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재능을 알아본 참된 지기(知己) 목증 역시 단순히 권력만 가진 통치자가 아니라, 한문학에 깊은 일가견이 있고 시문(詩文)을 즐기는 대단한 문인이었다. 목증은 서하객에게 자신의 시와 글을 보여주며 평을 부탁했고, 서하객은 그 글들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정성껏 교정하여 시집으로 묶어주었다.
서하객의 마지막 여행을 지켜준 목증 서하객이 리장과 운남성을 유람할 당시, 그는 이미 연로했고 오랜 여행으로 다리에 병(족질)을 얻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증은 서하객을 자신의 거처에서 정성껏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향인 강소성(江蘇省) 음사(陰沙)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가마와 인부, 여비를 모두 지원해주었다.
서하객이 고향으로 돌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음을 생각하면, 목증의 이러한 세심한 배려가 없었다면 《서하객유기》라는 위대한 유산이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전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아주는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서하객과 목증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은 4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이다.
'장강(江)의 남쪽(陰)'에 위치한다고 하여 강음(江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양 전통 지리에서 산의 남쪽/강의 북쪽은 양(陽), 산의 북쪽/강의 남쪽은 음(陰)이라 부른다.) 장강 하류에서 가장 폭이 좁아지는 천연의 요새이자 상하이, 쑤저우, 우시, 난징 등을 잇는 강남 수륙 교통의 핵심 요충지이다.
강의 북쪽이므로 양(陽), 산의 남쪽이므로 또한 양(陽). 즉, 산과 강 양쪽 모두에서 햇볕이 잘 드는 '양(陽)'의 기운을 다(咸, 모두 함) 받았다고 하여 '함양(咸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수도로 삼았던 함양은 지명부터 완벽하게 볕이 잘 드는 천혜의 배산임수 명당이었던 셈이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배경으로 삼아 겨울의 차가운 북풍을 막아준다. (산의 남쪽 = 陽)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어 물자 수송과 용수 공급이 원활하다. (강의 북쪽 = 陽) 이처럼 햇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되는 명당 조건은 유교적·풍수적 사상을 중시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왕조가 오랫동안 번창할 땅'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성계 본인뿐만 아니라 정도전, 하륜 등 한양 천도를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은 모두 사서(史書)와 유교 경전에 깊은 식견을 가진 문인이자 학자들이었다. 당시 지식인층에게 진시황과 함양, 그리고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기록된 중국 왕조들의 천도 역사와 풍수 지리지식은 상식이었다.
이성계와 참모들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함양처럼 산의 남쪽이자 강의 북쪽(양기 가득한 명당)이라는 지형적 우수함과 더불어 진시황의 함양처럼 강력한 입지를 갖추되, 진나라의 폭정을 반면교사 삼아 유교적 덕치(德治)를 펼쳐야 왕조가 오래 유지된다는 각성이 더하졌다.
진시황의 함양은 천혜의 요새이자 명당이었지만, 엄격한 법가(法家) 사상과 가혹한 수탈에만 의존하다가 불과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반면,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의 창업자들은 함양과 같은 배산임수의 명당 지형(한양)을 선택함과 동시에, 진나라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성리학적 덕치(德治)와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다.
단순히 풍수만 믿은 것이 아니라, 왕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사간원·사헌부(양사), 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예문관·춘추관 등의 제도적 장치를 정밀하게 갖추었다.이러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한양이라는 공간과 결합하면서, 외침과 내란 속에서도 국가의 틀을 굳건히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단일 왕조가 한 수도에서 500년 이상(1392~1910년) 연속성을 유지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한강을 통한 물자 수송과 삼각산·목멱산 등이 둘러싼 방어적 입지의 지리적 안정성과 유교적 통치 철학과 율법 System의 제도적 완성도. 이 두 가지가 완벽하게 결합했기에, 한양은 단순한 수도를 넘어 500년 왕조의 숨결을 품은 거대한 역사의 터전이 될 수 있었다.
