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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王仲)의 망명 해상항로(亡命海上航路), 낙랑 난감은 어디인가?
서진군국도의 낙랑군 부분도,
이지도에서 낙랑군이 등주와 근접한 발해해협임을 확인할것.
발해해협은 산동반도의 등주와 요동반도의 여순 사이에 있는 묘도열도의 해상을 말한다.
따라서 낙랑군과 한반도는 관계가 없다.
지도저본:대청광여도
이 지도는 왕중의 망명항로를 보여주는 지도다.
진시황이 서불을 시켜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보내놓고 낭야대에서 그를 기다렸다는 기록이《사기》진시황
열전에 전한다.
왕중도 마찬가지로 같은 항로를 선택하였으나 그는 성산각에서 외부항로(원양항로)를 과감히 선택함으로서
마침내 낙랑의 삼신산에 이르렀든 것이다.
지도에서 보듯이 성산각은 중국대륙의 최동단이다.
진시황은 삼신산에 마음을 뺏겨 수차에 걸쳐 직접 건너기를 원하였으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지도의 우측에 주석으로 설명하였듯이 바람이 배를 끌고 끝이 없는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진시황은 급류가 끝나는 성산각에 진왕석교까지 설치하고 삼신산으로 건너기를 원하였
으나 넓은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연안항로를 택함으로서 삼신산으로 건너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가 연안항로를 선택하였다는 근거는 그가 항해도중 지부산에서 고래를 사살하였다는 일화에 근거한다.
주석의 오른쪽에 보이는 내용은 《사기》<오제본기>전욱전에 소개되는 삼신산의 최초기록이다.
전욱은 이곳에서 출생하였고 소호김천씨를 따라 곡부지역으로 옮겨 24개국의 제후들을 다스리던 비왕으로
있던중 요임금의 반란으로 사문도로 들어가 고조선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지도:대청만년일통지리전도 제공:향고도
이 지도에서는 항로도를 그리고 있다.
지부산의 외각을 경유하여 사문도를 경유하는 경로다.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성산각에서 연안항로를 선택
할 경우 사문도를 경유할 수 없었다.그것은 오른쪽 삼신산을 소개하는 주석에 이유를 적고 있다.
제북왕 흥거의 난은 한나라 문제 때 있었던 반란인데. 기원전 177년의 일이다.
이때 배를 타고 동쪽으로 달아나 낙랑의 산중으로 피란하였다는 왕중의 얘기를 추적해본다.
왕중이 갔던 낙랑은 과연 한반도의 평양이었을까
《후한서》는 산동의 왕씨 가문이 한나라의 여씨들의 난으로 인해 중원이 혼란스러울 때 그 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낙랑으로 갔다고 한다. 이와같은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들이 바다를 건너서 도착한
곳은 낙랑. 즉 위만조선의 왕험성이었던 옛날 평양성이었다고 판단하고 지도를 먼저 위에 올렸다.
왕중이 산동반도의 남쪽인 낭야를 출발하여 도착한곳은 낙랑이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제일의 기착지 사문도는 삼신산이 있었던 섬이었다.
왕중은 평소부터 연고가 있었던 삼신산으로 망명을 한 것이었다.
낭야는 진시황이 삼신산으로 서복을 보내놓고 그를 기다리던 낭야대로 유명한곳이다. 지금도 청도 인근에
있다.
낙랑의 산이란 삼신산을 말한다. 낭야를 출발하여 항로를 따라가면 처음 도착하는 곳이 사문도다.
여기서 만약 한반도까지 건너려면 발해연안 항로를 따라 수 천리를 돌아가야 한다.
당시는 발해해협을 건너는 직항로가 없었다.
왕중이 낙랑의 산중으로 피란을 하였을 시기는 사문도에 위만의 낙랑조선이 있을 때다.
당시 낙랑조선에는 대륙출신 왕씨들이 이미 중심세력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대표가 우거시대 장군으로 활동하다 전쟁후에 평주후가 되었던 왕겹이다.
지도:명 주해도편 13권 등주부경도(登州府境圖) 제공:향고도 편집:필자
삼도를 모두 봉래산.전횡산.사문산등으로 기록하고 있음
왕중의 계보를 살피기위해서 淸(청)나라 말... 요미원[姚薇元-중화권에서는 이사람의 성씨淵源(연원)관련
저술은 거의 성서처럼 다루어 진다]著인《北朝胡姓考-북조호성고》外篇第二 東夷諸姓 세번째 항에 나와
있는 [왕씨]편을 본다.
첫번째는 요동 餘(여)씨(-부여,백제姓이다) 두번째는 요동高(고)씨(-짐작하는 바.. 고구려姓),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낙랑 왕씨다.
고씨와 여씨는 다음으로 미루고, 문득 이
王씨를 들추어 내는 것은, 사서에 등장하는 북조의 명족이(후대
에서”胡(호)”라고 지칭했건만 사실상 이 시기의 기득 기반을 독점 했을 뿐 아니라)…
漢化(한화)된 이후에도 꾸준히 지배 계층으로 영향력을 행사 했던 선비계(북조를 이룬 주체), 동호계,
동이계, 흉노, 저, 강, 갈..등이 등장하는 가운데 역사상 수수께기 같은 존재인 낙랑(樂浪)의 姓이 사서에
출현한 것도 심상치 않은 일이고,
무엇보다, 외편으로 분류된 동이 제성의 마지막 항목에 바로 낙랑왕씨,하남왕씨..등의 왕씨편이 등장하고
조금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자후손인 朗斯(낭사)왕씨와 기막힌 조우를
하게 된다.
기자후손인 낭사, 태원 왕씨편을 검토하면 이들이 낙랑 왕씨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들로 인해 파생된 "田氏,王氏,李氏,탁왕씨拓王氏(탁지씨拓至氏는 오誤),가빈씨可頻氏,을속고씨 乙速孤氏(기존에는 선비 또는 흉노족의 일원이라고 알려져 있다)등의 諸家(제가)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남북조 이래로 역사 속에 누대를 거쳐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名族(명족)들이다. 역시 본래 낙랑 왕씨와 다르지 않은 일족 들인 것이다. |
덧붙혀 또 다른 기자의 일족인 淸州(청주) 韓氏(한씨)와의 누대에 걸친 婚盟 (혼맹) 관습도 살펴봐야 할 것 이다. 그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王仁(왕인)이었다. 왕인에 대해서는 일본 위키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
다음은 《만주원류고》역주자이신 장진근님의 왕경에 대한 사료번역을 통해서 그의 8대조였던 왕중을 조
명해보기로 한다.
