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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불이(不二)」①”
(2014. 1. 25.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
오늘 수녀원에서 미사 중에 문득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하는 이 의문이 풀려버렸습니다. 제가 신앙수기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122-123, 126-127페이지에서 소개해 드렸듯이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성모님 도우심으로 이룩될 주의 나라 천년왕국」책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편【「“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하는 웅장하면서도 위엄스런 음성이 들려오면서 한없는 기쁨이 넘쳐나고 모든 것이 포근하고 고요해져 버린 것이었다. 그 음성은 온 세상을 울릴 만치나 웅장하고 위엄스러워 정신이 바짝 들면서도 깨어나지는 못하고 다만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라고 여쭈어 보았더니 다시 또 같은 음성으로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라고 말씀하시어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너무나도 궁금한 나머지 다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여쭈니까 똑같은 음성으로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라고만 말씀하신 뒤 볼 수 없고 알 수는 없었지만 그분이 떠나간 것만은 알 수가 있었다.」】을 읽고 알쏭달쏭하고 지금까지 알 수가 없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왔었지만
즉 하느님께서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하고 말씀하셨듯이 또 신앙수기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 소개부분 ‘태초에 하나였듯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 편 124-125페이지에서《《《【“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실 때도 하느님께서 종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언케 하신 말씀대로 오셨듯이 이 세대에 새로운 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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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이며 새로운 예루살렘을 우리 나라에 건설하시려고 우리 나라에 오시는 것도 하느님께서 종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오시며 성서에 기록된 말씀대로 이루시어 주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동정녀 성모 마리아께 잉태되어 오시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지만【부활하시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권능을 가지고 성령으로 오심에 있어서는 세상에서는 버림받고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오신다는 것은 진실되시며 “무식하고 보잘것 없는 이에게 나의 영을 주리라.”(요엘 3장 2절 참조)는 진실하신 말씀대로 역사하신다.(영성시집 ‘187.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편 210, 213-214페이지 참조)】
종교 통일 없이는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먹을 수 있는 하나의 빵이 되기까지는 밀가루에다 설탕과 이스트와 물을 섞어 반죽한 다음 익혀야만 먹을 수 있는 빵이 완성되듯이【하느님께서 우리 나라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심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 풍습이나 모든 것을 사용하시며】이 종을 통하여 여러 종교와 많은 것을 체험케 하신 것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이고 전에 내가 병든 몸을 이끌고 道를 통하기 위하여 전심을 쏟을 때 온갖 좋은 것인 하느님의 道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성취될 수 있으므로【썩은 검불을 뒤지는 나를 예수님이 학교 교무실에서 부르신 것은 선생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을 뜻하며】다른 사람들을 제쳐 놓고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신 것은 당신의 제자이며 종으로 택하시어 불러 세우신 것이었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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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이성계 비 앞에서 보통 사람보다 키가 배나 큰 사람이 나에게 와서 손을 잡은 것은 하느님의 道로서 천년왕국의 하느님 나라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은 한 하늘이고 땅은 한 땅이며【온 우주 만물의 주인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하느님이시므로 확실하게 증거해 보이신다고】말씀하신다.【“말씀이 한국에 오시다.”라는 말들을 하는 것을 보고 들었지만 진정 그 말씀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써 씨앗인 하느님 말씀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증거하고 계시하려고 택하신 사람과 사람들에게 말씀의 씨앗을 뿌려 주시어 그 사람들 마음 안에서 자라고 있을 것이다.
