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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花潭里 (도화담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해서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남포군(藍浦郡) 북외면(北外面)의 지역(地域)으로서 도화담(桃花潭)이 있으므로 도화담(桃花潭)이라 불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상암리(上岩里)를 병합하여 도화담리(桃花潭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장시글
도화담(桃花潭) 동(東)쪽에 있는 골짜기를 「 장시굴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한 장수가 큰 고을을 피해서 이 곳에 내려와서 살던 곳이라 「 장수골 」 이라 부르던 골짜기인데, 변해서 「 장시굴 」, 「 장숫골 」 이라고 부른다.
사기점골
도화담(桃花潭) 서(西)쪽에 있는 골짜기를 「 사기점골 」, 「 사기장골 」이라고 부른다. 오랜 이곳까지 바다여서 배가 들어 왔었다 한다. 그때 사기그릇을 한 배싣고 이 곳 사기장에 오던 배가 풍랑(風浪)을 만나 파선(破船)당해서 지금도 사기그릇 조각이 여기 저기 뒹굴고 있는데 옛날에는 사기그릇의 장터였던 마을이 있었다 한다.
장사바위
「 송장바위 」 옆으로 있었던 바위를 「 장가바위 」 라고 불렀다. 바위에 돌을 던져서 돌이 바위 위에 얹어지면 장가를 간다 하여, 장가 못가는 총각들이 돌을 던지곤 했던 바위인데 지금은 길 때문에 없어졌다.
자라바위
「 안골 」 과 도화담(桃花潭) 사이에 있는 바위를 「 자라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 자라바위 」 라고 부른다.
용바위
「 상바위 」 동(東)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용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용처럼 생겼다해서 「 용바위 」 라고 부른다.
송장바위
「 복두머니 」 옆 길가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송장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송장처럼 생겼다해서 「 송장바위 」 라고 부른다.
小金剛山 (소금강산)
도화담(桃花潭) 동북(東北)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 부른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서 강원도(江原道) 금강산(金剛山)과 같다 해서 소금강(小金剛),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 부른다.
상바위
도화담(桃花潭) 동(東)쪽에 있는 마을을 「 상바위 」 라고 부른다. 「 상암 」, 「 상암리 」 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에 큰바위가 있다해서 「 상바위 」 라 부른다.
비끼내약수터
도화담(桃花潭) 서(西)쪽으로 모롱이가 있는데 여기를 「 비끼내모롱이 」 라 부르고 「비끼내모롱이」에 있는 샘을 「 비끼내약수터 」 라고 부른다. 샘물이 매우 찬 약수(藥水)여서 피부병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속병 치료에도 좋은 약수라 한다.
불당골
도화담(桃花潭) 북(北)쪽에 있는 마을을 「 불당골 」 이라고 부른다. 불당곡 「 佛堂谷 」 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불당(佛堂)이 있었다해서 「 불당골 」 이라고 부른다.
북바위
「 북두머니 」 옆 산허리에 있는 바위를「 북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북처럼 생겼다해서 「 북바위 」 라 부르는데, 옛날 남도지방(南道地方)에서 온 원님들이 이 곳을 지나게 될 때는 「 북바위 」 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한다.
북두머니
도화담(桃花潭) 동북(東北)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 북두머니 」 라고 부른다. 옛날에 나라에 큰일이 닥쳤을 때 산을 울리게 하는 북이 감추어져 있어서 나라에 난리가 나기 전에는 으레 이 골짜기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다.
壬辰亂(임신란)때 倭軍(왜군)이 進軍(진군)을 못했을 정도의 협곡인데, 倭軍(왜군)이 巨大(거대)한 아미산을 넘었다는 說(설)이있다.
도화담(桃花潭)
「 불당골 」 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도화담(桃花潭)이라고 부른다. 아미산(峨嵋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인데 성주리(聖住里)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냇물과, 외산면(外山面) 「월명산」에서 흐르는 냇물이 이 곳에 와서 서로 맞닫는 곳에 못이 있고,
그 못 위쪽으로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봄에는 복숭아꽃이 져서 이 못에 흘러 내려오면 그 아름다움이 또한 절경(絶景)있어서,
복숭아꽃으로 얼룩진 못이란 뜻에서 도화담(桃花潭)이라고 못을 불렀는데
그 못이 있는 마을도 못의 지명(地名)따라 도화담(桃花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中國(중국) 사천성의 峨嵋山下(아미산하) 桃花潭(도화담)의 地名(지명)을 引用(인용)한 것 같음
朴孝子門 (박효자문)
「 상바위 」 복판에 정문(旌門)이 있는데 이 정문(旌門)이 박효자(朴孝子)의 정문(旌門)이다.
孝子門 (효자문)
桃花潭(도화담) 로상바위 들에 孝子門(효자문)이 세워져 있는 바 命旌立校(명정입교)에는 孝子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承健之門(효자통훈대부행사헌부장령승건지문)과 孝子處士朴世胄之門(효자처사박세주지문)이라 써 있으며 記錄(기록)에는 孔子通紀續綠(공자통기속록)(三綱編中(삼강편중) 孝編(효편)(卷之三(권지삼))에, 肅宗朝(숙종조))와 英祖朝(영조조)에 記錄(기록)에 있어 孝道(효도)는 雪鯉之孝(설리지효)와 割指進血等出天之大孝(할지진혈등출천지대효)로서 나라에서 孝子門(효자문)을 賜(사)하였다 함(父子(부자)분의 孝子門(효자문))
풍계리 (豊溪里)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남포군(藍浦郡) 주외면(州外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풍년동과 원침리(元沈里)를 병합하여 풍계리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觀音寺 (관음사)
「 백뜸 」 동(東)쪽 산에 절이 있는데 이 절을 관음사(觀音寺)라고 부른다.
권굴
「 풍년골 」 서남(西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권굴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권씨(權氏)가 많이 살았다 해서 「 권골 」 이라고 불렀는데 변해서 「 권굴 」 이라고 부른다.
까투리골
「 풍년골 」 서(西)쪽에 있는 산을 「 까투리봉 」 이라고 부른다. 산이 까투리처럼 생겼다해서 「 까투리봉 」 이라고 부른다.
積屍 (적시) 골
풍계리 東南(동남)쪽에 위치하여 峨嵋山(아미산) 줄기의 한 골짜기인 바 壬辰倭亂(임진왜란)때 피난민이 모여 있었든바 가등청정의 군이 와서 沒殺(몰살)하여 주검이 쌓였다 하여 積屍(적시)굴이라고 부르고 있다.
