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1.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사48,17-19 마태17,10-13
온전한 구원의 삶
-개방, 경청, 공감, 수용, 지혜-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화두처럼 생각납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잘 듣는 경청은 우리 일상의 삶은 물론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분도 규칙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됩니다. 참으로 제자들의 자세로 우선적인 것이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을 때 온전한 소통의 대화요 기도입니다. 경청이 생활화되어 있는 삶은 그대로 깨어 있는 삶의 실현입니다. 순종과 겸손 역시 잘 경청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덕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잘 귀기울여 듣는지요?
귀가 있다고 온전히 듣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되지 않는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의 귀로 들을 때 온전히 듣는 것이고 경청하는 마음은 그대로 순수한 마음의 반영입니다.
경청을 한자로 하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경청傾聽, 온전히 집중하여 귀기울여 듣는 마음을 뜻합니다. 경청敬聽,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건히 집중하여 듣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밴 겸손한 자세입니다. 아주 예전 수도형제의 방을 방문했을 때, 좌우명처럼 액자에 들어있던 한자 敬聽(경청)에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이런 경청의 자세보다 진지하고 겸손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연중 피정, 영어 OLYMPICS(올림픽스)의 한자 풀이 피정 강의 중 맨먼저 나온 O는 Open(개방)으로 활짝 열린 마음을 뜻하며, 이어지는 L은 Listen(경청)으로, 개방과 경청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본질적인지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이 맨 마지막 말씀 역시 화두처럼 들립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완고하게 굴어도 지혜로운 인격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옳다는 것은 그분의 일들로 분명히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경청과 지혜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경청과 지혜의 사람이 될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무지에 대한 처방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마음의 병에 대한 동방 영성에 대한 소개가 생각납니다. 중요한 내용이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싶습니다.
첫째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요, 둘째는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망각’이요, 셋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완고함’이요, 넷째는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멈’이요, 다섯째는 ‘오염’된 불순한 마음이요, 여섯째는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무분별’입니다. 이런 마음의 병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와 망각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바로 이런 무지에 대한 근본 대책이 우선 주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이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분명해 집니다.
이사야서의 경청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거룩하신 구원자 주님의 탄식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줍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 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 대한 예언처럼 생각되어 섬뜻한 느낌도 듭니다. 바로 개방의 경청이 지혜의 샘임은 물론 평화와 의로움, 축복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돌아와 회개와 개방, 경청의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음이 모든 불행의 근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떠날 때 우리는 얼마나 편견과 선입견으로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는지 오늘 복음은 잘 보여줍니다. 경청할 때 공감과 배려요 존중인데 그렇지 못한 세대에 대한 오늘 복음의 주님의 탄식은 그대로 우리에 대한 탄식처럼 들립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이와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
경청의 상실과 편견으로 완고해진 공감과 수용능력을 상실한 비인간화된 세대를 상징합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불행한 인간 현실입니다. 하여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왜곡 굴절된 시각을 보여줍니다.
하여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고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낙인찍어 버립니다. 겉으로 드러난 일부를 전체인것처럼 왜곡하니 그대로 온전한 영적 시야를 상실한 병든 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입니다. 참으로 개방과 경청, 공감과 수용의 온전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우리 무지의 마음 병에 대한 근원적 처방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개방과 경청, 공감과 수용의 온전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도 일맥상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1,1-3참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