주께서 아무리 좋은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셔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머물러 싹이 자랄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신앙의 근본인 것이다.】
어떠한 환상이나 계시를 보고 말씀을 들었으며 어떤 능력을 받아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진실과 정의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지 못한다면 진실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종교에서나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와 신이 옳은 신이라 주장하고 자신들의 계파만이 옳은 것이라고들 주장하는데 진정 옳은 참신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며 하느님께서 세우시고 역사하시는 종교와 섭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소개해 드렸듯이 또 묵상집 ‘80.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묵시 3장 7-13절)’ 편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 소개부분 102-103페이지에서《《《【예레미야 10장 10절부터의 말씀에 “야훼만이 참신 살아 계시는 하느님 영원한 임금이시다. 한번 분노를 터뜨리시면 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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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덜 떠는데 어느 민족이 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당해내랴?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은 신들은 천하 온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리라고 사람들에게 일러라.”는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다.★】》》》소개해 드렸듯이 즉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은 우상들은 사라지고 태초에 하나였듯이 하나로 종교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천년왕국의 믿음은 확실하게 생겼지만 그러나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하는 뜻을 즉 우리는 이 화두를 잘 못 알아들어도 불교 스님들은 잘 알아듣고 있지 않겠나하는 막연한 생각만 해왔었는데.... 얼마 전에 TV에서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가 “불이(不二)란 둘이 아니라는 말인 것입니다.” 하는 말이 귀에는 들어왔지만 깨닫지는 못했는데 그 후에 절에 가서 불이문(不二門)을 지날 때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궁금했는데 또 얼마 전에 TV에서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가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 노, 병, 사의 문제를 고심하다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닌 공(空) 사상인 것입니다. 이 공사상을 깨치면 불교를 다 아는 것입니다.” 하는 말이 귀에는 들어왔지만 역시 깨닫지는 못했는데 오늘 2014. 1. 25. 토요일 수녀원에서 미사 중에 문득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느님과 내가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는 즉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니다.” 하듯이 즉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하고 이 의문이 확실하게 풀려버렸습니다.
즉 불교의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요 색(色)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이라는 즉 색(色)만 설명해도 어려울 것인데 불교는 자연종교로서 공(空)까지 설명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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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대단한 것이며 물론 깨달음을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으로써 즉 공(空)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상권「22 (문) 천주 몇이 계시뇨? (답) 천주 다만 하나 계시니라. 23 (문) 하나이신 천주 몇 위(位)를 포함하여 계시뇨? (답) 하나이신 천주 세 위를 포함하여 계시니 곧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이시니라.
하느님이 하나인 동시에 셋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체(體)는 하나인데 거기 위(位)가 셋 있다는 뜻이다. 비유를 든다면 전기는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빛, 열, 움직임이 있고 또 이것들은 서로 구별된다. 전광(電光), 전열(電熱), 전동(電動)이라고 하는 만큼 전기의 그 무엇이지만 전기가 셋이란 뜻은 아니다.
사람은 식물처럼 생명이 있고 동물처럼 감각하고 또 신들처럼 지능을 가졌지만 혼이 셋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하나뿐이다. 영혼의 한 면인 지성의 경우에도 인식, 의욕, 기억, 이 셋이 서로 다른 것이지만 지성이 셋이란 뜻은 아니다.
여기 삼각자가 하나 있다. 서로 다른 각이 셋이지만 삼각형은 하나뿐이다. 각이 셋이라는 말은 삼각형이 셋 있다는 뜻은 아니다.
“위(位)” : 알아듣기 어려운 문제이다. 인간 세상에 있어 위(位 Persona)는 “지능을 가진 완전한 개체의 최고 자주성이다.” 이를 좀 더 설명해 보겠다.
