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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과 갈등의 시작]
제 1 장 갈등의 시작
제 1 절 개 요
아니 미군이 주둔하면 친미주의로 사대이고, 중국이나 소련의 비호아래 굽신거리는 북한은 민족주의란 말인가. 그 당시도 북한의 독재주의자들은 소련군의 철수를 빌미로 미군 철수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하지만 뒤로는 스탈린이나 모택동을 찾아가 공산주의의 최종 목표라는 전세계의 공산화를 위한 전단계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위해 없는 탱크와 비행기, 나아가 중공군에 소속되었던 조선족 출신 병력을 끌어들여 무장과 훈련을 실시하고 무력 남침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지금 세계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부터 아프카니스탄, 서아시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강경 민족주의자들과 전쟁 등 분쟁의 불씨는 계속번지고 있는 격변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버어마와 리비아등에서 번지는 극렬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민중의 대변인이란 이름으로 억압과 착취를 이어가고, 중국의 군비 확충과 동지나해로 이어서 태평양으로 그 힘이 뻗어 나고 있고 , 북한군은 이미 핵무기 개발을 완료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누구는 전쟁은 막아야 된다며 굴욕적인 저자세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한다. 무엇을 들어줘야 그들이 전쟁을 포기할까? 이런 질문에 경제 지원도 해주고, 핵무기 개발이나 그것을 실어 나르는 핵잠수함 또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묵인하고 도와주면은 그것이 다 결국 우리 것 아니냐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렇게만 되면 굳이 우리가 반대할 명분이 약할 수도 있다. 이것이 민족 자존심을 키우고 온 국민이 평화속에서 잘 먹고 잘 산다면 왜 싫어하겠는가!
1. "전쟁이 발발 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생에 첫 전투를 겪었다"
[제1사단 제13연대 제1대대 제12중대 기관포 사수 황대형의 증언, 작고]
"오늘은 전 중대 1/2 병력을 휴가 또는 외박을보낼 것이니 신청하라,는 지시가 하달 되었다. 우리가 며칠 동안 전방의 긴장돤 상황을 열심히 보고한 결과에 대한 응답인 셈이었다. 그때는 그려려니 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뭔가 이상핟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양에서 올라온 나는 갈 곳도 없고 해서 남에게 휴가는 양보하고 소대장 고인식 소위와 남아 있는 소대원들이 임진강가에 내려가 고기를 잡기로 했다. 저녁 때 중대로 복귀하여 내일 아침은 매운탕으로 회식을 하기로 했다. 대대에서 체육대회가 계획되어 있었다.(중략)
초소에서 중대본부로 내려와 기다리는 일요일 아침은 매운탕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일요일 아침은 이제 늦잠을 잘 수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새벽부터 정적을 깨며 포성이 울리고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잠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정도 포격은 그 전에도 여러 차례 격었던지라 단순한 위협사격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지날까,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가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을 하달 했다. '비상, 비상, 전 병력은 전투준비를 갖추고 진지로 투입하라!' 눈을 뜨고 보니 속옷차림의 박형수 중위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나는 얼떨결에 일어나 분대장 한시원 이등중사를 흔들어 깨웠다. 그와 함께 총열, 몸통, 삼각대로 분해되어 있는 CAL50 기관포와 탄통 3개를 부사수 및 탄약수와 들고 진지로 향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가 산등성이를 30여 분 달려 도착한 진지는 적이 점령하고 있었다. 소대장도 없다. 전날 밤 중대 간부들 회식에 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랑포 위 능선에 올라가 기관포를 설치하고 탄약을 장전했다. 임진강 수심이 얕은 곳으로 북한군이 도하하고 있다. 그들과의 거리는 200m, 아무 생각없이 그들을 조준하여 방아쇨 당겼다. 드르륵하는 굉음과 함께 실탄이 발사되고 적들이 넘어지고 흩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쏜 기관포에 적군이 쓰러졌다."
위 증언에서 무엇을 알 수가 있는가, 전쟁은 이미 벌어졌다. 당시에 사회적 분위기가 북의 공산당 세포들이 군내부까지 침투하여 적의 평화공세에 휘들리고, 세포조직들이 정상적인 방어 활동을 못하게 병력을 휴가 보내 환심을 사고, 엉뚱한 장비(차량, 소총)를 정비를 이유로 전방에서 사단 정비대대로 빼내는 등의 웃기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냥 지나갔다. 군의 가장 높은 참모총장부터 모두가 토요일 밤에 술에 취하여 허우적거렸다.
따라서 혹시나 작금의 현상,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하고 개성의 우리 건물을 폭파하고, 금강산의 우리 자산을 몰수하여 처분해도 별다른 반응없이 지나치는 모습이 정상인지 모르겠다. 그 당시도 북한 유격군이 10여차례 침투하고 38도선 상에서 침투공격을 훈련이라 안심을 주며 경계심을 무너뜨린 후 전쟁이 터졌다.
2. 전쟁 발발의 책임규명, 그 재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니 그 전쟁의 원인과 전쟁발발 책임을 규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핵심이다. 하지만 그 고도의 내용을 다 언급하기에는 내 스스로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다만 그 동안 20여 년을 유해 발굴을 위해 전사 연구와 현장 탐사 및 탐문을 하여 발굴지역을 결정했던 장본인으로써 현장에 남겨진 지역 주민의 제보와 관련된 참전용사님의 증언을 한 곳에 기록하여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따라서 전쟁 1,129일의 피비린내 나는 경과를 4단계로 구분하여, 제1단계는 전쟁전야로부터 낙동강선까지 후퇴과정을, 제2단계는 반격에서 북진작전까지를, 제3단계는 중공군 개입에 따른 다시 한강선 이남으로 후퇴, 제4단계는 재반격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주 전투지역에서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그 곳에 관련된 참전용사님의 증언과 지역주민들의 제보를 남기고자 한다.
또한 관련된 참고자료, 즉 중공의 항미 원조사, 중공군 부사령관이었던 홍학지의 회고록,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에프의 보고서, 일본에서 발행된 한국전쟁 10권, 몇 몇 참전 용사님이 남긴 회고록 등을 기초로 내용을 붙였다.
여기서 전사에 나오는 지역의 유해 발굴 결과, 탐사자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 규명 범국민 위원회에서 발행한 민간인 희생 관련 내용도 일부 수록하여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아무쪼록 지역별 전사의 생생한 내용과 관련 사료의 기록 내용, 피해 정도를 알아봄으로써 전쟁의 참혹성을 과감하게 들어내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기를 기대해 본다
제 2 절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기 이전에 38도선 주변에서는 도발이 계속 되었다. 북한군은 1947년 7월에 38경비대를 편성한 후 소련군과 교대하여 38도선 경비를 인수하여 유리한 거점을 선점하게 된다. 반면 대한민국은 최초 미군의 군정으로 경비경찰이 주 임무를 수행하였다.
1. 미 군정의 뱀부계획
미 군정의 하지 중장은 미. 소 공동위원회에서 어떤 정치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군 창설에 관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보고 그 대신 점령군의 경비 업무 부담을 덜기 위해 경찰을 미군무기로 장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신임 국방부장 참페니 대령은 군기능 보다 경찰 기능에 가깝게 병력과 장비를 축소한 경찰예비대 창설을 고려하여, 1개 도에 1개 연대씩 모두 25,000명 규모의 8개 연대를 편성하도록 하었으며 이를 당시 "뱀부계획(Bamboo)"이라 불렀다.
뱀부계획의 확정에 따라 조선경찰예비대는 조선국방경비대라는 명칭으로 군 창설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당시에 난립하고 있던 30여 개의 군소 군사단체가 해산되고 그 요원들은 경비대로 흡수되었다.
2. 국방경비대의 설치 및 증편
조선국방경비대는 뱀부계획과 군정법령 제42호('46.1.14)에 기초하여 경찰예비대 2만 5천과 해안경비대를 설치하였다. 경비대는 '46. 1. 15일에 태릉에서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 창설을 계기로 각도 단위 연대 별로 단지 소총으로만 무장한 경보병 중대를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46. 2. 7일 경비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중대편성 및 모병업무에 착수하여 4월 1일까지 8개중대를 편성하여 일단 8개 연대의 창설을 완료하였다.
창설시 간부는 주로 군사영어학교('45. 12.5일 설치, 4개월 교육으로 110명 임관시킨 후 폐교하고 '46.5.1일 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며 발전) 출신을 배치하였다.
병력은 모집하여 충원하였으나 사설 군사단체의 인원까지 받아들임으로서 좌익사상을 지닌 인원이 다수 입대하여 큰 문제로 남게 되었으며, '47. 3월까지 제주도가 도로 승격되면서 제9연대를 편성, 완전히 9개 연대를 편성했으나 대구의 제6연대는 편성간 좌익세력이 문제를 일으켜 편성이 늦어졌다.
가. 부대 창설
부대창설은 우리가 '48년 8월 15일 정식 독립국으로 탄생하는 싯점을 기준하여 그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되며, 군조직도 최초 국방경비대에서 통위부('46.9.12)-국방부('48.11.30)으로 개칭되어 갔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먼저 육군 위주의 연대와 지원부대가 창설되게 된다.
'46연도에 9개 연대가 각도에 1개 연대씩 창설되고, '48년도에 6개 연대가 창설되며 여기에 전투지원부대도 병기 대대, 공병 대대, 병참 대대 등 주로 서울지역에 7개 대대가 창설되었다
'46년도 창설된 9개 연대부대 현황이다.
제1연대(1.15,태릉), 제2연대(2.28,대전), 제3연대(2.26, 이리), 제4연대(2.15, 전남광주), 제5연대(1.29, 부산), 제6연대(2.18,대구), 제7연대(2.7, 청주), 제8연대(4.1, 춘천), 제9연대(11.16, 제주) 등 9개 연대이고, '46. 7. 1일 보급대대가 서울 대방동에 창설되었다.
'48년도 창설된 6개 연대부대 현황이다
제10연대(5.1, 강릉), 제11연대(5.4, 수원), 제12연대(5.1, 군산), 제13연대(5.4, 온양), 제14연대(5.4, 여수), 제15연대(5.4, 마산) 등 6개연대에 제1공병대대(1.1, 영등포), 제1병참대대(1.1, 김포), 제1의무대대(5.1, 영등포), 제51통신대대(5.1, 수색, 각 연대 파견병)가 창설되었다.
해군의 모체인 해안경비대는 '46. 9. 15일에 미 해군으로부터 최초로 상륙정(LCI) 2척의 인수를 비록하여 '48. 1. 14일까지 상륙정 6척. 소해정(AMS) 18척, 소해정(JMS) 11척, 유조선 1척 등 모두 36척을 인수하였다.
해안경비대는 '47.8.30일 부로 38도선 이남의 해상 방위업무를 미 제7함대로부터 인수 받았다.
공군은 외국에서 항공계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46. 8. 10일에 항공건설협회를 조직하고 공군 창설을 노력한 끝에 '48. 5. 15일 경기도 수색, 현 항공학교 위치에 통위부(국방부 전신) 직할로 항공부대를 창설하였다. '48. 7. 27일 육군의 항공기지부대로 개칭과 더불어 경기도 김포로 이동하였으나 비행기는 1대도 보유하지 못했고 병력도 105명에 불과 했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조선경비대는국군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고 정부 조직법에 따라 국방부가 설치되고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개칭되고, 공군은 '49년 10월 1일 육군에서 독립하여 육군 항공기지에서 공군으로 거듭나면서 육.해.공군의 3군체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나. 육군의 전력증강
'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더불어 군은 연대의 증편과 사단을 창설하게 되는데 연대는 제16연대를 포함하여 10개 연대가 증편되고 사단은 수도사단(수경사)를 포함하여 8개 사단이 편성된다
증편된 10개 연대 및 사단 편성은 다음과 같다
추가 연대는 기갑연대(1.1, 수색), 제16연대(10.28, 마산), 제17연대(11.20, 시흥), 제18연대(11.20, 포항), 제19연대(11.20, 광주), 제20연대(11.20, 광주), 제21연대('49.2.1,광주), 제22연대('49.4.15, 대구), 제23연대('49.4.20, 마산), 제25연대('49.6.20, 대전)가 편성되었다.
여기서 제20연대는 여순사건에 가담한 제14연대를, 제22연대는 대구반란을 일의킨 제6연대를 개편하여 창설하였으며, 지금도 군에는 반란사건과 관련된 숫자인 4연대(제14연대의 모체), 14연대와 6연대는 없다.
국방부는 한편으로는 군원획득 노력을 기울이면서 군 기본조직인 사단편성과 해군의 함대 조직 및 공군의 독립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육군은 주한 미군의 본대 철수 시에 인수한 장비로 무장을 하며, '49년 5월 12일 6개사단을 편성하고, 6월 10일에 다시 2개 사단을 창설하여 8개 사단을 확보하였다.
최초의 사단은 3개 연대를 주축으로 하였으나 4개 사단만 3개 연대를 갖추고 나머지는 2개 연대로 편성하였다.
이중에 제1, 제7, 제6, 제8사단과 제17연대가 38도선 경비를 담당하였고 그 밖의 사단은 후방지역 방어, 특히 공비토벌작전에 임하였으며 창설된 사단 및 편제 연대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제1사단(수색, 제11.12.13연대), 제2사단(대전, 제5.16. 25연대), 제3사단(대구, 제22. 23연대), 제5사단(광주, 제15.20연대), 제6사단(원주, 제2.7.9연대), 제7사단(의정부, 제1.19연대), 제8사단(강릉, 제10.21연대), 수경사(서울, 제3.1기갑연대)다. 여기서 제7사단은 수도사단을 개칭한 것이다.
다. 보유장비의 소요 대 보유현황 비교
105mm곡사포는 204문 소요에 85문, 박격포는 1166문 소요에 648문, 50구경 중기관총은 400정 소요에 443정, 30구경 경기관총은 1409정 소요에 944정, M1소총은 82,320정 소요에 40,050정, 칼빈소총은 33,183정 소요에14,746정, 30구경 자동소총(BAR)은 2,333정 소요에 1,091정, 2.36" 로켓발사기는 3,264정 소요에 1,961정으로 중기관총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비가 소요에 50% 수준이었다.
특히 대전차 장비가 전무였으며, 2.36"로켓발사기는 전혀 효용이 없는 장비였다. 전차 한대 없고 전투기 한대 없는 상태로 전쟁을 맞이했다.
라. 이상한 군대아닌 군대같은 조직의 난립
1) 유명무실한 호국군
여기에 국방부는 국군 조직법에 근거, 예비군 편성에도 착수하여 1949년 육군본부에 호국군사령부(초대사령관 송호성 준장)를 두고 같은 해 1월부터 7월까지 18개 연대를 지역 별로 편성하였다. 호국군은 거주지에 주둔한 연대에 소속되어 생업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1949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는 병역 의무를 진다"는 국민개병주의를 채택하여 지원병제에서 의무병제로 전환하면서 '49년 8월 31일 부로 호국군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대신 육군 본부에 청년방위국을 신설하여 대한청년단 조직을 중심으로 청년방위대를 도.시.군.면.동.리 단위로 조직하였으나 훈련이 되지않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밖에 육군은 북한에서 탈출한 청년들과 귀순장병들로써 수색학교(독립 제1대대), 호림부대(영등포학원), 보국대대(제803독립대대) 등 특수부대도 창설하여 남파되는 유격대와 지방공비의 소탕작전에 운용하는 한편, 일부는 대북공작도 준비했으나 실현하지는 못했다.
2) 서북청년단과 대북공작부대의 진실
우리는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김두환을 보면서 서북청년단의 활약상을 일부나마 알고 있다. 서북청년단이란 해방과 동시에 북에서 소련군과 김일성 군대의 공산당 독재에 환멸을 느끼고 남으로 넘어온 사람들 중에 청년층의 규합을 말한다.
그런데 그 넘어오는 숫자가 너무 많고 당시에 남한사회에 뿌리내린 남로당에 가입하여 공공연하게 공산당 선전을 하고 다니는 세력(북의 세포조직, 또는 프락치라 함)이 있어 군에서는 그들을 색출하는 숙군 작업이 있었다.
3) 국가보안법의 탄생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48. 4. 3 제주 사건에 이어 '48. 10. 19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 뒤이어 대구 제6연대 반란사건이 터지면서 국가에서는 반란세력을 규제하기 위해 '48. 12. 20일 국가보안법을 공포하게 된다. 이후 군내부에서 남로당 좌익세력의 숙군 작업이 진행되어 국군 전체 병력의 10%정도인 약 10,317명(숙군 4,749명, 탈영 5,568명)이 숙군 되거나 탈영하였다.