뒷골
「 풍년골 」 뒤에 있는 골짜기를 「뒷골」 이라고 부른다. 전에 광산이 있었던 골짜기인데 이곳에 굴이 있으면 이 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웅천(熊川)에서 나온다 한다.
말바위
「 검지보 」 안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말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말처럼 생겼다 해서 「 말바위 」 라고 부르는 바위다.
백뜸
「 풍년골 」 東南(동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백뜸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白(백)씨들이 많이 살았다 해서 「 백뜸 」 이라고 부른다.
사기샛골
「 풍년골 」 동(東)쪽에 있는 골짜기를 「 사기샛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 골짜기에서 사기그릇을 구웠다 해서 「 사기잿골 」 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 「 사기샛골 」 이라고 부른다.
完城 (완성)
「 풍년골 」 남(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완성(完城)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고을 원님이 앞 내에서 빠져 죽었다해서 처음은 「 원침 」 이라고 불렀는데 변하여 완성(完城)이라고 부른다 한다.
용둠병
「 집앞뜰 」 에 둠벙이 있는데 이 둠벙을 「 용둠병 」 이라고 부른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해서 「 용둠벙 」 이라고 부르는 둠벙이다.
용바위
「 풍년골 」 북쪽 냇가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용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에 용의 발자국 같은 것이 있다해서 「 용바위 」 라고 부른다.
집앞들
「 풍년골 」 앞에 있는 들을 「 집앞들 」 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것 같고 또한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들이라 「 집앞들 」 이라고 부른다 한다. 「 집앞들 」 에 보가 있는데 여기를 「 집앞들보 」 라고 부른다.
큰골
「 풍년골 」 서북(西北)쪽으로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 큰골 」 이라고 부른다. 큰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해서 「 큰골 」 이라고 부른다.
풍년골
완성(完城)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풍년골 」 이라고 부른다. 풍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마을에 큰 부자(富者)들이 많이 살아서 항시 풍년 든 마을처럼 사시사철 흥청거린다해서 「 풍년골 」 이라고 부른다. 풍년동이라고도 부른다.
龍水里 (용수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改革(개혁)때 龍岩部落(용암부락)과 水絃部落(수현부락), 巨門部落(거문부락)을 統合(통합)하여 龍水里(용수리)라고 불리고 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龍岩部落 (용암부락)
本 部落(본부락)은 龍水里(용수리) 西南端(서남단)에 位置(위치)한 部落(부락)으로 本 部落(본 부락)의 북쪽에 「 용바위 」 라는
큰 바위가 있고, 옛날에 龍(용)이 나와 秉天(병천)하였다는 傳說(전설)이 있고 龍(용)이 나온 동굴이 있어 물이 있었다는 傳說(전설)도 있으며 이 바위 앞 쪽에는 龍巖(용암)이라고 大字(대자)로 陰刻(음각)되여 있다.
이 바위 附近(부근)에 所在(소재)한 部落(부락)이므로 龍岩(용암)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部落(부락)에는 高麗(고려)의 重臣(중신) 益齊(익제) 李齊賢先生(이제현선생)의 影幀(영정)이 모셔진 影宇(영우)가 있는 바,
建立年代(건립연대)는 250年前(년전)에 建立(건립)되여 있으며 影幀(영정)을 그린 畵師(화사)는 咸台喆(함태철)이라고 紀錄(기록)되어 있으며
250年前(년전)에 그린 그림이나 色彩(색체)가 선명하고 변한 곳이 없는 美麗(미려)한 畵法(화법)이었음이 完然(완연)하다.
그때 심어진 「 은행나무 」 한구루가 있는바 둘레가 5m以上(이산)이고 樹高(수고)는 5∼60m되는 樹令(수령) 250年을 자랑하는 巨木(거목)이 있고, 이 나무는 蘭菊齊(난국제) 李禮煥先生(이예환선생)이 심으신 것으로 지금도 수확된 은행을 조금씩 後孫(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어 先生(선생)의 祭需(제수)에 쓰도록 하고 있다.
이 影幀(영정)은 後孫(후손)들이 歲一祭(세일제)로 秋亨祭(추형제)를 八月中丁(팔월중정)에 올리고 있다. 黃斗鉉先生(황두현선생))이 사시던 곳이기도 하다.
水絃部落 (수현부락)
속칭 물줄이라 하는데 본 부락은 龍水里(용수리) 동쪽에 位置(위치)한 部落(부락)으로 이 部落(부락) 後面(후면)이 산으로 둘러있는 故(고)로 전부락에 亘(긍)하여 生水(생수)하므로 部落名(부락명)을 水絃(수현)(물줄)이라 하였음.
巨門部落 (거문부락)
巨門部落(거문부락)은 龍水里(용수리) 東北端(동북단)에 位置(위치)한 部落(부락)으로 뚜렷한 전설은 남은 것이 없고, 本部落(본부락)의 앞산에 門(문)바위라 하여 文支株(문지주) 2個(개)가 우뚝 선 모습같이 보이니 문바위가 큰 문이라는 뜻으로 巨門(거문)이라 하였음.
金剛部落 (금강부락)
本 部落(본부락)은 龍水里(용수리)의 北端(북단)에 位置(위치)한 山谷部落(산곡부락)으로 人家(인가)도 4∼5家口(가구)가 살아온 것으로 現在(현재)도 家口(가구)가 增加(증가)된 일이 없으며, 部落(부락)의 後面(후면) 羊角山(양각산) 하에 金剛庵(금강암)이라는 庵子(암자)가 있으며 百濟末(백제말) 慧沓和尙(혜답화상)이 創建(창건)하고 李朝(이조)리 舞鶴大師(무학대사)가 重修(중수)하였다.
廉 (염) 뜸
本 部落(본부락)은 龍水里(용수리) 東便(동편)에 位置(위치)한 조그마한 部落(부락)으로 會住年代(회주년대)는 未祥(미상)이고 廉氏(염씨)가 入住(입주)하여 元居人(원거인)이 되었고,
現在(현재)도 20餘年帶(여년대)의 波州廉氏(파주염씨)가 居住(거주)하고 있는 바 廉氏(염씨)의 先朝(선조) 梅軒先生(매헌선생)의 影幀(영정)을 모시고 정결한 影宇(영우)를 建立(건립)하여 春秋亨事(춘추형사)를 받들고 있다.
