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세상으로 들어옴
롬 5:12-21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 5:12-21 / [아담과 그리스도]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죽음을 불러들였듯이 온 인류는 죄로 늙고 죽어 갑니다. 13) 원인이야 물론 아담에게 있겠지만 사람들은 모세에 이를 때까지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는 심판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지도 않았고 또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시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4) 그러므로 그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처럼 금단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특별한 법을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앞으로 오실 분의 표상이었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시기로 된 그리스도와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15)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 사이에는 얼마나 큰 격차가 있습니까! 아담은 자기 죄로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많은 사람에게 용서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16) 아담이 저지른 한 번의 죄가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져다 준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값없이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생명까지 주십니다. 17) 아담이란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은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용서와 무죄 선언이라는 선물을 거저 받고 모두 생명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18) 그렇습니다.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에게 형벌을 가져왔으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길이 살게 하신 것입니다. 19)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많은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20) 십계명을 받은 결과 모든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죄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될수록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더욱더 깊이 깨닫습니다. 21) 과거에는 죄가 모든 사람을 지배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지금은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근원인 아담과 의와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근원이 다른 두 인류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12-14)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죄가 시작되었고 그 죄의 결과는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죄를 죄라고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두려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죄는 율법이 있기 오래 전부터 세상에 있었습니다. 죄의 규정이 없을 때에는 죄라 여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죄와 짝을 이루는 죽음이 아담부터 모세에까지 지배해 왔던 것입니다.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15-17)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죄의 선물은 사망입니다. 반면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습니다. 그것은 의롭게 되는 역사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한 사람 까닭에 죽음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까닭에 생명 안에서 당당히 살게 되는 것이 복음의 시대에 달라진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8-19)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아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조건 없이 사면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회복의 약속입니다.
왕노릇 한 것 같이(20-21) 율법은 죄를 죄로 알게 하여 죄를 죄되게 하고 죄를 넘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왕노릇하며 믿는 자들을 영생에 이르게 했습니다.
적용: 당신은 죄와 사망의 근원된 아담에 속한 자입니까? 아니면 의와 생명의 근원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까?
첫 사람 아담은 범죄 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 이후 모든 인간에게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는 순종했습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죄를 전가시켜 주었지만, 예수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 주었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그 2000년 전, 골고다의 현장에 내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분명히 나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할 때, 그 장소에 내가 있었던 것처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때 나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호크마주석
=====5:12
이러므로 - 이는 헬라어 '디아 투토'( )의 번역으로 어떤 학자는 이 접속사가 6-11절과 12-21절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다고 보지만 (Lenski), 본절에서 이 접속사의 사용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진술과 본절부터 진술될 내용은 직접적으로 어떤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디아 투토'를 별 의미 없이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 접속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히브리식 문장 전개 방법임을 이미 2:1의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한 사람으로...
들어오고 -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시대(new aeon)가 시작됨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창조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죄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던 명령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죄와 사망은 불가피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망'은 (1) 육체적인 죽음,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엡 2:1;5:14;골 2:13;딤전 5:6;계 3:1), (3)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계 21:8). 본절에서는 두번째와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6:23은 마지막 영생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으므로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더욱 타당하다. 자세한 것은 6: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가 보편성을 지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의 보편성에 대해 증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미 1:18-3:19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르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덴'( )은 일반적으로 '통과하다', '퍼져가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몇몇 영역 성경은 문자적으로 '퍼져가다'(spread to)로 번역하기도 한다(RSV, NASB). 그렇지만 또 어떤 영역 성경은 개역 성경과 같이 '이르렀다'(came to)로 번역하기도 한다(NIV).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본절의 의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14절).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창 4:9-15),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창 6:1-7), 바벧탑 사건(창 11:1-9),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창 19:23-29)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14절)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의 (1) 역사성(歷史性)과 (2) 보편성(普遍性)이 시사되어 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不文律)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Ur-Nammu Code, Eshnunna Code, Lipit-Ishta Code, Hammurabi Code, Hittite Code).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5:14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 )는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 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절)라고 표현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대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義)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전 15:22;고후 5:14, 15).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 튀포스)이 될 수 있다 (type, RSV)
=====5:15
그러나( , 알라) - 이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뜻의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유사점을 말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은사 - 이는 언급된 사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은혜'와 관계된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그 범죄'라 함은 '아담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외의 다른 범죄', 즉 '모든 범죄'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아담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서 '범죄'( , 파랖토마)가 단수형이라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 , 카리스마)와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보편적인 범죄'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
죽었은즉 -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나, 본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표 단수를 사용하든지 단순히 복수를 사용하든지 헬라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도 이와 같다.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모든'이라는 총칭 형용사를 사용한 것과 비교할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 - 이 단어는 9절에서와 같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비교급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much more, KJV).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무너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Lenski).
하나님의 은혜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앞에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언급했으나 지금은 '한 사람의 은혜'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범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은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상반절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여기서 '많은 사람'은 앞에 언급된 '많은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넘쳤으리라'는 동사는 14절의 '왕노릇하였나니'라는 동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넘쳤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릿슈센'( )은 '물이 그릇에서 넘쳤다', '강물이 둑에서 넘쳤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넘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별없이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동사 '에페리스슈센'은 목적어로서 '에이스 투스 폴루스'( , '많은 사람에게'), 즉 4격을 취한다. 헬라어에 있어 4격은 3격과 같이 단순 목적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을 꿰둠고', '...을 관통하여'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가 개인의 전인격을 철저히 변화시키며 죄악을 씻고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5:16
본절에서 바울은 범죄와 은혜의 기원(起原)과 그 위력(威力)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범죄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은혜는 사망이 왕노릇하는 데서, 또는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기원과 위력이 '범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선물( , 도레마) - 이는 15절에서 언급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가리킨다. 15절에서 '은사'( , 카리스마)가 '범죄'( , 파랖토마)와 비교되었고 본절에서는 '은사'가 '심판' ( , 크리마)과 비교되었다. 은사는 값없이 주는 용서이며 심판은 엄격한 공의로서 모두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본절은 바로 이 칭의의 선물이 심판의 효능보다 우월함을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의롭다 하심'( , 디카이오마), 곧 칭의(稱義)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사면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라 칭하신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사이다. 또한 18절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를 보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인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회복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17
사망이...왕노릇하였은즉 - 본절은 12, 14절의 말씀을 요약 반복하고 있다. 즉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선하게 창조된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오염시켰고 그 가운데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래 하나님을 최고의 통치자로 삼고, 그의 대리자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지배를 받는 만물 순의 질서 체계가 죄의 지배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대신에 죄(사단)가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어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림과 동시에 인간도 아무 주체 의식 없이 죄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질서 내지 통치권의 변화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마 4:8, 9). 마귀는 천하 만국을 자기의 것인양 자랑하면서 예수로 하여금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경배하라'는 사단의 요구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예배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세상의 지배권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셨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마 28:18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가르쳤다. 만일 그러한 권세가 없다면 예수는 세상의 구주 또는 주인(Lord)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단은 자신이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양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단이 죄로 세상을 오염시켰다는 의미에서는 그 역시 세상의 지배자로서 자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 본장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 자세한 것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 여기서 '은혜'와 '의의 선물'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으로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논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왕노릇하리로다 - 상반절과 비교할 때 대조와 구분이 완전해지려면 본 구절은 '생명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리로다'라고 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왕노릇하다'의 주어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의도적인 변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後嗣)'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은 단순히 '유업을 잇는 자'(갈 3:29)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영광된 신분을 강조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계 22:5에서는 성도가 영원 무궁토록 '왕 노릇할'것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성도의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노릇'이란 말은 '죄의 종'되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21절).
=====5:18
바울은 다시 12절부터 지금까지 진술했던 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Murray). 그러면서 그는 죄인된 인간이 생명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즉 (1) 한사람(아담)의 범죄로 -> (2)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 (3)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 (4)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 (5) 생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과정에 바울이 그동안 진술했던 '믿음'과 '화목'을 삽입해 보면, '믿음'은 (3)과 (4) 사이에 그리고 '화목'은 (4)와 (5) 사이에 삽입될 수 있다.
