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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장 영웅호가행(英雄浩歌行)
서동정산의 한봉우리.
혈전은 이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단 세 사람의 분전에 불과했으나 그 격렬함이란 일찌기 무림사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대일의 싸움, 그것은 바로 반야천과 우내쌍기의 일전이었다.
콰르르르릉......!
굉렬한 음향이울리자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취화상과 만박노개가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우내삼기의 무공이 겨우 이 정도였더냐?"
반야천은 연달아 장공을 떨쳐 내며 조소를 던졌다.
그의 쌍장이 떨쳐질 때마다 산정의 암벽들이 마구 허물어져 내렸다.
우내쌍기는 그의 공세를 근근히 받아 넘기고 있을 뿐, 반격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동방절호, 그는 어디 있느냐? 그 자만이 노부와 자웅을 겨룰 자격이 있다."
콰르르릉--!
다시 한 차례 반야천의 쌍장이 춤을 추었다.
"흐흑! 빌어먹을타불......!"
"헉! 반야천, 세긴 세구나. 그러나 저러나 그 녀석은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지?"
취화상과 만박노개는 다급히 신형을 물리며 투덜거렸다.
"우우우우--!"
산정을 뒤흔드는 괴이한 장소성과 함께 시뻘건 운무덩어리가 세 사람 사이로 맹렬하게 덮쳐왔다.
콰콰쾅--!
폭음이 울리고반야천을 비롯하여 우내쌍기는 주르르 밀려났다.
느닷없는 사태에 세 사람은 낭패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자는 반야천이었다.
"천마혈영공! 너는 누구냐? 어떻게 암흑제의 무공을 쓰느냐?"
"암흑제는 죽었다, 동방불후의 손에."
"동방불후에게? 그렇다면 동방불후는 어디 있느냐?"
"크흐흐! 그 자도 죽었다. 내 손에 의해서!"
"뭣이? 그렇게 말하는 너는 대체 누구냐?"
"일월맹의 맹주. 후후후......."
진중서는 그저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평범한웃음 한 가닥이 전신에 소름이 돋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내쌍기는 처음 알았다.
그들은 대뜸 난입자가 어떤 인물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우우....... 마인(魔人)! 인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진중서가 쌍장을 뻗어낸 것은 그때였다.
콰아아아--!
무시무시한 예의 혈무기둥이 반야천을 노리고 폭사되었다.
반야천은 눈썹을 불쑥 치켜 올리며 냉소했다.
"어림없다! 그 무공은 본좌에게 통하지 않는다."
동시, 그가 쌍장을 뻗자 똑같은 혈무의 강기가 발출되었다.
콰콰쾅--!
벽력과 같은 폭음이 일자 두 사람의 신형은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우열은 뚜렷했다.
진중서는 일장여나 밀려난 반면 반야천은 다섯 보를 후퇴했을 뿐이었다.
"천마신궁주도 천마혈영공을? 그렇다면, 크크......."
진중서는 사이롭게 웃었으되, 그의 신형은 이미 하나의 혈무덩어리로 화해 반야천에게 그대로 충돌해 가고 있었다.
"오라! 내 너에게 천마(天魔) 무학의 진수인 구음유명공(九陰幽冥功)을 보여 주겠다."
반야천은 두 손을 뻗더니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고오오오--!
천지가 모두 유명부로 귀속되는가?
까마득한 대혼돈(大混沌)의 음향과 함께 반야천의 쌍장으로부터 청광(靑光)이 폭사되었다.
흑암을 짙푸른 광휘로 몰아 넣는.......
만박노개의 입에서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튀어 나왔다.
"오오, 저주의 아수라마공(阿修羅魔功)이 인세에 나타나다니!"
천하를 주유하며 갖은 풍상을 겪은 만큼 웬만한 일에는 눈썹도 까딱않는 그였다.
그런 그가 이처럼 놀란 것은 섬뜩한 혈사(血史)가 어우러진 하나의 전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태초에 아수라가 선계(仙界)에 도전하니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명암(明暗)이 나누어지도다. 아수라는 패퇴(敗退)하여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다.