《후한서》에는 왕경(王景)이란 사람의 전기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왕경은 자가 중통(仲通)이요,
낙랑 남감인(樂浪남邯人)이라고 하였다.
그의 8대조 왕중(王仲)은 원래 낭야(琅邪) 불기인(不其人)으로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았다.
여러 여씨(呂氏)들이 난을 일으키자 제애왕(齊哀王) 양(襄이 군사를 파견할 것을 모색해 여러 차례 왕중
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제북왕(齊北王) 흥거(興居)가 반하여 왕중에게 군대의 통솔을 맡기자 왕중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우려해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 낙랑의 산중으로 달아나 거기서 집안을 일으켰다.
제애왕 양이나 제북왕 흥거 등은 모두 고조의 손자인 제애혜왕(齊哀惠王)비(肥)의
아들들이었다.
왕경의 아비 왕굉(王閎)은 군의 삼로(三老)였다.
삼로란 어떤 사람인가. 《한서 · 고제기》에 의하면 백성들의 나이가 50세 이상인 사람 가운에서 행실이
잘 닦여진 사람과 많은 무리들을 잘 통솔하는 사람을 선발해서 삼로(三盧) · 향(鄕)1인씩을 두었다.
향과 삼로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현의 삼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왕망의 신나라 말에 왕망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가고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스럽자
한족의 후예인 유현(劉玄)이 한나라 부흥을 내건 일족들인 유수 등에게 추대되어 장안에 수도를 정하고
칭제를 하고 연호를 경시(更始)라 하였다.
경시는 술과 계집에 빠져 정사를 조맹에게 일임하고,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고 의심이 많아 전후해서
신도건 · 진목 · 성단 등을 죽이고 왕강 · 장인 등을 강제로 내쫒는등 실정을 거듭하다가 경시 3년, 장안에
처들어 온 적미군(赤眉軍: 정부군과 반란군의 복장이 같으므로 구별하기 위해 눈섶을 붉게 물들였음)에
항복을 하고, 얼마 있다가 교살을 당하고 만다.
《왕경전》에는 이 같은 과정이 모두 생략된 채 "경시가 패하였다(更始敗)"는 세 글자만 써 있을 뿐이다.
(김희영 저,
《이야기중국사》 2, 청아출판사, 16~50쪽 참조)
경시가 패한 뒤 낙랑의 토인 왕조(王調)가 군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자칭 대장군 · 낙랑장군(大將軍 樂浪
將軍)이라고 하였다.
건무 6년(A.D30년) 광무제가 태수 왕준(王遵) 명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치도록 하여, 군대가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군의 결조사(決曹史) 양읍(楊邑) 등과 더불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았다.
이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는데 왕굉만은 벼슬을 마다하고 사양하니 제가 기특하게 여겨 불렀는데 가는
길에
죽었다.(《후한서(後漢書) 권76, 순리열전 제66 참조)
여기서 왕경의 전기를 장황하게 서두에 꺼내어 이런 저런 설명을 한
이유는 그의 출신이 낙랑 남감인으로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4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에 난감현이란 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감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말씀언(言) 변에 방이 나아갈 염(冄)자는 어지간한 사전이나 옥편에 나오지를 않고 강희자전에 겨우 나오는
글자이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전한서(前漢書) · 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현명으로 낙랑군에 속한다고
풀이 되어 있으며, 발음은 맹강(孟康)은 음을 남(男)이라 했고, 사고(師古)는 음이 내감절(乃甘切: 초성이 ㄴ
종성이 암이니 남으로 발음됨)이라고 했으니, 발음은 남으로 해야 맞다.
다음
글자인 감(邯)자는 현이름 감으로 훈하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난감현으로 해야 맞다.
낙랑 난감현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청나라 건륭제 때 전에 만들어진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대대적으로 보완한 《성경통지》를 중간한
바 있는데 거기 인물조에 왕경(王景)과 그의 애비 왕굉(王閎)을 한대의 인물로 간주 맨 첫번째로 싣고 있다.
이는 그들이 한반도에 있는 낙랑군의 인물로 보았던 것이 아니라 만주 일대에 있던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1) 정인보설(鄭寅普說)
왕굉(王閎)의 7대조 왕중(王仲)은 낭야인으로 낙랑 산중으로 와서 살았다.
토인 왕조(王調)가 자립하던 때 후한 무제가 왕준(王遵)을 낙랑태수로 임명하여 쳐 평정토록 하여 군이
요동에 이르자 왕굉(王閎)이 결조사(決曹史) 양읍(楊邑) 등과 더불어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았으니 갑(甲)
이 이르자 을(乙)이 맞이한 것이다. 요동에서 일어난 사실이요, 지금의 평양은 또 산중이 아니다.
간은 무려(無慮)와 같은 현인즉 의무려(醫巫閭)의 일대에 은거하였으므로 산중으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미세한 것으로도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어부(魚部)에 양(鱶: 건어) · 사(鯊: 문절망둥이) · 추(魚+芻 :
원문의 위 글자는 돌고래(魚+움켜뜰 국자)의 오기임이 분명하다) · 청유(鯖鰇) · 려(鱸: 농어)가 모두 낙랑
(樂浪) · 반국(潘國)에서 나온다 하였는데 《성경통지(盛京通志)》 물산 노어(鱸魚)의 주에 , "《자휘(字彙)》
에 이르기를 낙랑 · 반국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지금 봉금(奉錦)에 모두 이런 것들이 많다."라고 했으니 봉금
일대가 바로 옛날 번한(番汗) 지방의 부근이라 낙랑 · 반국에서 나는 물고기도 서로 참고할 하나의 재료로
봄직하다.
《시초목충어소》
(詩草木蟲魚疎)》를 보면 낙랑 위중명(尉仲明)이라는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어 다른 것으로 변해 유어(鰇魚)
가 된 것이라한다 등주(登州) · 내주(萊州人)들이 유어를 이름하여 위어(尉魚)라 한다 하였으니 요동반도와
산동해안에 접근한 관계가 아니면 전설이 언어와 교화(交化)되는 것이 이럴 수 없는 것이다.(정인보)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상권, 서울신문사, 1946년, 187~188쪽 참조
다음은 사례 (2)번으로 최동박사의 글이 있었으나 이미 정답이 나왔기에 생략한다.
