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 곽윤직(厚巖 郭潤直). 법을 전공했든 전공하지 않았든 고시공부 하겠다고 법대 주변을 어슬렁거려 본 사람치고 곽윤직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고시생의 바이블로 통하는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론’ ‘채권각론’ 등 민법강의 시리즈의 저자다. 현재 법조계 최고 지위에 있는 대법관이나 검사장으로부터 말단 법률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책을 보지 않고 법을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 그는 77세의 고령에도 자신의 민법강의 시리즈 수정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한국에서 민법이 제정된 것은 58년. 지금까지 7차례의 개정이 있었지만 친족 상속법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사실상 올해 처음으로 물권 채권법 등과 관련한 개정이 이뤄진다. 당연히 그의 책에도 고쳐야 할 대목이 많아졌다. 부지런함은 그의 천성인가 보다. 그의 민법강의 시리즈는 늘 남들보다 한발 앞서 최근의 법령과 판례의 변화를 반영해왔다. ‘한국 민법 최고의 교과서’를 업데이트하는 일로 요즘도 오전 2시 이전에 잠을 청하는 날이 드물다. 민법이 모든 법의 근본임을 감안하면 그는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 민법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방 법무법인 파트너인 이숭희 변호사(83학번)는 “국내 다른 민법학자의 견해를 거의 무시하는 곽교수가 그래도 인정해 주는 학자가 선배인 김증한 교수였지만 김 교수조차도 이론적으로는 그에게 압도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의 위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였다”고 말했다. 그는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로 접어든 지금 법관의 자질 저하에 대해 깊이 우려하면서 “엉터리 의사가 많아지면 의료사고가 빈발하듯이 앞으로 엉터리 법률가가 많아져서 소송사고가 빈발하고 억울한 의뢰인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법률가가 돼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능력이 있다는 것과 법률사무에 맞는다는 것은 다르다. 법률가는 조금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노력하면 될 수 있다. 다만 법률가의 수를 채우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자격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현재와 같은 사법시험 방식으로는 자격있는 사람을 제대로 가려낼 수 없다. 사시 2차 시험에서 민법은 주관식으로 두 문제가 출제된다. 두 문제만으로는 운이 좋아 시험을 잘 본 건지 실력이 있어 시험을 잘 본 건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최근 들어 5000쪽에 달하는 그의 민법강의 시리즈보다 1500쪽 안팎의 고시용 책들이 널리 읽히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그가 ‘민법강의시리즈’를 쓸 무렵 기존의 교과서는 국내에서 실무가 돌아가는 것에는 캄캄한 사람들이 일본 교과서를 베끼다시피해 펴낸 일본 판결 일색이었다. 국내 판결을 찾아내 가능한 한 일본 판결 대신 국내 판결을 인용해 설명한 그의 책은 한국 사람이 한국인의 시각으로 쓴 최초의 민법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곽 교수는 정년 퇴임하는 날까지 학장자리 한번 맡지 않고 강의와 연구에 전념한 보기 드문 교수였다. 공부 이외의 일에는 신경쓰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한번 일에 몰두하면 무서운 집중력으로 일을 했고 점심 식사마저 귀찮아서 거르는 일도 예사였다. 취미도 바둑 두고 가끔 골프를 치는 것이 전부다. 3급 실력인 바둑도 골몰해서 둔다면 휴식이나 오락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굉장한 속기로 둔다.
95년 고희(古稀)기념논문이 출간돼 후학들이 열어준 행사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애써서 만들어줘 고맙다”고 한마디 한 뒤 “이런 자리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허식의 자리가 돼서는 안된다”며 예고없이 ‘상속법, 재산법인가 가족법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해 후학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런 성격을 반영해서인지 그의 호가 지어진 이유도 지극히 단순하다. 그저 후암동에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후암이다. 서재의 책을 옮기는 번다함이 싫어 65년부터 37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아침이면 집 근처 남산에 올라 산책하고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만한 알래스카 허스키종 개 3마리와 잠시 놀고 나면 서재에 들어와 또 책을 펼쳐드는 것이 요즘도 그의 일상이다.
법률가들의 책상에는 어디나 그의 민법강의 시리즈가 꽂혀 있다. 대법관을 지낸 이용훈 변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대법관 시절에도 무엇이 옳은 판결인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는 후암선생의 책을 펼쳐들고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해봤다고 한다. 그는 “후암선생이야말로 평생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학문의 외길을 걸어온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퇴임한 후에는 후배 교수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학교 근처에는 얼씬하지도 않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사표(師表)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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