그런즉( , 아라 운) - 12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죄와 율법에 관한 13, 14절 내용과 구원의 은혜와 범죄에 대한 심판을 대조시킨 15-17절 내용으로 중단되었던 아담과 그리스도 간의 비교가 12절에 이어 다시 본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절에 천명된 결론이 본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 범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헤노스 파랖토마토스'( )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한 범죄'로 해석하거나 영역 성경이나(the offence of one, KJV;one man's trespass, RSV) 독일어 성경처럼(eines Sunde, Luther Bible) '한 사람의 범죄'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느 경우를 취하든지 전후 문맥상의 의미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를 초래하지 않으나 후자의 해석이 지배적이다. 헬라어사본들 중의 가장 유력한 사본들 중 하나인 알렙 사본( )을 위시하여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본문의 '헤노스' 다음에 '안드로포스' ( , '사람')을 첨가하고 있으며 많은 역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15-17절에 '한 사람'이란 표현이 일관되게 반복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한 사람'이 원문에 충실한 듯하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조에 이른 것같이 - '많은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 안드로푸스'( )는 '모든 사람'(all men, KJV, RSV)을 의미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세상에 사망의 권세를 가져왔고 전인류는 이 사망의 권세에 눌려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은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행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의로운 행동' 즉 '디카이오마토스'( )를 '칭의의 행동'으로 해석한다(Meyer, Gedet). 그러나 '디카이오마토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다고 여기시는 행위', 곧 '하나님의 칭의 행위'란 뜻을 지닌 '디카이오시스'( )와 구별되므로 '의로운 행동'(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RSV)으로 해석됨이 무방하다(Murray, Holsten 등).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사역들을 총칭한다. 물론 이 구원사역은 십자가 사건에서 최절정을 이룬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이 헬라어 본문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 )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칭의가 이르렀다'이다(KJV, Modern Language Bible). 헬라어 본문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생명의 칭의'(justification of life)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생명'에 이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다'함은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뜻함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이 임함을 밝히고 있다(요 3:16;14:6).
=====5:19
본절은 앞절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앞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범죄와 의를 대조시켰으나 본절에서는 그 범죄와 의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불순종에 그 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 아담의 범죄, 곧 원죄(原罪)를 말한다. 아담이 범죄한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거스린 것은(창 3:1-6) 순간적이요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마음 먹었던 교만한 행위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였다.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12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했으나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했으며, 18절에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한편 '죄인된 것같이'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타데산'( )은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제정되었다', '설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KJV와 RSV가 번역한 것처럼 단순히 '만들어진 바 되었다'(were made)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 판결을 받았다'(were constituted)는 의미이다(NIV). 한 사람의...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죄인된 것을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연관짓고 있다. '순종'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의 책임 문제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히 3:18, 19;4:2, 6). 무엇보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사 53:12;요 6:38, 39;10:17, 18;17:4, 5;빌 2:7, 8;히 5:8, 9),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에 대한 대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Murray). 그리고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히 5:8, 9),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다. 한편 '의인이 되리라'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타데손타이'( )는 미래 수동형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정(制定)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미래 시제임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Meyer). 그러나 이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및 장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Murray, Sanday).
=====5:20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본절 초두에 '데'( )가 언급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은 이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KJV는 이를 '더욱이'(Moreover)로, Modern Language Bible은 '그러나'(But)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데'는 본절에서 새로운 개념, 곧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유도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본 구절은 인간에게 모세 율법이 부여되었음을 말하나 이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최초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그 이전에 법이 선재(先在)함을 나타낸다. 이는 '가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셀덴'( )이 단지 '들어왔다'라기 보다는 '곁에 들어오다'(came in beside, Green), '미끄러져 들어오다'(slipped in, Modern Language Bible)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이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걸었고 모세 시대에는 성문화된 율법이 부여된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시켰다는 말이 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요구에 비추어 보아(마 22:37-40;막 12:29-31;눅 10:27)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예민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모든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가 드러나도록 한다"(3:20;7:7, 13;갈 3:19). 또한 혹자는 "범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목적이다"라고 설명한다(Black). 이러한 주장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보다 율법이 옴으로써 그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13절)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딤전 1:9-11을 본절과 연관지어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Herrison). 그러나 분명히 성도들이 인식해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가 죄를 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딤전 1:9-11에서는 이러한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딤전 1:9-11은 율법의 정죄 기능, 즉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율법을 통해서 정죄받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 말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범죄의 사실이 더욱더 드러나 인간이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인간을 향해 쏟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죄사함도 없으므로 용서에 대한 은혜를 깨닫는 일도 없다. 다만 죄가 죄로서 정죄되는 곳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의 '더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오나센'( )이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반면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의 '더욱 넘쳤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페릿슈센'( )이 최상급의 최상급, 즉 강조 최상급으로 '넘침보다도 더욱 넘쳤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urray). 다시 말해 은혜의 세력은 죄의 세력을 휠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처입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를 완전히 소생케 한다.
=====5:21
본절에는 바울이 그동안 논의해 왔던 중요한 개념들이(죄, 사망, 왕노릇, 은혜, 의, 예수 그리스도, 영생) 종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너무도 아름다운 끝 맺음'이라고 극찬하였고(Hendriksen) 송영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다(Denney).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 '사망 안에서'란 표현은 '생명 안에서'(17절 하반절)란 표현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죄가 역사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죄의 결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12, 14절; 6:23). 따라서 죄는 '사망 선고를 받은 자들' 곧 '사망의 세력 아래에 있는 자들'에 한해서 왕노릇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稱義)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다(Lloyd Jones). 바울은 6장에서 이것을 '죄의 종'과 '의의 종'의 개념으로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 앞 구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본 구절의 '왕노릇하여' 앞에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삽입시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사망 안에서 종 노릇하는 사람'과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17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예수의말씀 중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는 선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
< 설 교 >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로마서 5:12-14 / 박성복 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담이 두 사람이 나옵니다. 이 ‘아담’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아”라고 불렀을 때는 “사람아”라고 부른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두 아담중에 먼저 나오는 아담은 인류의 조상인 에덴동산의 아담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아담은 세상 끝 날에 인류의 구원자로 나타나실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당신의 계획하신 바가 있었겠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과정을 정하시고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진행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까지 완벽한 계획을 세우시고 6일 만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6일이라고 하는 날짜는 오늘 우리가 적용하고 있는 24시간의 6일이 아닙니다. 그 6일이라는 날짜는 수억 만 년이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그 6일중에 모든 날짜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해서 생긴 날이 아닙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이 지나가고 넷째날부터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한 24시간의 날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천지를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고 했으니까 그중에 하나님의 날과 우리 인간에게 주신 24시간의 날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맨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을 만들면서 3대 축복을 허락하셨는데 먼저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고, 그 다음에 그 땅을 정복하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 만물을 통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는데 인간이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깊이 숨겨놓으신 모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누가 알고 있었습니까? 전 인류를 물로 심판 할 때에 의인으로 인정받은 노아가 알고 있었습니까? 그때는 성경이 없었을 때입니다. 그럼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는 성경이 없을 때에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첫 아담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으며, 마지막 아담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는지 그 의미를 그도 몰랐으며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시대에 들어와서 모세 역시 첫 아담이 누구며 마지막 아담이 누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 봐 보십시오. 