숙군이 시작된 '48. 10월부터 12월 어간에 밖에서 남로당 당원으로 자수한 인원이 33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도 바로 이시기에 육군 소령 계급으로 숙군 대상자였으며 선별 과정에서 군 내부의 세포 조직원 중에 알고 있는 인원의 솔직한 진술과 북한 김일성의 찬양자가 아니라는 각서를 쓰고 그 진실성이 인정되어 군에서 옷을 벗고 군무원으로 재직하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군에 원복하게 된다.(당시 심판관이 백선엽 대령, 육군 정보국장이었다)
4) 국회 프락치 사건
그 당시에 국회의원 중에도 일부 남로당에 포섭되어 활동하는 경우가 일부 있었다고 판단되며 실제 이와 비슷한 시기인 '49. 5~8월 사이에 외국군 철수와 군사고문단 철수를 주장하는 등 북한의 선전선동에 동조하는 듯한 국회의원이 13명이 검거되고 '50. 3. 14일에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6.25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진주하여 모두 형무소에서 풀려나고 피고인 대부분이 월북 또는 납북되어 사건의 최종 진상은 밝혀지지 못했다.
[남로당 서울시 총책 홍민표의 전향]
이 당시에 이미 박헌영은 북으로 도망치고 없었다. 당시 오재도 검사에 의해 수사가 진행되게 되고(보도연맹 사건) 전국에서 세포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열풍이 불었다.
그런데 그 핵심인물이 박헌영이 북으로 도망간 가운데 홍민표가 남아 있었으며 당시 서울시 남로당 부부위원장이었다. 그런 그가 잠복한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경찰서에 나타났다.
당시의 웃기는 일화 하나를 코믹하게 소개한다
나, 홍민표다. 남로당원이다
그래 너 뭐하는 놈인데?
나 서울시 총책이야, 뭐 하긴?
난 아무것도 몰라, 너 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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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님, 미친 놈이 하나 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여기 앉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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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님, 배고파요 밥좀 먹고 해요?
그래, 그럼 여기 잘하는 집이 있다. 가자!
아니요, 집 밥좀 먹고 싶습니다(그들은 오랫동안 숨어서 지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알았어, "여보 밥좀 준비해요 1시간 후에 도착할게요"
홍민표와 오재도 검사가 집에 도착했다
"홍민표의 대담한 도전"
그는 왜 스스로 자수했을까, 그리고 당당히 오재도 집에 가자고 했을까?
홍민표는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다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당시 대검 부장이라면 호의호식하고 살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본인의 눈으로 지금 큰소리를 치고 있는 실세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부자로 살면 전향하지 않을 것이고 검소하게 살면 좀 생각해 볼 것이다"
밥상이 나왔다. 그런데 걸인의 밥상 정도다
이게 뭐요? 손님을 불러놓고 뭐하는 거요?
아니 잠깐만 참아봐요, 여보 부르며 부엌으로 간 오재도다
"당신 나 진급과 관련된다고 했잖아, 이게 뭐요?'
"여보, 당신 월급이 얼마인데 지금 쌀독에 먹을 양식도 떨어져가요!"
이걸 엿들은 홍민표는 살며시 신발장을 보았다. 다 떨어져가는 구두 한켤레다
"내가 옷장을 좀 봐도 되겠소?"
"창피하게 뭐 옷장을 다 볼려고 그래, 앉아라 이거라도 먹자"
"아니요, 난 봐야겠소" 그러면서 옷장을 열었다. 으리으리한 옷이 없다. 금은 보화도 없다. 여기저기 뒤져보았다. 꽝이다!
고개숙인 홍민표다. "내가 속았다, 그래도 쓸만한 사람이 있는 곳이다.
지하 르트에 돌아와 총책들 16명을 모았다. '49.9. 22일 오후 3시의 일이다
총책 16명이 모두 모였고 한 시간이 흐르는 후 모두 전향서를 쓰고 오재도 앞에 나타났다.
전국 60여 만명의 남로당원 중 30여 만명이 '49. 10~12월 사이에 전향했다. 서울에서만도 6만명이 전향했다. 그리고 남로당은 무너졌으며 북으로 간 박헌영은 그래도 미련을 갔고 김일성에게 북한군이 서울에 가면 30만 명이 길거리로 나와 쌍 수를 들고 환영하리라 장담했다.
하지만 길거리에 쌍 수를 들고 환영하는 인파는 적고, 이에 놀란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을 허비하여 그만 미군이 부산에서 오산으로 올라오고,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
이런 과정에 바로 발생하는 것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이다.
5) 국민 보도연맹사건의 전말
국민 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 지도하기 위하여 조직딘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부터 9월경까지 수만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이 단체는 오제도 검사의 제안에 따라 내무부.국방부. 법무부와 사회 지도자들이 협의 후 정부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국민보도연맹 창설 당시에 정부는 좌익사상 전향자를 계몽.지도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직 목적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좌익성향자 단체라고 표방했지만 조직의 실질적 성격은 국가가 주도하는 관변단체로서 반공사상을 전파하고 보도연맹원의 사상을 전향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구체적인 가입자는 남로당원, 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인민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등 남로당 외곽단체 구성원들이었다.
초기는 전향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직이 확대되는 가운데 의무 가입대상을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자의적이어서 좌익과 관련이 없는 국민들이 가입되고 , 일부는 숫자를 늘리기 위해 말단 행정기관에서는 강제로 가입된 경우도 많았다.
많은 지역에서 좌익에게 물자나 식량을 제공한 혐의로 강제 가입되고, 일부지역은 주민간에 사적감정이 개입되어 보복으로 가입하게 되기도 했다. 또 일부지역은 각종 혜택을 준다고 유인하여 가입시키기도 했고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가입되었다. 보도연맹원은 전향여부가 의심되어 경찰에 의해 "요시찰 대상자"로 정기적으로 동태를 감시 당하며 '좌익혐의자' 또는'요시찰인'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렇게 결성된 인원이 약 30만으로 추정되며(당시 주도했던 검찰과 경찰 관계자의 증언)보도연맹 중앙본부는 사상개조와 국민들에게 반공교육을 위해 보도연맹원을 각종 활동에 동원하여 활용했다. 그리고 전향한 문화예술인을 중심으로 각종 연극. 예술활동을 전개하는데 이를 담단한 부서가 중앙본부 문화실이었고 당시 책임자가 양주동 문학박사 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원들은 곧바로 소집, 구금되고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이들을 집단 학살하게 된다. 법적 절차없이 집행되는데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이 구금자들을 심문하기도 하고 한강 이남 대부분 지역이 북한군이 밀려오는 바람에 이러한 요식행위마저도 없이 산골이나 창고 등에 갇힌 상태로 집단 학살되거나 죽을 자리를 미리 파고 아니면 스스로 파게 하고 그 속에 꿇어 앉혀 놓고 집단학살하게 되며 부모를 따라간 어린아이까지 함께 죽는 전쟁보다 더한 비극이 벌어졌다.
나는 소리없이 이런 곳을 찾아가 묵념을 올려야 했고 용서를 빌었다. 물론 정말 좌익도 있을 수 있다. 남로당 총책이던 박헌영의 뻥에 이걸 믿고 김일성이 무력남침을 자행했다면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김일성은 공산주의 혁명역량강화 차원에서 스탈린의 꼭두각시로서 세계공산화를 위해 한반도를 무력으로 남침한 것이고, 사실 이런 보도연맹원은 큰 영향력이 있었다고는 보지않는다.
더욱이 연맹 구성을 경찰과 검찰이 주도했고 여러 행사를 주도하면서 지역별 인원 수에 대한 경쟁도 일어나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원도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전 산내지역, 공주, 산청, 마산, 함평, 대구 코발트 광산 등 그 앙상한 뼈만 남은 시신을 수없이 바라보며 많이 울기도 했다. 같은 동족이며 부모형제인데 어찌 저렇게 무자비하게 죽일 수가 있을까하는 분노도 일었다. 지금도 산야에는 무수한 인원이 동면을 하고 있다. 하루빨리 이 분들도 발굴하여 어두운 그림자를 벗기고 따스한 빛을 머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다 산에 올라 총을 쥐고 숨져간 용사님을 보면 또 엉엉 울어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말 그 당시에 자유가 뭔지, 공산이 뭔지 알고 전쟁을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몇 몇 용사님께 물어보았다
6) 나는 배고파 군에 갔다! (제13연대 12연대 황대형의 수기에서)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 일제시대에 낙후된 시골 온양, 쌀농사하는 것 밖에는 없다. 뭔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48년 5월에 모병이 시작되었다. 동네에서 10여 명이 함께 호적등본을 들고 입대하였다. 나는 군번이 2501657이다.
항상 배가 고팠다. 당시 아침과 저녁은 통밀을 삶아 지은 밥이 주식이었다. 통밀로 지은 밥은 찰기가 없어 그릇 안에서 통밀 알맹이들이 굴러다녔다. 점심은 대부분 통밀을 가루로 만든 밀가루를 이용한 수제비다. 점심에 수제비 죽을 쑤기 위해서는 많은 손이 필요했다. 따라서 취사장 사역병을 차출하는데 훈련시절 가장 인기있는 사역병이다.
우리집은 안성 일죽면 죽산리다. 그러다 아버지 직장이 철로반원인데 음성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했다. 일제말기에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선생님이 "조선어 독본"을 몰래가르쳤다. 그래서 일본인 선생한테 일러 바쳤다.
"저 우리 선생님이 조선어 독본을가르쳐요"
선생님은 군소재지 경찰서로 끌려가 반병신이 되어 나왔다.
누가 친일인지, 누가 애국인지 개념조차 없었던 우리다. 임태식 선생님께 용서를 빈다.
내가 13세 때에 시집간 누나 집으로 갔다. 매형이 만주에 징용으로 , 그리고 북해도에 징용으로 갔다. 누나 혼자서 아이 둘을 길러야 하니 도움이 필요해서 내가 갔다. 큰 조카 순자가 젖을 먹고 나면 동생 순자는 먹을 것이 없다. 워낙 빈곤하여 뭐를 먹어야 젖이 나올텐데 먹을 것이 없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들에 나가 개구리를 잡아야 했다. 가을에는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했다.
그런데 겨울이 오니 할 일이 없다. 눈이 내리니 땔감나무 하는 일도 끝났다. 종일 빈둥거리는 일과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가출을 결심하고 편지 한장을 남기고 천안의 큰 집으로 갔다.그러다 봄이 오면 다시 누나집에 와서 개구리를 잡았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또 다시 가출이다.
이러다 해방이 되고 매형이 돌아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징용이나 노역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며 동네가 왁자지껄해지는데 사실 할 일이 딱히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다 온양온천 에서 모병 소식이 들려 눈감고 입대하였다."
마. 해군의 전력 증강
육군의 전력 증강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해군도 전력 증강이 이루어지고 해병대의 창설이 이루어졌다.
정부 수립 후 여순반란 사건에 출동하여 해상봉쇄작전과 지상군 지원작전을 실시하면서 작전경험을 살렸다. 그러나 이전에 도입된 대부분 소해정이 노후하여 미국에 전투함을 요청하였다. '49년 하반기에 이르러 37mm 포와 기관총을 장비할 몇척의 함정이 추가 도입되었다.
이에 해군은 모금 활동을 전개하여 손원일 제독이 직접 미국에 가서 구잠함(PC) 4척을 구매하여 그 중 1척이 '50. 4월 1일 진해항에 도착하면서 비로소 3"포가 장착된 전투함을 갖게 되었다.
바. 해병대의 탄생
또한 해군은 여순사건에서 육전대가 없어서 상륙작전을 실시하지 못하여 논의 되기 시작한 해병대를 '49. 4월 15일 진해에서 1개 대대 규모로 창설하였다. 해병대는 곧 진주지구의 공비토벌 작전에 나섰으며 그 후 12월 28일에 제주도로 이동하여 역시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하며 부대 증편에 주력하게된다.
사. 공군의 탄생
한편 육군의 항공기지부대로 있던 공군은 미군으로부터 '48. 9월 4일에 연락기 10대를 인수하면서 육군 항공기지사령부로 개편된다. 곧 이어 연락기 10대를 추가로 인수하였다.
아울러 김정렬 등 공군 핵심 간부들의 노력으로 '48. 12월에 육군 항공사령부로 개편되면서 '49. 10월 1일에 공군으로 거듭나면서 3군체제로 발전되게 된다,
이 때까지의 국군의 전력은 육군 10만 6천명, 해군 7천7백명, 해병대 2개 대대 천2백명, 공군 천9백명이었다.주요 장비는 장갑차 27대, 곡사포 91문, 박격포 960문, 대전차포 2040문(57mm 140, 2.36" 1,900),공군 연락기 22대, 해군 경비함 28척. 보조함 43척이었다.
제 3 절 전쟁전 38도선 상에서의 남북 충돌
이와같이 '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이 되면서 국군이 창설되고, 국군은 미군 및 경찰로부터 38도선 경계 임무를 인계받고 '49년 초부터 방어진지 편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북한은 조직적으로 우리의 진지공사를 방해하려 사격을 가하는 등 방해 사격을 해오다 38도선을 월경하는 등 개성, 옹진, 포천, 인제, 홍천, 강릉지역 등에서 불법 도발 및 월경 등의 무력 도발을 하게 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개성지역
우리가 잘 아는 육탄십용사의 신화가 만들어진 송악산(488고지)전투로서 송악산을 먼저 북한군이 주봉을 점령한 후에 바로 그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우리 군을 '49. 5월 3일 공격하여 292고지 와 유엔고지, 비둘기고지등을 점령해 버린다.
이에 국군은 육탄 공격으로 피탈된 진지를 다 회복하게 되는데 국군 제1사단의 제11연대 제2대대장이 전사하고 육탄 십용사의 신화가 만들어지면서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여 탈환헤 되는데 여기서 무려 39명의 전몰 용사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은 지금 북한지역으로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나 탐문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2. 옹진지역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와 경기도 경찰기동대가 방어를 하고 있는 가운데 '49.5월21일 북한군이 두락산-국사봉-충무고지-은파산-까치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국군이 옹진지구 사령부를 창설하고 제18연대가 '49년8월4일 다시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 시켰으며 오히려 북쪽의 은파산을 탈환하였다.
다시 '49.10월14일에 재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상호간에 응징목적으로 역습이 계속 되고 있었다.
3. 인제 관대리 및 원대리 지역
국군 제7사단 제7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인제에서 관대리로 남하하여 38도선 남쪽의 682고지와 704고지등으로 '49년 8월 6일 공격해와 예비대까지 투입하여 26일간이나 격전하여 격퇴한다.
이 지역은 실제 6.25전쟁 당일, 최초진지 공격간에도 그곳으로 공격을 가해 오는데 지금도 당시의 개인호가 즐비하고 '07년도와 '10년도에 유해발굴을 하여 704고지(수리봉)에서는 2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682고지는 소양호와 소양호 사이에 촛대처럼 생긴 지형인데 이곳에 올라서니 개인호가 수없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부평리 지역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국군이 지금 솟탱이 밑 강가에 화장터를 만들어 6.25전쟁 당시에 이 인근 유해는 대부분 수습하여 화장처리 하였다고 한다.
원대리는 북한군 2개 소대가 원대리 전초진지가 있는 망월봉 등으로 '49. 2월 13일 침투하여 군경 합동으로 5일간의 전투에서 결국 전초 진지를 피탈당하게 된다.
[북으로 간 대대장, 강태무, 표무원]
춘천과 인제는 '49년도에 발생한 육군의 치욕 중의 치욕인 대대장이 대대 병력을 이끌고 집단 월북 사건이 벌어진다.
인제지역 : '49. 5월 5일에 제6사단 제8연대 제2대대장인 강태무 소령이 휘하의 대대 병력을 조선 인민군을 공격한다면서 지금의 원대리로 출동하여, 이미 내통한 북한군에 포위되었다며 대대 병력을 데리고 월북을 기도하다 제8중대장 김인식 등 몇 몇 간부의 반대에 부딪치자 이미 인근 지역에 잠입하여 포위하고 있던 북한군이 사격을 개시하여 382명은 탈출하여 복귀하고 368명은 납치되게 된다.
강태무는 당시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군에 들어왔다. 강태무는 경남 고성출신으로 도쿄 릿쿄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형은 강태열로 공산주의 운동가로 후에 남로당에 가입하여 간부가 되었다가 월북하였다.
[억울한 죽음의 용사들]
춘천 서원리 지역에서 월북 시에는 거의 완벽하게 속아서 넘어 가지만, 원대리에서는 도중에 계략이 탈로가 나서 집단 투항이 어렵게 되자 기다리던 공산군측에서 사격을 개시하여 남한으로 다시 내려오는 군인과 총격전으로 많은 인원이 전사하게 된다.
4번 도로를 따라 남전리에서 원대리 방향으로 들어와 원대교 바로 못 미쳐 우측 700고지군이 실제 전투현장으로 이 지역에 사는 지역주민들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국군 묘지가 없었고 유해처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대장을 따르다 죽은 인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가 워낙 냄새가 나고 산짐승들이 물어 뜯어 흉측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고통은 심했고 주민들이 소원을 제기하여 결국 군의 통제를 받아 함께 수습하여 군에서 현재 상남면 상남리 고석평 제3군단 통신단 자리 인근에 가매장하게 된다.