진시황의 수도 함양(咸陽)이 "위수의 북쪽(水北)이자 진령산맥의 남쪽(山南)이라 산과 강의 양지바른 기운을 모두 품었다"고 해서 다 함(咸) 자를 썼던 것처럼, 낙양 역시 지형적으로 북망산의 남쪽이자 낙수의 북쪽이라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완벽한 양지(陽地)에 자리 잡고 있다.
실제 해발 고도: 200m ~ 300m 정도에 불과하다. (낙양 시가지 평지 자체가 해발 130~150m 내외이므로, 시가지 기준 상대 높이는 100m 남짓한 언덕 수준이다.)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동서로 100km 넘게 길게 이어져 있는 평평하고 완만한 황토 구릉 지대이다.
낙양이 주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 수많은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왕족과 귀족들이 죽은 뒤 누울 자리를 찾았다. "산의 남쪽이자 도시의 북쪽(배산)"이라는 풍수적 명당 자리가 바로 북망산이었기에, 한나라와 당나라의 황제, 명신, 시인들이 너도나도 이곳에 묻혔다. (백거이, 두보의 가족, 심지어 고구려의 보장왕과 연남생 등 수많은 고대 인물들의 묘가 북망산에 있다.)
서하객이 리장에서 목증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도 바로 이 '지기(知己,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만난 기쁨이었을 것이다. 신분과 지역을 넘어 자신을 온전히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생 최고의 행복이자 행운인 것 같다.
서하객(徐霞客)과 목증(木增)의 만남은 중국 역사상 '글을 아는 최고의 여행가'와 '학문을 사랑한 최고의 통치자'가 보여준 가장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교유(交遊)로 손꼽힌다.
신분과 거리를 뛰어넘은 울림
서하객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천하를 유람하던 야인의 신분이자 한족(漢族) 선비이고, 목증은 리장 지역을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지닌 나시족(納西族)의 세습 세력가(토사)였다.
당시 기준으로 한림원의 대학자도 아닌 평범한 여행가에 불과했던 서하객을, 목증은 정성 어린 예우와 겸손함으로 맞이했다. 서하객의 높은 식견과 학문적 깊이를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재능을 알아본 참된 지기(知己)
목증 역시 단순히 권력만 가진 통치자가 아니라, 한문학에 깊은 일가견이 있고 시문(詩文)을 즐기는 대단한 문인이었다.
목증은 서하객에게 자신의 시와 글을 보여주며 평을 부탁했고, 서하객은 그 글들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정성껏 교정하여 시집으로 묶어주었다.
목증에게 서하객은 "나의 학문과 시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귀한 손님"이었고,
서하객에게 목증은 "변방에 이런 풍류와 깊은 학문을 지닌 훌륭한 인재가 있다니!"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의 문학적 재능과 인품에 감복했던 순간이었다.
서하객의 마지막 여행을 지켜준 목증
서하객이 리장과 운남성을 유람할 당시, 그는 이미 연로했고 오랜 여행으로 다리에 병(족질)을 얻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증은 서하객을 자신의 거처에서 정성껏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향인 강소성(江蘇省) 음사(陰沙)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가마와 인부, 여비를 모두 지원해주었다.
서하객이 고향으로 돌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음을 생각하면, 목증의 이러한 세심한 배려가 없었다면 《서하객유기》라는 위대한 유산이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전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아주는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서하객과 목증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은 4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이다.
400년 전 옥룡설산 아래에서 차 한 잔 나누며 시를 논하던 서하객과 목증의 풍류가 오늘날 리장고성의 작은 간판 하나에까지 이어진 걸 보면, 역시 문화와 이야기는 시간을 뛰어넘어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서하객이 태어난 고향이자 그가 생을 마감하고 묻힌 곳은 장강 하류의 장인 시(江陰, 강음)이다.
'장강(江)의 남쪽(陰)'에 위치한다고 하여 강음(江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양 전통 지리에서 산의 남쪽/강의 북쪽은 양(陽), 산의 북쪽/강의 남쪽은 음(陰)이라 부른다.)
