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 / 지영미
싸늘한 바람이 마지막 이파리까지 떨구었다. 화목 난로를 열어젖힌다. 잔가지를 깔고 장작을 듬성듬성 놓고는 불을 지핀다. 공기를 머금은 불꽃이 춤을 춘다. 바짝 마른 나무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난로를 달군다. 피어오르는 온기에 마음도 훈훈해진다.
문을 열고 잔불을 뒤적인다. 희끄무레한 재 속에서 숯을 골라 삽에 담는다. 시꺼먼 결마다 숨은 불씨들이 바람을 맞고는 빨개졌다 사라진다. 물을 한소끔 붓자 쉭 소리를 내며 허연 연기가 허공을 가른다. 남편은 스산한 바람이 불기도 전에 겨울 채비를 한다.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대비한다기보다는, 마음마저 시려 오는 느낌이 싫어서일 것이다.
남편은 참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곧잘 뿌리를 내렸다. 한여름 뙤약볕엔 짙은 그늘로, 예고 없는 소나기엔 커다란 우산이 되어 주었다. 잎과 가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면 후드득 알맹이를 아낌없이 떨구었다. 풍성한 잎을 다 내주고도 겨울 광야에서 앙상한 팔로 삶을 헤쳐나가던 건실한 나무였다.
어느 해 예기치 못한 심한 눈보라가 산을 뒤덮었다. 높이 솟은 우듬지를 꽁꽁 덮어씌웠다. 햇살 하나도 비치지 않는 날이 계속되자 나무는 떨어뜨린 고개를 다시 들지 못했다. 쓰러지다가 전신을 덮쳐오는 환상통에 까무룩 정신을 잃은 사이 끓어오르는 불구덩이 한가운데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 안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국제 전화를 받는 남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선적해서 보냈던 부품 컨테이너가 항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납기를 못 맞추면 큰 손해가 나는데,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이었다. 국제정세로 생긴 일이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속히 무역 망이 안정되기만 초조하게 바라는 사이 해와 달은 속절없이 뜨고 졌다.
곧 숨이 멎을 같은 불길에 다 타버릴 듯한 날들이 이어졌다. 쓰라린 고통에 서서히 지쳐갔다. 무엇보다도 받아야 하는 금전보다 주어야 할 사람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 앓이가 심했다. 흥건한 참나무의 냄새는 사라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무성한 이파리와 쉼 없이 물길을 끌어올리는 둥치는 온데간데없고 퍼석거리고 벌어진 결만 남았다.
집에 오면 남편은 돌아누워 미동이 없었다. 어쩌다가 선사 船社에서 오는 소식에 화들짝 일어나 전화를 받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다 타버린 재처럼 희망의 불을 되살리지 못할 듯싶었다. 차곡차곡 받아먹은 도토리가 점점 바닥을 비우고, 그늘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와 아이들은 참나무의 웅숭한 깊이도 넉넉한 품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남편은 친정집 마당에서 툭하면 장작을 팼다. 햇빛에 번득이는 도끼날에 굵은 나무둥치가 속절없이 쩍 갈라졌다. 무표정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어깨에는 내면의 화가 모두 실린 듯 불뚝거렸다. 마치 도끼와 나무에 맺힌 한이라도 있는 듯 패고 또 패는 시간이 흘러갔다. 쌓여 가는 장작과 무뎌지는 도끼날만큼 울분과 억울함이 치유되고 있었다. 바람에 스며오는 파스 냄새가 진정 알약처럼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때쯤, 나는 새로 시작한 일로 바빠졌다. 그는 퇴근 후 아이들과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재미를 들였다. 엄마 손이 부족한 아이들은 아빠와의 시간을 마냥 좋아했다. 까르르 웃는 소리에 초췌하던 낮 빛도 점차 밝아지고 굽은 등은 다시 펴지고 있었다. 깊어진 눈빛에서 그간의 속앓이를 짐작하고 남았다.
미끈한 참나무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비로소 숯이 된다. 온몸을 사르며 극한을 향해 타오르던 순간 저절로 입을 벌린다. 불구덩이 속에서 숨을 참으며 재가 되지 않고 구워진다. 제살이 타들어 가는 아픔을 겪은 숯은 결마다 애환을 품는다.
삶은 자신을 태우는 일이다. 새까만 속살과 거무스름한 몰골에서 메마른 속내가 드러난다. 그는 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생명의 불씨를 잉태한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빛이었다. 쓰러진 나무의 인생이 모두 타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시 피어오를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숯이 숨을 쉬고 있었다.
검은 숯에서 불씨를 살려냈다. 바람과 불길과 차가움까지 온갖 시련을 받아낸 그는 설핏한 붉은 기운에 기대 간절히 불을 피워내고 있었다. 지난한 고통의 시간을 다 내려놓고 다시 삶의 의지를 다졌다. 새카맣게 가슴이 한번 타버린 사람이기에 남편은 숯과 동화된 듯했다.
한그루의 참나무가 숯이 되는 과정은 지옥 불에 뛰어든 것과 같다. 더 잘 살아야 했다는 미련도 잘려 쓰러졌다는 원망도 다 화염으로 태운다. 타닥타닥 파열음도 시꺼멓게 토해내는 그을음도 사라진다. 젊은 날의 번득이는 독기와 열기는 순연純然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싸한 공기가 새어든다. 난로를 급히 열어 불땀부터 살핀다. 굵은 장작이 어느새 제 몸피를 다 태우고 잠잠해졌다. 부지깽이로 들추자, 잠든 것 같은 불 속에서 잔불이 갈라진 혀를 내민다. 석류 씨알 같은 빨간 불씨들이 컴컴해진 난로 속에서 빠끔빠끔 빛을 발한다. 사그라든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는 알불이 파삭거린다.
남편은 자신이 숯이라는 것을 알까. 젊은 날의 모든 것을 녹여낸 강렬한 화염은 아니지만, 인생의 연륜이 쌓인 은근히 뜨거운 잉걸불로 남았다. 거무스름한 빛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뭉근한 기운이 주변을 환히 밝히고 따습게 한다. 온기를 담은 불을 뒤적인다. 불꽃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이글대는 잉걸불을 마주하면 살아온 생의 고단함도 앞으로의 삶에 대한 대단함도 무색해진다.
화형식을 마친 까만 숯이 한지에 스며든 묵흔墨痕처럼 퇴색해 버렸다. 소복한 하얀 재가 펄썩 인다. 나무의 분골을 삽으로 퍼서 텃밭에 뿌린다. 온전히 자신을 태워버린 숯은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윤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