그걸 조사팀의 요구로 발굴하라 하여 정덕이가 '08년도에 18구를 발굴하여 미확인 유해로 화장처리 되어 현재 발굴단 내부에 봉안 중이다. 과연 이 유해는 탈북 미수자들인지 아니면 단지 월북하는 대대장을 따른 억울한 자들인지 역사가 증명해야 할 문제다.
춘천지역 : '49. 5월 4일은 현재의 춘천댐 위 서원리에서 국군 제6사단 제8연대 1대대 병력이 대대장 표무원을 따라서 월북하게 된다. 당시 대대원 455명중 장교 4명과 사병 213명이 동반 월북하고, 239명은 귀환하였다.
표무원은 대구 출신으로 도쿄의 대성중학교를 졸업했다. 군 창설 당시에 군에 들어와 당시 이미 군내부에 들어와 있던 좌익인 상급자의 중대 하사관으로 들어가 있다 전향하였으며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임관하여 강태무와 동기생이 된다.
표무원은 전쟁초기 제766 육전대 제424대대장으로 삼척 임원진에 상륙하게 되고 일설에 거제 포로수용소에 위장하여 들어와 친공 포로들을 사상 교육했다고도 한다.
이 사건은 대대장이 군에 침투한 세포 조직원이었으며 군의 숙군작업이 이루어지자 검거 될 것이 두려워 훈련을 빙자하여 대대원을 데리고 자진 월북을 기도했던 것이다.
4. 포천지구
북한군이 '49. 6월 12일 약 200명의 병력으로 사직리를 공격하였으며 국군 제1연대는 사전 이러한 첩보를 입수하여 2개 중대를 매복시켰다가 일망타진하였다.
5. 강릉지역
북한군이 수시로 월경하여 주민의 납치, 약탈, 방화행위를 거침없이 하고 아군의 진지에 대한 공격이 수시로 있었다. '49년 2월에는 제10연대의 서림 방면과 기토문리에서 잔교리로 적이 침투하였으며 우리는 이에 대해 보복사격으로 105밀리 포격을 가했다. 다음 '49. 7월에는 유격대가 남파되자 제10연대는 일부 병력이 양양의 유격대 훈련소를 목표로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정확한 피해 내용은 세부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은데 잔교리 지역은 평지로써 차후 초기전투가 벌어지게 되고 100m이내의 낮은 구릉으로 잔교리나 판교리 미노리 지역의 밭등에 지금도 개인호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기도 하고 개간되어 묻혀 있으나 밭갈이 등의 영농활동시 우리 국군 8사단 병력이 발굴 되기도 한다.
이상에서 주요 남북 충돌 문제를 알아 본 바와 같이 남북은 이미 전쟁 전부터 특히 북한군은 우리보다 먼저 조직을 갖추고 꾸준히 침투공작을 통하여 우리의 대응 태세를 점검해 갔으며 우리도 때로는 선제 공격으로 그들의 의도를 무력화 시키는 활동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북한군은 그들 각본대로 전쟁준비를 하면서 남한내에 프락치를 침투 또는 양성하여 활동케 함으로서 군의 38도선 경계부대를 분산시키고, 미군의 철수를 선동하여 결국 미군이 철수하게 되자 전쟁을 일으켰다.
6. 그럼 여기서 38선 형성 과정의 진실을 알아보자
요즘 진보진영의 대다수는 마치 미국이 그렇게 한 것처럼 하여, 특히 전교조측과 노동계에서 그런 말을 강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대다수는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타계한 거물 정치인 김종필의 회고록에 그 의미심장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종필이 5.16혁명 후에 1962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로버트 법무장관(존F케네디의 친동생)을 만나 나눈 알화다
김종필 : 당신네 나라가 우리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분단의;아픔을 안게 한 원인을 만들었소!
로버트 케네디 : 그 원인이 무엇이오?
김종필 : 38선을 누가 만들었소. 딘 러스크 육군 대령이 긋지 않았소. 왜 아무 죄 없는 한국을 반으로 갈라놓았느냐 말이오. 우리를 분단시켜 싸우에 만든 것이 바로 미국이오! 지금 미국의 국무장관인 러스크, 1945년 8월, 당시에 대령으로서 한반도 지도에 38선을 그어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케 하는 초안을 만들었다. 장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한 전략적 패착이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정말 미국이 잘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모르는 일방적 편견에 불과한 식견이다.
아니 일본이 항복한 날 미군 최선봉 부대는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1,0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미군이 소련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였다.그때 소련은 함경도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오고 있었고 일주일 정도면 부산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이를 우려한 미국은 소련에게 38도선까지만 내려와 북한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라고 제의했던 것이다.1990년에 발행된 딘 러스크의 회고록(내가 본대로~)에는이렇게 적혀있다.
[러스크의 증언]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국방부와 국무부는 의견이 달랐다. 국무부는 중국 본토의 가능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그러나 우리는 아시아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내셔날 지오그래픽 잡지사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위 38도선을 건의 하기로 결정했다. 국무부,국방부.해군 협의회에서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 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하면 소련이 38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러스크의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반도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미국 군부의 희망대로 그때 한반도에 미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접령하고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당시 33세, 본명 김성주)을 앞세워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5년 5월 7일 패한 독일의 베를린 분할과, 체코슬롭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나라들을 전부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략했다가 1989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간신히 자유를 되찾았다. 이런 선상에서 역시 소련이 점령했던 북한은 아직도 공산독재에 김씨 왕조를 유지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가난하며 자유가 없는 나라가 되어 있다.
위의 러스크의 증언은 그 당시에 미국 대통령인 트루만의 1955년 회고록에도 언급되어 당시에 미국의 복잡한 내막을 엿볼 수 있다. 실제 미군은 지쳐 있었고 오키나와에서 한반도에 병력을 올린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이미 소련은 그토록 그들이 꿈구어 오던 부동항을 얻는 확실한 기회를 버릴 수 없었다. 선전 포고도 안했던 일본에 대해 원폭으로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야비하게 선전포고를 하고 러일전쟁에서 패한 그 복수를 하게 된 것이다.
만약 미군이 군부의 의견을 들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말고 역사도 현실이다. 감상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좀 아픈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때 독립국가가 아니였다.
여기까지 정독및 수정!
제 4 절 태동기 군의 한심한 모습
여기서 "숙군작업"이 무엇인지 잠깐 언급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48년도에 제주 4.3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 군 내부에 북한의 세포조직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관련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일이 숙군작업이다.
해방이후 우리 사회는 좌 우익의 극한 대립 속에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이 주요 도시에서는 테러 등의 돌발사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상은 공공연하게 서울 4대문 안에 붉은 깃발을 달고 활동하는 남로당(북한의 지령에 움직이던 박헌영 등이 주도한 단체)이 있었고, 전국 어디에나 특히 산골이나 해안가 등 도서 지역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프락치들이 숨어들어 선거 방해 및 국가 전복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의 공산주의자들(프락치 등으로 표현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김일성의 맹신 주의자도 많았지만, 당시 1920년대 서구 산업화된 사회에 불어왔던 좌파 운동의 영향으로 국내나 일본에도 기존 왕정을 배척하면서 계급 사회를 부정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순수 공산주의자들도 많았다.
특히 좀 배웠거나 도시, 일본 등에 유학하고 있던 인원들 중에 많았고 그들이 해방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에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바로 남로당이고 그들은 은연 중에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되어 결국 김일성의 하수인이 되었다. 이렇게 물들은 프락치가 군 내부에 무려 10%정도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알아 보았다.
당시 정국은 유엔 감시단 통제 하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48. 5. 10 선거가 계획되어 있었다. 북한은 유엔 감시단의 출입을 원천 봉쇄하고 소련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의 1당 독재가 이미 뿌리를 내리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었다.
따라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남한에 뿌리를 내린 남로당이 연계하여 남한의 정부수립을 위한 '48. 5. 10일 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여러 폭력 투쟁을 행동에 옮겨 남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물론 우리 대한민국의 태동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다. 정부수립이 되는 48년 8월 15일 이전에도 9월 폭동 10월 폭동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도 있다. 당시의 사회상은 무정부상태라 봐도 무관할 정도라고 보면 된다. 다라서 여기서는 정부수립 직전의 사건을 기술한다. 여기서 가장 큰 사건이 결국 제주 4.3사건의 전말이다. 이로 인해 여순사건도 생기기 대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모두 한가지 이유에서 발생하고 끝이 난다.
제주사건이나 여순사건은 모두가 당시 남한에 뿌리를 내린 남로당이, 북으로 넘어간 박헌영의 지령으로 남한을 해방구로 만들기 위해 저지른 반란사건이다. 그 핵심에는 모두가 남로당원이 군에 위장으로 들어와 세포조직을 늘리고, 북한이 남침하는데 가장 좋은 여건 조성을 위해 벌이는 폭력혁명이다. 제주도가 먼저 선정된 이우는 한라산이란 지형적 잇점과 이곳에 일본군이 구축한 토굴과 무가가 산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육지는 그래도 공권력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제주도는 제주지사부터 세포로 의심되는 인물이고, 군.경 조직내부, 관공서나 학교기관에 수많은 세포들이 잠입해 들어가 있었다. 바로 해방 직후에 30만이던 제주도민이 무려 6만명이 추가 된다. 대동아 전쟁에 끌려간 인원이 복귀하면서 빗어진 과밀도 인구분포로 사실 먹고 살기가 쉽지 않았다.
제주는 공산당이 가장 좋아하는 혁명의 불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이걸 박헌영 뒤를 이은 김삼룡이 김달삼에게 지령을 내리면서 박헌영의 남로당이 북한 김일성 밑에서 자리를 잡으려 충성노릇을 한 곳이다.
따라서 제주 4.3사건은 별도의 장으로 그 실체를 좀더 자세히 밝히려고 한다. 여기서는 개략적인 내용으로 특히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당시 연대장 김익렬(예) 중장)의 수기에 많은 것을 할애했다. 그렇다고 김익렬의 증언이 전부 맞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비록 중장까지 진급하고 퇴역했지만 그의 행적에는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나의 생각이니 오해금지)
그 대표적인 사건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48. 2. 7 폭동 사건
1948. 2. 27일 발생한 사건으로, 남한내 선거를 위한 유엔 감시단의 활동을 방해하고 미 . 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하면서 폭력투쟁을 벌인 사건이다.
당시 폭력투쟁을 주도한 세력은 남로당 세포조직원들로 그들은 공장과 생산기관 및 교통기관에 잠입하여 파업을 선동하고 경찰서의 습격, 방화, 파괴와 전신. 전화의 절단 등 공공 시설을 파괴하였다. 나아가 폭력을 주도한 세력은 선박 노동자의 해상파업과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이어지고 서울과 지방 학생들의 동맹휴학으로 확대되었으며 폭동은 약 2주일 지속되었고 모두 8,479명이 검거되었다.
2.'48. 4. 3 제주도 사건
2. 7 폭동에 이어 1948. 3월 말에 제주도에서 남로당 조직책 김달삼이 제주도에 주둔 중인 제9연대 내의 세포조직 책임자와 제주도를 폭력으로 장악할 것을 모의하고 곧 있을 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제주도 일원에서 일제히 폭동을 일의켜 경찰 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과 양민을 살상하였다.
이렇게 혼란상태가 야기되자 미군정에서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어렵게 되엇다. 이에 군 병력인 제9연대를 투입하고 수원에 있던 제11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미 군 내부에 침투한 세포 조직에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피살되고, 김달삼 세력의 군.경 상호 분리 책동에 군과 경찰이 서로 적대시 된 세력으로 급기야 발전되어 내부 총질이 이어지면서 상황을 모르는 지역 주민이 폭도들의 선동에 한라산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 과정에 군.경에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당하게 된다.
[운좋은 김익렬(예) 중장, 작고]의 진실게임?
당시 군의 3대 뻥쟁이(대포는 김익렬, 중포는 육사 2기 홍순용 소령, 소포는 육사 3기 신대성 소령)로 불리던 김익렬은 경남 하동 출신이다. 일본 고베 상업학교와 후쿠지야마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소위로 광복을 맞이했다.
'46. 1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으며,제주도 제9연대장이 된다.(이전은 이치업 중령이었다) '47년에 부연대장이였는데 명동에서 송호성 당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의 부인과 마주쳤는데 경례를 안해서 송호성의 눈밖에 나서 제주도로 쫓겨간 인물로 당시 소문이 제주도 간부들은 주로 송호성의 눈밖에 난 인사들이었다 한다.
'48.4. 3 사건 발발 초기에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김익렬은 회의를 느낀다. 처음 제9연대는 해당 사건을 제주 도민과 경찰 및 서북청년단의 충돌로 군이 개입할 입장이 아니라고 보았지만 사태가 악화되자 4월 17일 제주도 주둔 미 육군 제59군정 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제9연대의 진압작전 참여 명령이 하달 되게 된다.
이때 김익렬은 "선 선무, 후 토벌"이라는 진압 원칙을 세우고 당시 제주도 총책인 김달삼과의 담판을 추진한다. 드디어 4월 28일 김달삼과의 담판에서 72시간내 양측의 전투행위 금지, 유격대원의 무장해제와 범법자의 명단 제출, 김달삼과 다른 대원들의 탈출을 보장하기로 언약한다.
그런데 '48. 5월 1일 일단의 무장괴한들이 오라리를 습격하여 주민을 죽이고 방화를 저지르게 된다. 바로 이 사건이 가장 크게 도화선이 되어 결국 수많은 제주 도민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바로 이 사건을 김익렬 당시 연대장은 당시 경무국장 조병옥의 조종을 받는 경찰의 공작이라 보았고, 경찰은 반대로 군인이 만든 자작극이라 맞서는 가운데 5월 5일 제주 중학교에서 미 군정 장관 딘 주도하 당시 대책회의에서 조병옥이 김익렬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으며 김달삼과 김익렬이 일본 에비사관학교 동기임을 까발리게 된다.
이에 격분한 김익렬이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서로 주먹 다짐을 하게 되고 김익렬은 용공분자라는 의혹속에 공교롭게도 여수의 제14연대장으로 '48. 6월 9일 떠나게 되었다.
결국 김달삼은 탈출에 성공하여 북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6.25 전쟁시 유격대를 이끌고 경북 영양의 일월산 지역으로 침투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동하다 신불산 전투에서 죽었다는 설과 퇴각 중에 강원 정선 고양산에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
운좋은 김익렬은 다시 여수.순천사건이 터지기 전에 다시 연대장에서 물러나게 된는데 바로 제주도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이미 침투한 세포 문상길 중위의 조종을 받는 인원들이 독살)의 배후자로 내사를 받는다. 그러나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48. 8월에 제1사단 제13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하다 후퇴 과정에 제13연대는 제5사단 제15연대와 통합되어 제15연대가 되었다.(제13연대는 차후 제11사단 창설시 모체 부대가 된다)
김익렬은 다시 제6사단 제19연대장이 되어 신령지구 전투-북진작전에 참여하여, 제6사단이 중공군에 운산지구에서 포위되기 직전에 용케도 제11사단 부사단장으로 영전하여, 작전주임 박정인 소령이 노획했던 북한군 박일우의 차를 선물로 받아 후방으로 내려오게 되어 화를 면하게 된다(?)
김익렬의 뻥중에는 잠자는 호랑이 앞 이마에 칼집을 내고 뒤에서 꼬리를 잡고 발길로 차면 호랑이가 놀라서 튀어나가 껍질이 벗겨진다는 호랑이 잡는 뻥과, 국정감사를 나온 국회의원들에게 펼친 멸치를 튀기어 명태 만드는 뻥, 성냥개비를 튀기어 장작을 만든다는 내용이 있다.
그 후 그는 승승장구하여 사단장에 군단장까지 역임하고 5.16혁명 세력의 일원으로 허세를 누리다 '88년 68세로 운명하여 현충원에 안장 되었다.
지금도 과연 그 당시의 김달삼과 김익렬의 담판이 오해가 없었는지는 미스테리이며, 많은 제주 도민이 김익렬을 의인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만큼 그 시대는 군과 경찰의 헤게모니 싸움이 많았다.(두 집단 모두 일본의 잔재가 많이 묻어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남로당에 포섭된 인원들이 공공연하게 들어와 있었던 시절이다)
김익열의 증언(제주도 제9연대장역임,'69년 중장예편. 경남 남해출신)
먼저 '92년도에 나온 유고록에서 최대의 비극이라는 제주도 4.3사건의 실체를 조금 이해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요약형이지만 김익렬장군의 참뜻은 전혀 왜곡없이 반영되었고 차후 공비토벌 작전에 김달삼관련 내용도 언급하도록 하겠다. 장군은 '47년 9월에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 부임한 후에 '48년 2월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에 보임되었다.
'48.5.1, 남로당 제주도 총책과 담판으로 성사된 휴전 4일째 되는 노동 기념일에 제주읍 중산간 오라리에 정체불명의 일당이 습격하여 부락민을 죽이고 방화하는 난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경찰은 공산 폭도들이, 폭도들은 경찰이 서북 청년단을 시켜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두고 군정 장관과 나는 경찰의 소행이라고 심증을 굳혔다.
