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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따라 08.04.27 13:11
강성찬 HIT 48
고전3장10절로15절 은혜를 따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한 여행자가 여행을 갈려고 현자를 찾아 상담 하였더니 한문 글자를 여럿 내 놓아며 한 자를 선택하라고하여 집에 알른 오고픈 마음에서 집 옥(屋)자를 선택하였더니 죽게 되겠다고 말해 주면서 옥(屋)자는 주검 시(尸) 에 이르 지(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합니다. 집은 주거지이며 또한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집하면 우리는 향수에 젖어 초가 삼간을 생각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실버들 늘어진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정든 임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최정자) 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초가삼간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초가삼간을 유지 보수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며 특히 화재에 취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함석으로 스레트로 콘크리트 벽돌로 아파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장막도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야 하지만 신양의 집은 더욱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받은 은혜대로 집을 세우는 세우는 자들입니다.
유능한 건축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큰 회사에서 일해 온 그는 드디어 은퇴할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사장은 그에게 집을 하나만 더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작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건축가는 집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마음은 딴데 있었습니다. 그는 별로 좋지 않은 재료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재목도 엉성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집을 지으면서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많은 일들을 잘 감독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드디어 집이 모두 완성되자 그 회사의 사장은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집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여기 열쇠가 있습니다. 당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건축가는 그 즉시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것과 일급 기술자들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몹시도 후회하였습니다. 만약 그 집이 자기를 위한 집인 줄 알았다면 아마….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자신을 위한 영적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재료들을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재료들을 써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다양한 선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마음과 생각이 뒤따라야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맙시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남을 대신하여 영원의 집을 지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집은 언제나 내가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천년간이나 그대로 유지되는 집이 있을까요? 실제로 미국 테네사주 매리빌이란 곳에 그러한 집이 있다합니다. 이 건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다스리게 될때까지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집은 9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에 완성되었는데 특이 한 것은 집 안팎 어디에도 못을 사용한 흔적이 없고 문과 창의 틀을 제외하고는 나무를 쓰지 않았고, 대리석과 돌, 시멘트만을 사용해 벽은 두께가 5피트나 되도록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집을 지은 니콜슨 부부는 이 집은 주님 오실 때까지 견딜 수 있노라 믿고 있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삶도 이와 같다하겠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성도의 신앙을 계획하고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집을 짓는 데 명수라 합니다. 집을 빨리 지어서가 아니라 정교하고 튼튼하게 짓는 데 명수라 합니다. 까마귀들의 둥지는 여느 새들의 그것처럼 아무렇게나 틀어지지 않는다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아야 하며 딱딱해서도 휘어져서도 안 되는 그런 특수한 나뭇가지들만으로 특이한 공법에 의해 짓는다합니다. 게다가 여간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합니다. 더욱 어려운 점은 이런 안성맞춤의 재료가 아무 데나있는 것이 아니므로 알맞는 나뭇가지를 찾아내기 위하여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날아다니는 노역을 감수해야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합니다. 그렇다면 까마귀가 이런 노역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을까? 분명히 있다합니다. 다른 까마귀가 지어놓은 둥지의 나뭇가지를 빼내오면 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 굳이 알맞은 재료를 찾는 수고도 멀리까지 날아다니는 애씀도 면할 수가 있다합니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합니다. 이것이 까마귀 사회의 철칙이라 합니다. 비록 인간들의 눈에 어리석게 비칠지 모르는 까마귀 사회의 도덕률은 바로 집과 먹이만이 전부인 그들을 보호하고 생존을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힘이 되고 있다합니다.
그리스도의 터위에
인생은 벽돌 하나하나로 집을 짓듯이 지정의의 하나하나의 언행심사로 인생과 인격의 집을 짓습니다.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가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은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정치 지망생이 됐습니다. 동생 허드슨은 중국 선교사로 가고 형은 정계로 갔습니다. 먼 훗날, 영국의 역사가들이 이 두 사람을 기록할 때 테일러의 길고 풍성한 역사를 쓰는 대신 그 형은 허드슨 테일러의 형이라고만 썼다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터 위에 화려한 집을 지었고, 하나는 예수의 터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세계의 도서관을 메운 위인전과 공원과 번화가에 세워진 동상들의 주인공들이 역사의 뚜껑을 최후로 열어 볼 때, 누구의 터 위에 세워진 생애의 집이었는가가 문제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인생, 한번 밖에 못사는 생애, 영원한 예수의 터위에 불멸의 집을 지어야합니다.
집을 세우되 어느 터에 세우느냐는 각기 다릅니다. 세상의 사람은 그것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죄를 사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입니다.
은혜대로
한 불우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했으며 아사직전 이웃에게 발견돼 겨우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그때 한 구호단체가 그녀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는데 그 단체는 국제 연합아동구호 기금(UNICEF)이었습니다. 소녀는 구호 빵을 먹으며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장성해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됐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으로 그녀는 세상에 사는 그 날까지 이 단체의 홍보대사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굶주린 어린이들을 도왔습니다. 그녀는 늘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은혜를 은혜로 갚는 사람이 참 드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은혜를 받는 만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남에게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배은망덕한 악인의 집안에는 악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은혜로 갚으면 은혜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히 행할 바요 하나님의 복을 유업으로 얻는 길입니다.
금과 은괴 보석 같은 영적인 재료로
또한 집을 세우되 두 종류의 자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금, 은, 보석'등 값비싸고 견고한 것과 '나무, 풀, 짚' 등 값싸고 허술한 것입니다.