[실증]<동이고략東夷考略> 향요해로(餉遼海路)
필자는 선인왕검께서 주재하시던 옛 평양성을 등주에서 건너다 보이는 묘도군도의 사문도(현 장도)라고
주장하여 왔다.
그렇다면 그곳에 선인왕검께서 신선생활을 하시던 삼신산과 소도가 있어야 하고,기자가 머물렀던 수유
(須臾)가 있어야 하며, 위만이 최후를 맞었던 험독과 왕험성이 있어야 하고, 한사군중에서 낙랑군의 치소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서기427년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있어야 하고, 첫번째의 안동도호부가 있어야 하며,
200여년을 패허로 묵혔다가 고려왕건이 재건한 서경이 있어야 하며 원나라가 설치한 동녕로와 파사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들을 설명하기에 앞서 가장 궁금한것이 만약 등주에서 바다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사문도에 평양성이 있었다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였을때 쉽게 건널수가 있었을텐데 500여리나
멀리 떨어진 난하 하구에 있던 열구를 돌아와야했다는 사실이다.
한나라 수군장수 양복은 당시에는 대형선이었던 누상선을 동원하여 산동반도의 제남에서 출발하여 발해의
서쪽 연안항로를 따라 현 난하의 입해구인 열구까지 올라가서 순체가 지휘하는 5만명의 병력을 싣고 다시
사문도로 내려오도록 계획이 되어있었다.
이 작전중에 그들은 조선의 패수 상군과 서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을 면치못했던 기록도 있다.
당시의 한나라의 수군병력은 양복이 지휘하는 7000명이 있었다.
양복은 해남도를 정벌하고 산동으로 올라와 조선을 치기 위하여 죄인들을 동원하여 병력을 보강하였던것
이다. 그러나 만약 당시에 조선국이 하북지방이나 요동의 내륙에 있었다면 수군은 크게 필요없는 존재였다.
그것은 연나라도 수군을 동원하지 않고도 조선을 정벌했었고, 수,당등도 수군을 동원하지 않고도 요동내륙
을 침략하는데는 육로만으로도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나라나 당나라등이 최후의 목표지로 삼았던 평양성을 공격하는데는 개주의 사비성을 무력화시켜
야만 평양으로 직행할수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만약 평양이 요동이나 한반도에 있었다면 장량이 지휘하는 당나라의 수군은 크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청나라나 몽골군이 한반도를 침략했을 당시나 6.25 전쟁당시 중공군의 침략루트에는 수군
을 동원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범할 당시 선발대였던 이세적군은 수군이 도착하기 전에 요동을 침범하여 뒤에 도착한
후발대와 합류하여 거의 반년간을 요동을 휩쓸고 다녔지만 그들이 평양성을 직접 공격했다는 사실은 기록에
없다. 이것은 당시 평양성은 요동에 없었다는 증거인것이다.
여기서 장량의 역활이 들어난다.평양도대총관이라는 직위가 그것이다.
수.당시 평양성 공격을 책임맡았던 부서는 모두가 수군들이었다.
라.당연합군의 대총관 소정방도 래주를 출발하여 사비성을 거쳐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방효태가 사수전투
에서 연개소문에게 대패하므로서 후퇴하였고,
장량은 정명진과 사비성을 치고 사문도 근처인 타기도로 내려와 승전을 위하여 제사를 올렸던 흔적이 각석
으로 남아있다.
왜 이렇게사문도로 가는길이 어려웠었는지 <동이고략 東夷考略>을 통하여 당시 해류를 따라 운행하던
향요로해(餉遼路海)라는 항로를 알아보기로 한다.
북으로 향하는 항로는 대사도로 부터 시작이된다.
넓고 크게 보이는 사문도는 가깝게 보이지만 사이에 흐르는 험한 물살때문에 직접 건너기는 불가능함으로
북서쪽으로 해류를 타고 연안으로 돌아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지도에 넓게 보이는 사문도는 현재 산들만 남아 있고 넓은 평지는 지진으로 바다로 윤몰되었다.
이곳에 공자를 위시한 진시황과 한무제가 건너고 싶어하던 삼신산이 있었다.
지도설명:大明輿地圖 1536~1566 제작:명(明) 이 묵 (미 의회도서관 소장).출처: 향고도
발해안으로 흘러드는 황하.대요하.난하.영정하,대능하.소능하.백랑수. 육주하.개주하.웅악하.복주하등의
물은 발해해협이라는 높은 뚝에 막혀 시원스럽게 황해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마치 원형처럼 둥그렇게
회전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인공위성으로 고공에서 촬영한것이다.
주로 황하에서 흘러들어온 탁수가 다른물과 섞여 돌고있는 현상이다.
*고려 문인 최자는 洌水所匯名爲大同 열수는 물이 돌고돌므로 대동이라 이름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과 왕래하는 경로를 등주에서 발해해협을 거쳐 여순으로 바로
건너는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탐도리기(賈耽道里記)의 새로운 지도를 발견함으로서 통설은 뒤집혀졌다.
한국의 많은 학자님들 께서도 현재 우리가 새롭게 밝히고 있는 가탐도리기의 경로를 발표한 예는 아직까지
는 없었다. 따라서 통설을 기준으로 설명하던 종래의 항로경로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지금부터는 득물도(得勿島)가 인천옆의 덕적도(德積島)라는 주장은 하루속히 수정이 되었으면 한다.
득물도는 요동반도의 서쪽연안에 있는 섬이다.
가탐도리기는 발해와 신라로 가는 경로를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신라 왕성까지 가는 노정의 설명은 요동의
개주에 있는 장구진과 압록강 당은포구(개주 니하)로 끝이난다.
이곳에서 육로를 통하여 동남쪽으로 700리를 가면 신라 왕성이 있다라고 한 곳은 봉황성이다.
당시 신라는 이곳에 동주 낙랑부(東州樂浪府)라는 계림주 대도독의 치소를 두고 있었다.
하기 때문에 요동반도의 한 복판을 신라가 점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이제부터 긍적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것이다. 지금 위에 올려진 지도들은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최근에 소개되는 지도다.
