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버드> 11화. 자취도 없이 사라진 자존심
개학과 더불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나는 항상 무엇인가와 싸워야 했다. 실망과의 싸움, 수치심과의 싸움, 패배감과의 싸움 ------, 모욕감과의 싸움 이 모든 것들이 개학한 첫날부터 여기저기서 마구 공격해 왔다.
생일이 8월인 탓에 나는 6개월 늦춰 다시 중학교 1학년.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7학년에 입학했다.
예상했던 대로, 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은 제일 낮은 수준의 ESL, 과정을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시간표는 영어 미숙자 과정인 ESL, 레벨 1의 영어 2시간, 정규 과정 중 가장 낮은 레벨의 수학, 체육, 또 ESL, 역사와 지리, 과학 등이 각각 1시간으로 총 6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10개가 넘는 과목들을 보통으로 알고 소화시켜야 하는 한국 중학생들의 시간표에 비하면, 미국 중학생들은 정말 팔자가 좋은 셈이다.
첫날 아침은 같은 동네에 사는 9학년 언니가 도와 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언니는 나를 학교에 달랑 떨어뜨려 놓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고생고생 끝에 눈치코치로 겨우 시간표를 받아 들고, 학교를 사방으로 헤매다니다 겨우 ESL, 영어 교실에 발을 들였을 땐, 벌써 수업 시작한 지 40분이 지난 후였다.
ESL, 영어 교실에는 한국 여자 아이 한 명과 멕시칸(Mexican) 두세 명을 빼고는 모두가 아르메니안(Armenian)이었다.
아르메니안들은 소련 연방 구성 공화국의 하나인 아르메니아에서 온 이민자들로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엔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정말 ‘소수’ 민족이었다.
우리가 이민 온 글렌데일(Glendale)이란 도시는 한 15년 전만 해도 순수 백인 지역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옛날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집단인 KKK(Ku Klux Klan)의 본부가 글렌데일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부터 폭증한 아르메니안과 한국인 이민자들로 인해 80년대 후반쯤에는, 백인들이 도리어 소수 민족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지금의 통계를 보면 글렌데일 시의 가정에서 쓰이는 각종 언어 수가 이미 70여 종을 넘었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글렌데일이란 도시 하나에 세계 어느 곳보다도 많은 수의 아르메니안들이 밀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아르메니아에서 이민 수속을 밟을 때, 그들은 이민 예정지란(豫定地欄)에 단순히 ‘글렌데일’이라고 쓰면 끝이라고 한다.
나라나 주가 카운티의 이름을 댈 필요도 없이 다만 ‘글렌데일’ 하면 누구나 알 정도라는 말이다.
미국 중학교에서의 첫 두 시간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시간이었다. 선생이 하는 말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마디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고, 몇십 명의 아르메니안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아예 아르메니아어로 한껏 목청을 돋우며 떠들어댔다.
우리가 모두 저능아라도 되는 듯 손짓발짓까지 합쳐 느릿느릿 얘기하는 선생에겐 괜히 화가 치밀었다. 또 그렇게까지 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내 자신이 더더욱 혐오스러웠다.
교실이 아니라 동네 시장같이 시끌벅적거리는 주위 광경을 바라보니 울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것이 내가 6, 7년 동안 그렇게도 기다려 오던 미국 학교인가? 이런 곳에 오기 위해 나는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안락과 특권을 주저없이 버리고 왔을까?’
벙어리처럼 앉아 두 시간을 보낸 후 수학 교실에 들어가 보니 --- 미국은 선생이 여러 교실을 돌아다니는 한국과 정반대로 학생들이 과목마다 다른 교실을 찾아다닌다. ---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수학만은 ESL 과정이 아니라서 내심 기대를 했다. 그러나 가서 보니 그 반은 정규 과정 중에서도 가장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이나, 6학년 때 수학을 낙제하다시피 한 아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한 시간 내내 초등학교 입학 전, 아니 세 살 때 이미 할 수 있었던 덧셈, 뺄셈을 하다 보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Welcome Center’에서 나를 담당했던 선생에 대한 분노였다.
분명히 나는 보통 미국의 중학교 1학년생이 반 이하도 못 풀 시험을 봐서 만점을 맞았고, 그 사람도 두 눈으로 똑똑히 내 점수를 확인했다.
‘단순히 영어를 못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나를 완전한 바보 취급을 하다니------.’
영어를 못 하면 물론 다른 어느 것도 못 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정을 나름대로 내린 담당 선생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과학 시간은 더더욱 나를 격노케 만들었다. 입을 연 첫 순간부터 종이 울린 마지막 순간까지 백인 선생은 자신 앞의 외국 학생들을 가소롭게 여기는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어쩌다 서투른 영어로 더듬더듬 질문하는 학생이 있으면 빈정거리며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일부러 못 알아듣겠다는 듯 ‘What? What?’을 반복하며 학생들을 더욱 주눅들게 했다.