경찰은 폭도들이 시간을 벌기 위해 위장 평화 공세로 귀순하고 있다고 역 소문을 퍼트리고 또한 귀순하면 군인들이 몰살하려 한다는 낭설을 퍼트리고 있었고, 제주도에 와있는 미군 맨스필드 대령은 경찰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으니 나에게 조심하라 하였다.
그 이유는 수일 내에 폭도들이 귀순하여 폭도진압이 끝나면 경찰과 경무부장 조병옥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약 1개월 전 호언장담하고 제주도 폭동 진압 사령부를 설치하고, 공안국장 김정호가 진두지휘하여 토벌했으나 막대한 피해만 입고 육지에서 파견온 대부분의 경찰이 무기를 버리고 흩어져서 제주도 각지 항구에서 밀선을 타고 고향으로 달아나 버려 경찰은 2선으로 경비대가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서울 정계에 알려지고 미군정청에 알려지면 입장이 난처해 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폭동진압 불과 열흘도 안되어 28세의 백면 청년(김익렬)이 전투도 하지않고 단신 적지에 들어가 회담으로 귀순공작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조병옥은 제주도 현지 경찰의 허위 보고만 듣다가 대세의 판단을 그르쳤고, 이로인해 폭동발생 원인이 밝혀지고 초토화 작전의 진상이 탄로나면 그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해진다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그러니 화평 귀순공작을 무력화시키려 방해공작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경찰의 비 애국적인 처사에 대단히 분개하면서 경찰의 방해공작을 철저히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심지어 연대장을 암살 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 주었다.
드디어 5월3일 오라리 부락근처에서 귀순폭도 2백~3백명이 비행장근처 수용소로 귀순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연대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2명, 9연대 7명이 인솔하여 하산하는데 난데없이 완전 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경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기습 난사를 하였다.
드루스 대위는 제2차세계대전의 영웅답게 2명의 미군병사로 M1총으로 중기관총 사수를 저격하고 일제히 경찰에 사격하여 5명이 죽고 경찰이 도망가고 폭도들 중 생존자들은 다시 산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쓰러진 경찰 한 명을 데려다 치료하고 심문한 결과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 자백하였다.
그러나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은 뻔뻔스럽게 공산폭도들이 공격이라 중상 모략하려고 그들이 저지른 짓이라 격언을 한다. 그러면서 중상을 입고 잡혀온 자도 경찰에 들어왔던 제주도 지역 공산주의자로 중기관총을 갔고 산으로 도주하였으며 어제 심문을 받던 중 스스로 자살했다고 은폐하게 되었다.
그후에 경찰은 그들의 죄상과 과오를 덥기 위해 폭동을 조장하고 확대하려 하고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에 방화하고 귀순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임으로써 반대로 보복을 불러일으켜 난장판을 만들어 갔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지서를 방화하고 중지 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 되었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은 약속 위반이라고 나를 죽이겠다 하고, 경찰들은 폭도들이 자신들의 배반자를 죽여놓고 경찰에게 뒤집어 씌운다고 서로 비방과 악선전으로 주민들은 더 불안해지거 치안이 마비되니 군정장관이 대노하고, 경찰은 나에게 이용 당했다고 악전선이 계속 되었다.
[조병옥 대 김익렬난투극]
당황한 미군정은 군정청장 딘소장이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현지에서 대책을 수립하겠다 한다. 5월 5일 제주중학교에서 있는 회의에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제9연대장 김익렬, 민정장관 안재홍(평택출신, 납북되어 사망),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준장(함남출신, 6.25전쟁때 납북. 북에서 사망),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소장 통역관김씨(목사출신)이렇게 9명이 참석하였다.
먼저 경찰은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들에의해 사전 조직되어 훈련된 폭동으로 군.경을 투입하여 철저하게 토벌하자는 내용이었다. 다음은 송호성장군인데 나보고 하라하여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한 공산주의자. 불평불만자.밀무역자 등이 일으킨 도민 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간의 마찰이다. 실제 인원이 3백명인데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에 기인한다. 이작전의 방해 요소는 경찰의 기강 문란이며 이것이 폭도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경찰 지휘권을 나에게 달라.
그리고 사진첩을 딘소장에게 건네주었는데 얼굴이 상기 되면서 '닥터 조 어떻게 된거요?'하니 조병옥이 벌건 얼굴로 단상의 뛰어 올라가 조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은 전부 허위로 조작된 것이고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며 난데 없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소. 우리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가 국제 공산주의자이며 지금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소"라고 유창한 영어로 깔아뭉개고 있다. 이미 내 아버지는 5살에 죽었는데 말이다.
내가 단장에 올라가 '닥쳐라" 조씨를 붙잡고 한판 실갱이가 벌어지고 무고한 나를 공산주의자로 모느냐며 죽여버리겠다고 외쳤다. 여기에 송호성 장군이 참고 앉으라고 하는데 이걸 통역관을 딘소장이 불러 뭐라고 지금 하느냐고 하니까 "너는 공산주의자이고 나쁜 놈이다"라고 하여 발길로 입을 찬다는것이 그 곳를 차버렸다.
너무 비참한 일이다. 안재홍은 너무 비참한 일이다며 눈물을 흘리고 "민족의 비극이오"울먹였다. 이렇게 해서 연대장이 박진경(김익렬의 고향친구)중령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조씨를 구타한 것이지만 극비적인 문제는 제주도를 조기에 안정시키기 위해 빨리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고 본다. 후임자는 취임하면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30만을 희생하더라도 무방하다며 초토화 작전을 감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박중령과의 마찰로 원래 고문역활을 하도록 되었던 것을 단 1시간만에 결렬하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하지만 서울의 경비대 장교들은 한결같이 나를 반겨주고 이해하였으며, 이로 인해 다른 처분을 내리지 못했다. 3~4일간 쉬다가 여수에 제14연대장으로 내려갔다.
[베후로 몰려 제14연대장도 해임]
그런데 박진경이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축하 파티를 하고 나서 암살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그러자 조씨가 바로 배후에는 김익렬이 있다고 무고하여 나는 서울로 소환되고 14연대의 여순반란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게 되고 오동기 중령이 후임으로 갔다가 책임을 물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중에 사망하게 된다.
박진경이 죽자 딘소장은 자기 심복이 죽으니 CIC를 동원하여 배후를 밝히도록 강요하게 되고 나는 이틀만에 소환되어 지금의 명동 천주교 성당과 성모병원 길건너 어느 일본식 안가에 붙잡혀 1달 이상 편하게(?)지냈다.
딘소장과 조씨에게 공을 세우려는 군인, 경찰, 민간인등 친일파였던 민족반역자들이 나에게 접근하고 회유했지만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8월 초에 제13연대장으로 온양에 내려갔다.그후에 전방으로 추진하여 제1사단의 우측지역을 담당하게 된다.
박진경을 살해한 문상길 중위등 3명은 최후 진술에서 본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 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본의 아니게 사고를 저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그들은 모두 수색에서 총살로 끝났다.
3. '48. 10. 19 여수. 순천 제14연대 반란 사건(군중심)
이렇게 제주도 4.3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프락치를 토벌할 군대의 파견이 검토되고, 가장 가까운 여수 제14연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제14연대는 '48. 5. 4일 현지 모집인원과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창설되었다. 그러나 당시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어수선한 상태였다. 여기에 이미 남로당에 포섭된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지창수 상사 등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의켰다. 이들은 이미 포섭해 놓은 40여 명으로 연대가 출동준비를 하는 틈을 이용하여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연대의 주요 장교들과 수명의 하사관을 살해하고 제주로의 출동을 막았다.
이어서 연대를 장악하고 이날 밤에 1,000여 명의 참가자를 데리고 여수 시내로 진출하여 경찰을 무력화 시키고 여수를 장악, 나아가 순천까지 장악하였다. 이 동안에 세력이 3,000명으로 불어나자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반군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23일에는 여수 . 순천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어서 토벌작전이 전개되어 27일 치안이 유지되고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잠입하여 '50. 1. 25일에야 계엄이 해제되었다.
이 사건으로 약 5,000여 명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군경의 진압작전 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하며, 천문학적인 재산피해(당시 100억 추정)와 2천 호의 가옥 손실이 있었다.
4. 대구 제6연대 반란사건
이어서 '48. 11월에 대구주둔 제6연대에서 또 반란사건이 터졌다. 당시 연대는 3개 대대의 주력이 제주와 여수.순천지역에 토벌작전에 투입하고 있었다. 대구 연대 본부에는 일부의 경계 병력과 행정 병력이 남아 있었는데 11. 2일 남로당 세포조직원인 곽종진 특무상사가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의키고 대구시내로 진출을 꾀하다 군경의 의해 실패하고 40여 명이 팔공산 등으로 잠입한다.
이어서 여수에서 복귀하던 제1대대가 달성군 월배지역에서 좌익세력이 인솔장교 9명을 살해하고 반란을 주도했으나 실패했다.
5. 포항 오천 비행장 주둔군 반란사건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대구 주둔 제6연대의 주력이 출동한 틈을 이용하여 이미 침투해 들어온 세포조직들이 '48.11.2일날 연대본부 곽종진 상사 주동으로 무장반란을 일으켜 칠곡지서등을 습격하고 팔공산으로 도주하는등 2차는 '48.12월6일에 이동백 상사가 주동이 되어 3차는 포항의 4중대에서 '49.1월3일 포항경찰서를 습격하려다 일망타진 된다.
제 6 절 6.25전쟁 직전 북한의 유격대 남파
북한에서는 전쟁준비를 하면서 유격대를 계획적으로 양성하여 민심 선동, 테러, 파괴 등 남한 내부의 분열과 혼란, 폭동과 반란 등으로 국가 전복 활동을 위해 소련군이 진주한 직후부터 남한에서 월북한 인원 등을 일정 기간 공작 요원으로 훈련시켜 남파하게 된다.
'48년 1월에 강동 정치학원을 설치하고 인민 유격대를 양성하고 여기서 교육받은 인원은 다시 양양 인민 유격대 훈련소에서 재 교육을 받는다. 그러다 여수.순천반란 사건으로 국군 토벌대가 호남 및 경남지역에 집중되어 후방 경비가 허술하고 남한 사회가 혼란해지자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된다
[북한 유격대 남파와 토벌작전]
유격대는 3~6개월에 걸친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유격 훈련을 받고 인민 유격대로 조직되었다. 주로 남한 출신이다보니 지리에 익숙한 잇점이 있고 연고자가 있고 산악 지형에서 보급추진 등의 효율성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었다.이들은 총 2,450여 명을 300명에서 700명 정도로 구분하여 모두 10차례 남파하여 그들의 남침여건을 조성하게 된다.
제1차 : '48. 11. 14일, 북한군 군복을 입고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약 180명이 양양-오대산으로 침투하였다가 국군 토벌대에 모두 토벌되었다. 이들은강동정치학원 제1기생들로 평창 북쪽 태기산까지 진출했다가 영월 북방에서 소탕되었다.
제2차 : '49년 6월 1일, 약 400명이 오대산으로 침투했다가 섬멸되고 살아남은 자들이 지방 유격대와 합세하여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제3차 : '49. 7월 6일, 약 200명이 오대산으로 침투했다가 토벌되었다.
제4차 : '49. 8월 4일, 김달삼(제주도 인민유격대 초대 사령관)ㅊ부대 약 300명이 경북 영양 일월산으로 침투, 토벌대에 노출되어 분산하여 동해안 영일군 송라지역 지경리와 영천의 보현산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잔여 세력이 마지막 밀양 신불산지역에서 최후를 맞았다.
제5차 : '49. 8. 12일, 철원지구에 근거를 둔 유격대 선발대 15명이 명지산을 거쳐 용문산까지 침투하였다 다시 월북하였다.
제6차 : '49. 8. 15일, 제5차의 본대 40여 명이 명지산을 거쳐 용문산까지 들어왔다가 20명이 사살되었다.
제7차 : '49. 8. 17일, 유격대 약 360명이 태백산으로 침투,토벌되었으나 100여 명이 보현산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경북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제8차 : '49. 9. 28일, 약 50명의 유격대가 양양 금옥치리로 침투했다가 국군 제8사단에 섬멸되었다.
제9차 : '49. 11. 6일, 약 100명이 영일군 지경리로 침투하여 보현산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였지만 이후에는 잠시 중단되었다.
제10차 : '50. 3. 28일, 인제, 양구에서 김상호와 김무현 부대 약 700명이 오대산과 방태산으로 침투하였다. 이들은 보현산 일대의 김달삼 부대가 괴멸에 이르자 이들과 연결하여 월북을 지원하기 위해서 내려왔으나 대부분 토벌되었다.
이는 결국 정규전으로 전면적인 무력 남침에 앞서 우리의 병력 분산과 관심의 이완을 노리고 배후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우리의 증원과 동원을 방해하려는 전술적 의도에서 진행 되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전쟁전 남북한의 군사력은 어떠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제 2 장 남 .북한의 정권수립 과정
제 1 절 개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국문제를 토의하는 동안 국제정세는 소련 스탈린의 유럽 동구권의 철의 장막에 휘둘려 급격히 냉전으로 치달으며 1,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신탁통치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유엔 주도하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게 해야 한다는 제안을 소련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47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 상정하여 통과 되었다.
'48년 3월 31일 이전에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 후에 모든 외국군은 철수한다는 결의안 초안이 유엔에 상정 되었다. 그러자 소련측은 유엔은 한국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외국군은 통일정부 수립전에 철수하자는 대안을 내놓았으나 심의 과정에서 부결되고 '47년 11월 14일 미국측 안이 통과 됨으로써 한국문제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안으로부터 유엔관리하의 정부수립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에서 위원단이 구성되어 활동을 개시하게 되는데 북한으로는 그들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에서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 그 당시 남한 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한 단독정부 수립세력과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수립 지지 세력으로 크게 나누어져 대립하게 된다.
여기에 일부 지식인들이나 일부진보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후자를 택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했다고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 감성적인 통일이란 말에 촛점이 맞추어진 것이고 사실 그 당시의 객관적 남북한의 대립관계를 고찰해 보면 북한지역은 조만식 선생은 대표 자격이 없었으며, 소련의 지령을 받는 김일성은 전혀 우리의 바램과는 거리가 먼 소련 스탈린의 교시에 따라 오직 남한의 공산화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남북한은 북한은 소련의 지도하에 김일성 주관으로, 남한은 유엔감시단의 주도하에 정부를 수립해 나가게 된다.
제 2 절 북한의 공산정권 수립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북한이 어떻게 북한정권을 수립하게 되는지를 잠깐 알아보고자 한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 후 공군이 나진, 청진등을 폭격하는 가운데 8월 13일에 1개사단 병력이 청진항에 상륙한다.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고 평양에서는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중심이 되어 국내 공산주의자들까지 포함한 건국 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를 결성하여 정부수립에 대비하는 가운데 소련군이 24일에 평양에 진주하고 28일에 38도선 전역에 진주하게 된다.
소련군은 5개 사단,1개 여단 12만 명과 과 태평양 함대 사령부 해군 3만 명등 15만 명이 군정 체계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38도선 상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들은 38도선 요소요소에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남북을 잇는 경의선 등 철도와도로를 차단하고 교통통신을 페쇄하였다.
소련군은 군정을 실시하기 위하여 평양에 조만식선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승인하고 각도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면서 통일 정부를 만들되 신정부의 소재지를 서울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천명하였다. '45. 8월 24일부터 9월 말까지 도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일본인 관료로부터 행정기관,경찰관서, 경제기구 등 모든 국가기관을 접수하여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소련 군정 당국은 인민위원회위원장에는 한국인을 기용하되 소련군 장교를 고문 역에 임명하고, 그들이 입북시 대동한 소련계 한인을 요직에 배치하게 된다. 그러면서 10월14일에 평양에서 군중 대회를 열어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 주민 앞에 내세우게 된다.
제 3 절 조선에 임시정부수립과 신탁통치 5년
'45.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관해 3국(미.영.소)은 카이로 선언(한국독립인정)을 이행한다는데에 합의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임시정부 수립과 5개년 신탁통치안을 작성한다는 요지의 결정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남한은 즉각적인 반대 입장을 나타낸 가운데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모든 좌익계의 정당 및 단체들도 일제히 신탁통치 반대에 보조를 같이했다.
그러나 '46. 1월에 접어들어 공산당 계열이 소련 공산당측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에 평양의 조만식이 이에 반대하고 민족주의 게열과 반탁운동을 벌이자 소련군정 당국은 그를 감금하고 그의 세력을 제거함으로서 이를 계기로 김일성을 선봉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46년 1월 2일, 북한 주둔 소련군이 '46년 2월 15일 이전에 토지 조사사업을 완료하도록 강요하고 조사 대상은 전농호와 농민소유지뿐만 아니라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지까지 조사하도록 하고 김일성이 직접 개입하여 친일파와 지주들을 무력화 시키고 공산 엘리트들은 농민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군중집회등을 통하여 수정된 3.7제(지주 3, 작농7)의 정당성을 역설 하였다.