언제나 시대마다 하나님이 붙들어 쓰는 종이 나오는데 오늘 신약 은혜시대에 바울이 나와서 우리에게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것을 알고 누가 이것을 믿고 누가 이 과정을 확실히 알고 준비했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닫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런 말씀을 깨닫게 하는 특권을 준 겁니다. 이는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으로 그를 불러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주님이 오실 때가 되고 이제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든 때가 되니 성경이 백일하에 완벽하게 드러나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말씀들이 이제 우리에게 공개되고 있지요? 이것이 뭐냐면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첫 아담은 뭐냐면 실패한 아담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법을 저버린 사람입니다. ‘아담’이라는 뜻이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럼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저버린 법을 다시 세우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첫 아담은 죽음의 조상이 되었으나 마지막 아담은 영생의 조상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 잘 들어야 됩니다. 우리교회에 멀리서 오시는 성도들도 많은데 여기까지 와서 정말로 눈을 부릅뜨고 들어야 됩니다. 귀를 쫑긋하고 이 말을 들어야 됩니다. 왜냐면 마귀는 앉아있으나 못 듣게 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말씀을 못 듣게 하고 마음을 흔들어놓고 혼미하게 만듭니다. 마귀가 얼마나 놀라운 영물인지 모릅니다. 마귀의 사명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을 흙으로 만들고 복을 주었지마는 사람만은 다른 흙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사람만은 다른 흙으로 만들어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했기 때문에 인간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이나 다른 피조물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을 주지 않았지만 아담인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고, 말씀의 법을 주시고 우주의 대표자로 세우셨으며, 새 가정을 만들어주고 에덴동산을 관리하도록 허락하시어 행복하게 살도록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며 옛 뱀인 마귀가 하와를 통해서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 하와가 뱀의 꾐에 넘어간 그 이후부터 아름답던 에덴동산은 파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범죄한 인생은 하나님을 대할 수가 없게 되고, 말씀이 떠난 그 심령에게는 어두움이 자리를 잡습니다. 자기 부족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행동을 하고 싸움과 분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그대로 그 유전인자가 우리에게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 죄의 질이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남에게 잘 뒤집어씌우는 행동들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점점점 분쟁과 시비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으며, 형제간의 칼부림이 벌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만 오래 살지를 못하고 죽었는데 창세기 5장 8절에 보면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이제 죽음이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어 서서히 서서히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와서 이제 그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범죄한 인생의 행로였습니다. 본장 17절에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까? 그 한 사람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는 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피할 수 없이 모든 후손들에게까지 오게 되어 죽음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 유전이 되어 왔고 죄가 유전되어 왔습니다. 이제 인류는 마지막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끔 된 것이 에덴동산의 사건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는 이런 말씀 해놨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 하나님의 천지 창조 역사를 보면 이 첫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이미 어둠이 올 것을 말씀해 놨습니다. 선악과도 만들기 전에, 사람도 만들기 전에, 우주도 만들기 전에 먼저 저녁이 올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첫 아담은 저녁의 사람이요 밤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첫 아담의 어두운 밤의 시대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밤의 시대는 죄의 시대입니다. 죄의 시대는 분쟁과 싸움의 시대입니다. 사탄이 발악하는 시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천지 창조 역사속에 묘한 것을 숨겨 놓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만 생각하면 1980년도 5월달에 치악산에서 하나님께 몸부림 칠 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이 창세기 1장의 말씀이 저에게 반짝 지나가면서 해석이 되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왜 먼저 저녁이 와야 됐던가?’, ‘왜 저녁이 오고 그 다음에 아침이 온다고 하는가?’하는 겁니다. 인간은 분명히 아침부터 시작하여 저녁이 되는데 창세기에는 왜 저녁이 먼저 오고 아침이 된다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여기의 저녁은 해가 진 저녁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그 이후부터 죄의 시대, 어두운 시대, 밤의 시대가 먼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 깨닫는 시간이 얼마나 짧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신학교에 돈 보따리를 갖다 주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저는 그 깨달음이 어떻게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여, 치악산에서 죽으려고 엎드려 있는 이 박목사에게 주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곳까지 찾아오셔서 창세기 1장을 열어 주셨군요!”라고 하면서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역사가 성경 전체인데 첫 아담은 어두움의 사람이요, 마지막 아담은 빛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아담의 시대가 지나가면 마지막 아담의 시대가 오는데 이것을 창세기 1장에 먼저 ‘저녁이 오며 아침이 온다’고 한 것입니다. 그 저녁도 단수고 아침도 단수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가 되는지 몰라도 저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제가 삼성동에 있는 교회에서 집회할 때에 이 강의를 했더니 그 목사님이 “내가 교수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평생에 처음 듣는 강의이기 때문에 내가 신학교에 가서 이것을 알려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에 대한 역사에서 먼저 첫 아담으로 인해 어둠이 시작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이 회복하는 시대가 빛의 시대요, 낮의 시대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기묘한지요. 저도 목사가 되고 이 기록한 말씀을 그렇게 많이 봤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선악과 사건은 신학교에서 질문을 해도 교수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똑딱’ 보다 더 빠르게, ‘반짝’ 보다 더 빠르게 쑥 주시는데 그것을 깨닫고 보니 어떻게나 감사하고 고마운지요.
그런데 위의 본문에 보면 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회복할 것을 이미 알고 에덴동산의 “첫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표상이라는 말이 뭐냐면 헬라어에 “튜포스”라 그랬는데 이것은 “거울, 형상, 흔적, 자국” 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첫 아담은 장차 나타날 분의 거울이요 흔적이며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첫 아담은 장차 이 땅에 나타나실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요, 예수그리스도의 거울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발자국이고,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여러분, 보세요. 이런 내용을 구약시대 사람이 알았습니까?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내용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알았습니까? 이것은 바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권인데 특권을 받은 그가 입을 열어 공개함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바울에게 허락한 특권입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대 끝에 와서 이사야61장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 요엘서2장 28절과 29절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이 시대에 폭로한 목사가 이 박목사 아닙니까? 엊그제도 어느 장로님하고 식사하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나는 이 날까지 신원이라는 말은 박목사 입에서 들었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강사들도 이 소리를 안 하는데 듣고 보니 쉽고, 깨닫고 보니 기쁘다’는 말을 해요. 왜 그렇게 기쁩니까? 그것이 내 말씀이 되기 때문에 기쁜겁니다. 그래서 제가 담대하게 나가는 겁니다. 제가 강하게 말씀을 밀고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철학자나 세상의 권력자, 나폴레옹이나 징기스칸등 세상의 장군들이 이걸 압니까? 신학자들도 몰랐던 일인데요. 이것은 나라를 좌우하고 세계를 좌우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다고만 해서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와서 그 시대의 종에게 하나님이 공개함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에 관한 말을 했는데 이는 모세도 이런 말 하지 않았고, 율법시대 사람도 이 말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은혜시대에 와서도 이것을 그렇게 귀중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옴으로 말미암아 강력하게 이것을 말하게 되었는데 이 말씀을 듣는 동인교회 성도들이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에겐 귀한 말씀이요, 축복의 말씀이 될줄로 믿습니다. 어제 어느 장로님 내외분과 식사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하나 좀 고쳐주십시오. 밤낮 우리 동인교회라는 소리를 좀 빼주십시오. 이제 듣기가 싫어서 아주 시험이 됩니다’라고 해요. 그러면서 ‘목사님은 이 신원의 말씀이 우주적인 말씀이요, 세계적인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꼭 울타리 안에 끌어넣어서 동인교회 성도들만 애기하면 동인교회 교인이 아닌 자기들은 그 소리 들으면 시험이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알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재작년까지는 동인교회 소리를 많이 했는데 그후부터는 안하기 시작해서 올해는 잘 안 했는데 간간히 섞어서 나오나 봅니다. 그 장로님께서 ‘이제 목사님은 우리 교회라고 하지 말고, 우리 모든 성도들, 이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모든 성도들로 해 달라’ 그러더라고요. 어쨌든 간에 때가 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은 당신의 의합 된 자를 통해서 시대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공개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이 너무 정확하고 너무나 확신이 오기 때문에 일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라는 것을 바울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서 신원의 말씀을 말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시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특별히 본문 5장 19절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했는데, 여기 ‘모든 사람’과 ‘많은 사람’이 원어로 보면 뜻이 다르더라고요. ‘모든 사람’은 인류 전체를 말하는 모든 사람이고, ‘많은 사람’은 거기서 골라 놓은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본문 5장의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 중에 이 복을 받게 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4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것이라”고 그랬어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요,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 되고, 예수 승천은 내 승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죽을 것을 대신하여 죽었고, 내가 다시 살 것을 대신해서 살아 주었으며, 내가 주님 나라에 갈 것을 대신해서 다 처리해주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해됩니까? 첫 아담을 통하여 사망이 왕 노릇하던 이 세상에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이제 영생이 왕 노릇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지금까지 이 말씀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들은 부활의 축복을 주지만, 오늘 우리가 세상 끝날까지 살아서 오실 주님을 맞이한다면 이 몸이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5장 보면 오래 저장하였던 말씀으로 잔치를 열 때 면박과 휘장과 사망을 없애준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면박이 벗어지고 휘장이 제하여 지고 마지막에는 사망을 먹어버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 중에 강원도에 사는 김성국씨가 계신데 그분이 참으로 좋은 송이버섯을 보내왔어요. 해마다 안 잊어버리고 보내는데 제가 어찌나 고마운지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만 그것을 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요리를 했는데 맛이 참 좋아요. 그런데 송이버섯 자기가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양념이 들어가니까 맛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정말로 그것도 자연산과 양식과는 맛이 하늘과 땅차이에요. 그런데 버섯 자체가 혼자서 맛을 내지 못하고 뭐가 들어가야 맛이 나는데 그것이 양념입니다. 그런데 양념 중에 무슨 양념이 반드시 들어가야 되겠습니까? 소금입니다. 많은 양념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소금이 안 들어가면 제 맛이 안 납니다. 거기에 딱 소금을 집어넣으면 제 맛이 납니다.