그의 모든 힘과 저주를 하나의 마법(魔法)에 불어 넣은 바, 이를 일컬어 아수라마황검(阿修羅魔皇劒)이라 하노라.
그 마황검이 어둠으로부터 이 땅에 떨어졌으니, 거기에 적혀 있는 마법이 인세에 전해져 천마황(天魔皇)이 탄생했노라.
천마황이란 파황교의 시조(始祖)이자 고금제일의 마인(魔人)으로써 그는 아수라의 마법을 인세의 심법으로 바꾸어 전무후무한 마공을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이른바 구음유명공은 바로 그렇게 탄생되었다.
"멈추시오--!"
벽력성과도 같은 사자후가 암천을 갈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콰콰-- 콰르르릉--!
공전절후의 대격돌이 있었고, 산봉이 무너질듯 뒤흔들렸다.
경풍의 회오리가 일며 사방에서 흙과 부러진 나무를 휩몰고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속에서 튀어 오르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혈인(血人)인양 전신이 피로 물든 진중서였다.
"아버님--!"
장내로 뛰어 들고자 했던 인영은 막바로 진중서에게로 쏘아져갔다.
그는 진중서의 몸을 받아 안고 땅에 내려섰다.
진일문이었다.
그는 부친이 절명(絶命)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다.
"오오! 신이여......."
진일문은 거의넋을 잃었다.
그의 눈만이 극도의 동요를 보이며 시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제 진중서의얼굴은 더 이상 악마의 그것이 아니었다.
영혼과 분리되어 파리해진 그의 얼굴은 그가 인간(人間)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었다.
진일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그 얼굴이 무척이나 수려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아니 자신이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던 얼굴과 닮은 모습이기도 했다.
혈연(血緣)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존재를 깨닫는 순간부터 무서울 정도의 친화력(親和力)이 생기고 마는.......
진일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아버님......."
그 숨죽인 오열은 어떤 통곡보다도 더 처절하고 진한 슬픔을 내포하고 있었다.
쏴아아아--!
침묵도, 오열도 다시 쏟아지는 폭우 속에 묻혀 버렸다.
이윽고 신색을가다듬은 반야천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진일문은 말없이 부친의 시신을 지면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돌아섰다.
반야천의 얼굴에 일순 야릇한 빛이 떠올랐다.
"너는... 진일문......?"
"그렇소."
"살아 있었구나! 네가......."
이 시대, 마의 종주(宗主) 격이었던 반야천도 진일문만은 아꼈었다.
그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며 지금 그의 흔들리는 음성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반궁주, 방금 전 당신이 해한 분이 누군지 아시오?"
"그는 스스로 일월맹의 맹주라고 했다."
"맞소. 그러나 생전 처음 뵈온 내 부친이기도 하오."
"뭣이! 그것이 정말이냐?"
반야천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도무림을 대표하는 구주동맹의 맹주와 마세로 천하를 떨어 울리던 일월맹의 맹주가 부자지간이라면 천하의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반야천의 입에서 기이한 탄식이 흘러 나왔다.
"허허... 하늘이 진정 인간을 비웃는지고! 본좌는 결국 불운한 너희 부자, 그 공동의 부채를 안게 된 셈이렷다?"
"그렇소."
"그러나 나는 다시 너를 죽여야 한다. 본좌는 길이 다르고 뜻이 다른 자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외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소이다. 빈매.... 그녀는 내가 사경에서 깨어나는데 일조했던 사람 중 하나요. 당신은 바로 그녀의 조부......."
"흐흐흐... 흐하하하핫......!"
반야천은 급기야 말을 대신해 앙천광소했다.
정도와 마도의 거성(巨星)들, 이들 두 사람의 관계는 남이 아닌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얼굴 위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너, 너는!"
바로 눈앞에서진일문의 일신이 서서히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피부가 서서히 투명해 지는가 싶더니 은은한 백색의 서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곤륜의 산정에 쌓인 만년설(萬年雪)과도 같이 장엄하고도 눈부신 것이었다.