대청광여도
사문도와 등주사이에는 험한 물이 있어 건널수 없다는 주기가 달려있는 지도다.
평양성이 있었던 사문도가 바다로 일부가 윤몰되기 전의 모습이다.
당나라에게 망한 평양성은 안동도호부를 두고 3만이라는 인구를 대륙서쪽으로 분산시키고 노약자들만
남겨두고 있었는데 신라가 배경에 서서 지원하는 반군들의 공격에 편할날이 없었다..그러던 중
인근 청주에서는 지진으로 해일이 일어나 약 5000여호의 집이 떠내려가는등 수해가 극심하자 당나라는
이곳을 공지로 남겨두고 요동반도의 요양으로 안동도호부를 옮겨간다.
그래서 <요사 지리지>등의 기록상에 요양이 평양이라는 기록이 올려져 있는것이다.
그러나 같은 <요사 지리지>에는 고 평양성은 암연현(개주)의 서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서 이곳 사문도는 유령의 섬이 되었지만 신라가 수습하여 살면서 조금 버티다가 포기 하였고 패허가
되어있는동안 여진인들이 들어와 말을 먹여서 당나라로 수출하는 기지로 사용하게 된다.
이곳은 한때 당.송등의 범법자 유배지가 되기도 하였다.
여진인들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게 되는데 그동안 바다의 수위가 많이 높아지자 급류가 많이 완회되었고
또 도선장의 위치를 새로운 자리로 옮겨 항로를 개척하고 그 내용을 <동이고략>이라는 글 속에 담았다.
동이고략에는 요동반도의 남단인 여순에서 등주의 신하수관까지 550리인데 양와도까지 순풍을 만나면
이틀이면 도착할수있고,새벽 진시에 등주 신하에서 출발하면 여순에 저녘 늦게 도착하는데 여기서 자고
다시 다음날 새벽 진시에 여순을 출발하면 늦게 북쪽의 삼차하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리고 각 섬간의 거리를 말하고 있다.(1)
이 그림에 보이는 배들은 요동에서 사문도를 향하여 내려오는 배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점은 요동에서 등주로 향하는 항로인것이다.
당나라시대 사문도를 통하여 등주로 들어오던 항로는 역시 향요해로를 이용하였다는 증거다.
가는 항로와 오는 항로는 전연히 다른 일방통로다. (출처 월간win1996년 6월호)
무경총요 황화사달기에서 앞부분에 생략한 문장은 다음의 내용이다.
이에 뒤이어 필자가 인용한 문장이
계속된다.
(주1) 登州附見. 登州古東牟郡, 漢黄縣也. 唐建州於蓬萊鎮即今治所也. 東西北三面距大海, 各五里.
一路至
女真界, 揚帆一日一夜至馬石山. 按皇華四達記, 北渡海至馬石山五百里, 舊女真國, 今契丹界. 開寳年以前女
真内附, 産良馬通中國貿易. 詔登州大謝島人户等, 特免地租, 令許置舟船渡女真馬徃來. 淳化中契丹去海岸
四百里, 建砦置兵三千女真朝貢遂絶.
뒤에 생략한 문장은,
(唐置東牟東萊二郡守悉兼守捉) 使本朝隸京東路領水軍舠魚船入海戰艦數百教習水戰知州兼海内戰掉都巡
檢使.
[실증]하늘호수에서 만난 광개토대왕
이 글은 광개토대왕의 시호로 알려진 국강상(國 罡 上)이란 뜻이 북두칠성을 의미한다는것을 발견하고
혹시 그와 유사한 섬이 바다에 없을가를 탐색하다가 마침네 발해해협에서 북두칠성 형태로 배열된 섬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주변의 역사적인 상황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과 고구려의 초기상황과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곳은 통제된 장소로서 답사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어느정도의 성과를 얻었기에
그동안의 경과를 발표한다.
무리한 착오가 있을까 념려 되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글이오니 생소한 대목이 나오더라도 같이 연구
한다는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계속하여 더욱 많은 자료를 올리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앉은 북두칠성도(묘도군도)
발해해협의 묘도군도는 마치 그 모양이 북두칠성을 닮았다.
따라서 묘도군도는 북두성을 표방한 국강상(國 罡 上)이란 시호를 가졌던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탄생지로
강력히 추정되는 곳이다
호우총 출토 광개토대왕문 동기
별 이름. 28수(宿)의 하나로 물과 법(法)을 맡고 있다 함.
하늘의 호수를 한자(漢字)로 쓰면 '天湖'라고 한다.
그런데 이 天湖라는 간판을 달고 다니는 배가 대련과 연태 사이를 왕래하는 대형 여객선이었다.
'천호'는 이 배를 탓던 세계적인 기행작가 폴 써로우가 지은 <중국기행>이라는 책에 소제목(小題目)으로
나오는 단어인데 이 제목이 지닌 뜻을 과연 몇사람이나 이해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천호라는 여객선의 이름은 하늘호수로 해석되는 북두칠성도가 발해해협에 있다는 그들의 은어인
셈이었다.
실재로 발해해협에는 오호해(烏湖海)라는 바다가 있었고 또 그곳에는 오호도(烏湖島)라는 섬도 있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1차 침공할때 군수물자의 비축기지로 사용하던 섬인데 무슨일이 있었던지 650년에
진(鎭)이 패기된 후 흐지부지 사라졌다. 후대에 북황성도를 오호도로 인식하도록 지도는 전한다.
사실 오호(烏湖)라는 이름은 무서운 감 마져든다. 검푸른 바다 또는 죽엄의 바다라는 뜻과 함께 천상의
호수라는 북두칠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검정옷을 걸치고 조의선인을 지휘하던 연개소문은 이곳 하늘의 호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든 것일가?
그의 부친 연태조는 대막리지요 천문을 읽는 현인이었다.
오호도는 당나라의 군수물자 비축기지로 이용된 후 지진으로 가라앉은것이다.
지금은 그 형체를 찾을수가 없으니까.
따라서 자기들은 하늘호수를 왕래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을것이다. 현재 그들은 험악하기로 소문난 노철산
수도(등주-여순)를 피해서 연태로 직항하는 경로를 이용하고 있다.