오늘 아담 안에서 죽었던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의 맛이 나오기에 들어도 또 듣고 싶은 것이 이 말씀입니다. 한 번 봤는데도 또 보고 싶고 하는 것은 이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첫 아담에 속해서 죽음이 왔지만 마지막 아담에게 속해서 영생이 오게 되니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의 이름은 자다가도 부를 이름이요, 놀다가도 부를 이름이고 배가 고파도, 아파도 부를 이름이 그 분입니다. 그 마지막 아담이 나와 관계가 맺어 있다는 것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이 오게 되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리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역사를 잘 모르고도 죽었는데, 오늘 우리가 이것을 알고도 확실히 붙들지 못하여 영생을 놓친다면 되겠습니까? ‘도대체 저 사람은 신앙이 들어가는지, 사상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전에 제가 우리 동인교회 교인들은 눈이 반짝거리고 귀가 쫑긋하고 입이 방실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우리 집에 아주 오래전에 개 한마리가 있었는데 수없는 차들이 우리집 앞을 많이 다니는데 제가 비행기 같은 차를 몰고 다니지도 않는데도 제 차 소리를 바로 듣고 짖어요. 그래서 우리 애들이 ‘아빠가 오는가 보다’라고 해요. 제 차가 벌써 저만큼 오면 개가 뛰어 다니며 반가운 표시를 합니다. 그럼 제가 이삼분 안에 들어오거든요. 그렇게 개는 후각이 예민해요. 그 개에게 하나님이 법을 줬으면 아마 인간보다 훨씬 더 잘 섬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동물에게는 법을 주지 않고, 영이 들어간 우리에게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가 쫑긋 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이 반짝하고 입이 방실하며 얼굴이 환해야 합니다. 얼굴 면상만 봐도 어느 교인인지 알도록 하자고 전에 그랬었죠. 입은 방긋하고 벌어져야지 입을 닫아 놓으면 그것처럼 흉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안 믿는 사람들도 ‘웃으면 복이 온다’는 소리를 얼마나 했습니까? 정말로 웃으면 모든 복이 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나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딱 맞춰서 태어나게 하셔서 이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집 사람이 성미를 떼면서 이런 애기를 해요. 만약에 주님이 우리 시대에 안 오시면 우리 애들부터 성미 떼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해요. 요즘 젊은이들은 성미를 잘 안 뗍니다. 앞으로 우리 기성 세대가 지나가 버리고 젊은 애들 시대가 되면 새벽 예배도 없어질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안에 오시지 그 때까지 안갑니다. 주님이 머리가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새벽예배도 없을 때에 오시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새벽 예배의 역사를 봐도 옛날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고, 성령 강림의 역사가 있었어도 새벽 예배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종교 부흥이 일어나고 해도 새벽예배가 없었는데 1905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장로님하고 박칠옥 장로님이 시작한 새벽예배가 세계 새벽예배의 원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의 재림의 역사 때에 이 민족을 들어 쓰시지 않겠는가?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봐보십시오. 빵 먹는 저 중동의 사람들이 성미를 떼겠는지 안 떼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빵을 먹다가 찢어서 떼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복 받을 민족은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주여, 빵 조각 먹다가 성미도 못 떼는 자들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밥이라고 먹으면서 성미를 떼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이 민족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것을 감사 했습니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는데 여러분, 대한민국만큼 성경 많이 깨달은 나라도 없습니다. 세계에서 40일 금식기도를 제일 많이 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것이 왜 그런지 아십니까? 뭔가 그런 기도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마지막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마지막 아담에게 속한 자가 되므로 말미암아 영생이 왕 노릇하게 될 것을 확실히 믿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영생을 주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은 자다가도 부를 이름이요. 아파도 괴로워도 부를 이름인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분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돈 보따리를 가져다 놓고 위로 받아 보십시오. 그건 근심이 되지 진정한 위로가 안 됩니다. 남편을 쳐다보고 위로가 됩니까? 마누라를 쳐다보고 위로가 됩니까? 자식들을 보면서 위로가 됩니까? 오늘날 내가 위로받을 곳은 오직 그분, 자다가도 부를 이름인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영생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규현 목사
요즘 나온 책 중에 ‘회심’에 관한 책들이 눈에 띕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 속에, 또 믿음의 전통과 믿음의 영적 거장들이 늘 붙잡았던 주제가 바로 ‘회심’이었습니다. 회심은 과거의 죄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으로 진입하게 하는 출발 지점이 되고, 죄에 대한 심각한 통회와 각성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이 BC와 AD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무언가 깨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바뀌는 회심의 경험은 구원의 사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것이 교회에 잘 나가고 있다는 정도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과 회심의 문제는 전혀 다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회심의 분명한 경험이 있지 않으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중요합니다. 회심의 사건은 구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삶과 신앙에서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헌신, 봉사, 선교는 자기 열심과 사회적 위치에서 하는 연약한 노력일 뿐 한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큰 뼈대 속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이 표현이 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어떤 환란과 유혹이 와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구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근거를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본문 12~14절을 보면,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특히 12절은 어떻게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인간이 왜 죽게 되었으며, 왜 세상이 이처럼 불행하고 파괴되었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어떤 분은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나까지 죽어야 하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무언가 아담과 연관성이 있다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안 죽도록 영생의 몸으로 만드셨는데 불순종할 때 죽음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류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암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나이가 많아 죽지만, 사실은 죄로 죽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형벌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대목입니다. 아담과 우리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입니다. 아담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람으로 불리며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대표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류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또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마지막 아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첫 아담에 대한 얘기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구원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우리도 동일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온 후로 우리는 죄를 짓기도 전에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의 세력이 이 세상에 작용됨으로 모든 인류가 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사람이 지은 죄나 아프리카에서 지은 죄나 비슷합니다. 서구사람이나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나 무학자나, 종류가 다를 뿐이지 모두 죄를 짓습니다. 죄는 모두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인도네시아의 외딴 섬에 선교를 간 적이 있는데 문화와 문명으로부터 떠나있는 동네였는데, 그 동네에도 동성연애를 하는 젊은이 그룹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복사판이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죄는 모양이 다를 뿐, 어디에서나 창궐하는 것을 봅니다. 문맹을 퇴치하고 교육수준을 높이고 문화를 바꾸면 사람들이 선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죄는 다른 모습으로 변질될 뿐이지 약화되지 않으며 형태만 바뀔 뿐 반복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인간이 고통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서 인류는 동일하기 때문에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로마서에서 선포합니다. 죄를 짓는 형태, 도구,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죄의 성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범죄를 폭력적, 엽기적이라고 하는데 성경을 보면 고대사회에서도 엽기적인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류의 시초인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혈육의 살인극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악한 죄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숨어있는 죄성의 단면이 어떤 사건을 통해 그 사람에게 드러났을 뿐이지 우리 안에도 그 악의 단면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깊고 광범위하게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삶을 파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간 안에 숨어있는 죄성이 어떤 환경에 처할 때 죄의 힘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치명적인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전이나 현재나 죄의 파워는 조금도 약화되지 않고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데에는 그렇게 힘이 들지 않습니다. 악한 습관도 금방 자리를 잡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죄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은 철저히 성악설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의 문제는 우주적입니다. 죄는 인류에게 미치는 어떤 강한 악성 전염병보다 더 치명적이고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가져온 폐해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저주와 고통이 여기에서부터 흘러온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에 사망이 찾아오고 고통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존재에 대해서 부인하고 싶은 분도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 찾아온 죽음의 문제, 고통의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찾아온 인류의 비극에 관해서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생명공학이 발달을 해도 죄로부터 온 고통과 저주를 인간의 힘으로 거둬낼 수는 없습니다. 