그러자 조만식 선생등 북한 5도 민족주의자들은 북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산당들이 민족주의자들을 말살하려는 공작에 대응하여 북한 주민의 환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11월 18일, 5도 행정국을 설치하고 12월 17일에는 김일성을 북조선 공산당 책임비서에 앉힘으로써 북한 공산당의 제1인자로 만들었다. 이어서 도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1946년2월8일 북조선 임시 위원회가 조직되어 김일성이 위원장에 앉게 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46년 11월에 각 시도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게 되는데 사실상 단일 후보를 추천하여 흑백 투표가 실시 되고 이 선거에서 선출된 위원들이 '47년 2월 17일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한다.
이어서 '48년 4월에는 소련 공산주의자를 모방한 인민 헌법안을 채택하고 8월 25일에 북한 전역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흑백 투표함에 공개 투표로 진행하여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북한정권 수립을 공표하였다.
여기서 그들의 북한의 혁명과제 이행을 위한 일련의 과정중 가장 핵심적이었던 토지 개혁과 사회 혁명에 대해 잠깐 알아보면 그 구호는 바로 "농민에게 땅을 달라, 토지를 농민에게 주라"는 구호로 변하여 간다. 그들은 친일파와 더불어 반동적 요소도 포함하여 공산주의 지도자에 대한 암살 음모, 테러단 조직, 지도 및 배후 조종자나 감행자, 반동단체 가담자도 민족 반역자로 규정한 가운데 우파의 활동 또한 민족 반역행위로 규정하여 물적 기반을 합법적으로 박탈하기 시작한다.
지주 중에는 5정보 이상은 몰수당하게 되는데 그들이 토지개혁이 1차 끝날을 때에 총 1백만 정보를 몰수 했는데 북한 총 경지면적의 반에 해당하며 일본인과 종교 단체 것은 4% 수준이고 96%는 지주와 민족 반역자등의 것이였다. 이렇게 하여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지배 체제의 구축과 강화를 가져오면서 국가기구 내의 반사회주의적 반동적요소들은 보안국을 중심으로 제거하게 되는데 보안대는 '46년 7월에 1만 5천명으로 급속히 성장하여 전국을 장악하게 된다.
북한의 숙청은 보안국이 창설된 직후인 '45년 11~12월부터 광범위하게 실시 되며 여기에 소련이 깊숙히 개입하여 모든 중대 정치범 숙청은 모두 소련군의 지시 하에 집행할 것을 지시하게 되는데 이때 북한의 군, 치안기구, 법조계, 관료 등에서 숙청된 사람 중 상당수가 남한으로 유입되어 들어오게 된다. 북한에서 보안부에 의해 체포된 정치범이 황해도의 '46년 1~6월 어간에 1,752명이며 이중 186명이 소련군에 이감되었다.
그렇다면 황해도를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보면 1개도에 1,752명이니 북한의 당시 6개도를 고려하면 1만여명이고 여기에 보안국이 아닌 치안, 정보, 검찰기관등을 고려하면 그 수는 매우 어마어마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철저히 소련식 공산화 과정을 답습하여 나가며 중요 산업의 국유화 조치등으로 70%이상이 사회주의적 경제 형태에 의한 생산이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에 "농업현물세"제가 가해져 생산량의 25%가 징수되고, 소련의 주둔비와 식량도 북에서 부담토록하여 이러한 것도 세금으로 착출하면서 실제로는 40%이상의 강제 징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김일성의 등장에 대해 일부 언급하고자 한다.]
김일성의 성장과정이나 집안구조는 언급하지 않고 그의 등장과정에 대해서만 언급해 보면 우리가 알고있다시피 식민지 지배하의 시기에 김일성은 만주에서 오랜 항일게릴라투쟁(일부는 마적단을 이끌고 있으면서 참여 했다고도 함)을 하다가 일본 동북군의 공산당 토벌에 밀려 1940년에 소련의 넘어 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일본군의 밀정처럼 되었으나 동북 항일연군 제2로군 사령관 주보중(중공 공산당)의 신분보증으로 석방되어 그 밀영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42년 8월 1일에 새로 창설된 동북 항일연군 제88여단에 만주의 항일게릴라투쟁의 지도급 인물이던 최용건, 김책, 김일성이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김일성이 소련에 머물고 있을 때에 소련군 대위가 되고 특히 그들의 주요인사(차바예프: 소련 내전중 유격대장)와 가까와져 모스크바도 2번이나 방문하여 그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제4절 러시아의 조선 진입과정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고, 이 처리과정에 청나라와 일본간에 텐진조약이 맺어진다. 여기에 주된 내용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게 되면 서로 통보하게 된다.
아니 우리나라를 놓고 자기들 기리 협작을 하게 되는데 바로 누가 조선을 먹느냐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조선의 동학혁명을 깃점으로 조선에 진출하게된 양국은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져 일본이 승리하면서 우월권을 일본이 쟁취하게 된다.
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일본에 대만과 용동 반도를 할양했다. 하지만 유럽 제국과 러시아의 헤게모니 다툼에 일본의 요동반도 진출은 러시아가 좌절시켰다. 러시아 주도로 프랑스, 독일이 함께 일본을 간섭하여, 요동반동에서 일본이 물러나지 않으면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게 된다.
결국 일본이 요동반도를 포기하게 되고 이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진출하여 뤼순 항에 군항을 만들고 남진정책을 펴게 된다.
때마침 조선에 아관파천이 벌어지며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되면서 청나라 사라지고 러시아가 그 대신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북아시아로 진출을 확대해 나간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에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조선땅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1896년 6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약 하나가 체결된다.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다. 러시아 와 일본의 외무부 장관격이 만나서 체결된 의정서에는 텐진 조약과 같이 양국이 조선땅에 군대를 파견시는 상호 간의 충돌을 에방하기 위해 양국 군대의 완충지를 마련하고, 각 군대의 용병지역을 확정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또한 양국이 같은 수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니 솔직히 당시의 제국들 사이에는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누가 조선을 먹느냐가 더 관심이 많았다. 러시아는 극동에서의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 시베리아 종단 철도를 건설하고 있었고, 1900년대 완성될 상황이었다.
여기에 일본은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는 1905년쯤에 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고 그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1904년 러일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고 계속적인 당파싸움과 민비와 대원군의 대립속에 신문물의 도입은 꿈도 꾸지 못했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급변하는모습을 알지 못했다.
누구는 일본이 없었다면 하는데 없었다면 러시아가 잠식했을 것이고, 그러면 더 빨리 공산국가의 길로 들어서 러시아의 위성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1.김일성과 러시아
이미 앞에서 어떻게 김일성이 북한으로 들어와 최고 수반이 되었는가는 기록하였다.
남한은 이승만이 미국의 힘을 받아 들였고, 일부 친일파들이 생존하게 되었다.
그럼 정말로 당시 북한은 자주적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45년 8월에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냉전체제로 들어갔다. 자우진영의 미국과 공산 진영의 소련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런 냉전의 최전방에 경계선 역할을 유럽에서는 독일이 동.서독으로 갈라지면서 독일릐 수도가 있는 베를린이 동독에 위ㅐ치하면서 동독지구와 서독지구로 갈라져 베를린 장벽이 구측된다.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이 남한과 북한으로 38선을 경계로 갈라져 미.소의 영향력 아래 각각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역서 눈여겨 봐야할 것이 소련의 만주지역 진출이다. 사실 소련은 일본에 1904~1905년에 패하면서 만주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의 바램은 부동항을 얻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이고 여기에 조선이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1945년 8월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폭이 투하되면서 소련은 이때다 싶어 곧바로 만주에 진입했다. 소련의 목적은 일본과 전쟁이 아나라 일보니 물러나면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발빠르게 들어왔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에 미국과 소련의 만주, 한반도에 대한 입장은 많은 차이가 있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하고자 했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하면서 단지 일시적 물러나 있었고, 불과 4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때 태평양에서 아직 일본과 전쟁중이라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전쟁을 끝내고 일본 본토에 상륙해야 되는지가 관심사였고 만주나 조선땅은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소련은 그들의 목적이 결국 전세계의 공산화이기 때문에 북한도 공산주의로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보다 먼저 만주와 북한에 들어와 특히 북한지역의 지도자로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가 문제였고, 소련 편에 설 사람을 지도자로 삼아야 했고 공ㅅ한주의자를 선정하여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더구나 아직 미.소나 기타 연합국과의 관계에 미묘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당연히 그런 의심을 잠재우려 국적이 소련이면 안되고 북한이면 탱큐였다.
여기에 만주나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도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탐색과정에 김일성이 선정되었다. 김일성은 소련 군대에서 3년간 훈련을 받아 소련 편이엇고, 공산주의자였다. 소련은 김일성을 밀어주기로 했고, 1945년 9월 김일성은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나고 내략을 받는다.
[김일성.박헌영을 스탈린이 면접하다]
한편 남한은 이승만,김구,여운형, 등이 주요인사였고 북한은 조만식,박헌영 등이 유며인사였다. 특히 박헌영은 일제 강점기부터 남한의 가장 강력한 남로당 총책이었지만 소련은 박헌영을 몰랐다.
이에 소련은 다시한번 북한의 적임자를 찾기위해 비록 그것이 위선이라할 지라도 김이성과 박헌영을 1946년 7월에 모스크바로 불러 스탈린이 면접시험을 보고, 김일성이 지도자로 선발되었다.(소련의 장군들의 증언, 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그리고 48년 9월 9일에 북한정부가 공식 성립되고 김일성이 수상이 취임했다.
제 5 절 남한 정부 수립과정
반면 남한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재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등을 고려하여 명망 있는 한국인에게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하려 하게 된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송진우, 여운형등이 총독부와 의사를 타진하게 되는데 송진우는 연합군으로부터 정부를 인수 받아야 한다며 탈퇴하고 결국 여운형이 혁명 단체를 총망라하여 독립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공산세력에 잠식 당하여 좌경화 되고 민족주의자들은 정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국에 대비 하였다.
소련군이 상륙한 지 22일 만에 '45년 9월 4일, 미군 선발대가 들어오고 9월 8일에 미 제7사단이 인천으로 들어와 충청도 일원까지 배치된다. 그리고 9월 말에는 제40사단이 도착하여 경상도 일원에, 10월 16일에 제6사단이 들어와 전라도 지방에 배치되며 총 7만 8000여명 수준이었다.
미 제24군단장 하지 중장은 일정기간 일본의 총독 체제를 유지하며 미국인으로 직무를 대행하게 하고 점차 한국인으로 대체 시켜 나간다는 복안을 갔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부터 일본식민통치를 연장하려 한다는 맹렬한 비난에 부딪치자 9월 12일 일본의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9월 2일에 새로운 군정청 기구를 편성하여 국장은 미군장교로, 현직에서 물러난 일본인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보좌토록 하였다.그러면서 임시정부지도자들을 입국시키는 것까지 거절하게 되고 남한에서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이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되다보니 당시 국내산업은 위축되고 정치적으로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좌, 우, 중도로 나뉘어 각축을 벌여 혼란이 가중 되는 가운데 아놀드 소장, 군정관이 10월 5일에 일본인 고문관을 퇴임시키고 김성수를 포함한 지도급 한국인 인사로 대체하게 된다.
미국의 최종 목표는 자유 독립국가를 수립해 나가되 군정-신탁통치-독립국가로 이행하는 절차를 이행하게 되며 이에 따라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10월 16일에 이승만이, 11월 23일에 김구와 많은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정부수임기관으로 인정치 않으면서 좌.우익을 망라한 각 정파의 정치활동을 허용함으로써 혼란이 발생하게 되며, 반면 북한은 유일한 김일성 단독 공산당이 모두를 통제하여 일사분란한 정부조직과 군비 증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48년 2월 26일 유엔이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남에 따라 '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하여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고 5월 31일 초대 의장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이어서 7월 17일 헌법과 정부 조직법이 제1호로 발표되면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가 들어가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였음을 명시 하게 된다. 그리고 '48년 8월 15일 대힌민국이 탄생하였다.
요즘 또 다시 불붙은 대한민국 건국의 시작이 어디냐에 대한 문제의 단초가 여기에 있다 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렇다면 아예 개천절 날을 우리의 광대한 독립국가로서의 당위성을 받아드리고 모두에게 저 광활한 만주벌판이 아니 북중국 지역의 위대한 지배자였음을 과시하고 그 위상을 찾으려 후세대는 노력해야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과 광명이세 사상을 포함한다는 비장한 논리는 잘못일까?
그로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유엔총회에 이를 보고하고 총회는 12월 12일 대한민국이 한국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승인하였다.
[여기서 잠시 신탁통치안의 좌우대립의 실체를 알아 보고자 한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남한에 진주한 후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련의 전후처리과정을 통하여 한반도 문제를 토의하여 독립국가로 가는 길을 모색한 반면,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후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을 위성 국가화하려는 계획을 진행시키면서 남북의 교역 및 교통을 차단한 채 미.소간의 회담개최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국무장관 번즈의 제의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미.소.영 3개국의 삼상회의가 개최되어 3국은 카이로 회담 선언을 이행하는데 합의를 한다. 카이로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스벨트,영국의 처어칠,중국의 장제스 3국 수반이 모여 1943년 11월22~26일에 1차, 2차는 '43년 12월2~7일에 이루어지며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한국의 독립보장을 11월27일 선언하였다.
이 회담의 내용은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회담도중에 애틀리로 교체), 소련의 스탈린이 참여하는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일시적인 신탁통치안의 협정이 받아들여지자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던 한국민은 전국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조직이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계열이었으며 조선 공산당을 비롯한 모든 좌익계 정당 및 단체들이 반대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46년도 1월에 들어 공산당계열이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을 지지하면서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 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좌.우익은 반탁과 신탁으로 극렬한 대립관계가 되었으며 북한에서는 조만식선생등 반대세력을 소련당국이 감금하고 그 세력을 제거함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게 되는데 이는 소련이 남한의 대표자를 선정하는데 신탁통치안을 지지하는 세력만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46년 5월 8일부로 무기한 휴회가 된다.
이때 남한은 종전과 같이 김구는 통일 임시정부를의 구성을 주장하고 김규식은 좌우합작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때 이승만이 공산당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남한의 단독정부수립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측의 하지군정은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김규식을 과도입법의원 의장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소련의 팽창주의에 따라 급격히 냉전으로 치달으며 여기에 미국이 소련에게 미,소,영,중국의 4대국 협상을 제의 하였으나 거부당하고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면서 북한은 공산당 단독정권의 창출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 분위기 속에서 남한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무게을 실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미국의 국무장관 마셜이 '47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수립을 하자고 제의하여 통과 하게 되었다.
이미 소련과 북한은 이런 유엔의 결정에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게 되어 남한만의 정부수립을 위한 선거가 '48년 5월 10일에 실시 되었던 것이다.
제6절 6.25전쟁 직전 남북한 전투력 비교와 위장평화공세
1. 먼저 북한에 대해 알아보면
해방 직후 소련군정이 체제를 갖추기 전가지 북한 지역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조직한 자위대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치안대가 사회질서와 치안을 담당하였으나 소련은 김일성이 입북하자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각 도청 소재지마다 적위대를 편성하고 무장화하여 소련 군정을 대리한 경찰기관의 역활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서로 주도권 쟁탈전등으로 문제가 야기되자 이를 빌미로 해산해 버리고 소련군에 추종하고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인원 2천여명을 선발하여 보안대를 설치하여 운용하다 보안대만으로는 치안과 경비, 특히 철도 경비에 부족하다는 명목으로 철도 보안대를 창설 하였다.
이후 '46년 2월 8일 평양학원을 설치하여 군간부와 정치간부의 양성을 담당하게 되는데 주로 김일성 직계의 빨치산 출신들이 장악하여 핵심분자들을 선발하게 되며 이후에도 중앙보안간부학교, 보안훈련소, 철도경비훈련소등에서 군조직에 필요한 간부를 양성하였다.
또한 보안간부 훈련대 내부에 훈련소 3개소를 설치하여 18세이상 25세까지의 청년으로 모병하였으나 기피현상이 심해지자 강제징집을 시행하면서 초기에는 일제 38식 소총으로 그러다 소련제 소총과 탄약을 확보하고 소련군 장교를 고문관으로 두어 조직적인 체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다 미.소의 대립이 격하게 되자 '47년 5월에 이르러 훈련소 3개를 보병 제1사단, 2사단, 그리고 제3독립혼성여단으로 승격시키고 본격적으로 근사력 강허ㅘ와 군사원조의 획득에 박차를 가하여 소련으로부터 박격포, 곡사포, 대전차포와 각종 기관총과 다발총, 소총등을 장비하게 된다.
그리고 '48년 2월 8일에 정규군 창설을 선언하며 인민군총사령부로 거듭나고 '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의 공포와 더불어 인민군총사령부를 민족보위성으로 격상시키게 된다.
각사단은 중대급까지 소련군 고문관이 150명을 배치하여 소련군이 철군을 완료한 '48년 12월 중순에 모스크바에서 조,중,소 3개국 대표가 모여 18개월 내에 인민군을 남한 침략에 충분하게끔 증강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소련군 군사사절단이 12월말 입북하게 되는데 입북하면서 하얼빈에서 조.중 실무진과 만나 동북의용군의 입북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에 따라, 북한은 '49년도에 소련으로부터 소총 15,000정, 각종 포 139문, 전차 87대등의 수많은 전투장입를 인도받게 된다.