지능을 가진 : 그러니까 동물, 식물, 광물 등에는 위가 없다. 그것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행동이나 작용을 하므로 권리나 책임 같은 문제가 따르지 않는다.…………
24 (문) 세 위 서로 관계가 어떠하시뇨? (답) 세 위 서로 관계가 실로 오묘하니,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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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으시고, 성신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느니라. 25 (문) 세 위 서로 높고 낮음과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신 분별이 있느뇨? (답)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어 도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가지로 다만 한 천주시니라. 55 (문) 예수 그리스도께 몇 가지 성(性)과 위(位)가 있느뇨? (답) 예수 그리스도께 성으로는 천주성과 인성(人性) 두 가지가 있고, 위로는 다만 천주 성자위 하나 뿐이니라.」해설 참조】것으로써 사람은 영혼 육신이 결합된 존재면서(창세 2장 7절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참조) 즉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잉태됨과 동시에 매번 영혼이 하느님께로부터 즉시 창조되는 존재면서【상권「26 (문) 천지를 조성하신 자라 함은 무슨 뜻이뇨? (답) 이는 천주 당신 전능으로 없는 가운데로조차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섭리하심으로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는 자라는 뜻이니라. 34 (문) 영혼은 무엇이뇨? (답) 영혼은 신령하여 불사 불멸하는 체(體)니 육신과 합하여 그 생명이 되느니라.」해설 참조】즉 하느님과 내가 하나이지만 하느님과 인간 즉 말씀(진리)과 소리(요한 1장 1-34절 참조)는 똑같은 하나가 아니라 다른 하나라는 즉 그래서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하는 이치가 불교의 화두방식으로도 깨달아진 것입니다. 또 신앙수기 101번에서 소개했듯이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 “너를 통하여 종교 통일이 이루어진다.” 편 126페이지에서【「어젯밤에는 어덴가를 갔었는데 그곳은 모든 절을 대표하는 절 같았으며 그곳의 총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큰 칠판에다 불교의 반야심경을 전부 써 놓고 시험을 치르듯이 나에게 구절 구절을 엄격하게 물어 보기에 나는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고 하신 말씀의 진리로서 다 풀어버리니까 그 사람은 나에게 더 이상 물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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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없지만 불교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만 말해 보라기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더니 “됐다.”고 말하면서 “모든 종교는 너를 통하여 통일이 될 터인데 네 아버지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절에 가서 지내지 않겠느냐?”고 건의해 오는 것이었다.」】하였듯이 하느님께서는 천년왕국을 세우시려고 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간 즉 모든 종교통일을 가톨릭교회로 이루시려고 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대비해서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 11장 29절 참조) 하신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마태 19장 17절 참조) 하신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 23장 8-10절 참조) 하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대비해서 반야심경의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 라는 화두까지도 불자들에게 깨우쳐 주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불자들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 2015. 5. 20. 그리고 불이(不二)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면 진짜 불이(不二)는 예수님만이 말씀하실 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요한 17장 11절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5. 20. 복음말씀 참조) 또 22절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5. 21. 복음말씀 참조) 하셨듯이 즉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하나는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하나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창세 1장 26절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참조) 이 하나는 공(空)과 색(色)이 하나인 즉 인간이 하느님을 깨달아서 합일하는 하나를 말씀하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김정빈 구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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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대행스님의 대담집「道」책의 주인공 대행스님의 체험(신앙수기 ‘103. 道를 통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편 참조)처럼 깨달은 주인공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즉 하느님을 체험하고 깨달아서 진리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체험하고 깨달은 나름대로의 표현일 것이며 표현하는 방법도 그 사람의 지능에 따라 각자가 다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비교적 대행스님은 그래도 주인공에 대해서 나무에 뿌리가 안보이지만 있는 것처럼 주인공이 있다고 또 전기가 이미 가설이 되어있는 것처럼 코드만 꽂으면 전기불이 들어오듯이 주인공이 그렇게 우리에게 작용한다고 체험을 그런 대로 설명을 잘하고 계시지만
