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관조하다 / 이광복
가을이 깊어갈수록
내 안에 소년의 울음이 짙다
온통 허물어져 내리는 것들 사이로
울음 삼키던 바위 같던 사내가
우수수 모래알로 부서지고 또 부서져
먼지가 된다, 먼지구름이 된다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은 구름도 시간도 아닌
내 몸이다
밤늦은 시간 기도를 한다
어둠을 밟고
저 먼 우주의 은하계를 돌던 기도가 별이 된다
반짝이는 별빛이 창문을 넘어와
머리맡에 읽다 만 시집 갈피에 숨어
자꾸 나를 읽으려 한다
나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 문장이다
누군가 내 발바닥에 밑줄을 긋고
몇 개의 각주를 달아주지만
나는 아직도 나를 다 읽지 못한다
나는 물음표의 진행형이다
『발이 버린 신』, 이광복, 문학의전당, 2017년, 60~61쪽
이젠 숫자를 세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나이를 먹어버렸지만, 아직도 제 몸속엔 다양한 시간들이 살아 있습니다. 소년과 청년의 시간은 온전히 기억(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십 년도 더 지난 시간이지만, 뒤돌아보면 그 시간이 마치 어제의 일 같습니다. 나는 구운몽처럼 긴 잠을 자고 있고, 꿈을 깨면 10대의 어느 날로 되돌아갈 것만 같습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생은 어느 꿈속의 시간일 수 있다'고. 우리 꿈이 그렇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꿈속에도 ‘서사’가 있습니다. 그 서사는 현실처럼 현재로 이뤄져 있어, 과거를 가늠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꿈은 구은몽처럼 긴 서사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는 ‘생의 파편’입니다. 그 파편이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며 다시 일 년이 됩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이 연결 된다고 믿지만, 반복하는 것은 어떤 ‘일정한 상황’입니다. ‘일정한 상황’이란 '틀(프레임)'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쳇바퀴’라고 부르는 것도 '틀'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것의 의미, 틀의 범위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의미지, 행동양식이 기계처럼 반복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의미없이 반복된다면, ‘숙달’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반복 작업에서 숙달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작업 능률은 몇 배가 차이나기도 합니다.

저 시계는 하루에 두번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우리의 일상도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까.(ⓒ Pixabay)
반복되는 하루하루, 우리는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유가 삭제된 말', 오늘을 맞이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시간의 틀’만 동일할 뿐 모두가 다릅니다. 우리는 충분히 오늘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완전히 망칠 수도 있죠. 이러한 사건(긍정과 부정적인)은 우리의 행동 여부에 따라서 결정될 수도 있고, 때론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의지이며 후자는 우연입니다.
"생은 ‘의지’와 ‘우연’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 중 저는 ‘의지’에 더·더·더 큰 점수를 줍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우연도 의지가 없다면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우연이 로또 당첨일 것입니다. 그것은 ‘수백만 분의 일’의 확률이라고 합니다. 분명 그 확률을 내 것으로 만들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뚫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로또를 사는 것이겠지요. 물론 확률적으로 너무 낮으니, 이러한 동참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최근에 제 블로그 방문자수가 하루에 천명이 넘어갑니다. 엄청난 발전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들이 방문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우연도 작용을 했습니다. 그 우연이란 여러분이 제 블로그를 방문한 그 첫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우연’을 반복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어떤 소용이 있었을까요. 보통의 우연은 우연으로 끝납니다. 우연을 우연이 아닌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블로그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질적이란 경제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안정적인 직장에 맞벌이를 해도, 도시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기가 그리 녹녹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올 한 해는 일을 쉬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됩니다. 이런 상황,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글쓰기는 희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상황을 어렵게 만듭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시집과 책을 꾸준히 구입해야 합니다. 작년에 제가 구입한 책이 365권을 넘었습니다. 하루에 한 권 이상을 구입했습니다. 엄청난 양이죠. 올해는 좀 줄이자고 마음먹었는데, 이것도 습관이 되었는지 좀처럼 줄이지를 못합니다. 글을 써서 얻는 수입은 제로에 가깝고 계속 소비하기만 합니다.
제가 블로그를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은, '어떤 희망' 때문입니다. 어쩌면 특별한 ‘운’에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운이라는 것이 블로그를 더 키워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글을 쓰다 보면, 제 글쓰기도 더 나아지고, 상황도 어떻게든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몇 년 더 글을 쓰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십년쯤 더 글을 쓰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이 작업, 저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 주위에 저를 응원해주시는 블로그 이웃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이렇게 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아. 오늘은 주절주절 제 얘기를 했습니다. 시인의 시가 저를 제 얘기 속으로 안내했습니다. 시는 저에게 '묘한 능력의 바탕'입니다. 시에 기대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바쁘거나, 소란스러울 때는 단 한 줄을 쓰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오늘은 글을 쓰는데 한 시간여쯤 걸렸으니, 다른 날에 비해 괜찮은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