필자는 많은 시간을 죽여가며 이 황당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동분서주한 결과 이해하기 어려웠던
난제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이제 '국강상'이란 거창한 시호를 가졌던 광개토대왕의 출자에 대한 비밀을
풀기에 이른것이다.
금단의 구역을 마치 도둑처럼 마음을 조이며 답사하던 기억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짧은 글로서 설명하기는 어려움이 많아 두서가 난삽함을 이해하여주실것을 부탁드린다.
대국이라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비롯한 고구려의 모든것까지도 자기
들이 관장하던 변방이라고 헛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일찌기 고구려는 만주의 대륙과도 별도로 떨어져 있던 발해해협의 북두성 별자리에서 태어난 것
이다. 고려의 사학자들은 이곳이 북두성 자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비밀을 《제왕운기》를 통하여
밝혀두었지만 명나라는 이 장소를 수백년동안 금족령을 내려 은폐시킨 관계로 우리 후손들에게는 망각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먼 옛날 조상님들의 기억력까지 상실시키고 마치 신화처럼 부평초가 되게 한 것이다.
우리들이 조상의 흔적을 눈으로 보면서도 기억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옛날의 버릇을 다시 되풀이
하기 시작하였다.
홍산문화유적을 자기들 조상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무엇이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린다.
뼈아픈 하늘의 응징이 있었음에도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그들이다.
오늘날은 그들의 선조들이 약탈한 장물들을 감추어둔체 합리화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고 하늘까지 속일수는 없는일 아닌가. 알고 보면 중국도 세계 열강들의 보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진게
불과 수십년 전이다. 이제는 큰 덩치만 믿고 약소국들을 위협하는 불의의 힘만을 자랑할것이 아니라 자연
의 질서에 순응하는 큰 마음을 발휘하여 약소국들과 공존하며 동행하기를 기대한다.
옛날 진시황과 한무제등이 고조선을 침략한건 삼신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불사국을 손안에 넣기 위해서 필생의 전력을 다 하였으나 결국 더러운 방법으로 약탈한 낙원은
이미 낙원이 아니었다.
무력으로 침략하여 모조리 파괴하고 주민들까지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같은 성인까지도 예를
숭상하는 동방의 나라를 부러워 하며 땟목을 타고라도 건너기를 원하였다는 《논어》<자한편>의 기록
들은 우리가 민망할 정도로 많이 보고 있는데 그러한 군자국이요 불사국인 하늘이 만드신 낙원을 그들이
짓밟고 부셔버린것이다.
그후 많은 세월을 보내고 천신만고끝에 회복이 되는가 하였더니 이번에는 다시 당나라가 같은 방법으로
고구려를 치고 만행을 저질렀다.
본래 이곳 묘도(廟島)에는 제천행사(祭天行事)를 관장하던 마고궁(일명 천후궁)이 있었다.
고조선시대 소도(蘇塗)를 말함이다.
천강(天罡)이란 북두칠성을 상징한 표현인가 하면 마고(麻姑)할머니를 표현한 말이라고도 한다.
http://blog.naver.com/sunghan60/100092591521
동방문화가 열린 이래 하늘과 땅의 다리역활을 담당하던 천후궁은 전화(戰禍)에 짓밟혀 패허로 변하였지만
다시 복원되어 오늘날은 또다른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http://blog.daum.net/gusan0579/8006141
이같은 인간들의 잔악성에 실망하였든지 하늘은 지진과 태풍과 해일을 보내어 드넓던 평양 벌판을 반쯤
이나 바다로 내려 앉혀버렸다. 그리고는 무도한 침략자들에게도 응징을 내렸다.
결과 천하를 떨게 하던 진시황도 불로초에 미쳐 돌아다니다 객사 하였고 무고한 3000여명의 동남동녀들
까지 잃어버렸다. 그리고는 이와같은 장수설을 세상에 퍼트린 학자들을 보복하기 위하여 수십만권의 책을
불사르고 수백여명의 선비들까지 땅속에 산체로 묻어버렸다.
분서갱유라는 희대적인 사건이 이러한 연유로 일어났던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후유증으로 진(秦)나라도 망하고 뒤를 따르던 한(漢)나라도 망했다.
그리고 초기 조선과 진나라와의 국경선을 가르던 갈석산도 요동만에 있던 진번조선의 옥토와 함께 바닷
속으로 살아진것이다.
이때 사방 500여리의 조선 옥토가 요동만으로 사라진 사실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이기때문에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나라는 조선과 싸워 승전했음에도 공로로 상을 받은자는 없었고, 고위 장수와 책사들이 거의 사형을
받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건드렸다가 골육상쟁을 이르켜 황제는 살해되고 형제간의 암투로 모두가 망했다.
당나라 역시 태종의 죽엄으로 천벌을 받은 것이다. 아비와 아들을 한몸으로 섬겼던 측천무후는 나라의 이름
까지도 갈아치우는 맹위를 떨쳤다.
그러나 그 침략자들은 아직도 개과천선은 고사하고 사서들을 조작하여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것이다.
이곳의 위치는 발해해협의 묘도군도다. 그림에서 1,2,3,4번까지의 네 별은 선기옥형(旋璣玉衡)이라 부르며
그 위치에는 환웅님의 신시 이후 단군의 조선, 기자와 기준의 낙랑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초기에 낙랑군,
평양성등이 있었고, 5,6,7번 자리에는 진번, 임둔, 현도군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까지도 북황성도와 남황성도라는 지명이 전한다.
그러나 동황성이라는 성은 고국원왕이 선비족들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 장도지역으로 이동하여 만들면서
생긴 성으로 보인다. 평양성은 기원 427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기원668년 당나라에게 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다. 패전후 안동도호부가 들어섰으나. 669년 안동도호부가 요양으로 쫓겨간 이후
한때 신라가 점유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장도다.
장도는 반복되는 재앙으로 패허로 변한 후 약 200여년간의 세월동안 당나라와 송나라등의 죄수들의 유배
지와 여진족들의 양마장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오호16국시대에 들어서 기원 918년 왕건에 의해서 고려국의 건국지가 되었고, 왕건은 평양을 재건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이민자들까지 뫃아 이주시켰다.
장도 평양성은 고려가 개성으로 천도하면서 서경이 되었고, 당시 동경을 경주로 부르던 요동의 봉황성으로
정하고, 황경(皇京)은 관전(寬奠)에 신설되었다.