中台寺(중태사)
百濟末(백제말) 慧沓和尙(혜답화상)이 創建(창건)된 것을 朝鮮(조선)때 創建年代(찬건연대)는 未祥(미상)이나 舞鶴大師(무학대사)가 重建(중건)하였으며 佛敎(불교)에 입이 輩出(배출)되었다는 傳說(전설)이 있으며, 近時(근시)에도 이 절에서 勉學徒(면학도)들의 出入(출입)이 잦으며 이 절에서 공부하여 出世(출세)한 분이 많다 한다.
上臺庵 (상대암)
中臺寺(중대사) 위 편에 자리한 암자로서 本來(본래)는 任可馬公(임가마공)의 墓幕(묘막)이었던 바 約(약) 三千年前(삼천년전)에 스님으로부터 庵子(암자)로 改築(개축)하여 現在(현재)있는 庵子(암자)가 되었으며 上臺(상대)라는 名稱(명칭)은 中臺(중대)의 위편이라서 上臺(상대)라 불리운 것 같다. 任學準(임학준)이 高宗皇帝(고종황제)의 影幀(영정)을 모시고 松葉(송엽)만 먹다 自結(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下臺 (하대)
이곳은 中臺寺(중대사) 入口(입구)에 所在(소재)한 물탕 (약수터)으로써 약간의 동굴 형식이 되어 있으며, 이 동굴에는 맑은 물이 사철 마르지 않고 年中(년중) 물을 먹을수 있고 沐浴客(목욕객)이 끊이지 않으며, 부정한 사람은 출입하지 못한다는 傳說(전설)도 있다.
羊角山 (양각산)
龍水里(용수리) 서쪽에 자리한 해발 400m의 산으로서 산모양이 봉우리 2개로 이루어졌는데 봉우리가 두 개라 해서 或者(혹자)는 兩角山(양각산) 또는 염소 뿔모양이라 해서 羊角山(양각산)이라 쓰고 있는데, 이 산은 기암괴석과 가을의 風景(풍경)은 흡사 금강산을 방불케 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龍水里(용수리)를 굽어 지켜보고 있다.
峨嵋山 (아미산)
이 산은 龍水里(용수리)의 東北(동북)쪽에 所在(소재)한 해발 60餘高地(여고지)로써 북은 桃花潭(도화담), 서는 풍계리, 남은 龍水里(용수리), 북쪽은 扶餘郡(부여군) 外山面(외산면)에 接(접)한 산으로써 嵋山面(미산면)이라는 面名(면명)도 이 산에서 이루어졌으며
산이 웅장하다 하여 中原四川岩(중원사천암)의 峨嵋山(아미산)의 名稱(명칭)을 땄고, 북쪽 桃花潭(도화담) 역시 中國(중국)의 峨嵋山(아미산) 下桃花潭(하도화담)을 연상시킨 地名(지명)으로 알고 있다. 이 산에는 옛부터 山蔘(산삼)밭이 있다는 傳說(전설)도 빼놓을 수 없다.
향로봉
羊角山(양각산)과 峨嵋山(아미산)의 中右部(중우부)에 位置(위치)한 뾰족한 산봉으로 향로를 놓은 듯 하다 하여 향로봉이고 羊角山(양각산)은 女神(여신)이고 峨嵋山(아미산)은 男神(남신)이라는 傳說(전설)에서 山祭客(산제객)들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인 것 같다.
平羅里(평라리)
百濟(백제)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高麗(고려)때는 남포현(藍浦縣) 속했다.
조선(朝鮮)시대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에 平章里(평장리) 一部(일부)와 者羅里(자나리)를 병합하여 평라리(平羅里)라 하여
保寧郡(보령군) 嵋山面(미산면)에 編入(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平羅里(평라리)
平章里(평장리)와 자라실을 統合(통합)하여 불리는 部落(부락)으로 本 面(본면)의 中心部(중심부)에 位置(위치)하여 面事務所
(면사무소) 所在地(소재지)이며, 곰재를 境界(경계)하여 珠山面(주산면)을 境界(경계)한 마을임.
平章里(평장리)
平羅里(평라리) 南西(남서)쪽에 位置(위치)한 部落(부락)으로 高麗朝(고려조)에 平章使(평장사)가 出生(출생)하였다는 마을로
平章里(평장리)라 불리우고 있다.
자라실
平羅里(평라리)의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서 本 部落(본 부락)의 산허리에 자라못이라 부르는 못이 있었다 하며 現在(현재)에도
못터가 완연하며 루습지대로 있고 部落(부락)의 地形(지형) 또한 자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現在(현재)는 嵋山中學校
(미산중학교)가 建立(건립)되어 敎育(교육)의 터전이 되고 있다.
삼거리
平羅里(평라리)의 中心部(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部落(부락)인 바 嵋山面(미산면)의 關門道路(관문도노)이며 南北(남북)으로 桃花潭(도화담)∼珠山間(주산간)을 通行(통행)하는 君道(군도)가 있고, 동으로 扶餘(부여), 舒川(서천)가는 道路(도로)가 있어 大路(대로)로 形成(형성)된 三街里(삼가리)이며 面事務所(면사무소), 農協(농협), 郵遞局(우체국) 等(등) 官公署(관공서)가 있으며 釀造場(양조장), 수퍼 等(등) 各種(각종) 商街(상가)로 되어있는 마을이다.
쇠끝모랭이
平羅里(평라리) 中間部(중간부)(자라실과 平章里(평장리)의 境界(경계))에 位置(위치)한 山脈(산맥)의 끝 부분으로 옛 날에 쇠가 났다는(鐵鑛石)설이 있으며, 지금도 약간의 동굴 형식의 쇠를 캔자리가 있음.
三兄弟 (삼형제) 바위
「 웃골 」 동(東)쪽으로 여기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를 三兄弟(삼형제)바 위라고 부른다. 바위 셋이 나란히 서 있는데 한재가 심할 때 기우제(祈雨 祭)를 지냈다는 바위다.
벌뜸
「 평장이 」 서남(西南)쪽 벌판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벌뜸 」 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들 가운데 있다고 해서 「 벌뜸 」 이라고 부른다.