그 현상은 반야천은 물론 곁에 있던 우내쌍기에게도 심장이 멎을 듯한 일대 충격을 선사했다.
특히 백색의 서기 속에서 유현한 빛을 발하는 진일문의 눈은 그대로 심해(深海)를 연상시켰다.
파아아아--!
천지를 뒤엎을듯한 폭우도 그의 몸 일장 밖에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눈부신 백라유삼을 표표히 휘날리며 서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가히 인세를 초탈한 선인(仙人)의 풍도가 느껴졌다.
반야천의 입술사이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으음.... 네가 원원지체를 이루었다니! 동방절호의 생존여부를 회의했건만......."
하지만 그렇다해서 그의 기세가 사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 맹렬한 투지를 보이며 일갈했다.
"누구라도 좋다! 오라."
콰르르릉--!
천마혈영장이었다.
그의 쌍장에서 발출된 핏빛 기둥이 회오리를 이루며 가공할 기세로 진일문을 덮쳐갔다.
'더는 당하지 않소, 반궁주!'
진일문도 좌장을 슬쩍 밀어냈다.
고오오오--!
그를 감싸고 있던 백색 서기가 그의 손길에 따라 뻗어나갔다.
콰콰콰쾅-- 콰르르릉!
천지를 함몰시킬 듯한 굉음과 더불어 사위에는 거대한 잠력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우내쌍기는 이를 감당하지 못해 신음을 발하며 뒤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컸구나! 이번에는 혈명육장(血冥六掌)을 보여 주겠다."
반야천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올렸다.
동시에 그는 쌍장을 떨쳐 빠르게 허공을 유린했다.
스스스슷--!
무수히 환출된핏빛의 수영(手影)이 흡사 그물처럼 진일문을 조여갔다.
놀랍게도 단 한번의 손짓에 무려 일흔두 개의 수영이 허공을 뒤덮어 버린 것이었다.
콰아아아--!
막강한 장강(掌 )의 기류는 진일문으로 하여금 빠져 나갈 공간을 일 촌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일문은 그 속에서 담담한 기색으로 쌍장을 회전시켜 원을 그려냈다.
쿠우우--!
두 줄기의 백색 기류가 커다란 강환( 環)을 이루며 조수처럼 밀려오는 핏빛 강기들을 향해 부딪쳐 갔다.
콰쾅--!
암천이 깨져버릴 듯한 폭음이 동정산의 봉우리를 강타했다.
천지가 온통 그 엄청난 폭음 속으로 침몰되고 말았다.
"으음, 대단하다!"
반야천은 허공에 뜬 채 삼장이나 뒤로 튕겨져 나갔다.
침음성을 흘리는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혈명육장마저도 받아 내다니......."
반야천은 혼잣말처럼 읊조리더니 즉시 방향을 바꾸어 진일문에게로 쏘아져 갔다.
콰르르릉--!
그의 손이 일대 선풍을 일으키며 연속하여 허공을 갈랐다.
그때마다 핏빛을 드리운 막강한 잠경이 사위를 휘몰아쳤다.
반면에 진일문은 갈수록 강도가 높아가는 상대방의 공세에 전력으로 광화비전의 제 일법에서부터 육법까지를 펼쳤다.
그의 쌍장이 좌우로 번뜩이며 백색의 서기를 토해냈다.
콰콰쾅-- 콰쾅!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두 가닥의 각기 다른 잠경이 계속 충돌하며 대기에 파동을 일으키곤 했다.
두 사람 모두가 추호도 양보를 보이지 않는 일전이었다.
콰콰르르릉--!
급기야 동정산의 봉우리 전체가 진동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신형은 허공으로 십여장을 치솟으며 서로를 향해 충돌해갔다.
콰앙!
그것은 고금을통틀어 전무후무한 무림신화가 창출되는 한 순간이었다.
그들이 허공에 뿌려내는 수영은 암천을 뒤덮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때부터인가 폭우마저 잠재우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옷은 걸레처럼 헤어져 그 조각들이 사방으로 분분이 흩어져 갔다.
