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 섬유공예 공방, '봄볕 내리는 날'
짊어지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으면 인생이 한결 즐겁다고들 하지만, 막상 행동에 옮기기는 어렵다. 여기 일찌감치 욕심을 버리고 강원도 산골에 살림을 차린 부부가 있다. 소박하지만 내 손으로 지은 흙집, 자작나무 한 그루부터 잔디까지 직접 심은 마당. 1년 365일 ‘봄볕 내리는 날’인 그곳에 천연 염색하는 남편 박정용, 바느질하는 아내 김희진 부부가 산다.
◀ 직접 아크릴판을 자르고 페인트를 칠해 세운 간판 ▶동네 학교에서 가져온 현관문과 창문
올해 봄은 유난히 뜸을 들인다. 여전히 쌀쌀한 바람에 애타는 마음으로 강원도 삼척의 박정용, 김희진 부부를 찾았다. 이곳에서 부부는 ‘봄볕 내리는 날’이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산다. 펜션을 하며 천연염색, 규방공예 수업도 하고 텃밭도 일구면서 살림을 꾸려나간다. 대학 시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풍물동아리 경험을 살려 가끔 마을에서 하는 풍물수업도 맡아서 한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딱히 모자라지도 않은 삶이다.
어느덧 전원생활 10년 차에 접어든 부부는 결혼 전부터 귀촌에 대한 뜻이 같았다. 결혼하고 부산,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골로 내려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결혼한 지 9년째 되던 2004년, 드디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댁이 있는 삼척으로 내려왔다.
“다들 그 젊은 나이에 왜 귀촌하느냐고 하더라고요. 직장에 다니면서도 온통 시골 가면 뭐 하고 살 것인지에 대한 생각뿐이었어요.”
삼척에 내려오기 전 회사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실적에 관한 스트레스나 일상적인 중압감에 매일 피로가 몰려왔다. 특히 장이 좋지 않았던 아내 희진 씨는 조금만 예민해져도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아파도 눈치가 보여서 휴가도 쓰지 못하고 한약을 먹으며 힘겹게 버텼다.
“몸이 약하기도 했지만, 회사 다니면 식사도 불규칙하고 그렇잖아요. 장이 안 좋아서 출근하다가 지하철에서 내린 적도 많아요. 여기 오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진 만큼 몸도 건강해졌죠. 지금은 뭐, 장군이 됐어요.”
힘든 직장 생활 중에도 아내 희진 씨는 퇴근 후에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오후 5시에 퇴근하면 그녀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됐다. 야간대학교 의상학과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1년 동안 문화센터에서 조각보 수업을 들었다. 남편 정용 씨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바느질을 배우는 사이 도자기를 배우러 다녔다. 이때 배웠던 것들이 지금 이 부부의 ‘일’이 되었다.
▲ 강원도 산자락에 폭 안겨 있는 ‘봄볕 내리는 날’ 정경
▲ 날씨가 따뜻해지면 마당에 초록빛 잔디가 올라온다.
▲ 펜션 벽체는 흙부대와 인슐레이션을 썼다.
▲ 별채인 펜션의 1층은 방과 부엌이 함께 있는 원룸식으로 꾸몄다.
“그래도 저희는 남들보다 쉽게 귀촌한 편이에요. 삼척에 부모님도 계시고 땅도 있었고. 귀농·귀촌하려고 하면 땅을 구하는 것부터가 일이잖아요. 내려와서 처음 1년 반은 부모님 댁에서 살았어요.”
이들의 첫 번째 집은 처마에 부연까지 있는 2층짜리 한옥이다. 좀 더 소박한 흙집이나 초가집을 짓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계획과는 다르게 큰 한옥을 지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이듬해에는 남편 정용 씨가 손수 흙집 짓기에 나섰다. 생전 처음 지어보는 집인지라 국내외 관련 책을 찾아보거나 집 짓는 현장, 건축 관련 전시회를 다니며 발품을 팔아 준비했다. 그래도 아주 혼자는 아니었다. 귀촌한 사람들의 모임인 ‘농촌관광연구회’에서 영월에 사는 목수 한 분을 알게 됐다. 그분과 함께 기초공사부터 기둥 세우기, 구들 놓기, 흙벽치기 등 모든 과정을 직접 작업했다. 10분 거리의 아랫동네에 있는 부모님 댁에서 공수해 온 트랙터도 집을 짓는 데 한몫했다.
“기둥을 만들 때 나무껍질을 벗기는 도구가 따로 있는데, 그때는 모르고 낫으로 일일이 벗겼죠. 공사기간 총 3개월 중에 그것만 한 달은 걸렸어요, 하하.”
이후에 펜션용으로 흙집을 한 채 더 지어 지금은 집이 총 세 채다. 동네에서 집 짓는 데 필요한 재료를 사려니 종류가 많지 않아 생각해뒀던 재료를 사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낡은 집에서 가져온 고재나 폐교에서 가져온 현관문과 창문이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분위기를 살려준다. 집을 지은 이후에도 부부는 공동 작업장을 수리하거나 개인 작업실을 확장하고 데크를 만드는 등 계속해서 집을 만지면서 산다. 직접 집을 짓거나 고쳐나가면서 겪었던 경험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http://blog.naver.com/meokmul)에 과정별로 상세하게 기록해두었다.