아마 그는 그 일이 재미있는 것 같았다.
제5교시의 체육 시간 역시 힘들었다. 체육 시간은 ESL 학생들과 정규 과정의 학생들이 섞여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선생은 학생들을 잔디밭에 둘러앉게 한 후 무엇인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주위의 정규 과정의 아이들은 선생의 말을 경청하며 까르르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종이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 속에서 유일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숨죽이고 앉아 있는 나를 눈여겨본 선생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물론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 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캔 낫 스픽 잉그리시.”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그 선생은 눈치도 없이 커다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What?”
내가 좀더 큰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되뇌이자, 주위에 있던 몇몇 아이들이 돌아다보며 피식 웃었다.
내 말을 들은 선생은 마치 운동장이 떠나가라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질렀다.
“누가 이 학생을 위해 한국말로 통역해 줄 사람 없나?”
운동장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고, 여러 명의 한국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도와 줄 기미조차 비치지 않았다.
내 가슴은 창피함과 야속함으로 가득 찼다. 몇 명의 아이들이 조금 전에 분명히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 가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오지 않자, 선생은 어떤 한국 여자아이 한 명을 골라 내어 불렀고, 그 여자아이는 귀찮다는 표정을 역력히 얼굴에 담은 채 마지못해 걸어나왔다.
그때 그 애를 쳐다보며 나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나중에 영어를 잘하게 되면 저 아이처럼 저렇게 야속한 태도는 결코 보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수모를 안겨다 준 시간은 마지막 시간인 제6교시 역사와 지리 시간이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 교실 맨 뒤에 자리를 잡고 교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하루 동안 겪어 본 다른 학급들에 비해서 비교적 학생들의 분위기도 괜찮고 선생도 괘활한 성격을 지닌 사람 같아 보였다.
나는 곧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종이 울리자 선생은 무엇인가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런 후 출석부를 펴서 명단에 적힌 순서대로 이름을 불러 내려갔다.
이름 불린 아이들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레벨 투.”
“레벨 원.”
“레벨 쓰리.”
그런 대답으로 보아서 아마도 학생 한 명, 한 명의 ESL 영어 레벨을 묻는 것이라 짐작한 나는 내 차례가 되면 ‘레벨 원’ 이라 크게 대답할 준비를 했다. 드디어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말이 선생 입에서 흘러나왔다.
“Haena Park!”
(선생은 ‘헤이나 팍’ 이라 더듬거리며 발음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한 대로 대답했다.
“Here.”
“☆#*Ω------?”
다음에 흘러나온 선생의 질문이 ELS 레벨을 묻는 것이라 확신하고 나는 더 자신있게 대답했다.
“레벨 원.”
“☆#*Ω------?”
내 대답이 틀렸다는 듯 선생은 다시 똑같게 들리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것이 ‘스펠링이 꽤 복잡한 내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느냐?’ 는 내용의 질문임을 그때 어찌 알았으랴!
반신반의로 다시 조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벨 원.”
일이 이쯤 되자, 교실 안의 스물 몇 쌍의 눈이 모조리 내 얼굴 위로 따갑게 쏠렸다.
선생의 그 보라색 눈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어서, 그리고 점점 땅으로 향해 쏠리는 내 고개를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잠자코 바닥 위의 타일들을 세는 데 피눈물 나는 노력을 퍼부었다.
나로서는 아무리 애써 귀를 기울여도 애초에 모르는 단어들이 기적적으로 그 뜻을 내게 속삭여 줄 리가 만무했다.
그제야 선생은 한숨을 쉬더니 내 대답을 체념했다는 듯 다음 학생으로 넘어갔다.
이름 부르기가 모두 끝난 뒤,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종료 벨이 울릴 때까지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하여 치명타를 입은 내 자존심을 간호하는 데 전념하고 싶었다.
그러나 몇 초가 흐르기 무섭게 몇몇 아이들이 내 책상을 둘러싼다. 그들은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천천히 한 낱말씩 되풀이하며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몇 명이 더 가세하여 천천히 말을 걸었다. 나중에는 몇십 명이 내 책상을 둘러싸고 마치 오랜만에 동네 바보를 구경하듯, 동물원 원숭이에게 말을 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결국 종료 벨이 울렸을 때에는 이미 내 자존심은 풍비박산이 나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다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내 자신에, 또 인생에 대한 혐오감뿐이었다.