진일문.
그는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온몸이 부서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반야천의 무공을 앞으로 얼마나 더 상대할 수 있을지는 그로서도 의문이었다.
반야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진일문이 원원지체를 이루었다 해도 설마 하니 자신의 맞수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그였다.
진일문의 초인적인 거력(巨力)은 차라리 그 스스로 자신의 안목을 의심하게 했다.
반야천은 내심이를 악물었다.
'안되겠구나! 최후수법을.......'
결심을 굳히자그의 공세는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우우우웅--!
현란한 장영이원호를 그리는 가운데 반야천의 장심에서 섬뜩한 청광(淸光)이 반점처럼 떠올랐다.
이어 그것은 점차 확산되더니 곧 천지간을 청색의 빛으로 가두어 버렸다.
콰우우우--!
땅도, 물도,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도 없었다.
바야흐로 푸른 빛은 하늘과 땅을 뒤섞어 태초의 혼돈으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저것이 구음유명장......."
진일문은 호흡을 길게 들이켰다.
인세의 저주라 불리우는 아수라의 마공은 그의 심중에 일말의 경외감마저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본능은 이미 전 공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어느덧 눈부신 백광이 폭출하여 그의 신형을 완전히 가리워 버렸다.
아울러 그는 뇌정심법(雷霆心法)을 운용했다.
츠츳!
한 줄기 빛줄기가 암천으로 솟구쳐 올랐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청량해지는 용음(龍音)이 그 뒤를 이었다.
차앙--!
그것은 바로 뇌정도의 현신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 희대의 신검이 백색 서기 속에서 하늘을 향해 뇌광을 뻗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시퍼런 뇌전이 폭우를 가르며 뇌정도에 떨어져 내린 것은. 이어 진일문의 낭랑한 외침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뇌정만균(雷霆萬鈞)--!"
쩌어어억--!
마침내 천지에서 가장 강한 힘, 뇌정력(雷霆力)이 폭발했다.
시공을 초월한 뇌정의 정화가 인간의 대지 위에 발현된 것이다.
이른바 뇌전을끌어 당겨 시전하게 되어 있는 뇌정만균, 그것은 바로 뇌정삼식(雷霆三式)의 최후초식이었다.
고오오오--!
쪼갰다!
뇌정도에서 발출된 수천줄기의 뇌전(雷電)은 암천을, 빗줄기를, 그리고 천지를 침몰시킨 구음유명공의 청광을, 뿐만 아니라 불사인(不死人)을 자처하던 한 인간까지도.......
"크헉!"
단말마는 그리충격적이지 않았다.
단지 그도 여느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며 죽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었다.
폭우가 내리 쏟아지는 허공으로 피분수가 튀어 올랐다.
그 역설적인 느낌도 여타의 주검들과 다를 바 없었다.
파황교의 일맥이자 천마신궁의 궁주인 반야천.
그의 몸은 두개골로부터 사타구니까지 서서히 갈라지더니 양 쪽으로 나누어 쓰러졌다.
처참했다.
더구나 양단된 시신은 그 단면이 불에 탄 잔재처럼 시커멓게 그을러 있었다.
"우우......."
만박노개와 취화상은 신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흘려 냈다.
그들은 흡사 깎아 놓은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어진 채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런 그들의 시야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고요히 허공에서 내려와 부친의 시신을 안아드는 진일문의 모습이었다.
양자 간에는 단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진일문은 시신을 떠받들듯 안고는 걸음을 떼어 놓았다. 누구도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우내쌍기는 그를 보며 한 줄의 싯구를 떠올렸다.
- 일세의 영웅(英雄)은 이제 영원히 떠나리라.
쏴아아아--!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 퍼부었다.
그런 가운데 진일문의 뒷모습은 중인들의 시계(視界)에서 점차로 멀어져 갔다.
새벽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안개처럼 뿌옇게 밀려오는 밝음 속에 어둠이 여운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특히 비가 온 뒤의 새벽은 유난히도 아름답다.
