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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류창원권사
'삶'과 '신앙' 일치했던 신학자 남궁혁
남궁혁에게는 여러 가지 직함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닌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유학을 가서 정식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신학자이었으며 한국인 최초의 해외 유학파로서 평양신학교 성서학 교수가 되었으며 한국전쟁 초기에 납북되어 금식하다가 순교한 순교자였다.
남궁혁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882년 7월 1일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외조부인 임씨(任氏)는 승지(承旨)와 평양감사를 지낸 고위관리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용인으로 피난을 가서 세 살 때까지 거기에서 자랐다. 후에 외조부가 평양감사로 가게 되자, 그는 일곱 살까지 평양에서 지냈다. 1896년에는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인천세관과 목포세관에서 1901년까지 공직생활을 하였다.
남궁혁은 1916년 4월경에 광주 양림교회에서 동료인 이득주와 함께 장로로 임직하였다. 이듬해인 1917년에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에 장로이던 최흥종, 조상학 장로와 함께 신학교에서 동학을 하였다.
남궁혁은 1921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15회로 졸업하자마자, 다시 광주 양림교회에 제3대 담임목사(1921. 6. 29~1922. 4.)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 4월에 그는 선교사들의 거듭된 유학 권면에 따라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미국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남궁혁이 유학을 떠난 뒤에 한국에 남아 있던 부인 김함라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솔내교회 출신으로 양림교회에 출석하면서 수피아 여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후에 남대문교회의 여전도회를 창설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 남궁혁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귀국하여 1925년 10월 1일에 모교인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최초로 한국인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성서학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성서번역 사업, 성서 주석 발간, 신학교 교우지인 '신학지남'의 편집 등의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오른 남궁혁은 1927년에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약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참으로 남궁혁은 광주 양림교회 장로를 역임하다가 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담임목사로 재직하였고, 후에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로서 평양신학교 교수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32년)을 역임하는 등 초기 한국교회에 눈부신 역할을 감당한 분이었다.
남궁혁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서서 1938년 9월 20일에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이름으로 당시 일제가 국민의례라고 호도하던 신사참배를 결연히 거부하였는데, 그 결과 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쇄되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신학교가 폐쇄된 이후에도 '신학지남'의 편집 주간의 책임을 계속 감당하였다. 그러나 1940년 10월 25일자로 '신학지남'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자, 그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1945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남궁혁은 조국에 귀국하였다. 그는 1948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로회신학교를 서울 남산에 개교할 무렵에, 박형룡으로부터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제안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단호히 교장직분을 제안한 것을 거절하였다. 누구나 명예로운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적임자로 여긴 남궁혁이 스스로 신학교의 교장직분을 사양한 것은 너무나도 그의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던 것이다.
남궁혁은 신학교 교장직분 대신에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의 총무로 재직하게 되었으나, 곧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공산군에 의해 강제로 납북되어 금식하다가 끝내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가 그의 향년 69세인 1950년 8월 23일이었다.
일제ㆍ공산군에 맞선 한국의 본 회퍼
남궁혁은 한국의 본 회퍼와 같은 신학자이다. 본 회퍼가 나치 정권에 맞서서 신학자의 살아있는 양심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이라면, 남궁혁은 구한말에 의지할 것 없던 민심을 달래고 조선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침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어 금식 기도를 하던 중에 순교한 신앙의 위인이다.
남궁혁의 나이가 약관 16세이던 1898년 4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 변혁이 있었는데, 구한말에 친러시아 정책을 쓰던 명성황후를 일본 자객이 살해하고 한일의정서를 성립시켰다. 그 후에 일제는 고종 황제를 위협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였다. 민족적으로 위태한 이러한 때에 남궁혁은 한국초기교회가 민족이 당면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남궁혁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마침 방학 중에 광주에 머물러 있던 남궁혁은 이 일을 주도하게 되었다. 남궁혁은 자신의 가옥 앞에서 양림동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 광주시는 사회단체의 제안으로 남궁혁을 기리는 조형물을 설치하여 오는 세대에 3.1 정신을 전하고 있다.
남궁혁의 3.1 만세운동에 광주 양림교회 성도들이 대거 참여하자 일제는 북문안의 교회당 터를 몰수하였다고 한다. 광주의 3.1 만세운동은 양림동의 남궁혁의 집에서 양림교회 성도들(김강 최병준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최영균 최정두 서정희 김태열 홍승애 등)과 비밀 독서모임 회원들(정상호 김복수 박팔준 김용규 한길상 최한영 강석봉 김태열 강생기 등)을 주축으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 서정희는 시민들을, 김강은 양림교인들을, 홍승애는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을, 최병준은 숭일학교 학생들을, 김태열ㆍ최영균ㆍ김용규 등은 시내 각 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맡았다.
최한영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국가 등의 인쇄를 맡았다. 자금동원은 이기호가 맡았다. 드디어 3월 10일에 만세운동의 물결은 본정을 거쳐 광주법원을 지나 광주경찰서까지 진행하였다. 이런 와중에 1백여 명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12명이 양림교회 성도로 확인되었고, 그 중 김철ㆍ최병준ㆍ김강ㆍ최한영ㆍ황상호ㆍ김철주ㆍ홍승애ㆍ박애순 등은 실형을 선고 받았다. 후에 소록도 나환자촌과 광주 기독청년회(YMCA)를 설립해 성자로 불렸던 장로 최흥종도 서울에서 만세시위 중 일제에 체포되었다.