중공으로부터는 '49년 4월 조중회담에 따라 중공군 제166사단(방호산), 중공군 제164사단(김창덕), 그리고 독립 제 15사단(전우)과 중국 각지의 한인의용군 약 50,000며이 '49년 7월부터 '50년 5월까지 북한으로 입북하였다. 그러니 이들은 사실상 전투경험이 풍부한 실전 군인들인 셈이다.
이러한 장비와 인력을 기반으로 거국적인 전쟁준비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각도에 민청훈련소와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제2보충력을 확보하는 노력 또한 계속 하였다.
김일성은 '50년 4월에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여 전차, 자주포, 각종포병화력, 통신장비 도하장비들을 추기로 지원받고 한인계 중공군 제5사단으로 제12사단을 창설하는등 무려 육군은 10개사단에 지원 및 특수부댈르 합하여 18만 3천명, 해군 및 해병대는 육전대를 포함하여 1만 3천 700명, 공군은 1개 비행사단 2,000며으로 19만 8천여명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여기에 장비를 알아보면 전차 242대, 장갑차 54대, 자주ㅗ 176문, 곡사포 552문, 박격포는 82mm 1,142문등 1,728문, 고사포 36문, 항공기 211대, 함정은 경비함 30척, 보조함 80척을 보유하였다.
2. 반면에 국군은 더디게 진행 되었다.
구심점이 없이 미 군정의 통제를 받아오면서 국내에는 30여개의 사설단체들이 난립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서북청년단으로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을 목표로 조직한 우익청년운동단체로 1946년 11얼 30일 서울에서 결성하게 되며 경찰의 좌익 색출업무와 좌우익 충돌시 우익 선봉의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47년 7월에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약칭 : 한청으로 김구 성향 지지)을 조직하자 '48년 9월에 일단 통합하게 된다. 이때 통합에 반대하는 인원들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고 이승만 노선을 따랐으며 '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에 흡수 된다.
또한 예로 당시 영등포에는 윤재옥을 중심으로하는 36명의 청년들이 해방후에 영등포청년회를 조직하여 영등포 일대 27개 동지부를 조직하고 광복군 출신 장교에게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1천여명으로 세력이 늘어나게 되자 광복청년회 영등포 특별지회로 재발족하면서 '46년도 가을의 철도파업을 분쇄하고 '47년3월 1일 일명 '신길동 피바다 사건'에 관여하며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46년 10월에 미군정의 전면적인 후원을 받아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으로 100만 명이 넘었다. 차후 이승만의 지시로 대한 청년단에 흡수 됨)과 세력다툼 싸움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기에 미군정의 한국측 치안책임자인 조병옥 경무과장이 이응준, 원용덕등의 조언을 받아 미군정과 창군 협상을 벌여 '45년 11월 13일에 국무국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에 경무국과 군무국을 두게 되고 군무국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이들을 편성했을시에 훈련을 담당할 장교가 없어서 먼저 '45년 12월 5일에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여 4개월간 110명을 임관 시킨후에 폐교하고 '46년 6월 1일에 새로이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창설하게 된다.이 학교가 후에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사관학교로 개칭하게 되는 것이다.
가. 육군
이러면서 미군정은 한국군을 창설하기 위해 각 도에 1개 연대식 총 25,000명으로 하는 "뱀부 계획"을 발전시켜 '46년 1월 15일에 처음으로 경비대는 태능에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를 단지 소총만으로 무장하여 창설하게 되면서 모병 업무에 들어가 4월 1일까지 8개중대를 편성하여 일단 8개연대의 창설을 완료한다.이후 '47년 3월에 제주도에 제9연대를 창설하였다.
이때 장비는 미군으로부터 일제의 38식 및 99식 소총으로 장비하고 일본식 복장을 착용하였으며 '46년 9월 이후에 점진적으로 미제 병기와 피복으로 전환해 갔다.
이때 받은 훈련은 고작 총검술, 집총훈련, 폭동진압법등 치안유지 위주로 실시 되었다.
이와같이 국방사령부가 경비대의 창설에 몰두하던 시기에 군정청의 각 국이 부로 승격하면서 국방부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소련측의 조직적인 반대로 6월15일에 국방부에서 국내경비부로 개칭 되면서 조선국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사령부는 조선경비대사령부로 된다.
나. 해군
한편 해군은 '45년 11월 11일 발족했던 사설단체인 해사대를와 조선해사보국단을 통합하여 손원일 정극모등이 주도하여 조선해사협의회를 만들고 이를 모체로 해안경비대를 창설하고 명칭을 '해방병단'이라 하였다,
해안경비대는 '46년 9월 15일에 미해군으로부터 처음으로 상륙정 2척을 인수받고 '48년 1월 14일까지 상륙정 6척, 소해정(AMS급)18척, 소해정 (JMS급)18척, 유조선 1척을 인수받고 '47년 8월 30일 38도선 이남의 해상 방위업무를 미 제7함대로부터 인수 받는다.
다. 공군
공군은 1946년 8월 10일에 항공건설협회를 조직하고 공군 창설을 목표로 노력한 끝에 '48년 5월 15일에 경기도 수색에서 통위부 직할로 항공부대를 창설 하였다. 그러다 6월 2일에 조선경비대로 예속 변경 되고 '48년 7월 27일에 김포로 이동하였으나 비행기는 1대도 없고 병력은 고작 105명에 불과 했다.
그러나 계속적인 우리의 반대여론에 미군정은 국내경비부를 통위부로 '46년 9월 12일 개칭하게 되는 가운데 소련이 '47년 10월에 미소 양 군대의 철수를 언급하자 긍국적으로 미군의 철수을 염두에 두고 군 증창설에 박차를 가하여 '46년 7월 1일 처음으로 대방동에 보급부대가 창설 된 것을 기점으로 병기, 병참, 공병, 의무, 육군병원,제51통신대대등이 '48년 5월1일 사이에 창설 되었다.
그러면서 추가로 계속적인 군비확충에 노력하여 '48년 4월부터 5월에 추가로 6개연대가 창설됨으로서 15개연대가 편제 되었다.
'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조선경비대는 국군으로 새출발을 하게 되는데 대통령밑에 국방부장관을 그리고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로 공군은 육군에 예속 되어 있었다.
총 23만명의 병력 소요에 창설초기 모병과정에서 사상을 고려치 않고 인원을 받아들여 좌익사상을 가진자들이 들어와 군내에 용공사상을 부식시키는 한편 일부 남로당과 연결된 세력들이 세포망으 로 조직하고 반란과 폭동을 유발하여 '48년 10월부터는 대대적인 숙군작업이 진행되어군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러나 소련의 정부수립전 외국군 철수에 반대하여 ,미군은 정부수립후 철수안을 유엔으로부터 인정받고 융통성을 확보하였으나 소련이 다시 '48년 12월 16일 북한에서의 철수가 완료됨을 발표하여 주한미군도 '49년 1월 15일 미 제24사단을 해체하고 7,500명 정도의 1개연대 전투단과 임시고문과만 잔류시킨 채 철수하고 이어서 '49년 6월 30일에 군사고문관만 남기고 모두 철수 완료 하였다. 이 시기에 국군은 다시 10연대를 증편하여 3연대 또는 2개연대를 묶어서 8개사단을 편제하게 되었다.
3.당시의 부대별 위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육군의 제1사단은 11.12.13연대로 수색에 , 2사단은 5.16.25연대로 대전에, 3사단은 22.23연대로 대구에, 5사단은 15.20연대로 전남 광주에, 6사단은 2.7.9연대로 원주에, 7사단은 1.19연대로 의정부에, 8사단은 10.21연대로 강릉에 수경사는 3.8. 1기갑연대로 서울에 창설 되었다.
국방부는 '49년도에 예비대 편성에 착수하여 육군본부에 호국군 사령부를 두고 7개여단 18개 연대를 지역별로 편성하여 호국군은 거주지에 주둔한 연대에 소속되어 생업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다 '49년 8월 6일에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는 병역의무를 가진다"는 국민개병주의를 채택한 병역법의 제정에 따라 지원병에서 의무병제로 전환 되어 8월31일부로 호국군 제도가 폐지 되고 대신 육군 본부에 청년방위국을 신설하여 대한청년단 조직을 중심으로 도.시.군.면.동.리 단위로 조직하였으나 훈련이 되지 않아 유명 무실하였다.
그 밖에 육군은 북한에서 탈출한 청년과 귀순장병들로 수색학교. 독립 제1대대. 호림부대(영등포 학원). 보국대대(제803둑립대대) 등 특수부대도 창설하여 지방공비 소탕과 대북공작도 준비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해군은 여수순천반란 사건에 출동하여 해상봉쇄작전과 지상군 지원작전을 실시하여 작전경험을 축적하고 '50년 4월 1일에 미군으로부터 구잠함(PC)4척을 구매하여 3인치 포를 장착하고 '49년 4월 15일에 해병대를 진해에서 1개 대대규모로 창설하여 육전대 임무를 수행토록 함으로써 실제 진주지역 공비토벌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후 12월 28일에 제주도로 이동하여 부대증편에 주력한다.
한편 육군의 항공기지부대로 있던 공군은 '49년 9월 4일에 L-4형 연락기 10대의 인수를 계기로 육군 항공기지사령부로 개편하고 미군에 전투기등의 추가 도입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면서 '49년 10월 1일에 공군을 육군에서 독립시켜 구군을 육.해.공 3군체제로 발전시키게 된다.
4. 이에 따라 전반적인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병력 규모는?
육군은 국군 94,974명대 북한군 182,680명이었다.
해군은 국군이7,715명, 해병대1,165명 대 북한군은 13,700명이었다.
공군은 국군이 1,897명 대 북한군은 2,000명으로 거의 1:2로 절대 열세 하였다.
장비 분야는?
더 비침할 정도로 열세하여 전차 및 장갑차가 27대인 반면에 북한군은 296대, 자주포 및 곡사포는 자주포는 없고 곡사포91문에 북한군은 자주포 176문 곡사포 552문으로 숫적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고 박격포는 960문인 반면 북한군은 1,728문으로 상대적 열세에 있었으며 대전차포는 우리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하지 못하는 2.36"위주 2040문을 보유하고 북한군은 40mm 550문을 보유하여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항공기는 우리는 연락기 수준의 비행기만 22대 보유한 반면 북한군은 전투기 등을 포함하여 211대를 보유하였으니 비교자체가 창피스러운 현황이다.
해군은 우리가 이것저것 다 합쳐 71척인 반면 북한군은 220척을 보유하였으니 무슨 수로 그들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의 국방경비대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황대형 당시 1사단 참전용사의 증언을 통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용사님은 '48년 6월 1일에 온양에 있던 제13연대에 입대 했다. 군번은 2501657번이다.
"그때 지급받은 무기나 피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주로 일제 99식 도는 38식 소총을 받았는데 99식 소총에 착검을 하면 내 키보다 더 길어요. 1개 분대가 12명이고 일본식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복은 어떻게 된 건지 미제였어요."
"그런 생활에서 힘든 것은 무엇입니까?"
"항상 배가 고파요, 당시에 아침과 저녁은 통밀을 삶아 지은 밥이 주식이고 점심은 통밀을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를 먹었는데 여기에 손이 필요하여 사역병을 차출하는데 훈련시절 가장 인기있는 사역병이었지요. 그 이유는 많이도 먹지만 수제비로 솥 가에 붙여 만든 부풀데기나 나 누릉지를 훔쳐와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훔치다 발각되면 취사반장한테 장작개비나 물을 푸는 고무호스 등으로 무차별로 맞아 반은 죽는 날이 됩니다."
"훈련 받으며 무슨 에피소드는 없없습니까?"
"중대장이 기분이 좋으면 각개전 훈련을 고구마 밭에서 시켜요. 병사들이 생고구마로 요령껏 배를 채을 수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밭두렁이 큰 곳을 택하려 눈치 싸움이 벌어집니다. 두렁이 커야 고구마가 많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발로 힘차게 내리차면 2~3개 나오는데 그걸 미군이 준 옷이 크기 때문에 잽싸게 상의 속에 넣고 나와서 기회를 봐가며 먹느데 하루는 밭주인이 찾아와 강하게 항의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대장이 "왜 군인들을 고구마 도둑으로 보느냐?"며 주인에게 큰소리를 치고 중대원을 집합시켜 놓고 상의를 모두 벗게 했어요. 당연히 모두 처리하여 아무도 나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거지요. 그런데 꼭 그런데 동작이 둔한 친구들이 있거든요. 한 사람 몸에서 고구마며 고추등이 떨어진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일본도를 들고 철모를 내리치고 난리가 나니 주인이 미안해서 슬그머니 도망치고 마는 겁니다. 하하. 그러면 중대장은 피익 웃으며 부대를 정리정돈 하라고 하지요."
5. "위장전술과 경계태세"
그러나 상기 내용에서와 같이 북한의 남침을 위한 군비확장과 주민들의 일사분란한 통제 체재가 갖추어진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속에서 남한은 전혀 알아채리지 못하고 계속하여 좌우익의 대립과 정당간의 정쟁이 계속 되고 있었다.
아마 사실 그때 알아 차렸다 하더라고 병력과 장비면에서 월등히 열세였기 대문에 밀리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고 본다.
여기에 북한은 우리보다 빨리 군의 정예하를 갖춘 상태에서 유격대를 10회에 걸쳐 내륙 깊숙이 침투시켜 아직 걸음마 단계인 군부대를 공비토벌에 투입토록 강요하여 전방경계태세를 이완 시킴은 물론 내부적으로는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위장평화 공세로 우리의 경계심을 무력화 시키는데 주력하여 실제 그 여파로 전쟁 직전까지 있던 경게태세를 해제하게 되는 등 그들이 요구하는 여건 조성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45년 말부터 시작된 사회 각 계층의 구성원들에 대한 조직화를 위하여 지식인과 문화인들을 선전선동에 끌어들이고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처단하는가 하면 1948년 3월부터는 기관단총을 자체 생산에 들어가게 된다.
'49년 6월 29일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통)을 결성하고 그들 방식의 평화적 통일방안을 제안하게 된다. 이때 글들은 북한은 좌파가 80%, 남한에서는 65~70%가 된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원하느 득표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당연히 그제안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로 인한 정치적 승리를 달성하려는 의도였다.
'50.5월 30일에 조통은 평화 통일일 방안으로 유엔 감시하에 한국인 자결원칙에 입각한 남북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8월에 실시하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평양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과 남한에서 간첩활동으로 체포된 이주하(함흥출신, 공산주의 운동가. 월남하여 박헌영, 이강국등 재건파조선공산당 정치국에서 활동. 박헌영이 월북한뒤에는 총책을 맡은 김삼룡을 보좌 하였다. '50.3.17일 체포되어 '50.6.28일 총살))김삼룡(충북 충주 출신. 박헌영, 이현상등과 경성콤그룹결성, 조선 공산당활동. '50년 3얼 18일 체포. '50.6.28일 총살)등과 교환하자는 제의를 하는 등 계속적인 위장 평화공세를 하며 다시 전쟁 직전인 6월 19일에는 우리 국회가 원하는 방법으로 통일방법을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등 끝임없는 무력 충동과 위장평화 공세를 강화 하였던 것이다.
이런 반면에 우리의 경계태세는 한심한 수준이었으니 최전방에서 올라오는 북한군 대부대 및 전차부대 이동상황마저 훈련으로치부하고 뭉개버려 그들은 아무런 제제없이 편한하게 준비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미 '50년 접어들어 북한의 전쟁준비는 완료되었고 남침은 시간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5~6월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는가 하면, 맥아더 장군도 '50년 3월 10일 워싱턴에 보낸 비밀 정보 보고서에 "6월에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것이다."라고 지적 하였다. 이에 따라 5~6월의 위기설이 파다한 가운데 '50년 4월 10일 육군 참모총장에 재기용된 채병덕 소장은 4월 22일과 6월 10일에 걸쳐 8개 사단장을 교체하고 등 주요 군 수뇌부 인사조치를 단행하고 경계 강화 조치를 취하였다.
5.1 노동절을 전후한 남침과 폭동을 고려한 비상조치, 5.8일에 5.30선거의 혼란기를 틈탄 침략가 폭동을 대비한 경계태세, 그 다음에 북한의 6.7남북한 선거제의, 6.10 요인 교환제의등 평화공세에 따라 6월 11일부터 군에 비상경계 명령을 하달 하였던 군이다.
그러나 아무런 징후가 없다며 6월23일 24:00부로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제하였다.
하지만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것은 바로 11일부터 23일 어간에 부대이동이 이루어진 사실이다. 여기에 다음날인 24일에는 토요일로 부대가 외박.외출에 휴가등으로 1/3의 병력이 제자리를 비우게 되었던 것이다. 더하여 유엔한국위원단이 6월9일부터 23일까지 전방을 순시하고 유엔에 올린 보고서에도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쓰여지고 있다.