많은 독자님들중에는 지금까지도 서경을 현재의 평양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
다는 사실을 차차 아시게 될것이다.
기원전 82년에 진번과 임둔군이 패기되어 진번군은 낙랑군으로, 임둔군은 현도군등으로 합병된다.
다시 기원전 75년에 5,6,7번의 주민들이 수복을 위한 저항을 계속하여 현도군을 800여리 북쪽 무순지방
으로 몰아내고 졸본부여 세력들인 비류국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주몽이 나타나서 개주의 서쪽 위치에 있던
졸본부여에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고구려가 북두칠성의 탯줄을 끊고 태어난 천손족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이유였다.
중국의 사서들까지도고구려인들은 귀신을 섬기고 또 신령스러운 별들과 사직에 제사지낸다고 적고 있다.
<祭鬼神, 又祀靈星·社稷>그럴만 한 이유가 있었든 것이다.
우리역사상 북두칠성을 가장 숭상했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북두칠성을 나라의 징표로 삼고 깃발
을 만들어 고분에 장식하는가 하면 임금 스스로 자신을 북두칠성의 화신으로 생각하여 국강이라 하였다.
주술성이 실린 북두칠성을 魁罡(괴강)이라고 하는데 魁강의 괴자는 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鬼(귀)자와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칠성두(斗)자가 결합된 문자다.
그러니까 칠성의 신명에 잡혔다는것입니다. (북두칠성 연구가이신 노중평님의 해설을 일부인용)
따라서 '괴강'을 '국강'으로 고쳐 부른 분은 광개토대왕이다. 그의 비문에 그를 지칭하는 '국강상'이라는
시호가 새겨져 있으나 이 시호는 생전에도 사용하던 휘호인지는 상세히 알수 없다.
罡강이란 사정(四+正)을 바르게 한다는 공평을 뜻하는듯 하다.
북두칠성의 천추,천선,천기,천권등 네 별로 둘러쌓인 사각형의 공간을 선기옥형(旋璣玉衡)이라 부르는데
이곳에 삼신산이 위치하고 신시는 아사달의 터전을 일구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본래의 칠성'강'자를 언덕'강'자로 왜곡시켰다는 노중평님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는것이다. 그것은 칠성'강'자를 사용할때 묘도군도의 위치가 발견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중평님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시호 문구중 원래 강(罡)자가
있었야 하는데, 강(岡)자를 일본인들이 변조한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강(罡)은 칠성강자라는 의미로 광개토대왕이 북두칠성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며, 강(岡)은 북두
칠성의 성기(星氣)가 꽂히는 언덕, 다시 말해서 북두칠성이 떠오르는 동북간방에 위치한 산을 말하는 것
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성기(星氣)를 누르기 위하여 일본인들이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내용을 변조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맥을 끊고자 쇠말뚝을 박은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볼때 노중평님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또한 어떤 사람은 노중평 선생의 주장보다 더 나아가 일본 사학자(史學者)들이 국강상(國罡上)의 ‘북두
칠성 강(罡)’을 ‘언덕 강(岡)’으로 고쳐서 쓰는 이유를 일본 천황(天皇)의 상징인 ‘북두칠성’을 고구려(高
句麗) 태왕이 쓰는 것은 기휘(忌諱: 거리낌)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엄연히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국강상(國罡上)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두칠성 강(罡)’을 ‘언덕 강(岡)’으로 고쳐서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사서(史書)에 기록하여 노골적인
왜곡(歪曲)를 단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려때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마치 다빈치코드같은 두여<斗與>라는 대목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두여(斗與)라는 대목은 번역자들에게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시어
(詩語)였다.
틀림 없이 '斗'字는 북두성을 의미하는 상징 글자인것 같기는 한데 한반도를 모델로 대입시켜보면 해석이
불가능한 용어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삼면이 바다라는 공통점 때문에 한반도가 묘도군도의 대역으로 해석
된것이다.
한반도가 어떻게 일곱개의 별인 북두칠성이 될 수 가 있겠는가? 하마터면 영영 잊혀질뻔한 묘도군도였다.
遼東別有一乾坤 (요동별유일건곤) 요동에 따로이 별천지가 있으니
斗與中朝區二分 (두여중조구이분) 북두성과 더불어 조,중을 두개로가른다.
洪濤萬頃圍三面 홍도만경위삼면) 큰파도 수 만 이랑은 삼면을 둘럿고
於北有陸連如線 어북유륙연여선) 북쪽의 육지로 끈처럼 이어진다.
中方千里是朝鮮 (중방천리시조선) 이사이 중방 천리를 조선이라하니
江山形勝名敷天 (강산형승명부천) 강산은 절경이라 그 이름 천하로 퍼지네.
이승휴저 <제왕운기>1에서
이 외에도 북두칠성을 위주로 발생하는 과학적인 분석과 신화가 끼친 결과는 삼신사상의 영향을 받은
도교와 불교, 유교, 칠성교.그리고 소도를 운영하던 영향으로 무교가 성행하였음을 본다.
끝으로 많은 독자님들께서 궁금이 여기실 지금의 묘도군도의 형성은 본래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산맥
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으나 지진으로 무너져 내려 남은 여봉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
사전》은 전하고 있다.
생성 당시에는 현재보다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차에 걸친 지진으로 계속하여 줄고있는 실정이다.
본래 발해 내해에는 바다가 아닌 큰 강들만 흐르고 있었다는 지도가 따로 전하고 있다.
묘도군도는 2009년까지도 한국인들의 출입이 통제를 받는 금단의 지역이었다.
사서들의 기록중에는 별유(別有)와 별종(別種)이라는 알쏭달쏭한 기록들이 보이는데 이 '별유'라는 용어는
동해에서 별도로 떨어진 발해를 이르는 말이라는 근거가 《初學記》에서 발견되었다.(1)
고구려인을 소수맥 또는 부여의별종, 말갈인을 고구려의 별종, 백제인을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것은 이들이
모두 발해 내에서 출발하였다는 힌트가 되겠다.
따라서 《제왕운기》에서 <요동별유 일건곤(遼東別有一乾坤)>이라고 하는것은 발해를 은어처럼 표현한
암호같은 표현이었다. 원나라는 고려의 출판물들을 까다롭게 간섭하였다는 단재선생의 글을 참고하였다.