폭우는 올 때도 노도처럼 밀려 왔지만 갈 때 또한 빠르게 밀려갔다.
그렇다면 의당 아름다워야 하거니, 폭우 뒤에 맞이한 이 새벽은 청명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도 그렇지가 못했다.
물안개를 헤치며 슬며시 다가오는 여명(黎明)이 붉게 변해 버린 태호의 물결을 보여 주었다.
그 붉은 물은 지난 밤에 있었던 처절한 혈전을 선명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런데 태양 아래서도 황금빛이 아니라 핏빛을 띄고 있는 태호의 물결, 그 위로 하나의 작은 나룻배가 유유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사내.
일신에는 눈부신 백라유삼을 걸치고 있었다.
격전의 흔적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고고한 자태이다.
뒷짐을 진 채 나룻배 위에서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배는 저 홀로 물결을 따라 흘러 가고 있었다.
세인들의 눈길이 모여 있는 동정산으로부터 그렇게 벗어 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멀어져가는나룻배를, 아니 백라유삼의 청년을 응시하는 시선 중에는 한 쌍의 흑진주 같은 눈망울이 있었다.
젊은 사내의 시신을 안고 있는 여인.
이윽고 여인은눈을 들어 물안개로 뒤덮힌 허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고운 입술에서 일순 장탄식이 토해져 나왔다.
"사형, 저는 이제 모든 것을 잃어 버렸어요. 심지어는 제 자신마저도요. 하지만 사랑은... 제 스스로 버려야 할 것 같군요."
햇빛에 반사되어서일까?
반짝하고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서 영롱한 무지개 빛을 발했다.
"저도 알 것 같아요. 사랑하는 자의 선택을.... 사형이 그랬듯 저도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왔으니까요. 저는 역시 사형과 더불어 멀리, 이 세상에서 잊혀진 곳으로 떠나는 것이 좋겠지요?"
여인은 자문(自問)을 하고는 그에 대한 자답(自答)인양 쓸쓸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먼 물안개 사이로부터 나직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울려 온 것은............
- 번뜩이는 도기검광(刀氣劒光)에 용솟음 치던 영웅(英雄)의 호기(豪氣)여,
애환(哀歡)과 정의(情意)도 한 줄기 바람 속에 떠났으매,
이제 한 잔의 술로 이별주를 올리며.......
그 음성은 흔들리는 바람 때문에 금시라도 끊어질듯 불안스레 이어져 갔다.
그러나 그 노래소리는 그를 향하던 눈길의 임자들이 모두 함께 듣고 있었다.
태호에 면한 모래사장 위.
차가운 물결이자신의 발목을 휘감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들은 멀어져 가는 나룻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 중에는 유현한 풍도를 지닌 문사도 있었고, 세속을 떠난 승려나 도인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인도, 이제 막 기세를 키워가는 어린 영웅도, 심지어는 여인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한 가지, 배를 망연히 응시하는 눈에 하나같이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개중 누군가가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리더니 수중의 검을 벼락처럼 떨쳐냈다.
파파파팟--!
모래사장을 끼고 깎아지른듯 서 있는 절벽의 중턱이 장검의 검세를 이기지 못하고 흡사 비석처럼 매끄럽게 깎여 나갔다.
그 위에서 장검이 다시 춤을 추었다.
파파팟!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튀며 석벽에는 글이 새겨지고 있었다.
'번뜩이는 도기검광에 용솟음 치던 영웅의 호기여,
애환과 정의도한 줄기 바람 속에 떠나 보냈으매.......'
장검은 더 이상 힘이 이어지지 않는지 춤추던 기세를 멈추고 그 주인을 따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한 줄기 장엄한 불호소리가 울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파파파팟!
절벽을 향해 금강석이라도 능히 쪼갤 만한 지공(指功)이 탄출되고 있었다.
'이제 한 잔의 술로 이별주(離別酒)를 올리며,
그대 빛나던 장검은 황야(荒野)에 버릴지니,
한때의 뜻과 마음도 검을 따라 황야에 묻히리라.......'