한편 6월 24일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전방 부대의 보고 등을 종합한 결과로 북한의 전면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되어 비상경계의 해제중지와 휴가 및 외출의 중지 등을 건의 했지만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히려 이날 밤에 육군회관 장교구락부 준공 파티가 열렸고 여기에는 채 총장등 수뇌부와 각급 부대 지휘관이 다수 참석하여 밤늦도록 연회를 즐겼다는 사실이다.
제3장 : "우리는 모두 검다?"
그리고 운명의 날 새벽이 오고 있었다.
'50.6. 25일 04:00, "폭풍(6.25전쟁 공격 개시 암호명)"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작전명 암호다.
하지만 여기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몇가지 문제점을 집고 넘어가야만이 나의 직성이 풀릴 것같아 좁은 소견이지만 듣고 남의 자료를 통하여 알았던 것을 적어 보고자 한다.
제1절 : 스탈린-김일성-모택동의 삼각관계
우리는 현재도 과연 전쟁이 소련이아 중공의 사전 허락없이 북한의 독단으로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를 많이 하게 되고 결국 이문제는 무시무시한 추론인 북침이냐 남침이냐의 문제로 직결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는 베일에 가려 아닌말로 목소리가 크면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되어 미국의 요란한 대학교수인 커밍스같은 자의 주장으로 일부는 북침이 전쟁의 시작이었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휘둘린 결과이며 그 실 예가 소련이 무너지면서 공개되는 스탈린과 김일성, 김일성과 스탈린의 삼각관계의 대화 내용을 통해 그 핵심적인 부분을 이해할 수 있고 분명 남침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본다.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식의 일국사화주의 구축론을 따라 '45년부터 48년가가지 북한의 사회주의 구축이 완료되자 조선의 국토완정론을 제기하며 전국 혁명을 추구하게 된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건국 후 최초로 '49년 3월 3일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식적인 회담에서는 주로 북한의 경제지원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방대한 지원을 약속 받는다.
그 다음에 비밀 회담에 들어가 군사문제가 주로 논의 되었다.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 나와 있는 내용을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김일성과 스탈린
김일성 :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습니다. 북조선에 대한 반동세력의 도발이 점점 격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육군은 있지만 해안방어가 거의 전무합니다. 이 점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스탈린 : 미군은 남조선에 몇명이 주둔하고 있습니까?
김일성 : 최고 2만 명쯤 됩니다.
스탈린 : 남조선 군대는 있습니까?
김일성 : 있습니다. 약 6만 명입니다.
스탈린 : 그들이 두렵습니까?
김일성 :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군을 갖고 싶습니다.
~중략~
스탈린 : 남조선군이 침범해 많은 초소를 뺐겼다가 다시 찾았다는게 사실 입니까?
김일성 : 강원도 지역 38선에서 충돌이 있었습니다. 우리 경찰은 무장이 부실해서 나중에 정규군을 투입해 남조선군을 격퇴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에 의한 조선통일에 대해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고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확실한 히믜 우위가 갖추어졌을 때에만 남침이 가능하다고 한다.
김일성 : 스탈린 동지, 이제 상황이 무르익어 전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의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빨치산 부대의 지원이 있습니다.
스탈린 : 남침은 불가 합니다. 미군이 존재하는 한 불가 합니다.
김일성 : 그렇다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의 통일기회는 없다는 말씀인가요. 남조선 인민들은 하루 빨리 통일을 해 반종정부와 미제국주의자들의 속박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스탈린 : 적들이 만약 침략의 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해 올 것이오. 그러면 절호의 반격기회가 생깁니다.
2. 모택동과 김일성
이렇게 하여 실질적인 남침승인을 묵시적으로 얻은 김일성은 이번에는 김일을 중공에 보내 모택동과 조선전쟁문제를 상의 하는 것과 만주에서 활동중인 조선인 부대를 귀국시키는 두가지를 협의 하게 된다. 만주지역에 있는 항일무장투쟁자들은 대부분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중국과 북한은 한인병사들의 북한귀국문제를 중국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던 '49년 5월부터 이미 논의 하여왔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3개 한인사단중 한만국경에 가가운 곳에 있는 2개사단은 북한의 요청이 있으면 즉각 귀국 시키고 훈련이나 보급품등은 모두 제공한다고 약속 하게 된다.
바로 이들이 '49년 8월까지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과 164사단이 북으로 들어와 인민군 6사단과 5사단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0년 4월 25일에 제15사단이 원산으로 들어와 북한군 제7사단으로 개편되었다가 남침전에 제12사단으로 개칭되고 ,그 후 제7사단으로 신편되었다.
모택동은 전쟁은 신속히 끝나야 한다며 장기전시는 일본이 개입해 남조선을 도울 수 있다(모택동은 이미 미군이 곧 철수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러면 일본이 한국을 도우리라 판단한 것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지근에 소련이 있고 만주에 중국이 있으며 필요시 중국군을 보낼 수 있다고 말하고 그 유명한 "우리는 모두 검다, 미국 사람에게는 구별도 안된다"고 격려 하였다.
그러면서 중공군이 장개석 군대를 완전히 몰라낼 때까지는 좀 결정적 행동을 기다려줄 것을 김일성에게 권고 하였다. 이 회담 내용은 바로 모스크바에 타전되고 소련과 북한의 우두머리들은 미군의 철수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제 2 절 남침의 승인과정
김일성과 박헌영은 '49년 6월의 적극적인 평화통일 제안이 실패하면서 평화통일의 제안과 동시애 군사적 침투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빠구게 되며 이것이 "화전양면전략"이었다.
그래서 바로 태백산을 이용한 유격군의 침투가 내륙깊숙이 까지 10회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대응하여 반격을 하면 바로 스탈린이 말한 선제공격의 빌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49년 8월에 두차레에 걸쳐 모스크바로 휴가를 떠나는 슈티코프를 만나 남한이 조국전선의 평화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공격을 감행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하게 뒤따를 것이라고 강조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미 몇차례의 국경충돌에서 군사력이 훨씬 우위에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말하고 남한의 삼척에 해방구를 만들어 남조선을 혼란스럽게 하는 방안도 강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그들은 옹진지구에서 계속 우리의 38선을 무력으로 남하하여 송악산 전투가 진행되고 태백산맥으로는 유격군이 계속하여 침투하였다.
1950년들어 동아시아 사태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무엇보다도 1949년 가을 중국혁명의 성공에 따른 중국대륙에서의 통일된 공산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중국 혁명의 성공, 모택동의 방소, 소.중 연대의 형성을 통해 소.중은 북한이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에 동의 하고 ,북한이 외부의 군사적 지원없이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 다만 미국이 참전할 때만 소련이 참전한다는 내용이 스탈린과 모택동간의 회담에서 결정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50년 4월에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통역가로 88여단 시절부터 김일성비서였던 문일을 대동하고 스탈린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스탈린으로부터 남한침략의 동의를 받아냈다고 그 문일이 증언하게 된다. 그리고 4월 25일 평양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회담에서 스탈린은 두가지를 질문했다고 한다. 하나는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두번째는 중국의 지원여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중국으로부터 확약을 받은 상태니 답변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다시 모택동을 방문하여 스탈린과의 회담결과를 설명했고 모택동도 동의 하였으며 추가적으로 모택동은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 병사들을 12,000명을 열차편으로 '50년 4월18일에 원산에 도착 시켰다.
이렇게 하여 소련은 이들을 무장할 무기들을 보내게 되면서 모택동-김일성-스탈린의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을 위한 무력 남침계획에 마침표를 찍고 적극적으로 지원자가 된다.
하지만 김일성은 마지막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미군의 조기개입에 대힌 모택동의 신중론을 무시해 버리고, 한편 6월 10일 그들이 다시 주장한 평화통일제의를 남한이 거부하자 계획대로 되었다고 판단하고 마지막 단추를 누르게 되었다.
당시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직접 보낸 보고서를 한번 보자.
"남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했음. 공격계획을 예정대로 진행시켜 나가야 겠음. 병력을 38도선 부근으로 이동시키고 추가 평화통일 제의를 하겠음."
3. 여기서 소련을 그렇다치고 어떻게 중공의 모택동이 북한의 김일성을 지원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일부 있을 것이다.
이 의문은 이런 곳에 그 대답의 핵심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우리는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져 완성된 국가를 다져 나갈 때에 중국은 장개석의 국부군과 모택동군간의 내전이 끝나지 않고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실제 모택동의 만주 팔로군이 안동에서 국부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바로 조선의용군이 도와줌은 물론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지원이었다. 1945년 종전후 국공내전에 시기 동북 삼성에서 국부에 맞서 중공측에 참전한 조선족은 6만 2천 942명에 달했다고한다. 연변에서는 총 3만 4천 855명이 참전했는데 이 숫자는 연변 총참군 숫자의 85%에 달했다고 하니 실제는 조선족이 국부군과 전투를 벌인셈이다.
항일 투쟁 당시에 조.중공산주의자들의 연대를 강력하게 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공동의 목표를 당성하기 위해 자연적인 지리적 근접성연대와 공산주의자들의 연대를 강력하게 한 기본적인 지원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과연 간도와 만주지역에 조선인은 얼마나 있었는가가 질문이 될 것이다.
조선인이 이 지역에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해방 한 세대 전의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였다 한다. 1922년에 65만여 명이었는데 1936년도에는 88만 8천여 명으로 증가되고 '42년도에는 156만여 명에 달하여 만주지역은 조선인의 또하나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1910~1926년까지의 이주민을 보면 평북이 5만 3천여 명, 경북이 3만2천여 명, 함북이 2만9천6백여 명, 함남이 2만4천7백여 명, 평남이 1만7천9백여 명, 강원이 1만6천5백여 명으로, 남한은 각도를 합쳐 9천2백여명이었는데 북의 숫자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숫자는 북한의 당과 군의 주요간부의 사상적 교육을 담당하는 442명의 조선인민군 문화간부의 성향을 보면 항일연군이 5명(1.1%), 팔로군이 422명(95.5%), 지하운동자 9명(2%), 기타 6명(1.4%)였다는 점에서 얼마나 북한군이 모택동군대와 연대되어 있는가의 키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즉 김일성 군대의 핵심간부는 모택동 군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서 주요 인물을 보면 최용건, 무정, 김일성, 김책, 방호산, 최현, 김웅, 박일우, 김일, 안길등으로 우리가 낮익은 군 지휘관들이 대부분이다. 좀더 자세히 북한의 모택동 돕기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국부에 맞서 중공군을 도와 주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북한지역이 중공군의 후방기지가 되어막사를 제공하여 주고 훈련기지, 병원 등을 제공하여 주는 것이었다.
이는 '46년 10월에 안동이 국부에게 함락되자 중국군은 대거 북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병력이 1~2만은 되며 밤포진 청진 정주등에 주둔하게 되고 북한과 소련군이 장비와 물자를 제공하고 그들로부터는 식량을 받았다. 이때 중공군은 육로뿐만 아니라 대련에서 해상을 통하여 탈출하여 부대를 진남포에서 받아 북한을 거쳐 다시 만주로 보내지거나 신의주 방면에서 들어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쳐가는등 중공군의신속한 철수-이동-재배치에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만주는 모두 세번에 걸쳐 조중 두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공동투쟁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첫째는 항일투쟁시기, 두번째는 중공혁명시기, 세번째는 한국전쟁시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북한이 중공을 도와주던 시기는 모두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시기로 소련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협력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며 이 땅에서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는 정의의 전쟁이라고 열변하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 북한이 주체성이 있는 주권 국가인가다.
그들은 오직 스탈린의 지도와 모택동의 동의하에 동북아세아지역에서의 세력확장을 꾀하는 소련의 곡두각시였지, 절대로 독립적 선택이 아니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공산당을 위한 공산당원에의한 공산주의국가다. 오직 김일성일가의 수령통치국가인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의 전쟁이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 전쟁이며 이를 위해 전쟁을 누가 도발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성격에 촛점을 맞추어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전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므로 미제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는 6.25전쟁은 정의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해방이후 앞에서 언급 되었던 남북한의 정권수립과 군비확충의 단계를 보면 그 답은 명백히 나온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민족해방전쟁은 공산화를 위한 무력침략전쟁이다.
이미 언급되었다 시피 우린 유엔의 감시하에 합법적인 제헌의회가 비밀투표에의해 성립된 반면 북은 오직 한사람만을 내세워 놓고 공개투표로 진행한 공산당원 감투투표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바로 공산당 1당 독재체재였으며 김일성 1인의 위성국가였다.
더구나 전쟁 준비과정의 김일성와 스탈란 그리고 모택동의 대화에서 이미 남한을 무력의로 적화통일한다는 것에 대한 상호 의견통일을 본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 공개된 엄현한 자료속에 다 있다.
4. 그러면 그들은 왜 민족통일해방전쟁이라 했을까?
답은 명확하다. 누가 전쟁을 도발했는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38선상에서의 무력충돌을 야기하고 북침이라는 명분을 만듦은 물론, 남한의 많은 인민이 원하는 조국해방전쟁이라는 구실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해방은 자유민주주의국가로의 진행이 아닌 제국주의, 다시말해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빙자하여 민중, 아니 인민의 저항력을 키우고 이를 이용하여 요즘 금수저라는 혹평을 받고 있는 저명인사나 재산가, 지주등을 타도하여 인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로 가자는 것이고 이를 위해 무력 투쟁을 하라는 선동이며 평등사회를 부르짖고 있다.
우리 공산화된,요즘 박항서신드롬에 흠뻑 젖어있는 베트남을 보라. 그곳에 평등이 존재하고 인민이 잘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동구라파를 봐라. 영국, 덴마크, 독일, 프랑스에 비해 체코나 유고, 루마니아 등이 살 살고 평등이 보장된 나라였는지 말이다.
그건 또 다른 권력인 공산당에의한 공산당원을 위한 정치며, 결국 낙후되고 인민이 배가 가파서 인민에의해 무너진 소련부터 다시 인민에의해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백.청.적의 원 러시아 국가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낡은 공산주의는 살아 남지 못했다. 무너졌다. 그러나 유독 북한만 공산주의도 아니고 전재미문의 왕조시대를 꾸미어 법 위에 김일성가가 존재하는 그런 나라로 되어 버렸다.
전쟁전에 남북한 경제수치 비교는 남한이 1인당 국민소득이 90$였고 북한은 270$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린 3만$시대이고 북한은 1,500$수준에 불과 하다고 한다. 거지도 남한의 거지가 훨씬 자유롭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이제는 원자폭탄이라는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여 막가파식 벼랑끝 외교전을 하고, 뭔가 안주면 자폭해서라도 다같이 죽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통미봉남" 전략으로 미국을 한반동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들의 비핵화와 맞물려 미군의 한반도 핵전략의 유입을 원천 차단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은 트럼프 독트린으로 자국의 이익에 국한 되는 것에만 촛점을 맞추어 다시금 6.25전쟁 직전의 미군을 철수해 간 "애치슨 라인"의 선포가 임박한 것처럼 위험한 등거리 외교가 꼭 구한말 주변 강대국에 휘둘린 민비와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의 싸움처럼 비화 되어 가는 현실을 구경만 할 것인지 사뭇 걱정스럽다.
제2절 : "풀리지 않는 비상해제와 채총장의 지휘관 교체 및 부대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면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정말 아무런 대비도 않하고 가만히 앉아서 그냥 당했느가에 대한 의구심과 하필 전쟁 전야에 연회를 배풀고 많은 병력을 외박 및 휴가를 보낸는가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때에 맞춰 주요 지휘관을 교체한 것이 우연의 일치였을가에 대한 의문점이 지난 20년간 끝이지않고 진행형이다.
사실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진실을 향한 의문점은 진행형이다. 그러나 몇가지 가정에서의 그럴수 있다는 증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의문점에 의문을 더 하고자 한다.
1. 채병덕 소장의 총장 임명과 그후 1사단장 김석원과의 북어사건에 얽힌 비화에서 얼마나 군이 한심한 조직이었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물론 김석원장군님과 나는 서울 성남고의 이사장이며 학생으로 대면을 하는 영광을 안고 들었던 이야기(각하, 전쟁이 납니다. 그리고 전쟁이 났다.)의 일부와 어느 상가집 문상을 갔다가 들은 이야기, 그리고 작고하신 예비역 육사 7기 이종록선배님의 증언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단서가 있다고 보았다.
물론 많은 세인들이 북어사건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직접 앞에서 그 노병의 한 맺힌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모든걸 다 재치고 당시 군은 썩어서 군 보급품을 밖으로 내다 팔아먹고 심지어 북한과 바꿔치기 하기가 다반사 였다. 언래 1사단은 김석원이 아니였다. 일본군 출신이기에 앞으로 나서지 않했는데 자꾸 군에 기강이 무너지고 사고가많이나는데 특히 1사단이 맡고 있는 황해도지역에 대한 북한군의 도발이 심상치않기에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군사영어학교 졸업시 부여한 소령계급장 대신 대령을 달아 사단장에 부임하게 된다.