주(1)《初學記》東海之別有渤澥,故東海共稱渤海,又曰滄海。
渤海
齧入遼東半島山東半島間之內海也,中有大灣二,入於東北者曰遼東灣,遼東半島爲其東壁,入於西南者曰
直隸灣,山東半島突出於其東,其他小灣甚多,在遼東半島者,有金州灣、復州灣,迤而西北有錦州灣,
灣之西有葫蘆島,在山東半島者,有龍口彎,皆有名者也,
兩半島之間與黃海相通處曰直隸海峽,廣二百餘里,北曰老鐵山角,南曰登州頭,廟群島聯絡兩間,爲天然
之門戶,此海水量甚淺,中央深處不過百十一尺,長八百十六里,廣四百七十六里,
*太古前兩半島之山脈本相聯絡,此海亦爲陸地,迨後漸次陷落,遂成此海,廟群島乃陷落之餘峰也,入於渤
海巨川,以遼河、灤河、黃河爲最大,營在遼河之口,天津牢牢白河之口,皆最著之商港,惟冬春之間,
冰結者七八十日,汽船皆取道於山海關內之秦皇島焉。출전:<중국고금지명대사전>
신라 성덕대왕은 삼신산에 살았다.
《부도지(符都誌)》와 《삼국사기》의 놀라운 삼신산 기록
시(市)에 온 사람들은 영주(瀛州) 대여산(岱與山)1)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이었다.
그것을 ‘영주 해삼’이라
하였으며 능히 삼덕(三德)2)을 보전하고 돌아갔다. 모든 인삼이 그 수와 격(數格)
을 갖추어, 자삭방(磁朔方)에서 난 것은 반드시 장생하니 40세(歲)를 1기로 휴먼하고, 13기를 1삭(朔)
으로 정기를 쌓고(蓄精), 4삭을 경과하여 씨(子)를 맺어 화(化)하니,
이러한 것은 부도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혹 작은 뿌리라도 부도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 신령한 효험(영효:靈效)가 있으므로, 시(市)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구하였다.
대저
삼근영초(三根靈草)의 인삼과, 오엽서실(五葉瑞實)의 잣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의 부인(符印)은
진실로 불함삼역(不咸三域)3)의 특산이요, 사해제족(四海諸族)에게 하늘의 은혜(天惠)였다.
《부도지(符都誌) <제16장> 원문생략
주1) 영주 : 산동성 연태시 장도현 삼신산지역
주2) 삼덕 : 하늘과 땅과 사람의 덕(삼신의 덕)
주3) 불함삼역 : 방장의 방호(方壺), 봉래의 원교봉(圓嶠峰), 영주의
대여산(岱與山)
* 삼신산에 나는 인삼(산삼)과 잣과 뽕나무는 하늘의 은혜를 받어 불로장생의 낙원이 되었으니 이를 군자
국이요 불사국이라고 불렀다.
영해박씨(寧海朴氏) 박재상(朴堤上)이 작자로 알려진 부도지(符都誌)는 성덕대왕이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있던 영해부(산동성 연태시)에서 기록되었을 공산이 크다.
그것은 《삼국사기》<신라본기>성덕대왕조가 이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덕대왕은 발해국의 해상침범을 방어하기 위해서 당현종으로 부터 영해군사(寧海軍使)직을 위임 받았다.
따라서 신라의 통제하에 있던 발해및 동해(황해)에 세곳에 통제부를 두었는데 대련.연태.영파등이다.
당시 성덕대왕의 거주지는 봉래.방장.영주산등산이 있던 삼신산지역이었다.
신라는 당나라에게 보낸 사은품중에 해표피(물범가죽)가 있음이 밝혀졌다.해표피는 종래에 단순한 표피
(표범가죽)로 알려졌던 물품이다.이 물범가죽은 삼신산(발해해협)지역 바다에서 서생하는 특산품이다.
의충이 귀국할 때 황제는 신라에 패강 이남의 땅을 주라는 조칙을 내렸다.
(이 패강은 북한의 대동강을 지적한게 아니고 개주의 대통강(개주하)을 지적한것이다.(대명일통지)
《삼국사기》<신라본기>성덕대왕
32년 가을 7월, 발해에 소속된 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를 침범하므로, 당 현종이 태복원외경 김 사란을
귀국시키면서, 동시에 왕에게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김 사란에게 군사를 주어
말갈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한길 넘게 내려 산길이 막혔고,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으며,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
하고 귀환하였다.
김 사란은 원래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 나라 조회에 참여하였을 때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므로 숙위로 머물
도록 하였는데, 이 시기에 당 나라의 대외 임무를 맡긴 것이다.
겨울 12월, 왕의 조카 지렴을 당에 보내 황제의 은혜에 사례하였다.
이 보다 앞서 황제가 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각 한마리와 자주 비단에 수놓은 웃옷과 금은으로 세공한
기물과 무늬 놓은 비단 및 오색 비단 3백여 단을 주었다.
왕이 다음과 같은 글을 황제에게 올려 감사를 표시하였다.
"생각컨데 폐하가 천하의 운행 법도에 따라 나라를 창건하니, 문무가 성스러워 천년 동안 창성할 것이며,
만물을 상서롭게 할 것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가는 곳은 어디나 폐하의 지극한 덕을 받게 되었으며,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폐하의 깊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봉래와 방호의 옆에 있어 중국과는 멀지만, 황제의 자비는 이러한 먼 데까지 미쳤으며,
궁벽진 향리에서 중국을 바라보니, 밝은 은혜가 어두운 데까지 뻗었습니다. 공손히 조서를 읽고서, 무릎
꿇어 선물 상자를 열어 보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은 듯하고, 오색 빛깔의 신기한 새들이 그려져 있었
습니다.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영물스러운 새인 앵무는, 흰 것과 푸른 것 두 마리가 신묘하게 어우러져, 때로는 장안
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황제의 은혜를 전해주는 듯 하였습니다.
비단의 채색 무늬와 보물의 금은 장식은, 보는 자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자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원래 당 나라에 정성을 바친 공은, 사실은 선조들이 이룬 것인데, 저에게 이 처럼 큰 은총을 내리고, 자손에
게까지 미치게 하니, 미미한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태산 같이 큰 격입니다.