왜 불행을 원하지 않는데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지 이 실체를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리 사회학적, 심리학적으로 접근을 해도 답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명공학이 발달해서 120년까지 산다고 하고, 실제로 프랑스의 한 할머니는 123세까지 살았습니다. 최근의 뉴스위크지를 보면 150세까지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얼마 있지 않아서 암이 정복되고 우리의 신체 장기들이 낡으면 갈아 끼우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해도 죄로부터 온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또 죄의 문제로 인해 깨어진 삶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의 관점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굉장히 종합적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죽음은 한번 죽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영원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아무것도 없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예수를 믿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죄는 우리를 많이 망가지게 했습니다. 망가져도 많이 망가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 찾아온 수많은 어려움들을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쓰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을 열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에 ‘한 사람으로 인하여’ 찾아온 사망과 저주가 그 한 사람으로 온 것과 같이 또 한 사람으로 인해 이 모든 것들을 걷어내고 생명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와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사람의 순종을 대조하면서 앞의 한 사람은 아담이라는 인류의 대표이고 또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마침내 모두가 죄를 짓게 된 것을 17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한 사람을 통해 사망이 왕 노릇했다고 했습니다. 그 죄가 왕 노릇했다는 말은 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 죄의 속박과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뒤덮고 있다는 죄의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또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표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대표의 원리에 의해서 마치 내가 한 것과 같은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일합방을 했을 때 내가 직접 하지 않았지만, 대표가 조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 영향 아래에 들어가 식민지 생활을 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노아가 낮에 술을 마시고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을 때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 저주를 받게 되는데 그 후손까지 저주를 받습니다. 그 안에 대표의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고 그것으로 인해 미친 범죄의 결과를 우리가 부정하고 싶지만 그 원리 안에서 한 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아담의 대표원리를 거부하고 부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원리를 동시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대신하여, 대표하여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죄가 해결된 효과가 나에게도 미치는 것입니다. 이 대표의 원리가 너무도 은혜롭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고 또 한 사람으로 인해 생명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저주와 죄가 왔다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아담의 범죄로 인한 저주로 결론 맺고 끝이 났다면 인류는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담 안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생명이 왕 노릇하는 삶이 우리에게 시작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아담 이후에 죽음이라는 문제, 사망의 권세는 인간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이고 온 인류를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는 잔인한 폭군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돈이나 건강이 빼앗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보다 더 큰 상실은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저주 중의 저주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죽음을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에 찾아올 영원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계보에서 난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긴 대열에 서 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여기에는 돈도 권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망의 권세보다 더 강력한 생명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력한 생명의 힘이 역사하게 됨으로 이 생명의 힘 앞에 사망이 힘을 쓰지 못하고 예수 안에서 생명의 꽃이 피어오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이 구원의 사건은 그렇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사건을 정확하게 경험한 사람은 속에 불이 날 정도로 뒤집어집니다. 구원의 감격을 말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에 주목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여기에서 생명의 왕 노릇은 이 세상의 죄로부터 주어진 사망의 지배, 죽음의 굴레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고 나의 생명이 영원한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나를 죽이려고 해도 더 이상 저주는 사라지고 영원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자도 암에 걸리고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이제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 아래 있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에게 주어진 죽음의 형벌과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풍성함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 접속되어 죽고 사는 문제가 끝이 난 것입니다.
요즘 적조 현상으로 바다의 물고기떼들이 몰사하는 것을 보면서 인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적조 현상이 일어나니까 생명체들이 숨을 쉴 수 없고 흙을 붓지만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죽음의 힘이 임하니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이때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면 한순간에 해결이 됩니다. 17절에 ‘더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풍성하게 흘렀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힘이 흘러 모든 인류를 쥐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압도적으로 역사하여 생명의 힘이 발동함으로 모든 저주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에 넘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당하고 넉넉한 정도가 아니라 압도하는, 거대한 쓰나미가 밀어닥칠 때 아무도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것 같이 저주와 절망과 사망의 권세,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뒤집는 감격적인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율법이 있기 전에는 우리가 죄를 죄인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인해 우리 죄를 깊이 인식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절망할 수 없는 것은 그 죄를 덮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 안에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망을 삼켜 소화되고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넘쳐 우리 죄를 덮고도 남고, 그 죄로 인한 결과들이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안에 잠겨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누리자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누리는 것입니다.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롬 5:2~3)」 은혜에 들어감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의 풍성함 안에 있는 것이고, 더 이상 우리 삶에 어떤 고통도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에게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지금까지 사망의 권세 앞에 꼼짝 못 해 사망이 쏘면 모두가 쓰러졌지만 이제는 예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들에게 더 이상 사망의 화살은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흥분이 됩니다.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절대 폭군이었던 죽음도 꼼짝 못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생명이 흘러넘치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확인하면 우리는 절대로 비관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던 첫 사람 아담의 뒤에 더 이상 서 있지 말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뒤에 줄을 서서 생명과 은혜의 풍성함 안에 들어가 날마다 승리를 선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고, 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죽고, 죽고’의 계보와는 다르게 ‘낳고, 낳고, 낳고’ 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강력한 역사 안에서 구원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의 장엄함, 풍성함을 알아갈수록 우리 삶에 활기와 감격과 당당함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수많은 절망 가운데에서도 위축되거나 우울할 일이 없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승리했다면 더 이상 위험한 것도 없고 불행한 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위기와 환란 중에서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불사조처럼 날마다 일어나게 했던 것은 예수의 생명 안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의 파워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승리를 경험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부활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케 하신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계속 역사함으로 사망의 권세 아래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 앞에서 사망의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라고 선포하는, 구별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한 사람 때문에
로마서 5:12-19 / 홍인식 목사(현대교회)
지난 3월 09일 재의 수요예배를 시작으로 2011년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예배입니다. 저는 주로 성서일과를(1992년 개정판, Revised Common Lectionary) 중심으로 설교를 준비합니다. 성서일과는 세계교회가 공통적으로 읽어가는 성서구절입니다. 성서일과에 의한 설교는 설교자가 자기의 취향에 따라 설교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주어진 본문에 복종하게 만들어서 그 본문이 오늘의 상황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만듭니다. 더욱이 세계 교회의 설교에 참여하게 하는 좋은 이점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모두 4가지입니다. 첫째 본문은 창세기 2:15∼17과 3:1∼7(인간의 타락, 선악과를 따 먹는 장면), 시편 32편(죄의 고통과 죄의 용서, 다윗의 시), 마태복음 4:1∼11(예수님의 광야의 시험)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의 설교본문인 로마서 5:12∼19 절입니다.