장강 하류에서 가장 폭이 좁아지는 천연의 요새이자 상하이, 쑤저우, 우시, 난징 등을 잇는 강남 수륙 교통의 핵심 요충지이다.
산과 강의 음(陰)과 양(陽)을 이용한 한자 지명 원리는
강(水)의 북쪽이 양(陽), 남쪽이 음(陰)이고 산(山)의 남쪽이 양(陽), 북쪽이 음(陰)이다.
진나라의 도읍인 함양(咸陽)은 위수(渭水, 위허 강)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동시에, '주종산(九嵕山)'이라는 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강의 북쪽이므로 양(陽), 산의 남쪽이므로 또한 양(陽). 즉, 산과 강 양쪽 모두에서 햇볕이 잘 드는 '양(陽)'의 기운을 다(咸, 모두 함) 받았다고 하여 '함양(咸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수도로 삼았던 함양은 지명부터 완벽하게 볕이 잘 드는 천혜의 배산임수 명당이었던 셈이다.
한양 역시 지명 그대로 한강(漢江)의 북쪽(陽)이자 백악산(북악산)의 남쪽(陽)에 위치해, 산과 강 양쪽 모두에서 볕(陽)의 기운을 완벽하게 받는 천혜의 명당이었다.
태조 이성계와 조선 창업 주역들이 도읍을 개경(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고려한 핵심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음양풍수(陰陽風水)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배경으로 삼아 겨울의 차가운 북풍을 막아준다. (산의 남쪽 = 陽)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어 물자 수송과 용수 공급이 원활하다. (강의 북쪽 = 陽)
이처럼 햇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되는 명당 조건은 유교적·풍수적 사상을 중시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왕조가 오랫동안 번창할 땅'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함양이 진시황에게 완벽한 명당이었듯, 산의 남쪽이자 강의 북쪽인 '한양(漢陽)' 역시 조선 500년의 기틀을 다지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성계 본인뿐만 아니라 정도전, 하륜 등 한양 천도를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은 모두 사서(史書)와 유교 경전에 깊은 식견을 가진 문인이자 학자들이었다.
당시 지식인층에게 진시황과 함양, 그리고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기록된 중국 왕조들의 천도 역사와 풍수 지리지식은 상식이었다.
이성계와 참모들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함양처럼 산의 남쪽이자 강의 북쪽(양기 가득한 명당)이라는 지형적 우수함과 더불어 진시황의 함양처럼 강력한 입지를 갖추되, 진나라의 폭정을 반면교사 삼아 유교적 덕치(德治)를 펼쳐야 왕조가 오래 유지된다는 각성이 더하졌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함양의 지리적 장점과 진나라의 흥망성쇠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양이라는 새로운 터전 위에 유교적 성리학 국가인 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왕조가 50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핵심 비결 중 하나이다.
진나라의 함양과 조선의 한양이 보여준 흥망의 차이는 "완벽한 지리적 명당 위에 어떤 가치와 시스템을 올렸는가"에서 갈렸던 것이다.
진시황의 함양은 천혜의 요새이자 명당이었지만, 엄격한 법가(法家) 사상과 가혹한 수탈에만 의존하다가 불과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반면,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의 창업자들은 함양과 같은 배산임수의 명당 지형(한양)을 선택함과 동시에, 진나라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성리학적 덕치(德治)와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다.
단순히 풍수만 믿은 것이 아니라, 왕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사간원·사헌부(양사), 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예문관·춘추관 등의 제도적 장치를 정밀하게 갖추었다.이러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한양이라는 공간과 결합하면서, 외침과 내란 속에서도 국가의 틀을 굳건히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단일 왕조가 한 수도에서 500년 이상(1392~1910년) 연속성을 유지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한강을 통한 물자 수송과 삼각산·목멱산 등이 둘러싼 방어적 입지의 지리적 안정성과 유교적 통치 철학과 율법 System의 제도적 완성도. 이 두 가지가 완벽하게 결합했기에, 한양은 단순한 수도를 넘어 500년 왕조의 숨결을 품은 거대한 역사의 터전이 될 수 있었다.