勒田里 (늑전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한 산골이였다. 신라(新羅)때는 소포 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 (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해서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남포군(藍 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으로써 골이 깊고 밭이 많았으므로 「 굴앗 」, 「 구리앗 」 으로 부르다가 변하여 「 동달이 」 또는 늑전(勒田)이 라 불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대늑리(大勒里), 소 늑리(小勒里)를 병합하여 늑전리(勒田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미산면 (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평장(平章) 이재
「 작은늑전 」 북쪽으로 자리한 재(峠)를 「 평장이재 」 라고 부른다. 평라리 (平羅里)의 「 평장이 」 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 소금 장수들이 쉬어가며 짐을 흥정하던 고개라 한다.
퇴미산
「 영월이고개 」 건너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 퇴미산 」 이라고 부른다. 산이 작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이 생겼다 하여「 퇴미산 」 이라고 부른다.
큰늑전
「 영월이고개 」 동북(東北)쪽에 자리한 마을을 「 큰늑전 」 이라고 부른다. 밭이 많은 큰 마을이라 「 큰늑전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천석바위
「 두내바지보 」 위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청석바위 」 라고 부른다. 장수가 디딘 발자국이 있는 바위다. 「 천석바위 」 아래에 있는 보를 「 천석보 」 라고 부른다.
진터
늑전(勒田) 남(南)쪽 「 영월산 」 동(東)쪽에 있는 터를 「 진터 」 라고 부른 다. 옛날에 진(陳)을 쳤던 자리라 「 진터 」 라 부른다.
좁은목
늑전(勒田)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 좁은목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좁은 목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 해서 「 좁은목 」,
「 협항 」 이라고 부른다.
작은늑전
「 옻샘 」 북(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작은늑전 」 이라고 부른 다. 밭이 많은 곳이 작은 마을이라 「 작은늑전 」 이라고 부른다.
양지뜸
「 큰늑전 」 양지뜸 바른 곳에 자리한 마을은 「 양지뜸 」 이라고 부르고, 「 큰늑전 」 음달진 곳에 자리한 마을은 「 음지말 」 이라고 부른다.
윗말
「 작은늑전 」 위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윗말 」 이라고 부른다. 마을 위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 「 윗말 」 이라고 부른다.
웇샘
「 작은늑절 」 남쪽으로 샘이 있는데 이 샘을 「 옻샘 」 이라고 부른다. 물이 몹시 차며 옻 오른데 특효가 있다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샘이다.
영월이고개
「 큰늑전 」 서남(西南)쪽에서 주산면(珠山面) 삼곡리(돌실)로 넘어가는 고개를 「 영월이고개 」 라고 부른다. 「 월티 」 라고도 부르는데 달이 항상 휘 영창하게 걸려 있는 고개라 「 영월이고개 」 라고 부른다.
아랫말
늑전(勒田)마을 아랫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아랫말 」 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아랫쪽에 자리해 있다해서 「 아랫말 」 이라고 부른다.
솥점터
「 사당굴 」 에 「 숱점터 」 라는 장소가 있다. 여기는 옛날에 솥점이 있었다 해서 「 솥점터 」 라고 부른다.
서낭당
「 영월이고개 」 아래에 당(堂)이 있는데, 이곳에 산제(山祭)를 지내는 성왕 당(城徨堂)이 있다.
산정모랭이
「 큰늑전 」 서남쪽으로 모롱이가 있는데 여기를 「 산전모랭이 」 라고 부른다. 산아래 모롱이가 있다 해서 「 산전모랭이 」 라고 부른다.
붉은바위
「 독쟁이 」 북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붉은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 빛깔이 검다해서「 붉은바위 」 라고 부른다.
복개봉
「 큰늑전 」 남(南)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복개봉 」 이라고 부른다. 산 모양이 뚜껑처럼 생겼다 해서 「 복개봉 」 이라고
부른다.
두내바지보
「 좁은목 」 에 보가 있는데 이 보를 「 두내바지보 」 라고 부른다. 늑전리와 내평리의 두 내가 합한 곳에 보가 있다해서
「 두내바지보 」 라고 부른다.
감투바위
「 늑전 」 동남(東南)쪽 동달산 아래에 있는 바위를 「 감투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감투처럼 생겼다 해서 「 감투바위 」
라고 부른다.
각시바위
「 작은늑전 」 동(東)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각시바위 」 라고 부른다. 각시가 원상을 입고 앉아 있는 모양같다 해서 「 각시바위 」 라고 부른다.
都興里 (도흥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 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 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심 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상도리(上都里), 하도리(下都里), 영흥리(永興里)와 홍산군(鴻山郡) 상서면 (上西面)의 자명리(自鳴里)를 병합하여 상도(上都)와 영흥(永興)의 이름을 따서 도흥리(都興里)라 하여 부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절터
「 백제고개 」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 절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 절이 있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는데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 「 절터 」 라고 부른다.
재명
「 도장골 」 동(東)쪽에 있는 마을을 「 재명」 이라고 부른다. 아홉사리고개 아래에 자리한 마을인데 「 자명 」 자명리(自明里)라고도 부른다
아홉사리고개
자명리(自明里) 동(東)쪽에서 부여(扶餘)로 넘어 가는 고개를 「 아홉사리고개 」 라고 부른다. 고개가 높고 험하며 아홉사리로 되어있다 해서 「 아홉사리고개 」 라고 부른다.
백제고개
영흥(永興)에서 부여군(扶餘郡) 외산면(外山面)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 백제고개 」 라고 부른다. 백제(百濟)때에도 사람이 지나다녔다는 고개라 하는데, 사비(泗泌)로 가는 길에 자리한 고개라 「 백제고개 」 라 부른다.
마당바위
영흥(永興)에 마당처럼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마당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마당처럼 크다해서 「 마당바위 」 라고 부른다.
도장골
자명리(自明里) 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도장골 」 이라고 부른다. 「 여흥 」 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래 오래 흥하는 마을이라고 「 영흥 」 이라 부르다가 변해서 「 여흥 」 이라고도 부른다.
永興 (영흥)
「 아래도장골 」 북서쪽으로 자리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영흥(永興)이라고 부른다. 「 여흥 」 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래 오래 흥하는 마을이라고 「 영흥 」 이라 부르다가 변해서 「 여흥 」 이라고도 부른다.