사실 여기에도 많은 비하인드스토리가 있다. 원래 일제시절 유명한 조선군 출신인 김석원은 그 용모와 위엄으로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사이에 인기가 높았는데 이때 교류한 여성중에는 바로 임영신여사와 김활란 여사 등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분들은 이숭만과도 관계가 깊게 형성된 위치에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대통령이 북한군 문제로 고심하고 있으니 천거가 된 것인데 한참 어린 채병덕 총장이 가운데서 여러 이유로 불가론을 내세워 번번이 밀려났다가 우여곡절끝에 사단장 부임을 하게 되었다.이때 이박사 이야기가 둘을 이화장으로 불로 싸우지 말고 일본 육사 선후배 답게 화합하여 국토방위에 힘써달라고 한다. 그러니 이미 이박사는 둘 관계가 원수지간임을 알고 있었다.
부임한 사단장은 바로 북에서 내려오는 북어 20차를 다 그대로 몰수 하여, 사단 병력에 먹으라고 풀어주고 만다. 그러니 서울에서 채병덕에 손을 대고 이것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어디 흙수저들이겠는가!
채병덕으로서는 고참인 대선배에게 뭐라고 말 하기도 그렇고, 당시 유력인사들은 너가 다 독식하고 안주냐고 빈정거려대니 꼴이 아니였다.이때가 전쟁나기 채 1년도 안되는 상황이다.
미군정은 '47년 5월에 소군정과 남북간의 물자교류에 합의하여 남한이 의약품,전기용품,생고무,자동차 부속품, 광목 등을 북한의 북어, 오지어, 카바이트,인삼 등과 상호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은 전략물자가 넘어가고 온다는 것은 명태가 주류였다
.
김석원 장군이 부임한 것이 '49년 1월 7일 이었으니 그동안 2년여의 군수품 밀매에 가담한 자들의 저항은 거세어 바로 1달 여의 특무감사도 받고 이승만에게 보고되 되어 독단적인 지휘에 문제가 많은 양 온갖 것을 다 고자질하여 노신사 이박사를 화나게 한다.
하지만 김석원은 불의에 화답하지않고 계속하여 곧은 지휘관을 하게 된다. 그러니 북한군이 남한의 모리배들과 내통이라도 한 것인냥 '49년 5월 4일날에 개성 송악산지역으로 무력침공한 북한군을 육탄 10용사가 무너뜨린 그 역전의 장수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심기가 불편해진 이박사는 신성모국방장관과 채총장 김석원 장군을 불러 화해하도록 지시하지만 그 말은 그 비리를 눈감고 있어라는 것과 같았기에 화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하여 동조하지 않으니 또 뭐라고 했는지 결국 '49년 10월 1일에 보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바로 그 후임이, 국방부 장관까지 지낸 유재흥장군의 아버지인 유재홍 대령이 제3사단장에서 제1사단장으로 부임해 왔다. 아들인 유재흥 대령은 바로 7사단장이었다.
하지만 유승렬은 대령은 다시 '50년 4월 22일 제5사단이던 백선엽 대령이 1사단으로 부임해 오게 되었다. 군문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에 처음에는 동반 후퇴로 채총장도 옷을 벗었는데 신국방장관이 어떻게 하였는지 채총장은 두 달 후에 원직에 복귀하였다.
여기서 당시 김석원 장군이 이박사에게 던진 구국을 위한 쓴소리 "군내부에 군수물자를 적에게 밀수출하는 반역도배들이 있으니 철저히 조사해 달라"는 강변은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장군은 덧붙여 "각하, 전쟁이 납니다. 북한이 곧 처들어 옵니다."라는 충언도 묵살 되고 말았다. 모두는 이런 말에 대해 믿으려 하지않을지 몰라도 나는 굳게 믿든다. 그 이사장님 앞에서 20여명의 학생간부 대표로써 퇴학이란 무거운 벌칙을 용서받았던 나는 그 분의 강직함과 소신을 믿고 있다.
전쟁이 그리고 난 것이 아닌가!
[하동, 채총장 묘소에 경례를 했다]
나는 적어도 채총장님에 대해서도 그 중심에서 얼마나 고생했을까하는 연민은 있어도 절대 이러쿵저러쿵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채총장님이 백의 종군하여 하동의 쇳고개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소도 찾아갔고 그분의 비석이 세워져 있던 계동의 대나무 숲도 찾아가 경례를 올렸다. 가끔씩 동작동 현충원의 장군묘역에 들러 꼭 경례를 올리고 언젠가는 미국에서 찾아온 여자 동생분을 직접 묘역에서 만나는 영광도 안았다.
생각해 봐라.평양 출신으로 일본 육사를 나와 병기장교 출신이며 '46년 7월 1일에 제1대 보급부대장이었던 그는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두번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50년 7월 27일 전사하던 그나이 약관 35세였다. 혼자에게 모든 6.25전쟁의 실패를 뒤집어 씌우기에는 우리 군역사가 너무 왜소하고 슬프다.
2. 비상해제와 전방의 차량이나 총기류등의 정비를 위한 명목으로 후방으로 빼낸 사건이 과연 우연의일치인지 조직적인 북한군의 세포조직에 의한 활동인지 의문점에 관한 나의 의견이다.
국군 제1사단 13연대에서기관총 사수를 했던 고)황대형 참전용사님의 증언에서 알아보았듯이 전쟁 바로 전에 전방 경계근자들에게 다 철수하라 명령을 내리고 장비와 무거운 탄통을 들고, 철수하여 물고기 잡기나 체육활동을 하다 발가벗고 잠들고, 주요 간부는 대대본부에 가서 회식을하고 전쟁이 났는데 기관총을 들고 탄통 3개를 들고 뛰어가니 이미 적이 점령하고 있었다는 증언!,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계속해서 전방 감시자들이 적의 이동상황을 보고 하고 전선으로 다가온다고 보고를 했는데도 훈련이겠지라고 판단하고 1/3이상 병력을 외박이나 휴가를 보냈다니 과연 그것이 군대였는지 아니면 배가 너무 고파서 밖으로 많이 내 보내야 나머있는 병들과 간부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에 그랬는지 속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다.
솔직히 누군가가 군 내부에 세포가 들어와 높은 분들의 판단력에 먹칠을 하여 듣지도 보지도 듣고도 모른척하라고 세뇌교육 하였다고 한다면 어떨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잘알고 있는 분이 사고로 운명하여 분당의 어느 장례식장에 갔을 때의 들은 이야기를 남기고자 한다. 나는 전투지역을 탐사하고 있었기에 복장이 현역 탐사복장으로 그곳에 가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나보다는 조금 아래지만 정이 많이 들었던 사돈지간 이었다.
그런데 옆에 또 다른 방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상객으로 왔는데 그중에 몇몇 나이드신 분이 나에게 하는 일을 물어보더니 정말 고생하고 좋은 일 한다고 칭찬을 하신다. 그래서 잠깐 복도에 나와서 이곳 저곳을 눈으로 바라보는데 그분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창군초기 채병덕 장군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총장이나 당번이나 전속부관이나 나이 차이도 안나고 뚱뚱한 채총장이 마치 어린 코끼리 새끼처럼 뛰뚱 뛰뚱 걷는다는 등 신체적 이야기와 그곳에 근무를 하는 총장실에 정00라는 사람이 실세처럼 행동하는데 고향분이고 참위인지 무슨 계급이라는데 베일에 가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군인사 등을 주로 그 사람이 담당하는 눈치였으며 많은 사람이 그 사람과 줄을 데려고 노력했고 실제 얼마씩 주는 것도 보았다는 것이다. 무슨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 이야기같지만 그 후에 내가 전사에 눈으 뜨고 실체를 증명하려 했을 때에 바로 이것이 혹시 정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갔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의 창군 원로님 대부분이 북에서 월남한 분들이 많고 사람이란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고, 고향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는게 사실 아닌가. 더 이상은 말하지 못하겠다. 자칫 벌떼처럼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 이 이야기를 들었고 나의 잘못이라면 그 분의 주민등록증을 받아 인적사항을 기록하지 못한 것이 죄이다.
이 이야기를 이종록용사님이 살아 계실 때에 말씀드렸더니 그 분도 정말 그 당시에 분명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장교 인명록에 없다는 것이다. 이종록 용사님은 전후에 이승만 밑에서 장군인사담당을 하다 여하한 사건으로 튕겨 나왔던 분이다.
차량과 관련하여 제7사단 소대장이었던 고)이종록 참전용사님의 증언은 더 기가 막히다.
전쟁이 났다고 휴가, 외출 및 외박 중인 군인은 모두 복귀하라는 가도 방송이 요란하였다. 용사님은 제7사단 소대장으로 포천 북방 양문리에 근무중 24일 비상계태세가 해제되어 모두를 나가도 좋다는 상급부대 지시에 갈 곳도 마땅하지 안해서 포천읍에 와서 술 한잔에 회포를 동료들과 함께하고 잠들었다. 그런데 밖에서 하도 시끄러워 일어났더니 벌써 옆 방의 김소위가 옷을 입고 문앞에 와 전쟁이라며 빨리 부대에 복귀하자고 한다.
그런데 많은 인원이 벌써 이 방송을 듣고 모여 들었는데 실고 갈 차량이 오질 않는다. 포천에서 영평천 최전방까지는 거의 20km로 빨리 걸어도 최하 4시간 이상이다.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발생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 말은 전쟁이 발발 하기전에 괜한 차량을 점점해야 한다며 다 후방으로 가져가 주둔지에 없었었을 뿐만 아니라 휴가나 외박을 신청자는 아무나 보내다 보니 있다 하더라도 운전병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분명 그 당시 군 수뇌부에는 누군가 프락치가 숨어들어 이런 모양으로 대처를 못하게 했다고 하신다.
차량만 그런게 아니라 박격포등 공용화기도 일부 정비한 답시고 입고를 시켜 초전에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한 장비가 없다고 한다. 2.36인치 대전차포는 관통력이 없어 소련제 T-17전차를 앞에서 보고 쏘아도 끄덕도 안하는 무용지물이었다고 한다.
용사님은 김성수중위 등과 걸어서 또는 뛰면서 전방으로 올라가는데 양문 못미쳐 지금의 백로유원지에 다다르니 벌써 저 앞에 적 탱크가 앞장을 서서 43번도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고, 그 좌측으로는 창수면이 있었는데 그 87번 도로를 따라서 북한군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않고 걸어서 내려가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병력도 없고 장비도 없는데 뭘로 적을 방어하겠는가?
용사님은 백로유원지 우측에 도성사가 있는 곳으로 올라서 내려오는 병력을 취합하여 그나마 처음으로 병력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황대형, 제1사단 13연대 용사의 증언과 11연대 소대장이었던 홍정표 중위의 증언('80.11.26 증언:군사편찬연구소) 도 일치하고 6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그런 지경이었다.
병력이 서울역에 영등포에 수원역에 신촌역에 수색역에 모여 있어야 허당이었다.
비상해제의 문제와 병력휴가 나 외박조치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이미 조금 언급했지만 창군 당시에 장군들이 많은 사람이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주요요직을 맡고 있었고 그 조직내부에 세포들이 숨어 들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공공연하게 북으로부터 일본놈 소총이나 권총, 수류탄등이 차에 실려 들어와 좌익계열에게 공급되고 그걸로 무장으 하기도 했다. 대구폭동이나 여수.순천, 제주도 4.3사건이 다 그 연장선에 있다.
중요한 증언중에 당시 육본에 근무했던 김홍일(시흥지구 사령관, 후에 제1군단장 역임)장군의 증언은 전방에서 많은 포와 전차가 추진된다는 등 전쟁의 징후가 있다고 올라 왔으나 미 고문관들이 졸 무시해 버렸다고 한다.또한 본인은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진지 구축과 후방 사단을 전방으로 이동연습을 해 보아야 한다고 건의 했으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한다.
3. 전쟁 발발시 벌어진 한강교 폭파 이전의 채총장의 육본 이탈에서 다시금 복귀후 재 이탈한 순간에 함께한 강영훈 전 총리의 증언을 토대로 의문점을 확대해 보고자 한다.
강영훈 전 총리는 6.25 전쟁 전에 육본 인사국장이었다. 1981년 1월에 국방부 편찬위원회 위원들이 증언을 청취한 결과를 소개한다. 강총리는 한국전쟁 발발 전에 사단장급의 대규모 인사이동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채총장 취임 12일만에 3개 사단장 이동('50.4.22), '50.6.10일 경에 대폭적인 인사이동 :김홍일 소장 외 9명)
"사단장급 인사는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1차는 정기인사 이동이었고 2차는 이북의 징조가 삼상치 않아서 거기에 대비해 전열을 정비해야 되겠다는 그러한 각도에서 취해진 인사이다.
일부에서는 망치기 위해서 인사이동을 했다고 하는데 누가 6.25전쟁이 터질줄을 알았는가! 심상치 않으니까 인사를 정비하고 대비행야 되겠다고 하여 대폭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한 것으로 안다"
강총리는 모든 질문에 누구에게 귀착되는 답변은 모두 피했다., 젅쟁 발발 직전 왜 공용화기를 부평 조병창으로 후송조치하게 된 배경 질문에도 "잘 기억이 나지않는다. 일부 수리를 하느라 후송되었을 것이다. 강문봉 장군이 작전국장이니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식의 답변이다.
4. 비상해제와 부대교대 및 지휘관들의 교대시기에 관한 의문점의 확대 재생산이다.
이 문제는 당시 작전국장 이던 장창국 대령(1군사령관 시절 '64.8.26일 증언)의 증언에서 얼마나 무책임하고 모르쇠로 일관하여 누구도 그 책임의 선상에 있으려 하지도 않고 누굴 물고 들어가지도 않는 의리를 보여 살아있는 분들끼리 같이 살자식의 답변이다.
질문 : 6월 24일 전방 지휘관들을 육본에 초대해서 파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전방 지휘관들이 나왔는데 그것은 육본에서 나오라 해서 나왔을 터인데, 그 다음에 전사를 보면 휴가도 병력의 1/3을 휴가 보내라. 그런데 그건 육본의 구두명령이라 하는데 총장께서 하신 것이겠지요?
장사령관 : 글쎄. 그것은 확실히 기억이 없는데 내가 6월 10일부터 작전국장이 되었는데 2주일 밖에 안되어서 터져 버려. 내가 문서상이나 무슨 전달한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그 당시 우리가 알기로는 농번기라 해서 휴가를 많이 보냈었다. 그것은 어떠한 특별한 계획이 아니고 순전히 농번기니까 휴가를 많이 보냈다고 하는데 내가 인계하기 전이니 병력이 나간 것은 어느 정도에서 나갔는지 모르겠다."
질문 : 문서상의 명령은 없고 구두로 전화로 전방지휘관에게 명령해서 나가도록 했다고 전사에 나와 있는데?
(육군회관장교구락부 준공파티 : '50.6.24일 밤, 채총장.육군본부 참무보 장교. 참모학교 요원과 피교육자. 각급부대 지휘관 다수 참석)
장사령관 : 그 당시의 체계가 뭐냐하면 어느 참모계통으로 해서 전달하는 것이 없었다. 대개 총장 예하에 그 당시 행정 참모장이 하나 있고 작전 참모장이 있어서 대개 거기서 이루어져서 나가니까 밑에서 참모부로 해서 문서계통으로 올라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당시에 고급지휘관을 부른 것이라고도 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 당시도 역시 고급지휘관반이 그대로 와 있었다.
질문 : 그러니까 부른 것이 아니고?
장사령관 : 부른 것이 아니고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이 그냥 그 파티에 나온 것이다.
5. 정말 6.25전쟁은 '50. 6.25일이 맞는 것인지?
이 질문은 여러곳에 나열되어 있다.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50.6.25일이 아니라 그보다 한달 전에 이미 공격하기로 되어 일부 특수전 부대가 침투해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또 동해안의 임원이나 삼척의 묵호항에 이르는 해안가에 가서 들으니 하루 전날 그 특수전 부대들이 들어와서 걸어다녔다는 것이다.
전남 영암에 가면 염전이 발달되어 있다. 차후 지역별 발굴 및 탐사기록에서 언급이 되겠지만 어느날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제보가 들어와 직접 그걸 확인하러 내려 갔다. 동네에 가서 탐문을 한 결과 염전으로 가는 길에 조선시대 왕묘크기의 묘가 있는데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누가 벌초를 때가 되면 다 해준다고 한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을 찾아(염전 사장, 가장 좋은 외제 자가용 소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정말 웃기는 이야기였다. 전쟁 한 달 전에 이곳은 북한군이 배를 이용하여 들어왔다 한다. 그런데 총을 들지 않고 들어왔고 그래서 동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두둘겨 패서 다 죽었다 한다. 그 시체를 그곳에 묻었는데 어느날 그렇게 크게 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에 그들 이야기를 들으니 북에서 내려 보내며 북에서 왔다하면 쌍수를 들고 반기며 혁명이 완수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두둘겨 패느냐고 물었다니 웃기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