“집을 짓고 살다 보니 흙벽이 주저앉는 곳도 있고 아쉬운 점이 꽤 많더라고요. 본채를 짓기 전에 창고를 먼저 지어보는 게 실수를 줄이는 방법인 것 같아요.”
◀ 겨울마다 구들방을 덥혀주는 아궁이 ■ 전시된 조각보 작품들은 따뜻한 색감을 자랑한다. ▶ 희진 씨의 개인작업실이 최근 확장공사를 마쳤다.
▼ 2주에 한 번 규방공예 수업을 하는 작업장(사랑채). 전시된 작품은 부부가 직접 만든 것으로, 판매도 하고 있다.
아내 희진 씨가 어느 글에서 말했듯, 사실 도시나 시골이라는 장소 자체가 누군가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 삼척에서의 일상은 매일 다른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같은 염료로 천을 염색해도 매번 다른 빛깔이 나오는 것처럼.
“여기 오고 나서는 매 순간이 좋은 것 같아요. 이 마당이 처음엔 모래밭뿐인 비탈이었거든요. 그때 사진을 지금 보면 ‘이랬단 말이야?’ 싶을 정도로 엉망인데, 그 당시에는 너무너무 좋았던 거예요. 마당에 라일락 나무 한 그루를 심어도 정말 행복해요. 처음 집 지었을 때도 그랬고, 작업장 테이블을 새로 샀는데 이 공간에 딱 맞을 때도 그랬어요. 살다가 부족한 게 있다 싶으면 채우면서 살고, 그때마다 서로 ‘아, 너무 좋다!’ 감탄하고 그러면서 살죠.”
욕심을 버리면 사소한 일도 생활의 활력이 되고 새로운 의미가 되나 보다. 시골 내려와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희진 씨가 숨도 안 쉬고 “회사 안 가는 거!”라고 외친다. 예전에는 아침에 눈뜨는 것도 싫었는데,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일어나게 된다. 전과 다르게 해가 뜨면 좋아하는 일들이 펼쳐지니 하루의 시작부터 다르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직장 다닐 때보다 힘들어요. 여기서는 예전에 벌던 거 5분의 1만 버는 게 목표거든요. 하지만 많이 번다고 풍족하게 사는 건 아니잖아요? 신랑이 가끔 얘기해요. 이제 우리 나이면 명퇴(명예퇴직)할 나이니까 좀 있으면 친구들 다 회사에서 잘릴 거라고요. 우린 미리 잘려서 그런 고민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쉽다. 백화점 세일 시즌마다 가서 옷을 사고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는 즐거움은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새로 완성된 작업실에 한참을 앉아 따스한 햇볕을 만끽하는 시간,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구들방에 나란히 누워 즐기는 낮잠. 이런 즐거움은 단순히 대가를 지급하면 얻어지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다.
“바느질 수업한 지 7년 정도 됐는데, 수강생 중에 70대 중후반의 할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원래 눈이 침침하신데다 백내장 수술까지 하셔서 바느질하는데 어려움이 많으셨죠. 그런데 삐뚤삐뚤하더라도 끝까지 완성을 해오시더라고요. 주머니를 만들면 세뱃돈을 넣어서 손녀 주시기도 하고요. 그리곤 정말 행복해하시는 거예요. 제 손을 꼭 잡고 연신 고맙다고 하시면서. 결과물이 예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었죠. 그럴 때마다 이 수업하길 참 잘했구나 싶어요. 저한테도 그 행복이 같이 묻어오는 거잖아요.”
남편 정용 씨가 가진 삶의 목표는 ‘게으름’이다. 아내는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우리가 빈둥거리며 사는 줄 오해한다”며 타박하지만, 그저 웃을 뿐이다. 그 게으름이란 게 ‘여유’와 같은 의미인지 묻자 정용 씨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유는 할 일이 없어서 생기는 ‘여가’와 같은 시간이고. 게으름은 할 일은 있는데 하기 싫은 거 있잖아요, 왜 굳이 하기 싫은 거(웃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올해는 바빠서 아직 밭에 상추씨도 못 뿌리고 매실나무 가지치기도 못했다.
“시골에 내려오면 농사짓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도시에서 하던 일을 시골에서 계속 이어갈 수도 있고요. 정보화 마을에서는 강의를 맡거나 농산물 유통 사업에 참여하는 것처럼 월급을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요. 아니면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일단 내려와 살아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어디를 가든 자리를 잡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요.”
“감나무를 키울 수 없는 곳에서는 살지 말래요. 너무 춥다고.”
유독 눈이 많이 내린 지난겨울, 춥지는 않았는지 물으니 희진 씨가 이리 대답한다. 강원도 정선에 사는 친구가 마당에 감나무를 심었더니 매서운 추위에 결국 얼어 죽었다고 하더라면서. 같은 강원도지만 ‘봄볕 내리는 날’이 있는 삼척은 감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한계선이다. 이들 부부가 마음껏 게으름 피우며 만들어 놓은 삶의 틈 사이로 사람의 온기가 스미기 때문일까. 아직은 마당에 초록빛 잔디가 올라오기 전이지만, 하루하루가 봄볕 내리는 날인 그들의 집. 그곳에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봄’이 먼저 와 둥지를 틀고 있었다. http://blog.naver.com/meokmul
취재 조고은 사진 변종석
출처 월간 <전원속의 내집> www.uujj.co.kr Vol. 171-6 / 전원속의 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