鳳城里 (봉성리)
백제(百濟)때에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새재고개」가 있으므로 「새재」또는 조령(鳥嶺)이라 부르고 또한 조티(鳥峠)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상조리(上鳥里), 하조리(下鳥里), 중조리(中鳥里)를 병합하여 봉성리(鳳城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새재
봉성리(鳳城里) 동(東)쪽에서 부여군(扶餘郡) 옥산면(玉山面)으로 넘어 가 는 고개를 「 새재 」 라고 부른다. 고개의 형국(形局)이 새처럼 생겼다 해서 「 새재 」 라고 부르고 산이 깊어서 많은 종류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개다. 「 새재고개 」 아래에 「새재」라는 마을이 있는데 고개 지명 (地名)을 따라서 그리 부른다.
또한 「 새재 」 위쪽에 자리한 마을은 「 위 새재 」, 「 새재 」 가운데에 자리한 마을은 중조(中鳥) 또는 「 중새재 」, 「 새재 」, 아래에 자리한 마을은 하조(下鳥), 「 아래새재 」 라고 부른다.
방아보
하조(下鳥) 서(西)쪽으로 보가 있는데 여기를 「 방아보 」 라고 부른다. 옛날에 물방아간이 있었던 보라 「 방아보 」 라 부른다.
정바위
봉성리(鳳城里)에 옛날에는 큰 냇물이 흘렀었다. 어느 해에 가뭄이 들어 비가 안와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농악(農樂)을 하던 한 농부가 징 을 치다가 물속에 징을 빠뜨렸다 한다.
그 후 징을 찾지를 못했는데, 그 징을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모래사장에서 주어서 가져 왔다는데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모래사장에서 주어서 가져 왔다는데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과 통하는 물줄기가 바위아래에 있다고 한다. 징을 잃어버린 바위라 「 정바위 」 라 부른다 한다.
玉峴里(옥현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 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 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 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상내리(上內里), 금당리(金塘里)를 병합하여 옥녀봉(玉女峯)과 장현(場峴)의 이름을 따서 옥현리(玉峴里)라 하여, 보령 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장고개
「 서당골 」 동(東)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 장고개 」 라고 부른다. 장현(場峴)이라고도 부르는데 부여군(扶餘郡) 홍산장(鴻山場)으로 통 하는 고개다. 마을 사람들이 장보러 갈 때 홍산장(鴻山場)으로 통하는 고개다. 마을 사람들의 장보러 갈 때 홍산장(鴻山場)으로 통하는 고개이므로 「 장고개 」 라고 부른다.
위안골
「 안골 」 위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위안골 」 이라고 부른다. 「 안골 」 위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 위안골 」 이라고 부르며 「 아래안골 」 은현리(隱峴里)에 있다.
안골
「 서당골 」 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안골 」 이라고 부른다. 마을안쪽으로 아늑하게 자리한 마을이라 「 안골 」 이라고 부른다.
서당골
「 안골 」 남쪽에 자리한 마을을 「 서당골 」 이라고 부른다. 고청(孤靑), 서기 (徐起)가 가르치던 서당(書堂)이 있었던 마을이다. 옥현리(玉峴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쇠개울과 못도 있었다 한다. 「 금당리 」 라고도 부른다.
샛갈
옥현리(玉峴里)에 있는 마을이다. 풀(새)가 많았다 해서 「 새갈 」 이라 부 르던 것이 변해서 「 샛갈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나무재
옥현리(玉峴里)에서 부여군(扶餘郡) 옥산면(玉山面)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 나무재 」 라고 부른다. 나무가 많은 고개라 「 나무재 」 라고 부른다.
隱峴里 (은현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 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 했었다. 조선(朝鮮)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 鮮末葉)에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으로써 「은고개」 아래가 되므로 「은고개」또는 은현(隱峴) 이라 하 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하내리 (下內里), 모항리(茅項里) 중조리(中鳥里) 一部(일부)를 병합, 은현리 (隱峴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뜸부기
「 은고개 」 에서 내평리(內坪里)로 넘어 가는 고개를 「 뜸부기 재 」 라 부르고 「뜸부기재」아래에 마을을 「 띄목이 」, 모항(茅 項), 모항리(茅項里)라고 부른다.
아래안골
옥현리(玉峴里) 「 안골 」 의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을 「 아래안 」 라고 부른다. 「 안골 」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 아래안골 」 이라고 부른다.
山祭堂 (산제당)
「 뜸부기 」 마을 앞에 당(堂)이 있는데 여기가 칠성당(七星堂)이 라고 부르는 산제당(山祭堂)이다.
느티나무
은현리에 있는 느티나무는 옛날 딸을 가진 한 가난한 농부(農 夫)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선비가 못되고 농부가 된 것을 슬퍼하다가 죽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 잃은 것을 슬퍼하 다가 죽었다 한다. 부모를 잃은 딸은 미인(美人)이었는데 세상 사(世上事)가 싫어서 산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한다. 산속에서 살다가 문득 느티나무를 하나 발견하고 자기가 살던 마을에 내 려와서 심은 것이라 한다. 수령(樹令)이 300여년(餘年)되는 느티나무다.
內坪里 (내평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한 산골이었다. 신라(新羅) 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 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구역 (區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내기리(內 基里)와 평촌(坪村)을 병합하여 내기리(內基里)와 평촌(坪村)의 이름을 따서 內坪里(내평리)라 하고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황생굴
「 안터 」 동쪽으로 큰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 황생굴 」 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에 큰 샘이 있어 왕생굴이라 부르던 것 이 변하여 「 황생굴 」 이라 부른다. 또한 황새가 마시는 우물이라「 황새물 」 이 있는 골짜기라 「 황생굴 」 이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장구매미
「 안터 」 서남(西南)쪽으로 논이 있는데 이 논을 「 장구매미 」 라고 부른다. 논이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 장구매미 」 라고 부른다.
웇샘
「 웃골 」 마을 중심지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이 약수(藥水)가 나온다는 옻샘이다. 옻 오른데 좋은 약수라 바로 고칠 수 있으며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해서 「 옻샘 」 이라고 부른다.
역적골
「 안터 」 동쪽에 자리한 골짜기를 「 역적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역적모의를 하다가 실패한 사람이 몸을 숨기고 살든 골짜기가 「 역적골 」 이라고 부른다.
안터
「 장구매미 」 동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안터 」 라고 부른다. 「 내기 」,「 내기리 」 라고 부르는데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 안터 」 라고 부른다.
수랑들
「 안터 」 앞으로 펼쳐진 들을 「 수랑들 」 이라고 부른다. 수렁이 있는 들이라 「 수렁들 」 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 수랑들 」 이라고 부른다 한다.