우리 천주성삼 수도회의 예언자 황데레사 어머님은 하느님을 즉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즉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전능한 빛과 말씀을 즉 물질을 초월해서 있는 빛과 말씀 즉 태양 빛을 창조한 본질적인 전능한 빛과 말씀을 즉 바오로 사도가 본 본질적인 전능한 빛과 말씀, 모세 성인이 본 본질적인 전능한 빛과 말씀 즉 성서에서 선조 성인들이 수 없이 본 본질적인 전능한 빛과 말씀을 보고 듣고 그림으로 그려내고 말로 풀이를 하면서도(영성시집 ‘147. 두 증인 두 예언자①’ 편 123-134페이지와 황데레사 저,「데레사의 지난 일들」책 그림 3-5번, 19번, 30-31번, 88번 설명 참조) 즉 교리적으로 습득하는 교육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하느님을 깨닫기가 어려운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본질적인 전능한 빛이나 말씀을 보고 들으면 즉 태양 빛에 의존하지 않는 태양 빛을 초월한 본질적인 전능한 빛을 보고 물질의 소리를 초월한 본질적인 전능한 소리를 들으면(신앙수기 ‘15. “깨어라!” 편 참조) 순식간에 교육이 되고 순식간에 하느님의 본질적인 전능이 깨달아진다는 것을 성서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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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잘 알 수가 있듯이 그런 본질적인 전능한 하느님의 체험을 많이 하면서도 이 세상을 창조한 본질적인 빛과 말씀인 전능한 하느님을 오직 믿을 뿐이지 본인의 지식으로는 공(空)과 색(色)이 하나인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신 본질적인 전능한 하느님을 인간이 체험하고 깨달아서 합일하는 하나를 또 그러면서 본질적인 전능한 창조주와 같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어리석고 순박한 마음’(메시지 받은이 황옥희 데레사,「성모성심 메시지」책 ‘7. 데레사의 생활’ 편 60-63페이지 참조)이라 즉 순박한 어린 아이 마음이라 본인의 지식으로는 본질적인 전능한 하느님을 교리적으로 전혀 설명하지를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 2015. 6. 10. 인터넷 네이버 지식백과에서「심우도(尋牛圖)」:【④ 득우(得牛)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땅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돌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라고 많이 표현된다. 실제로 이때의 소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아직 삼독(三毒: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이라는 뜻에서 검은색을 소의 빛깔로 표현한 것이다.(영성시집 ‘183.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편 190페이지 참조)
⑤ 목우(牧牛)는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게끔 길들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保任: 깨달은 것을 더욱 갈고 닦음)의 단계로, 선에서는 이 목우의 과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한번 유순하게 길들이기 전에 달아나 버리면 그 소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준 것이다. 이때의 소는 길들이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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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서 차츰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어 가게 묘사된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빈 원상만을 그리게 된다.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를 살펴보다 ④번에서 ‘득우(得牛)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는데,’를 읽고 인터넷 네이버 지식백과에서「견성(見性)」을 검색해 보았더니【「견성(見性)」:〔정의〕마음 닦는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체험의 경지.〔내용〕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닦아서 미혹(迷惑)에서 깨어나면 곧 부처가 됨을 가르치고 있다.
교종(敎宗)에서는 이 마음 닦는 방법을 계(戒)·정(定)·혜(慧)의 3학(三學), 또는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 등 6바라밀(六波羅蜜)의 교리와 실천행을 제시하였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교리나 단계를 밟는 수행법보다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 이므로 곧바로 본성을 보아서 부처를 이루는 것[見性成佛]’을 종지로 삼고 있다. 즉, 선법(禪法)으로서 마음을 직관(直觀)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마음의 본바탕을 발견하면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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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근본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이 전래되어 선문구산(禪門九山)이 형성된 신라 말기부터 견성을 위한 갖가지 수행이 계속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수행은 마음을 통일시켜 조용히 자기를 관조하는 방법을 취하거나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이르러서 본성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무심선(無心禪)의 방법을 취하였다.
