었다. 여기에서 ‘남한’과 ‘우익’과 ‘토벌대’는 ‘미국’과 관련되고, ‘북한’과 ‘좌익’과 ‘무장대’는 ‘소련’과 연결된다. 우리는 세계의 패권(霸權)을 노리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각자의 이념을 펼치며 충돌한 결과가 ‘4.3’임을 알 수 있다. ‘제주 4‧3 사건’과 그것의 확장판으로서의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이 미국과 소련의 역할을 대신하여 수행한 일종의 대리전일 수 있는 것이다.
10편의 시를 중심으로 살핀 강상윤의 시집에는 무고한 민간인으로서 희생당한 제주도 주민들이 등장한다. 총살 등의 방식으로 실제로 죽음을 당한 이들이 있고,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이 있다. 부모, 형제, 자식 등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두려움과 괴로움을 호소하였다. ‘4.3’의 비극 앞에서 아기도 죽고, 여자도 죽고, 노인도 죽었다. 합리적인 근거나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냥 죽어야만 했던 이들이 있었다.
‘제주 4‧3 사건’은 이제 더 많은 이들이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며 파악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밝은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필자는 ‘4.3’의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3’의 공론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될 수 있을 테다. 강상윤은 시적인 언어로 이를 달성하였다. 그가 제안한 진실로서의 기록 또는 최소한의 양심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 시인의 살아 있는 시가 앞으로 화해와 화합의 길을, 새로운 ‘4.3’의 여정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