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09/14 14:59 보리피리 시인 한하운 심포지엄 9월 23일 개최 〈보리피리〉로 유명한 한하운 시인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 9월 23일 인천 부평구 인천여성가족재단에서 열린다. 《한하운, 그의 삶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한하운 시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기조강연과 연구 발표가 이어진다. 한중일 3개국 학자가 각각 발표자로 나선다. 심포지엄 축사는 「〈한하운 시초〉를 읽고 시인이 되기로 했다」는 고은 시인이 맡는다.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1920∼75)은 인천 부평에 한센병 환자요양소 2곳을 설립해 운영하며 한센인 구제사업(救濟事業)을 벌이다가 타계했다. / (인천=연합뉴스) 2017/06/13 11:38 《보리피리》 한하운 심포지엄 9월 개최 … 高銀 詩人 축사 한하운 시인 [인천시 부평구 제공] 시(詩) 보리피리로 유명한 한하운 시인의 삶을 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올해 9월 인천에서 열린다. 인천시 부평구는 한하운 재조명사업운영위원회 회의를 열고 9월 23일 인천여성가족재단 대강당에서 《한하운 그의 삶과 문학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키로 확정했다고 6월 13일 밝혔다. 이 심포지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이 참석해 <한하운과 나> 라는 주제로 축사할 계획이다. 최원식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이 <한하운과 한하운 시초>라는 주제의 기조 발제를, 요시카와 나기 일본 릿쿄대학 강사가 <세이케이 시절의 한하운과 일본의 나(癩)문학>이라는 주제의 연구 발표를 한다. 추이 위산 중국 北京 대외경제무역대학 교수, 고봉준 경희대 교수, 박연희 동국대 교수도 한하운 시인에 대한 연구발표를 이어갈 예정이다. 부평구는 시·구비 등 2억2천여만원을 들여 부평에 오래 살았던 한하운 시인의 재조명 사업을 벌인다.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1920∼75)은 부평에 한센병 환자 요양소 2곳을 설립해 운영하며 한센인 구제사업을 펼치다가 57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chamse@yna.co.kr 한하운(韓何雲) 본명은 태영(泰永). 함남 함주 출신. 종규(鍾奎)의 아들이다. 1932년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19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동경 세이케이 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 2년 수료하였다. 그해 중국 北京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남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癩病)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뒤 자신의 투병생활과 함께 1950년 성혜원(成蹊園), 1952년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뒤 1966년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활동은, 1949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新天地)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해 첫시집 《한하운詩抄》,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 1956년 《한하운 詩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詩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 해설집 《황톳길》(1960), 《定本 한하운시집》(1966) 등이 있다. / 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2051 한하운(韓何雲) 1919~75 194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삶에 대한 애착을 통곡과 피의 언어로 노래했던 문둥병 시인 1949년에 들어 서울 바닥에는 해괴(駭怪)한 소문이 한 가지 떠돈다.
『명동에서 문둥이가 詩를 판대』 그 무렵 이미 明洞은 제법 번화한 거리였다. 멋쟁이 젊은 남녀, 작가, 시인, 화가, 실업자, 거지, 앵벌이, 아편중독자, 병역기피자, 양공주, 건달····· 서울의 복판에 자리잡은 명동에는 갖가지 인간 유형이 모여든다. 어느날 밤, 명동의 한 바(bar)에 어깨에 닿을 만큼 머리가 긴 거지 하나가 나타난다. 거지는 대여섯 명의 신사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다가간다. 『뭐요?』 거지는 신사들 앞에 하얀 종이 1장을 내민다. 종이에는 <파랑새>라는 제목의 詩가 적혀 있었다. 한 신사가 제목을 들여다보며 『그린버드(Green Bird), 그린버드(Green Bird)』하고 중얼거린다. 『이거 당신이 지은거요?』 『네, 詩가 되건 안되건 1장 사주세요』 『여기에 계신 분들이 詩人들이오. 자, 내가 소개를 하지. 이 분은 정지용, 이 분은 이용악 이라는 분이오』 그들은 詩를 파는 문둥이 거지에게 술잔을 권한다. 거지는 사양한다. 『인간이 사는 조건은 육체적 조건으로 사는 것이 아니오. 정신적인 것이 제일이오. 어서 드시오』 정지용은 호주머니 속에 있던 고급 만년필을 꺼내 거지의 손에 쥐어준다. 『내 오늘밤은 돈이 없으니 대신 이 만년필을 갖다가 쓰시오』 그러나 거지는 만년필을 탁자 위에 놓고 허둥지둥 바에서 나간다. 이 거지가 바로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이다. 그는 나병(癩病)에 걸린 몸을 끌고 비극(悲劇)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과 고독을 담은 詩를 팔아 생존을 지탱해나간 것이다. 한하운은 본명이 태영(泰英)으로, 1919년 함남 함주군 동촌면에서 지식인 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간 그는 학과 뿐아니라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 재능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붓기 시작해 아버지를 따라 한달 남짓 온천과 약수터에 다니며 요양생활을 한다. 이때 이미 나중에 있을 불행의 시초를 보인 것이다. 그는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해 수의축산학(獸醫畜産學)을 공부하게 된다. 