그리고 고려 중기에 지눌(知訥)이 송나라의 고승인 대혜(大慧)의 영향을 받아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주창하자 그 이후에는 간화선법에 의한 견성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즉, ‘개에게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등과 같이 상식을 벗어난 화두(話頭)를 깊이 의심하여 그 의심을 타파함과 동시에 견성하게 되는 수행법을 취하였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그대로 전승되어 오늘날 참선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방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고려 말의 백운화상(白雲和尙) 등은 무심선법에 힘을 기울였고, 무심선에 의한 견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종 이후 선종과 교종의 종파가 사라지고 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에 의해 선(禪)이 우리 나라 불교의 중심을 이루게 됨에 따라서 견성수행법은 교학·염불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성불의 유일한 방편처럼 되었으며, 휴정이 간화선을 강조함에 따라 그 전통을 이은 문도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수행자들이 참선을 하게 되면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견성의 경지라고 보고 있다.】즉 ‘선법(禪法)으로서 마음을 직관(直觀)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마음의 본바탕을 발견하면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하였듯이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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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 마음의 본바탕, 부처 등이 다 같은 말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면서 즉 마음이란 죄를 짓고 사는 중생심의 나 한 사람의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참마음을 말하는 것이며 즉 부처님의 마음 부처님의 뜻이라고 하듯이 즉 불지견(佛知見), 중생지견 등 육조단경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내용들이 깨달아지면서 즉「교종(敎宗)에서는 이 마음 닦는 방법을 계(戒)·정(定)·혜(慧)의 3학(三學), 또는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 등 6바라밀(六波羅蜜)의 교리와 실천행을 제시하였다.」와「선종에서는 복잡한 교리나 단계를 밟는 수행법보다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 이므로 곧바로 본성을 보아서 부처를 이루는 것[見性成佛]’을 종지로 삼고 있다. 즉, 선법(禪法)으로서 마음을 직관(直觀)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마음의 본바탕을 발견하면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견성을 가장 근본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는 내용들이 깨달아지면서 ⑧번에서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는 내용과 ⑨번에서 ‘이제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는 즉 붓다, 가섭, 달마대사에서 진제 법원까지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로 선맥이 전해져 오듯이 이런 깨달음이야 체험적인 깨달음이라서 누구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즉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견성은 이미 ④번에서 득우(得牛)를 체험한 것으로써 이때는 ‘검은 색’ 즉 ‘거친 본성’으로 표현하고 ⑤번에서 ‘보임(保任: 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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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것을 더욱 갈고 닦음)의 단계’로 표현하고 즉 견성을 이미 깨달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듯이 ⑧번에서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는 내용과 ⑨번에서는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는 즉 성철스님 종정 취임 법어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말씀은 ④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견성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⑧번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깨달음’을 ⑨번의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써 즉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는 즉 여기서의 완전한 경지에 이른 깨달음이란 불교의 계율이나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8가지 덕목인 八正道(영성시집 ‘183.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편 189-195페이지 참조)나 가톨릭의 10계명이나 7덕(신덕, 망덕, 애덕, 지덕, 의덕, 용덕, 절덕)인 정결, 청빈, 순명은 절덕에 포함되는 덕으로써 완덕의 경지에 이른 즉 만족한 행복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깨달음이란 뜻으로써 즉 성인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깨달음을 묘사하는 것으로써 즉 ⑨번의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으로 묘사 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라는 즉 (‘주객이 텅 빈 원상 속에 자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이라는 내용들이 깨달아졌습니다.
※ 2015. 6. 24. 새벽에 잠이 깨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부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출근하여「달마 2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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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인도 불교」를 검색해 보았더니 인터넷 네이버 통합검색「뉴스 더보기」에서
「보살행… 인류사상 최대의 공헌 ‘중도’를 남기다(불교신문 2013. 4. 4.)」편에서【“부처님의 법은 3조 아난 이후 여러 조사를 거쳐 제27조 반야다라존자에게 이어졌다. 반야다라는 어느 날 남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초청을 받아 궁에서 공양하게 되었다. 이때 왕의 셋째 아들 보리다라가 이 대선지식을 만나 대화하던 중 마음을 깨달았다. 그가 바로 달마이다.
반야다라존자가 말했다. “그대는 모든 법을 다 깨달아 나의 법을 받았다. 달마(法, Dharma)라 함은 통달하고 크다는 뜻이니, 이름을 달마(達磨)라 하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동쪽 나라에 가서 법약(法藥)을 크게 베풀라.”