위 네 가지 본문의 공통점은 죄와 용서에 관한 것에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명상하고 기억하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세계교회가 공통적으로 읽는 성서일과가 죄와 그의 용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와 그리고 그의 용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을 시작하면서 인간의 죄와 그의 용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의 성서일과의 본문을 따라서 한 사람으로 인한 죄와 한 사람으로 인한 죄의 용서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나 중심의 한 사람과 죽음의 세계
본문은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의 죄와 관련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한 사람으로 인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5:12)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늘 성서일과의 본문 중의 하나가 창세기 2장15∼17 과 그리고 3장 1∼7절입니다. 이 본문은 인간사에 있어서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기록입니다. 창세기의 기록은 인간이 선악을 알고자 하는 것이 죄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물과 사실의 중심에 인간이 서겠다고 하는 시도입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겠다는 시도입니다. 인간중심(anthropocentrism) 그것도 다름 아닌 나 개인 중심(egocentrism)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나 중심 egocentrism 으로 인하여 인간세계에는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결국에는 egocentrism 이기주의의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처럼 죄의 근본적인 모습이 egocentrism(나 중심적 이기주의)의 무서운 결과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자기 혼자서 스스로 서고자 하는 시도와 욕심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입니까? 당시 사람들의 죄 바로 egocentrism 이기주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파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형장으로 내 몹니다.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겠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에게 유죄를 선고합니다.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겠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가르침에 놀라 그렇게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들, 그들의 예수님을 향한 환호는 저주의 말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듭니다. 군중들도 자신의 이익 앞에 눈이 어두워 졌습니다. 또 다시 자신이 삶의 중심에 서고 또한 자신의 이익을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egocentrism 의 승리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든 것은 우리 모두의 이기심, 자기만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egocentrism의 죄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무슨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시려고 합니까? 근본적인 죄, “자기만이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경제. 사회 정치적 위기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정치인들의 부패입니다. 그리고 이를 동조, 묵인 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여서라도 나도 한번 부를 축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은연중 가졌던 국민들의 부패입니다.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부패가 원인입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의 부패만이 지금의 위기상황의 원인은 아닙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980년 이후로 세계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오직 이윤과 부의 축척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시스템 다시 말하면 부를 만들기 위해 무제한적이고 무차별적인 경쟁을 추구하는 현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현 시스템은 egocentrism의 결정판이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강한 자(그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를 중심으로 이 세계를 재편해 보자는 것이 현 시스템입니다. 세계경제가 이처럼 위기를 겪게 된 것은 현 경제체제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위기를 몰고 온 두 가지 요인의 깊숙한 곳에는 다름 아닌 죄의 근본모습인 egocentrism 이기주의 ‘나 중심의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죄가 그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나만 살겠다는 그리고 내가 제일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의 죄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성서에는 이같이 한 사람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에 대한 증언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이 성 공격이 실패로 끝나고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것은 아간이라는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다시스를 향하여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은 요나라고 하는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입니까? 오늘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같은 자기중심적인 죄로부터 자유롭습니까? 혹시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나 한 사람의 자기중심적인 죄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입니까?
2000년 전 예수님이 egocentrism 나 중심의 세계관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듯이 오늘도 우리의 egocentrism이 우리의 형제들로(작은 예수들) 하여금 고난 받게 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나 한 사람 때문에, 나 혼자만 살겠다는 그것 때문에 세상에 죽음이 왔습니다. 바로 나 한사람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나 한 사람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처럼 한 사람 때문(아담이라는 존재)을 강조하면서 다른 측면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 때문에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열리는 생명의 세계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5:18) 사순절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성찰하는 계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사순절을 통하여 고난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선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고난을 미화시켜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고난이라는 것은 인류가 극복해야 할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이 고난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난 자체를 선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순절을 통하여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운 고난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통하여 나타나는 주님의 의로운 행동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금욕의 종교와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금욕주의적인 성격을 믿음과 동일시 해왔습니다. 그래서 좋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금욕생활을 잘 하느냐와 연관시켜 판단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금욕적인 모습이 바로 이런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믿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대표하는 것은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올바른 삶입니다.
그러면 고난과 의로운 삶과 연관하여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교훈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죄악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사는 길은 가시밭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고난과 죽음은 어쩔 수 없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올바르게 살려고 할 때 받는 박해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주님이 사셨던 의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삶을 사시느라고 받으셨던 주님의 고난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받게 되더라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감수하면서 살겠다는 결단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아담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 이 세상에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서 이 세계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입니까?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는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를 무수히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한 사람의 의로운 삶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동안의 노예생활을 마치고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의로운 삶으로 인하여 바울이 회개하고 전 세계에 예수님의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는 놀라운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는 놀라운 생명의 길을 열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이처럼 아담과 예수님을 대조하면서 한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11년도 사순절 첫째 주일을 보내면서 한 사람의 행위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를 기억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단순한 고난을 찬양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는 신앙의 결단을 다지는 계절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내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겠다
오늘 우리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아담과 같은 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의 갈래 길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 중요합니까? 한 사람 때문에 이 세계에 죄와 죽음이 들어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이 세상에 생명이 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한 사람으로 살아가시렵니까?
2011년도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의 위기와 고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위기가 깊어 가면 갈수록 우리는 한 사람의 존재가 그리워집니다.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누가 그 한 사람입니까?
오늘의 위기와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는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정치계가 예수님과 같은 그 한 사람 때문에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사순절 기간 동안에 간절히 기도합시다. 한국 경제 아니 세계 경제계가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바로 한 사람 때문에 생명이 있는 곳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누가 그 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지나간 우리들의 삶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바로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가정에 생명이 넘쳐나게 합시다. 바로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교회가 생명과 신앙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십시다. 오늘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문제는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5:19)
새로운 피조물
롬 5:12-18 / 조용기 목사
<서 론>