저의 분수를 생각해보면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지렴을 위하여 대궐 내전에서 잔치를 열게
하고, 그에게 비단 1속을 주었다.
三十三年, 春正月, 敎百官, 親入北門奏對. 入<唐>宿衛左領軍衛員外將軍<金忠信>上表曰: "臣所奉進上{止} ,
令臣執節, 本國發兵馬, 討除<靺鞨>, 有事續奏者. 臣自奉聖旨, 誓將致命. 當此之時, 爲替人<金孝方>身亡,
便留臣宿衛. 臣本國王以臣久侍天庭, 遣使從姪<志廉>代臣. 今已到訖, 臣卽合還. 每思前所奉進上{止} , 無忘
夙夜. 陛下先有制, 加本國王<興光>寧海軍大使, 錫之旌節, 以討凶殘, 皇威載臨, 雖遠猶近, 君則有命, 臣敢
不祗. 蠢爾夷 , 計己悔禍, 然除惡務本, 布憲惟新. 故出師義貴乎三捷, 縱敵患貽於數代. 伏望: 陛下因臣還國,
以副使假臣, 盡將天旨再宣殊裔. 豈稚{惟} 斯怒益振, 固亦武夫作氣, 必傾其巢穴, 靜此荒隅, 遂夷臣之小誠,
爲國家之大利. 臣等復乘 滄海, 獻捷丹 , 毛髮之功, 答雨露之施, 臣所望也. 伏惟陛下圖之." 帝許焉. 夏四
月, 遣大臣<金端竭丹>, 入<唐>賀正. 帝宴見於內殿, 授衛尉少卿, 賜緋 袍·平漫銀帶及絹六十匹. 先時遣王
姪<志廉>謝恩, 獻小馬兩匹·狗三頭·金五百兩·銀二十兩·布六十匹·牛黃二十兩·人蔘二百斤· 頭髮一百兩· 海豹皮
一十六張. 及是授<志廉>鴻 少卿員外置.
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봄 정월, 백관들이 직접 북문으로 들어와 상주를 올리거나 왕과 마주 대하도록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당 나라에 가서 숙위를 하는 좌령군위원외장군 김 충신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다.
"제가 받은 명령은, 제가 폐하의 신임표를
가지고 본국에 가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물리치는 것이었
으며,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계속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나서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저를 대신하여 숙위할 사람인 김 효방이 죽었기 때문에 제가 숙위로 유임하
게 되었습니다. 저의 본국 왕은 제가 황제를 오래 모셨다 하여, 저의 종질 지렴을 사신으로 보내와 저를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이미 도착해 있으니 저는 귀국함이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명령은 언제나
염두에 둘 것이며, 밤이나 낮이나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예전에 본국의 왕 흥광에게 영해군 대사의 직위를 가하고, 군사 출동의 정절을 주어 흉적을 토벌
케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임하면 먼 곳이라도 가까운 곳 같았고, 황제의 명령이 내리면 신하는 감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오랑캐들은 자신의 행동이 화를 불러 일으켰음을 이미 후회하고 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근본에 힘써야할 것이며, 법령을 선포함에 있어서는 새로움을 도모
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저의 귀국을 기회로, 부사의 직을 저에게 맡겨 주셔서, 황제의 뜻을 신라에 거듭
선포토록 하소서. 그리하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 떨칠 뿐이겠습니까. 실로 군사들도 또한 기운을
내어 반드시 오랑케의 근거지를 뒤엎어서, 이 거친 변방을 안정시킬 것이고, 마침내 저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큰 이익으로 변할 것입니다. 신 등이 다시 창해에 배를 띄우고 승리의 보고를 대궐에 바치며, 작은
공이라도 세워, 크나큰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폐하께서 이 뜻을 들어
주소서."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여름 4월, 대신 김 단갈단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황제는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그를
접견하고, 위위소경 벼슬을 주었으며, 비란포·평만은대·명주 60필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왕의 조카 지렴을 보내 황제에게 사례하고, 작은 말 2필·개 3마리·금 500냥·은 20냥·베 60필·
우황 20냥·인삼 200근·머리털 100냥· 해표 가죽 16장을 바쳤었다.
이 때 황제는 지렴에게도 홍려소경원외치 벼슬을 주었다.
三十四年, 春正月, 熒惑犯月. 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少卿.
<義忠>廻, 賜<浿江>以南地.
34년 봄 정월, 화성이 달을 범하였다. 김 의충을 당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2월, 부사 김 영이 당에서 사망하자, 광록소경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귀국할 때 황제는 신라에 패강 이남의 땅을 주라는 조칙을 내렸다.
三十五年, 夏六月, 遣使入<唐>賀正, 仍附表陳謝曰: "伏奉恩 ,
賜<浿江>以南地境. 臣生居海裔, 沐化聖朝,
雖丹素爲心, 而功無可 , 以忠貞爲事, 而勞不足賞. 陛下降雨露之恩, 發日月之詔, 錫臣土境{壤} , 廣臣邑居,
遂使墾闢有期, 農桑得所. 臣奉絲綸之旨, 荷榮寵之深, 粉骨 身, 無由上 {答} ." 冬十一月, 遣從弟大阿
<金相>朝<唐>, 死于路. 帝深悼之, 贈衛尉卿. 遣伊 <允忠>·<思仁>·<英述>, 檢察<平壤>·<牛頭>二州地
勢. 狗登<在城>鼓樓, 吠三日.
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35년 여름 6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패강 이남의 땅을 준다는 칙서를 삼가 받았습니다. 제가
바다의 한 구석에 태어나 살면서, 거룩한 당 황제
의 교화를 입었으니, 비록 충성을 바칠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공적은 없었으며, 충정을 일 삼았으나 상
을 받을 만한 노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크나큰 은혜를 베풀고, 해와 달 같이 밝은 조서를 내려
저에게 토지를 주어서, 나라를 넓혔으니, 마침내 땅을 개간할 희망이 생기고 농사지을 터전을 얻게 되었습
니다. 저는 조서의 뜻을 받들어 큰 은총을 입었으니, 분골쇄신할지라도 황제에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겨울 11월, 왕의 종제 대아찬 김 상을 당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도중에 사망하였다.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 벼슬을 추증하였다.
이찬·윤충·사인·영술을 보내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조사하였다.
개가 재성 고루에 올라가
사흘 동안 짖었다.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