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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 일어나 빛을 발하자 (사60:1-5)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술가인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사람이 성공자가 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즉 뭔가를 하려 할 때면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마음으로부터 그 목표를 ‘생각하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일이 있으니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냥 하는 일과 계획하고 준비해서 하는 일은 과정도 다르지만, 결과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일을 하려 할 때면 분명한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내게는 없는 능력을 얻게 하는 만능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면 그에게서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모든 잠긴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가 됩니다. 그래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일을 하려 할 때나 하는 중에라도 늘 ‘기도하며 일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목표를 정했고 계획을 세웠으면 주저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말로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정녕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행동하는 사람이 되라고 할진대 목표든 계획이든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까지도 ‘실천하며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보면 필 박사가 자기 계발 전문가라서인지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들뿐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 옳은 말일지는 몰라도 다 맞는 말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뭐가 틀렸다는 거냐?’라고 할 수 있는데, 필 박사가 말한 세 가지 중 첫 번째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배고파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에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목표와 계획을 세울 줄 몰라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막막한 형편에 맞닥뜨렸다면?
주야장천으로 사면초가의 상황만 계속된다면 단지 목표를 세우지 않았기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형편이었고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의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들 앞에 펼쳐진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처참했습니다. 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성전은 흔적만 겨우 남은 상태로 무너져 내려앉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왔다고 좋아하던 것도 한순간이었고 당장 살아갈 길은 물론이고 집이고 성이고 간에 재건을 하자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가 막막하기만 했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털썩 주저앉아 절망 어린 한숨만 내쉬는 게 전부인 상태였습니다.
상황이 이랬기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건을 위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됩니다.
“일어나라.”
하나님의 이 한마디의 말씀은 인생의 주저앉은 형편에서 다시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의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해 줍니다.
우선 본문에 기록된 ‘일어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쿰’입니다.
번역상으로는 ‘일어나라’가 맞습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일어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쿰’이란 단어가 히브리어 원어 그대로 신약에서 딱 한 번 기록되고 있는데 마가복음 5:4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다 했습니다.
이때 ‘달리다굼’에서 ‘달리다’는 ‘소녀, 처녀’라는 뜻이고 ‘굼’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쿰’ 곧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셨을 때 죽었던 소녀가 스스로 일어난 겁니까? 예수님이 일어나게 하신 겁니까?
이외에도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도, 심지어 성전에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도 ‘일어나라’의 주체가 누구였습니까?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 만나니까 일어났습니다. 선천적 앉은뱅이도 예수님의 이름만으로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앞서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고.
그러므로 본문을 보며 우린 알아야 합니다. 막막함 중에 주저앉은 자들에게, 또한 절망 중에 낙담한 사람들을 향해 그들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런 이유로 필 박사가 말한 성공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목표를 세우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라.’에서부터 시작했어야 옳은 말인 동시에 맞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이젠 내 인생을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막막해하지만 마세요. 어떻게 해야 다시 회복하고 회생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고, 또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된다고 절망하거나 포기하려 하지 말고 내가 해도 안 될 때는 그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라는 신호라는 믿음을 갖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 서리라.’는 찬양곡의 가사처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라는 소망을 품고 삶을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기록된 ‘일어나라’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도 다시 일으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의 말씀이라 믿어 세상에서 다시 우뚝 서기 위해 우선은 믿음부터 일으켜 세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이어서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도 해석에 신중할 필요가 있는데, ‘일어나라’의 경우에서처럼 이 말씀 역시 빛을 발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가장 흔한 오해가 빛을 발하라고 하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해야 한다거나 믿는 자의 본을 보이며 살라든가 세상에 빛을 전하기 위해 전도에 열심을 내라는 말씀 정도로 해석하거나 설교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물론 ‘빛을 발하라’는 말씀엔 그런 의미들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인 얘기고, 빛을 발하기 위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삶이 가능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빛을 발하라’는 말씀의 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뒤에 나오는 말씀인 ‘네 빛이 이르렀고’에서부터 해석해나가야 합니다.
