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에 도착해서 받은 첫 인상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많다는 의미는 '셀 수 있는 것의 규모가 크다'는 것에 더해서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 틀 안이 빽빽하게 차 있다'는 의미다. 많기는 내가 사는 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이곳의 많음은 '넘침'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많더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시스템과 인프라를 갖춘 곳이라면 문제 될 것은 없다. 관리 가능한 많음이라면 오히려 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높은 인구밀도 속에 살면서도 저 출산을 걱정하는 것은 많음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선 출근길의 혼잡이 지하철역 출구를 나오면서 해소되지만 이곳에서는 눈을 뜨고 있는 한 비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초저녁 골목 안 건물 벽에 등을 기댄 노숙자의 멍한 눈동자와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는 이곳이 온전하게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예쁜 아이들이다. 짙은 갈색 피부에 시원하게 드러난 하얀 이로 그들의 순수함을 뿜어낸다. 그러나 하얀 눈자위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는 아름다움과 내면의 두려움을 동시에 드러낸다. 아름답지만 밝지 않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어두움은 아이들의 짧은 삶에서 새겨진 것이리라.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우수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우물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으로 몸이 오그라든다. 어디를 가도 아이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수용 가능한 수준을 넘어선 듯 보이는 넘침은 높은 출산율이 원인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출산을 국가 차원에서 제어하는 일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새 생명의 탄생조차 권력으로 통제하는 사회에서 민주나 개인의 사생활, 인간의 존엄을 말하는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은 그것의 피해가 결국 개인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국가가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국가 주도의 인구 억제 정책을 펴면서 권장 수준을 넘어서 피임과 낙태까지도 권장했던 나라들도 여럿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돌아보면 잔인하고 반인권적인 정책이었지만, 그것을 방기한 결과로 겪을 수 있는 사회적 혼란보다는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출산을 단지 개인의 판단에 맡겨서 인구증가를 방관하는 정부와 국가적 차원에서 피임을 강제하는 정부가 있다면 어떤 정부를 지지할 것인가.
현실적으로는 후자가 전자보다 나은 결정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성원들이 개개인의 생활 결정권과 공동체의 이익 중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지를 먼저 합의해야 할 사안이다. 출산과 관련한 정부의 정책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어느 수준에서 존중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국가들이 인구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많음의 판단 기준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