사당골
「 안터 」 동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가 「 사당골 」 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 사당골 」 뒤에 또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는 「 사당골재 」 라고 부르며 옛날에 사당(祠堂)아 있는 골짜기다.
부엉바위
「 사양산 」 에 큰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 부엉바위 」 라는 바 위다. 옛날부터 부엉이가 사는 바위라 「 부엉바위 」 라고 부른다.
방아보
「 장구배미 」 들에 물을 대는 보를 「 방아보 」 라고 부른다. 전에 물방아간이 있었고, 보에서 흐르는 물로 물방아를 돌렸었다 한다.
띄목이재
「 안터 」 동북(東北)쪽에 자리한 재(峠)를 「 띄목이 」 라고 부른 다. 「 은현리 」 의 「 뜸부기 」 마을로 넘어가는 재(峠)다.
들말
「 안터 」 서남(西南)쪽으로 들에 있는 마을을「 들말 」 이라고 부른다. 「 안터 」 와 연하여 있는 마을인데 들에 마을이 있다해서 「 들말 」 이라고 부른다.
동말
동달산(東達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을 「 동달 」 이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던 동달산(東達山)에서
미산(嵋山)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다. 또한 마을 앞에 펼쳐진 들을 「 동달들 」 이라고 부른다.
達山 (달산)
「 안터 」 서(西)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다. 동달산(東達山)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달산(達山)이라고 부른다.
꿩바위
「 안터 」 북쪽으로 사양산에 있는 바위다. 바위 모양이 꿩처럼 생겼다 해서「 꿩바위 」 라고 부른다.
구석뜸
「 안터 」 남쪽으로 한 구석진 곳에 자리한 마을은「 구석뜸 」 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구석진 곳에 자리해 있다해서「 구석뜸 」 이라고 부른다.
웃골
「 안터 」위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 웃골 」 이라고 부른다. 「 안터 」위쪽에 골짜기가 있다해서 「 웃골 」 이라고 부른다.
三溪里 (삼계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 (朝鮮末葉)에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으 로서, 두 시내가 합하여 세 내를 이루었으므로 삼계(三溪)또는 쌍계(雙溪)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소삼리(小三里), 동산리(東山里), 판수리(判水里)를 병합하여 삼계리(三溪里) 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 (編入)되었다.
`19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판숫골고개
「 판숫골 」 서쪽으로 주산면(珠山面) 금안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 판숫골고개 」 라고 부른다. 옛날 「 판숫골 」 에 살던 도령(道 令) 한 사람이 벼슬하기 위해 넘어 다닌 고개라 해서 「 판숫골 」 고개라고 부른다.
판 숫 골
소삼(小三) 서북(西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판숫골 」 이라고 부른다. 「 판서곡 」 이라고 부르는데 조선(朝鮮)때에 판서(判書)가 나온 마을이라 판서곡(判書谷), 「 판서골 」 이라고 부른다.
大三(대삼)
삼계삼계리(三溪里)의 큰 마을이라 대삼(大三), 대삼리(大三里), 큰쌍계(雙溪)라고 부른다.
큰뫼
「 은새뜸 」북쪽에 자리한 산을 「 큰뫼 」라고 부른다. 산 봉우 리가 시루처럼 생겼다 해서 「 큰뫼 」 라고 부르며, 「 전뫼 」라고도 부른다.
절굴
소삼(小三) 서남(西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절굴」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그때 「 절골 」 이라고 불렀는데 변해서 「 절굴 」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재뜸
소삼(小三)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재뜸 」이라고 부른다. 고개아래 있다해서 「 재뜸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장수발작
「 자경이 」에 자리한 바위를 「 장수발작 」이라고 부른다. 장수가 옛날에 이 근처에서 살았는데 바위에 놀 때 남긴 발자국 이 있는 바위라 하여「 장수발작 」이라고 부른다.
小三 (소삼)
쌍계(雙鷄)의 위쪽으로 마을이있는데 이 마을을 소삼(小三), 소삼리(小三里) 「 작은쌍계 」 라고 부른다. 삼계리(三溪里)의 작 은 마을이다.
은새뜸
「 동산절 」 서남(西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은새뜸 」 이라고 부른다. 사이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안마실
「 동산절 」안쪽으로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 「 안마실 」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한가하고 풍류(風流)를 즐기는 마을이라 「 안마실 」 이라고 부른다.
안뜸
동산리(東山里) 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안뜸 」이라고 부른다. 마을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안뜸 」이라고 부른다.
아래뜸
쌍계(雙鷄) 아래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아래뜸 」이 라고 부른다. 마을아래에 마을이 생겼다해서 「 아래뜸 」이라고 부른다.
쇠
「 동산절 」 서(西)쪽에 자리한 마을을 「 쇠재 」라고 부른다. 재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쇠재 」 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쇠고리
「 은새뜸 」서(西)쪽에 산(山)이 있는데 이 산을 「 쇠꼬리 」라고 부른다. 산(山)이 길게 뻗쳐 있어서 마치 소의 꼬리처럼 생겼다 해서 「 쇠꼬리 」라고 부르는 산이다.
벼락바위
「 생젓골 」북(北)쪽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벼락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옛날에 벼락에 맞아서 한쪽이 떨어져 나간 바위다.
방앗들
삼계리(三溪里) 중앙(中央)에 있는돌을 「 방앗들 」이라고 부른. 옛날에 물방아가 있던 들이라 「 방앗들 」 이라고 부르는 들이다.
동산절
「 안뜸 」바깥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동산절」 이라고 부른다. 삼계리(三溪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옛날 한중이 지 나다가 여기가 명당자리라고 절을 지었는데 그절이 동산사(東 山寺)였다 하나, 지금은 절이 없어졌다. 동산(東山), 동산리(東 山里)라고도 부른다.
독뫼
「 안뜸 」 동남(東南)쪽에서 외따로 있는 산(山)을 「 독뫼 」 라고 부른다. 돌이 많은 산이라 「 돌뫼 」 라고 불렀는데 변해서 「 독뫼 」 라 부른는 산이다.
농망태
소삼(小三) 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농망태 」 라고 부른다. 옛날의 녹막터가 있다해서 「 농망태 」,「 녹막터 」 라고 부른다.
강산재
「 동산절 」 에서 부여군(扶餘郡)「 서저 」 로 넘어가는 재(峠)를 「 강산재 」 라고 부른다. 옛날에 선인(仙人)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던 재(峠)라 「 강산재 」 라고 부른다.
