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지난 16일자 A12면 '서울대 게시판의 신림동 비하 논쟁' 기사를 읽었다. 서울대생들의 인터넷 게시판에 '신림역 근처엔 왜 이렇게 질 떨어지는 사람이 많죠?' '패션과 외모, 머리 모양 등이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인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에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하나' '글쓴이는 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송두리째 폄하하는가'라는 비판이 있자 '왜 선비인 척하느냐' '신림역에 모이는 사람들이 저렴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반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졸업생으로서 무심할 수 없었다. 다만 전제할 것이 있다. 마치 서울대생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왜곡이다. 그리고 '서울대생'의 의견이라고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도 난센스다.
젊은 세대 일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다. 먼저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항변은 요즘 인터넷 일각에서 흔히 보는 '팩트(fact·사실)는 팩트다' '개취(개인적 취향) 존중' 운운의 논리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취향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 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 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하느냐'는 한마디다. 요즘 인터넷에 횡행하는 '선비질'이라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 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1차대전 패전 후 독일인들은 막대한 배상금 부담에 시달렸다. 이때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유태인의 열등함, 사악함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며 아리아인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생학까지 주장했다. 그들 마음속 심연에는 지금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은 본능이 있었다. 결국 성실하고 착한 가장들이 이웃들을 대량 학살하고 그 피하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본능이다. 여성 차별, 흑인 차별, 이민자 증오…. 우리의 본능은 전자발찌를 채워야 할 상습 전과자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선비질을 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후배 세대의 위악은 선배인 우리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우리는 열린 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커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만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 사과한다. 기득권은 다 누린 주제에 극심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는 후배들을 싸잡아 욕하는 선배의 일원이기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후손들에게 가치를 판단하고
가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확하게 밝히는 능력을 가르치는 공간
그것이 학교이다. 지금 우리의 학교가 그기능을 잃었다.
철학이 없는 지금의 대학생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이다.
눈으로 보는 세상과 손으로 만지는 재물과 출세, 권력 이런 것 외에는 가치를 인정할줄도 모르고
형이상학적 사색을 하고 삶을 사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하니....
말이 흉기다
사람을 살해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재판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의외로 '자존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건설 현장에서 숙식하는 노동자가 자고 있는 동료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동기는 말 한마디였다. 저녁 때 소주를 마시다가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특정 지역 출신 촌놈이라고 놀렸다. 다 같이 힘든 삶을 사는 처지면서 좀 더 가난한 지역 출신이라고 놀린 것이다. 그만두라고 해도 반복적으로 놀리자 모욕감에 시달리다 일을 저질렀다.
40년 해로하던 노부부가 있었다. 평소 유순하고 소심하던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 이유는 사소한 말다툼 중 '개눈깔'이라고 내뱉은 아내의 말 때문이다. 어린 시절 사고로 눈 한쪽을 잃고 모진 놀림에 시달렸던 그에게 그 한마디는 흉기였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급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찌르는 흉기는 바로 '말'이다.
특히 인터넷은 그 흉기를 죄의식 없이 휘둘러대는 전쟁터다. 리틀 싸이 황민우군과 베트남 어머니가 악성 댓글로 고통받은 일이 있다. 미국인들은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 발언에 대해 사회적 제재를 가한다. 한 NBA 구단주는 '흑인과 함께 내 경기장에 오지 마라'고 여자친구에게 전화로 말한 사실이 알려져 영구퇴출 당하고 구단을 매각했다.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흔히들 첫 번째 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이 두 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친구의 비만을 걱정하여 충고하고 싶다면 말을 잘 골라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반성했다. 혹시라도 법정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귀는 더 열고 입은 더 무겁게 해야겠다.
언어가 망가지기 시작하면 생각도 망가진다. 필요할 때 필요한 언어를 쓰는게 아니라, 험한 말, 혐오의 말이 그냥 일상언어로 대체된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걸 매일 본다. SNS, 유튜브들이 1차적 원인이다.
그런 언어들은 남을 조롱하고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므로, 그 말을 써서 절대 조롱과 공격 이외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런 언어가 일상언어가 되면 조롱과 공격도 일상이 된다. 근처 사람들도 계속 쓰니 문제가 없는 줄 알고 점점 사고가 마비가 된다.
그런 조롱과 혐오의 언어를 농약이라고 한다면, 사고가 마비가 되면 이 농약을 필요할 때 쓰는 게 아니라 길가던 사람 얼굴에 마구 뿌려대는 광인이 되는 것. 바르고 고운 말만 쓰라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소에 쓰는 개념어들과 주요 표현들을 검토해보란 이야기.
일례로 '증세'를 모두 '세금폭탄'이라는 말로만 바꿔서 쓰기 시작하면 증세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아예 불가능해진다. 인터넷에 이렇게 오염된 개념어들이 매우 많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이런 것이 이 카페의 목적이 아닌가 생각뵙니다. 정치를 비판하기보다는 우리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가 해야 할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사뢰가 될것입니다
올바른 사회가 되려면 우선 정치가 바로 서야겠지요. 극우가 날뛰고 일베같은 애들이 세상에서 판치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수없죠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조롱받는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우선 정치가 바뀌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