‘네 빛이 이르렀고’에서 ‘이르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보’인데 우리말로는 ‘돌아오다’ 또는 ‘돌아가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빛을 발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찬란한 때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니 당장의 현실 상황이 어떠하든 이제부터는 다시금 빛나는 인생으로 살게 될 것을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증거로 1절 말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와 관련하여 신약의 기록을 보면 요한복음 1:9절에서 12절 말씀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한 이스라엘에게 찬란하게 빛나는 날이 돌아오게 된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빛 되신 예수님이 같이 하시기만 하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 인생의 앞날이 환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내가 살아가는 형편이 어떻게 변하든 내가 가진 ‘믿음의 정체성’만은 절대 변하거나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살다 보면 실패하거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이 뜻대로 안 되거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중에 중요한 건 ‘나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사는 형편은 변해도 절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놓치거나 잃어버리고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십니다. 찬양곡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일에 실패했어도 너는 실망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
이렇듯 ‘일어나라’와 ‘빛을 발하라’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내 인생이 일어나질 못하고 있고 내 삶이 찬란하게 빛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책임이 나와는 하등 상관없이 오롯이 다 하나님 탓이고 예수님 탓일까요?
만약에 누군가가 줘도 못 받았다면 통상적으로 볼 때 못 받은 게 준 사람 탓일까요? 못 받은 사람 탓일까요?
안 주고도 줬다고 한다면 거짓말하는 그 사람 탓이겠지만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란 건 다들 믿으실 겁니다. 그래서 주신 하나님은 못 받는 사람이 없게 하시려고 사람들을 향해 준 것을 받고자 하면 이렇게 하라고까지 ‘받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55:6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엘 2:32절에서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받는 방법이 하나님을 찾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면, 일어나고 빛을 발하고자 함에 있어 오늘날이라 해서 그 방법이 다르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따라서 이런 말씀들에 근거하여 인생에서 성공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를 다시 쓴다면 첫째는 ‘하나님을 찾으라!’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이고, 셋째는 ‘이것들을 실천하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하나님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현실이 망연자실하고 앞날이 막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너희의 그런 인생에서 너희가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너희 인생에 내가 개입하게 해라. 그래서 너희가 못하는 그 일을 내가 하게 하라시는 하나님의 강권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셨으니 받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줘도 못 받는 인생으로 남을 것인가의 선택과 결정은 이스라엘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로 넘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과연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여기서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며 그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은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고 있을 때의 시간으로 되돌려 보면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살고들 있었을까요?
‘우린 언제나 이 포로 신세를 면할까?’ 또는 ‘우리가 과연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나 있으려나?’ 하며 살았을 겁니다.
이제 거기서 다시 시간을 조금만 앞으로 옮겨오면 영원할 줄만 알았던 바벨론 제국이 어느 순간 바사 왕국에 의해 패망하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던 민족들은 각기 자기 나라로 귀환하라는 왕의 조서가 내려집니다.
당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현실로 펼쳐집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그런 상황들이 꿈꾸는 것 같다고까지 할 정도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리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내 생전에 이런 날도 다 있구나.’ 그리고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귀환했을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문의 시간대로 왔을 때, 폐허가 된 고향과 집들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심정을 가졌어야 했을까요?
‘어떡하지?’라는 낙심과 절망을 해야 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 이번에도.’라는 믿음을 가져야 했을까요?
본문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가졌던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며 오늘을 사는 저나 여러분도 선택과 결정을 함에 있어 분명한 기준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렵고 답답한 현실 앞에서 체념하고 근심만 할 건지, 아니면 ‘하나님! 이번에도.’라는 믿음을 가져야 할지...
(한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 이번에도.”
우리의 믿음이 변함이 없는 한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의 기도가 흔들림이 없는 한 하나님의 응답하심도 흔들림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신다면 앞으로의 하나님도 ‘좋으실 하나님’이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너든 나든 슬픔이 찾아온 형편에서 ‘슬퍼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자.’ 한들 슬픔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낙심될 상황에서 ‘절망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자.’ 한다고 절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약에서 죽었던 소녀가 일어나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고, 나면서부터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일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게 됐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의 원치 않는 상황들을 떨치고 일어나며, 바라고 원하던 일들로 인해 환하게 빛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게도 ‘예수님만이 답’입니다.
이제 내 인생의 답이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신다면, 그 답을 내 인생에 적용하여 내 삶의 모든 문제들을 풀고 해결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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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나님을 찾았으면, ‘하나님! 이번에도’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이제부터는 힘든 인생에서 일어나고 암울했던 인생이 밝아져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며 사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