"무량수불(無量壽佛)... 빈도가 뒤를 이으리다."
묵직한 도호성이 울리더니 또 다른 장검이 석벽에 계속해서 글을 새겨나갔다.
'뉘 호기영지(豪氣英志)가 있어 황야에 묻힌 장검을 잡을 때,
영웅의 호기는다시 한 번 하늘 높이 비상(飛翔)하리라.'
"으핫핫핫! 곤륜, 소림, 무당의 장문인들께서 그처럼 대형의 뜻을 기려 주시니 어찌 우리 환우오사가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으리오? 나 탁불군(卓不君)이 감히 나서리다."
우렁우렁한 음성과 더불어 다시금 벽에는 심후한 공력에 의해 글이 새겨졌다.
'- 구주동맹(九州同盟)과 천하의 영웅들이 구주신협(九州神俠)을 기리며.'
누가 권해서가아니었다.
다만 물안개 속으로부터 바람을 타고 아득히 들려 오는 노래를 따 그들 스스로가 마음을 헌상하듯 기꺼이 새겼을 뿐이었다.
노래의 제(題)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노래에 담긴 영웅의 의기이지, 여타의 것은 사족(蛇足)에 불과할 따름이다.
특히나 그 안에 잔잔하게 내재된 영웅의 고독과 비애를 이해한다면.......
훗날.
세인들은 그 노래를 가리켜 영웅비가(英雄飛歌), 혹은 영웅호가행(英雄浩歌行)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태호를끼고 있는 그 벽은 호검벽(浩劒壁)이라 명명되었는데, 그것은 어느 날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곳에 한 자루의 장검을 깊숙히 꽂아 놓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매그 장검도 풍상 속에 녹이 슬어 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후세에 이르도록 녹슨 검과 영웅호가행을 잊지 못했다.
지금은 전설처럼 되어 버렸지만 하나의 일화가 있다.
물안개 자욱한태호의 새벽이 시작되면 언제나 선녀처럼 맑고 고운 음색의 노랫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그 음성의 주인이 아마도 천하 절색의 여인이리라는 소문과 함께.
아무도 그 여인이 누군가를 알려고 들지는 않았다 한다.
혹여 그녀가 부르던 영웅호가행이 그칠까 봐 그 근처에는 얼씬도 않고 듣기만 했다고 하니.......
번뜩이는 도기검광(刀氣劍光)에 용솟음 치던 호기(豪氣)여,
애환(哀歡)과 정의(正義)도 한 줄기 바람 속에 떠나 보냈으매,
이제 한 잔의 술로 이별주를 올리며,
그대 빛나던 장검은 황야에 버릴지니,
한 때의 뜻과 마음도 검을 따라 황야에 묻히리라.
뉘 호기영지가있어 황야에 묻힌 장검을 잡을 때,
영웅(英雄)의 호기는 다시 한 번 하늘 높이 비상하리라.
- 大 尾 -
첫댓글 무협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인지라~
끄까지 즐독햇슴다.ㄳ
즐감요!!!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연재해 주신 님
감했습니다
즐감했습니다...
또 다른 작품으로 만나뵙길!~~~~
모네타님 덕분에 오래전에 잊고 지냈던 무협지 다시 젊은시절에 밤잠 설쳐가며
보든 시절 회상하며 열심히 잘 보고 또 지난 세월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며
가슴 졸이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잘 봤습니다 다시한번 감사 드려요...
건강하십시요~~
``@-@``...ㄳ
너무나 멋진 이야기 시간 가는걸 잊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 몸건강히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즐겁게 감명깊게 읽고 갑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의 여인들을 버리고 떠나다니,,먼가 아쉬운 대미입니다..
굿,,즐감,,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즐감요
감사합니다
쟴나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잼나게 봤습니다.
재밋게즐독했습니다.감사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ㅈㄷㄳ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대단히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ㅎㅎ
잘 보고 갑니다
수고해 주신분 에게 감사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