오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옛날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그 후 6전쟁으로 피난민 생활할 때는 누더기 옷을 입고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찢어지고 구멍 뚫린 옷을 몇 번이고 기워 입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런 옷을 입고 학교를 가거나 친구들 집에 가면 우리 자녀들이 울고불고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때는 옷 한번 입으면 찢어져서 못 입을 때까지 입는다 말입니다. 나는 오늘 이 설교를 하려고 앉아있다가 작년에 세상 뜬 내 짝꿍 생각이 납니다. 내 짝꿍이 옷을 입고 오면 내가 시간만 나면 그 찢어진데를 잡아서 더 찢어지게 해서 옷 물어내라고 울고불고 하던 그 옛날이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멋을 내려면 내찌께 라고 해서 이렇게 방바닥에 옷을 싹 깔아놓고 요를 살짝 덮어놓고 그 위에서 누워잡니다. 잘 내찌께가 되면 앞에 옷의 줄도 서고 제법 멋있는 옷을 입을 수 있는데 잘못 뒹굴어 놓으면 줄이 수십가지가 나와서 옷이 망쳐지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형제간이 많으니까 형제들 중에 옷을 깨끗이 그렇게 입으려고 했으나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옷이 더 망가져서 울면서 학교를 안 가고 옷 바로 세워 달라고 한 것이 오늘같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 신앙생활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전도서 1장 9절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다 있던 그것이 또 있고 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상적으로 되풀이될 뿐,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에 새것이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의 새로움은 네오스입니다. 옛날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서 오늘 것이 새로워지고 이것은 네오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질적인 새로움, 완전히 속이 달라져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카이노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생활이란 네오스, 세월이 흘러가서 어린 사람이 나이 먹은 사람으로 변하여 자랐다. 그런 크리스챤의 체험을 새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카이노스라고 질적으로 새로워 예수를 믿고 속이 달라져 버리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때 카이노스를 사용합니다. 이는 우리가 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 믿고 교회 등록해서 종교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확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나라가 바뀌듯 인격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을 입게 되며,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4차원의 영성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하나님께 쫓겨나갈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냥 사람이 되었어요. 그냥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쫓겨나오니까 마귀가 덥썩 잡았습니다. 그래서 마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다 마귀 사람인 것입니다. 마귀의 죄악을 그대로 옮겨놓고 마귀를 따라 사는 마귀 사람이 되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죄를 청산하시고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마귀가 쫓겨나가고 다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되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냥 사람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있어서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을 행하는 4차원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4차원이 그들 속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3차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와서 앉아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입니다. 여보, 잠을 깨어나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래요? 하나님의 사람이면 다른가요? 다르고 말고요. 하나님의 사람은 4차원의 영성을 가진 사람으로 환경을 다스리고 변화시키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은 그런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 론>
1.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패와 부정으로 도덕적으로 누더기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사람으로 세상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을 본받아 삶으로 누더기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질적 발전이 도덕적 뒷받침이 없으면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하지요. 우리 대한민국은 올해는 평균 국민 소득 3만달러가 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깜짝 놀랄 만큼 잘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변화되느냐. 더 변화되지 않고 더 부정하고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사회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세월호 같은 일본에서 더 사용하지 못해서 내버리는 고철덩어리를 사와서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 배로써 제주도로 거제도로 왔다갔다 하다가 물에 빠져서 그 많은 희생을 가져왔지 않습니까? 이것은 도덕적으로 부정과 부패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더기를 입은 잘사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누더기 기워 입듯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땜질하듯이 사회를 고쳐서는 새롭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도 통째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것이 우리 가정과 사회와 우리 생활에 행해질 때 비로소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9절로 10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예수 믿는 것은 새사람을 입었다.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까지 새롭게 되었다. 엄청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냥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좋은 일하는 것이 예수 믿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전적으로 새롭게 되었다. 생각이 새로워지고 꿈이 새로워지고 믿음이 새로워지고 말이 새로워지고 온통 새로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갖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변화되느냐’하면, 애벌레가 이전보다 더 잘 기어가는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꿈틀꿈틀 기어가는 애벌레가 어떻게 자극을 받아서 꿈틀꿈틀 조금 빨리 걷는다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새벽기도 안 나오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나가는 것 보면 참 용한 일이다. 그래도 생각하는 것 보면 변화 안 되고 말하는 것 보면 욕지거리하고 거짓말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의심투성이고 거짓말하는 그러한 새것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새롭게 되느냐면 예수 믿는 사람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 믿은 우리 신앙생활을 옛날 생활에 짜깁기하는 그것 아니고 낡은 포도주 바구니에 그것 바구니라고 합니까? 포도주를 담아놓는 가죽 주머니에 새 포도주를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가 확산하면 가죽이 다 터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더기를 기워 입듯,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땜질하듯 해서는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범죄한 인간의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야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만,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그럼 때려 잡아 죽이자. 그래서 새사람이 되어서 부활하기를 기다리자. 그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고 장사지내고 사흘 만에 부활한 그 모든 극적인 행동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신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내가 바로 저를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하고 피 흘려 죽고 내가 장사지내서 무덤에 들어가고 내가 예수를 통해서 부활하고 내가 승천했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꿈꿔 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나와 하나가 되는 이러한 꿈과 신앙이 일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 속에 깨달아 알고 그것을 꿈꾸고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죽고 장사지낸 것을 꿈꾸고 그것을 믿고 여러분이 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 지낸 바 되고 함께 부활하고 승천해서 하나가 되었다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그 때문에 여러분은 내적 상상이 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을 늘 생각해야 돼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날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다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탁월하게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이것이 따라야 예수 믿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 좀 나눠주고 한푼 달라는 사람에게 천원 짜리 한 장 주고 아침 일찍 배고픈 사람에게 밥 먹여줬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될 선한 행위이지 그 자체가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기에 달린 저 예수님이 바로 나다.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달려있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장례식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간다. 내가 함께 부활해서 내가 함께 승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당한 고난 전체가 여러분을 위한 하나의 극적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상상하지 못하면 신앙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바라봐야 돼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믿고 말해야 돼요. 나는 예수와 같이 죽고 같이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승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되어야 해요.
2.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성경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누더기 옷을 대신 받아 입으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삶 그 자체가 탐욕에 젖은 누더기 옷인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누더기를 예수님이 받아 입었습니다. 자기의 의롭고 깨끗한 옷은 여러분에게 내어 주시고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누더기 옷을 대신 입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아담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기독교 신앙은 대표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아담 안에 우리가 다 죽었고 아담 안에 버림을 당했는데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처음 아담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 둘째 아담이라고도 하고 마지막 인류의 조상으로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처음 아담이 가지고 온 죄와 죽음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다 인수 인계해서 당신이 죽고 당신을 통해서 용서와 의와 거룩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깨달아 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돼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자기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나의 누더기 인생을 인계 받아가지고서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죄에 빠져서 탐욕의 누더기 옷을 입고서 자기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집에서 농주를 담그곤 했습니다. 메주 같은 것을 쑤고 쌀을 쪄서 그 속에 넣어 두면, 누룩이 퍼져서 완전히 발효되어 술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라는 누룩이 그 안에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죄의 누룩이 어머니 뱃속에서 생겨나는 자식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기 전에 벌써 누룩이 기다리고 있어요. 응아하고 태어나자마자 발효해서 온갖 죄를 짓습니다. 선은 가르쳐도 잘 안하는데 죄는 안 가르쳐 줘도 전부 짓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누룩이 그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죄를 짓습니다. 먹을 것을 주면, 하나는 입에 넣고 또 하나는 손에 쥐고 좀 달라고 해도 안 나눠주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탐욕에 젖은 누더기를 입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죽어서 좋은데 간다. 그런 말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린 아기 뱃속에서 떨어져서 응아~ 우는 그때부터 죄인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아담의 핏줄을 통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어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위를 해서는 구원을 못 받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의 누더기 옷을 당신이 갈아입고 대신 죽어주므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오늘 마음에 죄 값으로 말미암아 괴롭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적은 죄나 큰 죄나 할 것 없이 전부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못을 박아 내가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죄를 백년, 천년 용서해 버린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용서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은 영원합니다. 여러분 영원히 죄가 씻음을 받았어요. 영원히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참 이것 얼마나 좋은 구원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죄를 낱낱이 다 청산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청산해 주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입은 누더기는 죄의 누더기, 허물의 누더기, 질병의 누더기, 저주의 누더기, 죽음과 음부의 누더기. 이 휘황찬란한 누더기를 주님이 다 덮어쓴 것입니다. 다 짊어졌어요.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나 때문에 그렇지 않고 너 때문에 그렇다고 상대에게 죄를 덮어 씌우지만 예수님은 내가 다 짊어질테니까 내게 맡겨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주님께서 하나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때문에 다가온 죄악의 결과를 청산한 것입니다. 그가 처참하게 대못에 찔렸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쳤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런 소리 마세요. 내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았노?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깨달아 알면 그것이 진짜 여러분 신앙인 것입니다. 나 때문에 그런 것 아니요. 아니요. 그러면 안돼요. 어머니 물침례 받을 때 목사님이 누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었습니까 그러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세요. 알았다 알았다. 목사님이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지요? 그것 모를 턱이 있어요? 우리 며느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 그러면 안돼요. 그것은 잘못 깨달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나 때문에 내가 지은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5절은 예수님 오시기 칠백년 전에 이미 예언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로마서 5장 15절과 18절처럼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아담 때문에 모든 세계인들이 죄인이 된 것처럼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은혜가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청산했으니까 은혜도 영원한 은혜인 것입니다. 