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만나다
퇴직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어도 어느 하루도 여유로운 날 없이 한 해가 저문다. 임인년을 하루 남긴 십이월 다섯째 금요일이다. 올해 우연한 기회로 경작하게 된 텃밭에 올라가 나에게 터를 넘겨준 할아버지 일손을 도울 거리가 있음에도 그럴 여건이 못 되었다. 시청 공한지에 한시적으로 경작했던 텃밭은 돔 축구장이 들어서게 되어 그 땅에 심어둔 더덕과 도라지를 캐는 일이다.
할아버지 일손 돕기에 앞서 평소 교류가 있는 문학 동인들과 함께 보낼 일정이 우선이었다. 내가 ‘영웅’ 영화를 관람하자고 제의했더니 그날이 정해져 통보가 왔더랬다. 시내 상영관이 아닌 교외로 나간 함안 작은 영화관이라 산책 코스를 두르면 하루 내내 걸릴 시간이었다. 이웃 아파트단지와 단독 주택지에 사는 선배 문우 셋은 팔룡동에서 합류한 분의 승용차로 시내를 벗어났다.
서마산 마산대학 아래서 신당고개를 넘어 산인을 거쳐 함안 가야읍으로 갔다. 상영 시간이 점심나절과 겹쳐 식사부터 해결했다. 가야에는 경전선 폐선에 5일과 0은 오일장이 서는데 31일까지 있는 큰 달은 30일이 아닌 31일에 장이 서는 원칙을 정해 두었더랬다. 장이 섰다면 장터의 명태전이나 국수로 끼니를 때우려던 계획은 철회하고 예전 같이 들렸던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었다.
점심 식후 예전 가야역이 있던 역사에 들어선 작은 영화관으로 갔다. 동행 넷은 지난번 아바타2였던 ‘물의 길을’봤던 그 영화관이었다. 소멸 위기 직면한 소읍에 정부가 지원한 문화 사업으로 운영되는 영화관인 듯했다. 영화 관람료는 시내 상영관의 절반에 해당했다.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거룩한 행적을 오페라로 공연된 작품을 윤제균 감독이 다시 영상으로 담은 내용이었다.
작은 영화관엔 우리를 포함한 관객이 여남은 되었다. 시골 영화관의 특징은 상업 광고나 예고편 없이 곧바로 본 영화가 상영되었다. 제작진을 소개한 자막에 이어 시베리아 벌판에서 찍은 듯한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손가락 마디를 잘라 혈서를 쓰는 장면부터 시작했다. 뚝뚝 떨어진 선혈로 안 의사는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네 글자를 남겼다.
황해도 해주 본가의 모친과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황야로 떠나 고행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안중근이었다. 영화 전반부는 동토의 땅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펼쳐진 독립운동가의 사랑과 우정도 잠시 보태졌다. 상상력이긴 했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한 궁녀가 일본으로 잠입해 이토 히로부미에 접선한 활약에서 스릴감이 더했다. 대사보다 오페라가 영상 흐름을 이끌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 쾌거는 영화의 절정이었다. 이후 변호인의 변변한 조력도 받지 못하고 요식적인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감옥에서 동양평화론 초고를 남기면서 일본인 간수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글을 써주기도 했다. 고국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항소를 포기하고 어미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감을 조금도 불효라 생각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해 가을 의로운 거사로부터 이듬해 봄 순국까지는 불과 다섯 달이었다. 일본의 방해로 안 의사 유해는 하얼빈 어디에 묻혔는지 아직도 찾을 길이 없다는 자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렸다. 조 마리아 여사님의 편지글과 유해를 찾을 길 없음에 객석에 앉은 한 관객은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영화가 종영되어 화장실에 들어 거울을 봤더니 충혈된 눈시울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동행한 일행은 가야읍에서 군북으로 가서 경전선 폐선 부지에 들어선 독립운동가 이태준 기념관을 둘러봤다. 이태준은 군북면 명관리 출신으로 안중근이 의거를 일으킬 무렵 세브란스 의전을 나와 몽골로 건너가 의술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이었다. 우리는 기념관을 나와 이태준 생가가 수몰된 명관저수지를 찾아 둘레길을 산책했다. 가랑잎이 서걱거려 운치가 더한 산책로였다. 22.12.30
첫댓글 우리가 기억해야할 역사의 인물중에
존경하는 인물로 안중근의사가 있다
거사를준비하고 서거하기까지 1년을
영화한 영웅.,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모처럼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오붓한 자리 소박한 시간들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오가는 길 위에서도 얼마나 행복하실지요?
쭈욱 그 여정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