태어난 이래 가장 길고 험난했던 하루를 겪은 후, 집을 향한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다지고 또 다진 한 가지의 모진 결심은, ‘절대로 집에 가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림자처럼 먼 곳에서 가물거리는 내 자존심 조각들을 다시 끼워 맞추는 길은 어머니의 얼굴을 대했을 때 철부지처럼 울먹이지 않고 무덤덤하게,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언니의 걱정에 찬 얼굴을 마주했을 때, 나는 애써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언니는 그 날 내가 당한 것만큼 아픈 수모는 당하지 않았다. 석달 동안 서머 스쿨을 다닌 덕택에 ELS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정규 과정에 들어갈 만한 영어 실력이 되어 있었다.
아무튼 그 당시의 웃지 못할 사연들에 대해서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얘기하고 함께 웃을 수가 있었다.
<법정> 31화. 쥐 이야기
산사(山寺)의 가을은 바람결에 묻어 온다. 처서를 고비로 바람결은 완연히 달라진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무덥고 끈적거리던 그 바람결이 오후가 되면 어느새 습기를 느낄 수 없도록 마른 바람으로 바뀐다. 문득 초가을의 입김을 느끼게 한다.
이 무렵 절에서는 여름 안거(安倨)가 끝나고 해제(解制)철이라 다들 하산을 하고 절 안이 텅 빈다. 빈 뜰에 곧잘 산비들기가 내리고 다람쥐들이 툇마루에 올라 재롱을 피운다. 여름철에 못다한 열정을 쏟음인지, 더러는 소나기가 천퉁 번개를 데리고 온 골짝을 휘저어 놓기도 한다. 아침 저녁으로 선득거려 군불을 지피고, 삼베옷은 까슬거리어 벗어놓아야 한다. 문득 앞산을 바라보면 그새 산색(山色)이 수척해졌다. 허허로운 바람소리가 스쳐간다.
지리산에 있는 어느 궁벽한 암자에서 지낼 때였다. 그때도 여름철 안거가 끝난 뒤라 함께 지내던 도반(道伴)들은 다 하산해버리고 나 혼자 남아 텅 빈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 시절은 등산꾼도 구경꾼도 없던 때라 암자는 그야말로 적적요요(寂寂寥寥)하여 무일사(無一事)였다. 사람이라고는 약초를 캐러 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이따금 지나갈 뿐이었다. 다로(茶爐)에 물은 끓어도 더불어 마실 이가 없는 그런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을 마치고 헌식(獻食)을 하기 위해 뒤꼍 헌식돌로 나갔더니 거기 꽤 큰 쥐 한 마리가 있었다. 나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헌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헌식이란 불가에서 공양할 때 배고픈 중생 몫으로 따로 떠놓았다가 베푸는 일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여름철 내내 헌식돌이 깨끗했던 연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헌식한 음식은 대개 새나 다람쥐가 와서 먹게 마련인데, 어떤 때는 전날 놓아둔 음식이 그대로 남아 지저분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헌식들이 말끔했던 것은 날마다 이 쥐가 와서 먹어치웠기 때문인 것이다. 하루 한끼밖에 먹지 않을 때라 한낮에 공양을 끝내고 헌식을 하러 가면 으레 그 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에는 쥐꼬리만 보아도 소름이 끼치곤 했는데,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쥐를 대하니 오히려 반가웠다. 더구나 나를 의지하고 사는 중생이니 생각하면 어떤 연민의 정마저 들었다. 헌식도 전보다 좀 많이 주었다. 쥐는 눈에 띄게 무럭무럭 자라 보통 쥐의 세 곱은 되었다. “너 오늘도 왔구나. 어서 먹어라.” 하고 헌식을 주면, 내 곁에 다가와 먹을 만큼 우리는 길이 들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쥐에게 한마디 일러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미쳤다. 그날도 쥐는 어김없이 헌식돌에 와 있었다. 쥐가 다 먹기를 기다려 말을 걸었다.
“쥐야, 네게도 영식(靈識)이 있거든 내 말을 들어라. 네가 여러 생(生)에 익힌 업보로 그같이 흉한 탈을 쓰고 있는데, 이제 청정한 수도장에서 나와 같이 지낸 이 인연으로 그 탈을 벗어버리고 내생(來生)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을 하거라. 언제까지 그처럼 흉한 탈을 쓰고 있어서야 되겠니? 어서어서 해탈하거라.”
쥐는 그대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 다음날 헌식들에 나가니 쥐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 했는데 그 쥐는 헌돌 아래 죽어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못 미더워하고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는 막힌 세상에서, 쥐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구나 싶으니 대견스러웠다. 하는 짓에 따라 그 거죽이 다를 뿐 착하게 살려는 생명의 근원은 조금도 다를 게 없음을 거듭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염불을 하고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해 가을 나는 그 쥐의 명복을 빌면서 줄곧 마른 바람소리를 옆구리께로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