大農里 (대농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 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 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 (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대삼리(大三里)와 농 소리(農所里)를 병합하여 대농리(大農里)라 해서 미산면(嵋山面) 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황새나루쟁이
「 못골 」뒤쪽에 있는 등성이를「 황새나루쟁이 」라고 부른다. 등성이 모양이 황새의 등처럼 생겼다해서「 황새나루쟁이 」라고
부른다.
靑龍 (청룡) 골
대농리(大農里) 서쪽에 있는 마을을「 靑龍골 」이라고 부른다. 청룡곡(靑龍谷),「청역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청룡(靑 龍)이 살았던 곳에 마을이 생긴다 하여 청룡(靑龍)골이라고 부른다.
참나무보
「 못골 」앞에 있는 보를「 참나무보 」 라고 부른다. 옛날에 보 근처에 참나무가 있었다 해서「 참내무보 」 라고 부른다.
정주나무
「 못골 」동북쪽으로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 정주나무」 라고 부른다. 나무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며 높이가 20餘(여)m
되는 나무로 수령(樹令)이 200여년(餘年)된다.
절골
「 청룡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절골 」이라고 부른다. 옛날 절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절터가 남아있다. 절이 있던 골짜기라「 절골 」이라고 부른다.
여숫골
「 뒷골 」옆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여숫골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 골짜기엔 여우가 많았다 해서「 여숫골 」이라고 부른다.
三巨里 (삼거리)
농소(農所) 동(東)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삼거리(三巨里)라고 부른다. 마을에 세 갈래의 길이 있다해서 삼거리(三巨 里)라고 부른다.
山祭堂 (산제당)
「 못골 」뒷산에 산제당(山祭堂)있다. 천신(天神)과 산신(山神)을 지내는 산제당(山祭堂)이다.
산꼬드리
「 못골 」 과 「 남심리 」 사이에 있는 모롱이를 「 산꼬드리 」 라고 부른다. 산 끝에 모롱이를 사이에 두고 자리해 있다해서 「 산꼬드리 」 라고 부른다.
방맹이
삼거리(三巨里) 동(東)쪽에 자리한 산(山)을 「 방맹이 」 라고 부 른다. 산(山)이 방망이처럼 생겼다해서 「 방맹이 」 라고 부른다. 산앞에 펼쳐진 들은「 방맹이들 」 이라고 부른다.
못골
농소(農所) 남(南)쪽에 자리한 마을을「 못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마을에 못이 있었다 해서「 못골 」 이라고 부른다.
마살뫼
「 당골 」북쪽에 자리한 산(山)을 「 마살뫼 」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공동 묘지처럼 묘가 많았던 산(山)이다.
뒷골
「 청룡(靑龍)골 」뒷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뒷골」이라고 부른다. 마을 뒤쪽으로 골짜기가 있다해서「 뒷골 」 이라고 부른다.
당골
농소(農所)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당골 」 이 라고 부른다. 옛날에 산제당(山祭堂)이 있었던 마을이라 「 당골 」,
「 당곡 」 이라고 부른다.
農所 (농소)
삼거리(三巨里) 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농소 (農所)라고 부르며 대농리(大農里)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조선(朝鮮)때 농소(農所)가 있었다 하여 농소(農所), 농소리(農所里) 라고 부른다.
검은바위
「 못골 」 서남(西南)쪽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검은바위 」라고 부른다. 바위빛이 검다해서 검은바위라고 부른다.
갑부터
「 못골 」 동(東)쪽에 있는 터를「 갑부터 」 라고 부른다. 옛날에 큰 부자(부자)가 살던 곳이라 「 갑부터 」 라고 부르는 터다.
豊山里 (풍산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 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 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 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신모리(新茅里), 신풍 리(新豊里) 일부를 병합하여 풍산리(豊山里)라 해서 미산면(嵋山 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참샘골
「 주정리 」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찬샛골 」이 라고 부른다. 마을중앙에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해서
「 찬샘골 」,「 찬샛골 」, 선천(仙泉)이라고 부른다.
은굴
「주정이」 동북(東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은 굴」이라고 부른다. 또한「은굴」서쪽에 있는 모롱이를「은굴 모랭이」라고 부른다.
엿마지깃들
「 안주렁이 」북쪽에 자리한 들을「 엿마지깃들 」 이라고 부른다. 들에 엿마지기의 논이 있다해서「 엿마지깃들 」 이라고 부른다.
방망이재
「 주정이 」 서(西)쪽으로 자리한 재(峠)를 방망이재라고 부른다. 옛날 만석(萬石) 부자(富者)인 박씨(朴氏)한사람이 살았는데 그 후 망한 마을이라「 박망이재 」 라 부르다가 변해서「 방망이재 」 라고 부른다.
방구바위
「 주정이 」 동(東)쪽 들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방구바위」 라고 부른다. 두드리면 쇠소리가 나는 바위다.
밧주정이
「 주정이 」 바깥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밧주정이 」 라고 부른다. 마을이「 주정이 」 마을 바깥쪽에 자리해 있다해서 「 밭주정이 」 라고 부른다.
동편 (東便)
「 주정이 」마을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동편(東 便)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주정이 」 마을 동쪽에 자리해 있다해 서 동편이라 부른다.
갓골
「 주정이 」마을 서쪽으로 가에 있는 마을을「 갓골 」이라고 부른다. 큰 마을가에 있다해서 「 갓골 」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南深里 (남심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 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 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 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심전면(深田面)의 지역(地域)으로 서, 장태산(將胎山)속이 되어 골이 깊으므로「깊은골」또는 심 동(深洞)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발악리(發惡里), 태봉리(胎峯里), 신풍리(新豊里) 一部(일부)를 병 합하여 남심리(南深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미산면이 되었다.
갈현 (葛峴)
「 깊은골 」남동(南東)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갈현(葛 峴)또는「 가루고개 라고 부른다. 서천군(舒川郡) 판교면(板橋 面) 마대리(馬垈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에 갈밭이 우거졌다 해서 「 葛峴(갈현) 」, 「 갈고개 」 라 부르다가 갈현(葛峴)「 가루고개 」 라 부르며 고개에 성황당(城徨堂)이 자리해 있다해서「 서낭당 」 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갈현(葛峴)마을 아래로 마을이 있는 데 이 마을도 고개 지명(地名)따라 「 갈현 」,「 가루고개 」 라고 부른다.