이렇게 하여 제28조가 된 달마대사는 인도를 떠나 동쪽나라 중국으로 왔다. 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나고 깨치고 열반에 든 땅이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제28대로 인가 받은 달마는 인도를 떠나 동쪽으로 왔을까? 이것은 선문(禪門)에서 유명한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祖師西來意)?’ 이라는 화두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달마는 3년에 걸쳐 해로로 왔다. 중국에 처음 닿은 곳은 혜능의 고향인 광동성 광주였다. 이때가 서기 510년경이다. 혜능이 태어난 것은 서기 638년이니 120년 앞이 된다. 달마대사가 도착한 중국은 저 유명한 <삼국지> 시대가 끝나고 5호 16국 시대였다. 당시 광동성 일대는 남경을 도읍지로 한 양(梁)나라 무제(武帝, 464년-549년)가 통치하고 있었다. 양 무제는 독실한 불자였다. 그는 인도에서 대선지식이 왔다는 보고를 받고 친히 달마대사를 궁궐로 모셨다.”】를 읽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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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승의 머리 묻은 암자가 지리산에....(네이버뉴스 2015. 2. 26.)」편에서【“육조 혜능의 두개골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을까? 육조 혜능은 또 누구인가? 옛날 붓다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알 수 없어 수런거렸는데 다만 가섭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염화미소의 이심전심이었다. 미소로 붓다의 법을 이은 가섭은 선의 시조가 됐고 28조였던 달마가 인도의 마지막 조사였다. 달마는 6세기 초에 중국에 와서 중국 선종 1조가 됐다. 중국 선종은 달마를 초조로 해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을 거쳐 6조 혜능에 이른다.
붓다가 가섭에게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으로 전한 것처럼 달마도 9년 동안의 벽관을 통해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장벽과 같이하여 문자나 교리에 이끌리지 않았다. 이가 곧 ‘선은 문자에 있지 않아서(불립문자, 不立文字), 교설을 떠나 따로 전하니(교외별전, 敎外別傳), 인간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직지인심, 直指人心) 그 성품을 보고 깨달음을 이룬다(견성성불, 見性成佛)’이다. 선은 문자를 떠나 한 송이 꽃과 한 번의 미소에서 비롯된 것이다.”】를 읽어보니 우리 가톨릭교회에는 구약, 신약에도 하느님과 꾸준히 계약을 맺은 종교이면서 사도전승이 있듯이 불교에는 교(敎)를 중시하는 교종(敎宗)과 선(禪)을 중시하는 선종(禪宗)이 있듯이 물론 둘 다 똑같이 중요하지만 즉 선(禪)을 더 중시 한다고 해도 교(敎)도 당연히 중시 해야지 교(敎)를 등한시 하고 견성(見性)이나 선(禪)을 더 중시 한다면 이미 선(禪)도 제대로 된 선(禪)이 아니듯이 붓다, 가섭, 달마에서 진제 법원까지 교외별전으로 선맥이 전해져 오듯이 역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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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묵시록의 천년왕국을 이루시기 위한 즉 세계 평화, 교회 평화, 죄인 회개, 외교인 귀화, 성직자․수도자 성화, 이북 이남의 평화 통일과 산아제한 죄 보속인(영성시집 ‘147. 두 증인 두 예언자①’ 편 123-134페이지와 황데레사 저,「데레사의 지난 일들」책 그림 63번, 235번 설명 참조) 즉 이사악과 이스마엘 즉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해소되고(창세 25장 9절 ‘아들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동굴에 안장하였다.’ 참조) 즉 유대교가 구약만 믿는 또는 이슬람교가 코란만 믿는 종교에서 유대교가 신약까지 믿고 이슬람교가 구약과 신약까지 믿는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고 모든 종교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은 우상들은 사라지게 하는 천년왕국인 세계 평화, 교회 평화, 죄인 회개, 외교인 귀화, 성직자․수도자 성화, 이북 이남의 평화 통일과 산아제한 죄 보속인 성삼은혜를 우리나라에서 이루시기 위한 하느님의 지혜로운 뜻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 신앙수기 ‘101. 선생님(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편 122-123, 124-125, 126, 126-127페이지, ‘102. 당신의 종 김강철(바오로) 형제님을 통하여 풀어주신 묵시록 3장 8-12절 말씀’ 편 127-130페이지 참조.
※ 묵상집 ‘80.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묵시 3장 7-13절)’ 편 김강철(바오로) 신앙수기 소개부분 102-103페이지 참조.
※ 영성시집 ‘147. 두 증인 두 예언자①’ 편 123-134페이지, ‘183.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편 190페이지, ‘187.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편 210, 213-214페이지 참조.
※ 인터넷 다음 블로그「달마의 생애」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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