이러한 남궁혁의 나라사랑은 그의 후손에게도 그대로 연결되어 흐르고 있다. 손자인 남궁건(미국명 토니 남궁)은 1990년부터 아시아 소사이어티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지난 20년 가까이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양자 간에 대화의 다리를 놓아온 숨은 공신의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남궁건은 UC 버클리대학의 스칼라피노와 함께 처음 북한을 방문, 미ㆍ북 간 첫 고위급회담을 주선했고. 이후 여러 차례 북한과 미국을 연결하는 비공식적 고리 역할을 해 왔다.
몇 년 전부터는 미국 내 대표적 북한통으로 알려진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의 아시아 문제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남궁건은 한국 기자들에게 "북한은 저를 믿을 만한 중재자(honest broker)로 봅니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일한다고 신뢰하죠."라고 자신의 역할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남궁억의 증손자이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신약학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평양신학교 교수를 지낸 남궁혁의 손자인 남궁건은 자신의 조부가 일제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1950년 홍콩으로 옮겨갔고, 그 후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외국인학교를 다닌 그는 미국 대학으로 진학했고, UC 버클리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재 한반도 전문가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함께 동아시아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끝으로 남궁건이 남긴 다음의 말이 그의 조부인 남궁혁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일본에 살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증조할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조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수천 번은 들었을 겁니다. 한반도 전문가가 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남궁혁은 한국 신학의 선구자이다.
한 시대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실한 믿음으로 살았던 남궁혁은 한국 신학의 초창기에 대들보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남궁혁은 두 차례에 걸친 미국 유학을 통하여 1924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27년에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가 공부한 것은 성서학이었다. 귀국 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교수직을 수행하는 동안에 그는 성서 번역 사업과 성서 주석 발간과 '신학지남' 편집과 같은 많은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신학지남에 남긴 글을 종합하여 보면, 필자가 보기에 그의 전공은 신약신학임이 틀림없다.
이미 남궁혁의 로마서 강해는 2004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자 남궁혁의 로마서 강해'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의 글이 모든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오늘 한글세대가 읽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모두에게 알기 쉬운 한글로 풀어서 출판한 것이다.
로마서 강해 외에 그는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에 관한 강해 설교를 '신학지남'에 연재하였다.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주로 바울 신학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그가 바울 전공 신학자라는 사실은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예수와 바울의 신학' '예수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 '에베소 서신에 보인 영복' '바울의 생애 관' 등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남궁혁의 신학은 결코 이론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온 몸으로 노력하였으며, 그 가르침을 실생활에 실천하고자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이 같은 노력은 그가 전개한 기독교 정화운동을 통해서도 꽃을 피웠다. 그는 "조선 교회는 겨우 반세기도 지나지 못한 기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늙을 대로 늙고 상할 대로 상하여 그 가련한 병적 상태는 가히 눈으로 보기 어려울 만치 되었다"라고 한탄하면서 정화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삶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그의 신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교훈을 주었는데, '일하러 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일심단합' '그리스도의 일꾼인 우리' '그리스도를 평범한 생애에서 봉사하자' '도끼날 잃은 일꾼' '영생 얻는 회개' 등의 설교들은 당시 할 일 많은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대사회적 사명감을 일깨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사회봉사에 매진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남궁혁의 신학은 개혁신학의 원리에 충실히 서있었다. 그는 개혁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적 근거를 칼빈에게서 찾았다.
이를 위해 그는 칼빈을 단지 교회적 신앙생활의 기초 위에서만 그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 범위를 정치생활과 과학과 예술과 인간 삶의 미래 전반에까지 넓혀서 이해하였다. 그는 이러한 개혁신학의 원리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바울 다음으로 중심적 인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바울의 뒤를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하였으며, 그 영향력이 중세를 이어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내려왔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그가 기독교 사상을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이 성서의 정경론과 삼위일체론이다. 그는 이런 정통신학에 입각하여 기독교 이단에 관한 연구도 병행하면서, 단성론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남궁혁은 오늘 우리 교단이 추구하는 것과 거의 일치하는 통합적 신학을 추구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신학지남'의 주간으로 있는 동안에,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실어주었다. 비록 그 자신은 칼빈의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신학에 서있었을지라도, 당시에 근본적인 신학의 경향성을 가진 분들이나 혹은 그 반대로 급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경향성을 가진 분들에게도 집필의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기품이 있는 유교적 전통가정에서 성장하여 자연스럽게 중용의 도에 익숙한 그의 인격에서 우러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포용과 수용의 덕을 갖추고서 당시 신학계가 좌와 우로 나누어져서 논란을 벌이던 시절에 과감하게 대화와 토론의 장을 제공하였다. 그는 신학적 독선과 아집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상호 존중이라는 큰 인격의 틀 속에서 한국 신학이 통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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