이무렵 그는 장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하는 한편, 발자크,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등 번역소설을 탐독한다. 아울러 일본어로 된 『詩論』과 『詩作講座』 등의 책을 읽는가 하면, 일본인 교사로부터 단가(短歌), 하이쿠 그리고 漢詩作法을 배우며 詩를 쓰기 시작한다. 뒷날 그에게 큰힘이 되어주는 「R」라는 여학생과 사귀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맘때만 해도 그는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건강하게 생활한다. 1936년 봄, 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덮친다. 몸 곳곳의 말초부에 콩알 같은 결절(結節)이 생기고 궤양(潰瘍)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여러 병원을 다니며 진찰을 받다가 경성대 부속병원에서 마침내 「나병 진단」을 확정받는다. 한하운의 나이 17살, 이리농림 5학년 때의 일이다.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雷聲霹靂)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한하운 《나의 슬픈 반생기》(인간사, 1957) 절망한 그는 학업과 문학수업을 다 팽개치고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간다. 그가 온천에 다니며 치료를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 무렵 애인 「R」가 그를 찾아온다. 그는 「R」에게 나병에 걸린 사실을 털어놓은 뒤 폭포에서 뛰어내리려고 한다. 「R」는 극구 만류하며 「일생의 반려가 되겠다」고 밝힌다. 결국 그는 마음을 돌려, 치료에 전념해 나병을 치유하겠다고 「R」 앞에서 굳게 다짐한다. 1937년 병세가 호전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호시에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2년 뒤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귀국한다. 얼마 동안 요양한 다음 이번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北京大 농학원에서 축목학(畜牧學)을 전공하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뒤 아버지의 권유로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적을 두고 개마고원과 경기 용인군 등으로 옮겨다니며 근무한다. 나병 진단을 받았음에도 이맘때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증세가 겉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고나면 검은 눈썹이 없어지고, 자꾸 코가 막혀 숨도 제대로 못쉬게 된다. 1945년 봄, 마침내 나환자(癩患者)임이 밝혀져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낙향해 방안에 틀어박힌다. 이때까지도 「R」는 한하운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보살핀다. 덕분에 한하운은 병과 싸워가며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본명 대신 필명 「何雲」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한하운 육필 해방은 한하운에게 기쁨보다 고통을 안겨준다. 집안이 불로소득을 일삼는 부재 지주로 몰려 가산을 몰수당하고 길바닥에 나앉은 것이다. 이듬해 1946년 3월 그는 함흥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를 구경하다가 체포된 뒤 병 보석으로 가출옥한다. 이 무렵 어머니가 병으로 숨지고, 1947년 4월께 다시 체포된 그는 원산형무소까지 끌려간다. 아우가 벌인 반공활동에 한하운과 「R」도 연루된 까닭이다. 얼마 뒤 다시 병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藥을 구하려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다. 대구·부산 등지의 나병요양원에서 약을 구해 귀향하던 도중 원산(元山)에서 불심 검문에 걸려 그는 또 체포된다. 곧 탈주를 감행한 그는 걸어서 동두천까지 온다. 이때부터 남한 곳곳을 떠돌며 밤에는 쓰레기통 옆에서 자고 낮에는 깡통을 든 채 빌어먹는 생활이 이어진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지만,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윽고 그는 문둥이 박대가 한결 심한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온다. 땅 위에서는 고사하고 다리 밑에서 사는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 시골에 비해 문둥이가 살기에는 오히려 서울이 나았으며, 구걸을 위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찾다보니 결국 明洞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한동안 다방, 음식점 또는 상점 어귀에서 빈손을 내밀어 구걸하던 한하운은 겨울이 닥치자 거적 한닢으로 영하 10℃의 추위를 견뎌야 하는 처지가 된다. 옆에서 자던 거지가 얼어죽고, 잠들면 저도 그대로 죽어버릴것 같았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밤을 새운다. 그는 떨어진 제 손가락을 주워 옷깃으로 소중하게 감싼뒤 호주머니에 넣어둔다. 한때라도 제 피와 영혼이 통하던 그 살점이 한하운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된 것이다. 「죽어서는 안돼. 이 세상에는 나 하나 밖에 없지 않은가?」 죽음의 문턱에서 한하운은 며칠 동안 궁리한 끝에 「詩를 팔아야겠다」는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된다. 어느 날부터 한하운은 자신이 쓴 <파랑새> <비오는 길> <개구리> 같은 詩를 구걸의 대가로 지불한다. 