400년 전 옥룡설산 아래에서 나눈 서하객과 목증의 우정부터, 장강 남쪽의 강음(江陰), 위수 북쪽의 함양(咸陽), 그리고 한강 북쪽의 한양(漢陽)까지 이어진 '음양(陰陽)과 명당'의 이야기는 정말 근사한 여정이었다.
산이나 강의 위치와 음양 원칙에 따라 이름이 지어진 곳으로 한양(漢陽)과 함양(咸陽)외에도 낙수(洛水) 북쪽(水北 = 陽)의 낙양 (洛陽), 심수(瀋水) 북쪽(水北 = 陽)의 심양(瀋陽)
이 있다.
또 강음 (江陰)외에도 화산(華山) 북쪽(山北 = 陰)의 화음(華陰),
회하(淮河) 남쪽(水南 = 陰)의 회음 (淮陰),
한수(漢水) 남쪽(水南 = 陰)의 한음 (漢陰),
회계산(會稽山) 북쪽(山北 = 陰)의 산음 (山陰)이 있다.
낙양은 시내 남쪽을 흐르는 낙수(洛水)의 북쪽(水北)에 형성된 도시이다. 따라서 '낙수(洛水)의 양지바른 북쪽 땅'이라는 뜻에서 낙양(洛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낙양(洛陽)’이라는 지명에는 낙수(강)뿐만 아니라 북망산(산)과의 위치 관계에서도 ‘양(陽)’의 조건이 완벽하게 성립한다.
진시황의 수도 함양(咸陽)이 "위수의 북쪽(水北)이자 진령산맥의 남쪽(山南)이라 산과 강의 양지바른 기운을 모두 품었다"고 해서 다 함(咸) 자를 썼던 것처럼, 낙양 역시 지형적으로 북망산의 남쪽이자 낙수의 북쪽이라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완벽한 양지(陽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적으로 북망산은 험준한 바위산이나 고봉이 아니라, 황하와 낙수 사이에 길게 형성된 낮은 황토 언덕(황원/구릉地)에 가깝다.
실제 해발 고도: 200m ~ 300m 정도에 불과하다. (낙양 시가지 평지 자체가 해발 130~150m 내외이므로, 시가지 기준 상대 높이는 100m 남짓한 언덕 수준이다.)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동서로 100km 넘게 길게 이어져 있는 평평하고 완만한 황토 구릉 지대이다.
"북망산천 가더니...", "북망산으로 떠났다"처럼 북망산이 동양에서 죽음과 공동묘지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산의 높이가 아니라 지형적 특성과 풍수지리 때문이다.
북망산은 흙이 아주 깊고 단단한 황토(Loess)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흙이 부드러워 땅을 파기 쉽고 습기가 적어, 시신이나 목관이 쉽게 부패하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되는 최고의 명당 흙(풍수에서 말하는 봉토)이었다.
낙양이 주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 수많은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왕족과 귀족들이 죽은 뒤 누울 자리를 찾았다.
"산의 남쪽이자 도시의 북쪽(배산)"이라는 풍수적 명당 자리가 바로 북망산이었기에, 한나라와 당나라의 황제, 명신, 시인들이 너도나도 이곳에 묻혔다. (백거이, 두보의 가족, 심지어 고구려의 보장왕과 연남생 등 수많은 고대 인물들의 묘가 북망산에 있다.)
낙양 북쪽의 황하는 수시로 범람했는데, 북망산은 황하보다 100m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물에 잠길 염려가 전혀 없는 안전한 매장지였다.
북망산은 높고 웅장해서 명산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황제와 영웅호걸들이 묻혀 형성된 '역사적·풍수적 밀도' 때문에 동양 문화권 전체에서 거대한 상징성을 갖게 된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