바울은 순수하며 변치않는 영원한 것과 이에 비해 무미건조하고 일시적인 것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거짓된 가르침은 쉽게 소멸될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고용주가 자기의 고용인에게 방까지 제공하는 시대에 살았던 어떤 경건한 스코틀랜드의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지 못한 농부를 위해 일하러 갔습니다. 그 농부가 자기를 돕는데 대한 댓가를 후하게 지불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인은 그와 함께 오랫동안 머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이 그 믿는 자에게 왜 그렇게 일찍 떠나느냐고 묻자 그는 "그 집엔 지붕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자기의 이상한 대답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옛 격언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께 규칙적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는 집은 마치 지붕이 없는 집과 같습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평안과 위로 그리고 안전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도의 캘커타에 있을 때 마더 테레사의 '죽어가는 자를 위한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녀가 청결하게 청소해둔 예배당에 데려가서 보살피고 있었다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갈 때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 그 집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붕이 낮은데다 비좁았고 불빛도 희미했지만 그러나 사방은 청결했고 신선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원이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매일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죽어가는 사람들만 이곳에 수용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 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게 되면 그들은 소망을 가지게 되기 떼문에 결국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죽음의 집이 아니라 "소생의 집'으로 개조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불란서 남부에 새로 부임한 한 목사님이 자기 담당 지역을 알기 위해 방문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지역 사회의 지도자이며 좋은 인상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라던 한 부부는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직장에서 돌아 왔을 때에 그 부인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왔다 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무었이라고 말했소?" 남편이 물었습니다. "그가 묻기를 '여기 이 집에 그리스도가 사십니까?' 했어요. 그래서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지 몰랐어요."하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남편의 얼굴이 이글어졌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들이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런 것을 묻지 않던데요."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린다고 왜 말하지 않았소?" "그것도 묻지 않았어요." 남편은 좀 더 화가나서 "당신은 어째서 우리가 교회에 출석을 잘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것도 또한 묻지 않던데요." 하며 부인이 목이 메어 울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 가지만 물었어요. '여기에 그리스도가 사십니까?'라고..." 목사님의 질문은 새로운 힘으로 그 부부를 강타했습니다. 서서히 그들의 생애는 변화 되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대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가정에 사시는가요?
공적이 불타지 않게
미국의 6대 대통령이었던 죤 퀸시 아담스가 80세가 되었을 때 오래된 친구를 한 분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떨리는 손을 잡고 "죤 퀸시 아담스씨,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은퇴한 노 대통령은 그를 잠시 쳐다 보더니 "저는 아주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현재 거하고 있는 집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했지요. 지붕은 거의 다 걷혀졌고 담장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집이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낡은 셋집은 이제 거의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저는 곧 그 곳에서 이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아주 좋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후서5:1에 바울은 현재의 몸을 거할 처소 혹은 '장막집'으로 비유합니다. 아담스 대통령이 웅변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이 장막집은 일시적이며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변화와 쇠퇴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기다리는 새로운 집은 놀라우며 튼튼한 집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현재의 불완전한 질그릇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 이 불멸의 장막 집은 영혼을 맞아 들이게 될 것이며 그 후 부활의 몸과 연합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복된 장래에 온전히 실현될 것이지만 이 사실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옛 '장막집'이 걷힐 때 우리가 하나님의 지으신 집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합니다.
'그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주의 날'(롬 13:12;살전 5:2-9;히 10:25)입니다.
그 날에는 각 사람의 공력에 따른 결과와 성격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인데 그 드러나는 방식이 '불'에 의해 결정되어지는데, 이는 '심판의 불'을 의미합니다.
상을 받도록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합니다
공적이 무익하여 없어져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갖고있지 못하므로 단지 구원만 받게 될 인데 그 구원도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아서 쉽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이 표현은 화염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Morris).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쌓은 공적의 최종적인 시험이 불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을 선언합니다(13, 15절).
우리는 롯의 경우에서 그 좋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이 세운 공력에 따라서 불로 심판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멸망당했으며, 그의 처 또한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연고로 심판을 받았으나 오직 롯과 그의 두 딸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19:15-29).
그처럼 그 세운 공력을 그리스도 위에 세우면 상급을 받을 것이요, 세상의 것에 세우면 불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14, 15절)>
그날에 하나님은 재판장이 되셔서 모든 자들의 일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판단하시되 그의 의로우심과 불로써 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나누시고(마 25:32),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어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실 것입니다(마 3:12).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운 건물이 그리스도 위에 세운 것이면 상을 받되 그렇지 못하면 시험에 견디지 못하고 파쇄되어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밴 다이크는 이런 유명하고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의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가서 천사의 안내를 받아 가며 천국의 여기 저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한곳에 와보니 참 아름다운 집이 있었습니다. 아주 근사하고 멋있는 집이었습니다. 이 부자가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이집이 누구 집이요." "그 집은 당신이 거느리고 있었던 당신 종의 집이오"천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천국에서 이런 집을 소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가 이렇게 말하자 천사가 대답합니다. "천국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그가 보낸 자료로 이 집을 지었습니다." 한참을 더 가다 보니 무척이나 날고 허술한 집이 한 채 보였습니다. 이 집앞에서 깜짝놀라며 부자가 "도대체 이집은 누구 집이요?"라고 물었습니다. "당신 집이오"라고 천사가 대답하자 부자는 반문했습니다. "그럴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집이 내 집일 수 있습니까?"천사가 다시 대답합니다. "천국은 오류도, 실수도, 착각도 없습니다. 이집은 당신이 보낸 그 자료로 지어진 집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물질은 어떤 일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공적이 불타지 않고 상 받는 자리에 함께 하는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