『명동에서 詩를 파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차츰 퍼지게 되고, 이에 호기심을 느낀 몇몇 시인의 힘으로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癩詩人 한하운 詩抄》라는 제목으로 시 <전라도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외 12편이 한꺼번에 실린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 뿐 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 가는 길······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2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한하운, <전라도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全文, 신천지(1949.4) 이것이 많은 독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어 같은해 5월 그의 시 26편이 실린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정음사에서 나오기에 이른다. 詩 26편이 실린 첫 시집 《한하운 詩抄》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만 한하운은 여기에 실린 시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한하운 詩抄》의 속표지 한하운은 그뒤 경기도 수원시 세유동 나환자 정착촌 하천 부락에서 지내다가, 1950년 3월 경기도 부평에 있는 나환자마을 성혜원으로 이주해 자치회장으로 선임된다. 1952년 5월 부평에 신명보육원, 1953년 경기도 용인에 동진원을 설립한 그는 처지가 같은 이들 틈에서 제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애쓴다. 1953년 8월, 한하운은 느닷없이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한하운 詩抄》에 실린 작품 <데모>의 내용 가운데 「피빛 기빨이 간다」는 표현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1953.8.1일부터 주간지 『신문의신문』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한하운을 『문화빨치산』이라 말한데서 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한하운」이라는 나의 아호(雅號)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詩 내용마저 적색(赤色)이라는 것이며 ······ 또한 혹독하게도 나 자신마저 허구의 인물이라고 날조하며 떠들어댔다. 한하운 <보리피리에 관하여> 김창직 편저, 《가도가도 황톳길》(지문사 1982) 재인용 이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경찰과 검찰에 이어 국회에서까지 문제로 삼는다. 한하운은 서울신문의 취재 요청을 받고 신문사에 찾아가 즉석에서 詩 <보리피리>를 써보임으로써 자신이 「가공의 인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얼마 뒤 문제가 된 詩의 내용도 불온(不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이 난다. 서울신문사 기자 2명이 파면당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고, 서울신문 10월 15일치에 그의 시 <보리피리>가 실린다. 1955년 그는 2번째 시집 《보리피리》를 펴낸다. 이어 《평화신문》에 시 「비창(悲愴)」 등을 발표하고, 같은해 5월부터 《희망》에 자전적 얘기 《나의 슬픈 반생기》 를 연재한다. 1956년에는 詩 48편이 실린 《한하운 詩전집》을 발간하며, 《현대문학》에 수필 「나의 시작수업」을 발표한다. 1958년 청운보육원을 설립한 그는 《신문예》에 수필 <큰코 다친다> <인간에 대한 반항 정신으로> <어느날의 단상(斷想)> 등을 발표한다. 한하운의 2번째 시집 〈보리피리〉 詩 48편이 수록된 〈한하운 詩전집〉 1959년 《한하운 자작시 해설집》을 내놓은지 얼마 안되어 그의 신변에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한다. 「불치」로 알고있던 그의 병이 「음성」으로 판명된 것이다. 한하운은 슬픔으로 얼룩진 세월을 청산하고 정상인으로 사회에 복귀한다. 그는 곧 「한미제약회사」를 창립하고, 1960년에는 서울 명동에 출판사 무하문화사(無河文化社)를 설립한다. 이윽고 해설집 《황토길》을 펴낸 그는 《여원》과 《새벽》에 각각 수필 《첫사랑의 요오델가》 《방랑과 향수》를 내놓는다. 이어 1963년 《여상》에 詩 애염전(愛染箋), 《새빛》에 <세월이여> <오마도>, 1964년 《국회평론》에 詩 포인세치아꽃, 《계간 시문예》에 詩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1965년 수필 <물전쟁>, 1966년 詩 <회심> <금유월>, 1968년 詩 <올봄에도 꽃은 피는데> <장승>과 수필 <나의 소하(銷夏)> 등을 발표하며 문학활동도 멈추지 않는다. 나병이 음성으로 판명된지 10년도 채 안되어 한하운은 「간경화증」이라는 또다른 병마를 만나게 된다. 이런 지독한 불운 속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귀향> <춘일지지> <낙엽> <춘와> <파고다공원> <귀로> <어떤 인생> <자유당> 등의 시를 발표한다. 1973년 그의 사회적 공로를 기리는 뜻으로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시비(詩碑)가 세워진다. 1975.1.28일, 시인 한하운은 「간경화증」이 악화되어 쉰여섯해 동안의 가파른 삶을 마감한다. 1977년 유고시 <백목란꽃> 외 19편이 《한국문학》 6월호에 발표되며, 1982년 김창직 편저 《가도 가도 황톳길》이 지문사에서 나온다. 한하운은 우리 詩史에서 달리 찾아볼 수 없는 문둥이 시인이다. 나병은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차압하는 견디기 힘든 천형(天刑)이다. 罪名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어느 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그에게는 문둥이로 살아야 하는것 자체가 치욕이고, 벌이었다. 어제 발가락이 하나 떨어져 나갔는데, 오늘 또 발가락이 저도 모르는새 없어진다. 어쩌다 차를 타면 발길질을 당하고 강제로 끌어내려진다. 「문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이 모든 굴욕과 수모를 견뎌야 했다. 그래도 삶에 대한 그의 애착이 다하지는 않아 통곡과 피의 언어, 시로 나타난 것이다. 詩가 나의 현실생활에서 밥도 죽도 되지않는 냉수보다도 도움이 되는것이 못되지만 정서 면에서는 詩는 버릴수없는 제2의 생명이다. 이 詩로 사는 길이 전생명을 지배하고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백광(白光) 같은 빛을 마련해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한하운, 《나의 인생 편력》 《보리피리》(지문사, 1987)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0XX6910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