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용산신문 `신용산-구용산 220601
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3)
신용산과 구용산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손님, 어디로 모실깝쇼?
-용산으로 가세나.
-어느 용산요? 신용산 말씀이신가요?
-용산이라면 원래의 용산 아뇨? 이젠 구용산이라고 해야능감?
-알았수다, 그러면 손님. 모토마치 방면으로 모실께요.
※모토마치는 지금 용산구 원효로. 당시 원정(元町)의 일본식 발음
일제 강점기, 경성역(서울역) 앞에서 인력거꾼과 손님의 대화를 상상해 본 것이다.
용산권 일대가 지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중에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용산공원(현재 조성 중) 일대에 더욱 눈들이 쏠린다.
앞으로 경부선 철도 지하화와 연계해 용산공원 일대가 개발되면 용산역세권이 크게 달라징 것이다. 또, 철도가 지하화될 경우 그 지상 부지에 업무·상업 복합시설이 들어서겠지. 여기서 멀지 않은 코레일의 철도기지창 부지도 크게 힘을 받을 것이다.
경치가 좋았던 용산의 산억덕은 지금은 아파트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차 완전히 산머리를 가리고 말았다. 이 산이 그 유명한 옛날의 용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저 산천동 언덕이니 원효로4가 끝머리니 하며 짚어 말한다. 요즘에 와서는 ‘용산’이라 하면 대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하는, 그 주위를 우선 떠올린다. 지금의 한강로 일대의 어디쯤이거나 삼각지나 국방부터 일대로 안다.
조선시대만 해도 ‘신용산’이니 ‘구용산’이니 하는 말이 따로 있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새푸리(한강로) 지역에 용산역을 만들면서 그 일대에 새 상권이 형성되어 ‘새로운 용산’이란 뜻으로 이 이름이 붙어 버렸다.
한강물이 드나드는 저지대로, 모래와 자갈, 풀섶이나 있었던 한강로 일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부터 주택지로 탈바꿈하였다. 한강의 모래를 깔아 지대를 높이고 전찻길도 깔고... 이러면서 이 지역은 급속도로 발전해 갔다.
저지대여서 큰물이 자주 들어 지금의 이촌동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지가 형성되어 갔다. 을축년(1925) 장마 때는 용산 일대가 거의 물바다였는데, 그 중에 가장 피해를 본 곳이 한강가의 이촌동과 지금 신용산이라고 부르는 이 일대였다.
이촌동이란 이름은 동네가 둘(2)이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세 개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동부이촌동, 서부이촌동, 중부이촌동. 그러나 그 중에 중부이촌동은 을축년 장마 때 모두 떠내려가 폐촌이 되어 이름 그대로 이촌동(二村洞)이 되어 버렸다.
황량한 벌판이었던 신용산 일대는 중요 기관들과 함께 주택들이 계속 들어서면서 모습이 크게 변해 갔다.
이제는 용산이 새로운 개발 분위기 속에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용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용이 높이 하늘로 치솟아 오를 기세다. 이미 신용산 일대는 고층아파트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고 있다. 용산 중에서도 신용산이 주목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