가잣골
심동(深洞) 남쪽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가잣골 」 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의 마을이 갓쪽으로 자리해 있다해서 「 가잣골 」 이라고 부른다.
거 문 바 위
「 태봉 」 동(東)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검은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검게 생기고 큰 바위라 해서「 검은바위 」 라 부른다.
관모바위
「 말바위 」안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관모바위 」라고 부른다. 바위가 관모처럼 생겼다해서「 관모바위 」 라고 부른다.
도채박골
심동(深洞) 동(東)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도채박골 」이라고 부른다. 바위가 있는 골짜기라「 도채박골 」 이라고 부른다.
馬場山 (마장산)
음지(陰地)뜸 동남(東南)쪽으로 자리한 산(山)을 마장산(馬場山) 이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에 말을 먹이던 산이라 마장산(馬場山)이라고 부른다.
말바위
심동(深洞) 뒷산 중턱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말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꼭 말처럼 생긴 바위라「 말바위 」 라고 부른다.
바랑메
심동(深洞)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바랑매 」 라고 부른다. 또한「발악네」,「발악매」라고도 부르는데 지형(地 形)이 중의 바랑처럼 생겼다 해서「 바랑매 」 라고 부른다.
방아다리
심동(深洞)앞에 펼쳐진 들을「방아다리」라고 부른다. 들의 지형(地形)이 방아다리처럼 생겼다해서「방아다리」라고 부르는 들 이다.
방패바위
심동(深洞) 남동(南東)쪽「 장대봉 」 서북(西北)쪽에 자리한 바위 를 「 방패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군사들이 지니고 다니는 방패처럼 생겼다 해서「 방패바위 」 라고 부른다.
將 臺 峯(장대봉)
옛날에 장수 한 사람이 살면서 무술(武術)을 닦았던 산(山)이다 .
갯가에 쳐들어 오는 오랑캐들은 50年間 막았다는 장수가 홀 로 산에서 살았다 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한 장수였으나 마을엔 내려오지 않고 산에서 칡뿌리를 소금에 담그고 반찬을 했으며 조(粟)밥으로 일생을 삼았다 한다.
오랑캐들이 쳐들어 오면 산아래 마을 사람들이 불을 놓고 그 불을 본 장수는 산봉 (山峯)에서 불을 놓고 연기로 대답하였다 한다. 장수가 불을 놓 고 연기가 나면 그길로 오랑캐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갔다 한 다. 장수가 연기를 피우던 곳을 장대(將臺)라고 부른다.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과 주산면(珠山面)과 舒川郡(서천군) 판교면(板橋面)에 걸쳐있는 산(山)으로 산 높이가 320m나 되는 산(山)이다.
배나무골
심동(深洞) 서쪽에 자리한 골짜기를「 배나무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배나무가 있던 마을이라「 배나무골 」 이라고 부르며 이 곡(梨谷)이라고도 부른다.
배암골
음지(陰地)뜸 남쪽에 자리한 골짜기를「 배암골 」 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에 뱀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해서「 배암골 」,「 뱀박골 」 이라고 부른다.
절텃골
남심리(南深里)에「 절텃골 」 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 부처박골 」이라고도 부르는데 절터와 부처가 있는 골짜기라「 절텃골 」,「 부처박골 」이라고 부른다.
불목쟁이
「 텃말 」남쪽에 있는 모롱이를「 불목쟁이 」라고 부른다. 서천군(舒川郡) 판교면(板橋面) 판교(板橋)장으로 가는 길 모롱이를 「 불목쟁이 」라고 부른다.
양지뜸
심동(深洞)양지 쪽에 자리한 마을을「 양지뜸 」 이라고 부르고 심동(深洞)음지쪽에 자리한 마을은「 음지뜸 」이라고 부른다.
옻샘
「 차독배기 」가운데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을「 옻샘 」 이라고 부른다. 샘 물이 옻오른데 특효가 있다해서「 옻샘 」 이라고 부른다.
장생이
심동(深洞)東쪽으로 옛날의 장터자리가 있다. 조선(朝鮮)때에 이곳에 장이 섰었는데 그 터를「 장생이 」라고 부른다.
장수바위
심동(深洞) 남쪽으로 장대봉(將臺峯) 동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장수바위 」 라고 부른다. 옛날에 장수가 살았던 바위라「 장수바위 」 라고 부른다.
질마재
「 바랑매 」 서(西)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 질마재 」라고 부른다. 「 농마바위 」 남(南)쪽에 자리한 고개로서 지형(地 形)이 길마처럼 생겼다 해서 「 길마바위 」 라고 부르다 변해서 「 질마바위 」 라 부른다.
농마바위산
미산면(嵋山面) 남심리(南深里)와 주산면(珠山面) 금암리(金岩 里) 경계(境界)에 있는 산(山)을「 농마바위 」 산이라고 부른다. 「 농암산 」,「 농마암산 」 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높이가 320m되 는 산으로써 농처럼 생긴 「 농마바위 」 가 있다 해서「 농마바위 산 」 이라고 부른다.
차독배기
심동(深洞) 동쪽에 있는 밭을「 차독배기 」라고 부른다. 밭 가운데 차돌이 박혀있다해서「 차독배기 」라고 부르는 밭이다.
칼바위
심동(深洞) 南西(남서)쪽 장대봉(將臺峯)아래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칼바위 」 라고 부른다. 바위가 칼처럼 생겼다 해서「 칼바위 」 라고 부른다.
胎峯 (태봉)
장대봉(將臺峯) 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태봉(胎峯)이 라고 부른다. 옛날 태(胎)를 묻었다는 산 아래에 마을이 있다해서 태봉(胎峯)이라고 부른다.
텃말
심동(深洞)東北(동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텃말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큰 마을이었다해서 이 고장에 터를 크게 잡았던 마을이라「 텃말 」 이라고 부른다.
홀애비쪽부리
「 텃말 」 동쪽에 있는 모롱이를 홀애비쪽부리라고 부른다. 옛날 에 이곳엔 사람이 살기만하면 아내가 죽어 나갔다 한다.
그래 서 자연 홀애비들만 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호랑이쪽부리 」 라고도 부르는데 호랑이가 살고 있으며, 여자들만 해치는 모롱 이라「 호랑이쪽부리 」 라고도 부른다. 신랑(新郞) 신부(新婦)가 지날 때 가장 주의 하라는 모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