아담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 아담은 죄를 지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 사람,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죄를 받아 가지고서 온 세상 인류의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는 말로다 할 수 없이 풍성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죄는 한사람을 통해서 온 인류를 휘어잡았지만 그러나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선물을 넘치게 받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허물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되며 병을 다스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가난을 다스리고 헐벗은 저주를 다스리고 죽음을 다스려서 부활 영생 소망을 갖고 이 넘치는 은혜와 축복은 한번 예수님만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러한 은혜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 알고 그것을 꿈꿔 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이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고 옛날 것은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완전히 새롭게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로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주신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이구 나는 아직 새것이 되지 못했는데요. 못해도 여러분이 새것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령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는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면서 1년 동안에 어려운 문제가 당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으려고 할 때도 언제나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았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여러분이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고 믿고 맡기고 나는 복을 받았다고 입술로 고백을 하고 시인을 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면 옛다 떡 먹어라 하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뼛속까지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침례 안 받았다고해서 구원 못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데 왜 침례는 구태여 받느냐. 침례를 받으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은 죽고 지낸바 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체험하므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더 뚜렷하게 새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 옷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중복음의 옷이지요. 용서와 의의 옷을 받아 입고 성결과 성령충만의 옷을 받아 입고 치료와 건강의 옷을 받아 입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의 옷을 받아 입고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옷을 받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눈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받아 입느냐. 역시 4차원의 영성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옷을 받아 입는 것이라. 여러분이 예수님 옷을 받아 입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꿈꿔 보고 그것을 믿고 입술로 말하면 말이 나가서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로운 옷을 입은 사람이다. 나는 거룩한 옷을 입었다. 나는 치료의 옷을 입었다. 나는 축복과 형통의 옷을 입었다. 나는 부활 영생의 옷을 입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은 새 옷을 받아 입었기 때문이다. 입술로써 고백하면 성령이 와서 네 말한 대로 될지어다. 여러분이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중축복의 두루마기를 입고 이제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까? 여러분, 이 은총과 축복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여러분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청춘을 독수리같이 활달하게 만들어 주시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루 생활할 때 짜증나고 귀찮은 일이 있더라도 말을 하십시오. 나는 독수리같이 새롭게 될 축복을 받았다. 죄가 다 용서받고 나는 의롭게 되었다. 나는 형통함을 입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적은 목소리로 여러분 자꾸 말하십시오. 여러분 말이라는 것은 속에 있을 때는 내가 콘트롤합니다. 그 말을 내가 다스리지만 그러나 일단 입 밖으로 나오면 그 말은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결국 말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멋도 모르고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그 말이 다 나가서 에너지가 되어서 나중에 여러분에게 책임지게끔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보통 사람들은 오만가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오만가지 말 중에 여러분이 긍정적인 말을 얼마나 하는 것입니까? 지극히 적게 합니다. 오만가지 말은 전부 비난하고 비평하고 욕하고 탄식하고 한탄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이것이 나가서는 에너지가 되어서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여러분을 물고 찢고 짓밟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서 입술을 지키면 여러분의 많은 불행과 슬픔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로 해야 되고 꿈을 바로 꿔야 되고 믿음을 바로 믿어야 되고 자꾸 믿음을 의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뭘 믿느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지요?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요? 그런 그 예수님에게 내 문제를 맡겨 버려야 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을 내가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문제를 예수님께 맡겨버리고 랄랄라 휘파람 불고 나가면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맡겼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 내게 짐을 맡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맡겼다는 것을 입술로 자꾸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다 맡겼다. 나는 예수님께서 다 맡겼으므로 무겁지 않다. 나는 좋다. 말이 나가서 에너지가 되어서 여러분 짐을 다 주님께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와서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와서 여러분 자유와 해방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질병, 저주와 절망에 속박에서 해방되고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떠나가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마음에 다가오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므로 이와 같은 변화가 다가와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교회 오는 것이 정말 즐겁고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는 것을 체험하고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시듯이 은혜의 생수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러한 산 체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 왔다갔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못 박혀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하셔서 손을 내밀고 내게 오너라. 내가 너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주마. 의로운 옷을 입혀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혀 주고 있고 치료의 옷을 입혀 주고 있고 축복과 형통의 옷을 입혀주고 있고 영생복락의 옷을 입혀주어서 내 아들, 딸들 참 좋다. 옷 입혀 놓으니 기쁘다. 자, 속옷 입었으니 겉옷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전인구원의 옷을 입어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옷을 입혀 놓고 좋아하고 아이고 내 아들, 내 딸 좋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상으로 그 옷을 생각하고 그 옷 입은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고 저 옷이 내 옷이라고 믿고 그 입술로 고백합니다. 그러면 주님하고 딱 맞아떨어져서 그 모든 옷들이 여러분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이 옷을 다 입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새 옷을 입으라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생각이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와~ 저 십자가 주님 고통이 나를 변화시키는구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꿈을 새롭게 하고 내가 언제나 마음속에 상상한 꿈입니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구박받는다 하지 말고 나는 주님 때문에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나와 같이 계시고 저주가 다 물러갔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된 모습을 항상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나는 믿음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니 행복하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그렇게 나가면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은혜가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축복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축복은 없습니다. 아담의 죄악은 예수님이 짊어지고 갈보리산에서 다 청산할 때 마지막에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주님은 영원히 여러분이 잘 살 수 있도록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하고 끊임없이 싸워서 결국은 이기는 영원히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결국은 이기는 것입니다. 허물도 결국은 다 벗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병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내 병을 대신 짊어지셨다는 것을 끝까지 믿고 참고 견디며 입술로 주장하면 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축복도 내 것이라고 자꾸 주장하면 축복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여러분 새 인생, 새 옷을 입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속에 온 이후로는 누더기 옷을 다시 입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성경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다 방탕해 써버리고 기근이 들어서 굶어죽게 되니까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올 때 아버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아들이 아버지께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으니 다시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종의 한사람으로 여겨 주소서. 아버지가 그 아들 목을 감싸고 환영을 하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냄새나고 구역질나는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그게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예수 믿고 나오면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죄가 하나도 안 지은 사람처럼 깨끗한 옷을 입혀라. 그만큼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철저히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당한 것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만한 죄도 예수님이 다 청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의로운 사람이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혔으니까. 그리고 성령이 같이 계실 정도로 거룩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령이 같이 계시면서 여러분에게 보혜사가 되셔서 도와주시고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절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일생 살 것을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요사이 백세를 살면 육십세 은퇴를 하면 나머지 40년을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태산인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라. 우리 주님 섬기고 주님께 십일조 심고 주님을 기뻐하면 필요할 때 다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 먹이고 열두 바구니 남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희한한 방법으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교도소에 갇혀있던 죄수가 임기가 다 끝나면 교도소에서 나오면 사복을 가져와서 입힙니다. 죄수복을 입고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죄인의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혈로써 값주고 산 옷을 입혀서 우리를 돌려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의식을 집행하므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한분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불러 주셔서 내가 예수님 앞에 나가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드리면 예수님이 여러분과 나의 영과 혼과 육의 모든 죄와 병을 다 책임지는 것입니다. 다 내게 내놓아라. 다 내게 내놓아라.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신 짊어졌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 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찔림은 네 죄 때문이요 내가 상함도 네 죄 때문이다. 내가 징계를 받은 것도 너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서 내가 채찍에 맞아. 보아라. 내 등허리, 채찍에 맞은 것은 너 고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너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매달렸다. 그러므로 너는 내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이 된다고 깨닫고 그 꿈을 꾸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라. 여러분 금년도에는 꼭 그렇게 하십시오. 생각이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생각이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옛사람이 아닙니다. 저주가 다 청산되었습니다. 이제는 새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요사이 핸드폰이 카메라 역할을 해서 가는 곳마다 핸드폰을 가지고 자기 사진도 찍고 남의 사진도 찍는데 그 핸드폰을 영적인 핸드폰을 가지고 자기 모습을 찍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변화된 축복받은 모습을 마음속에 찍어서 걸어놓고 보십시오. 그리고 믿고 그리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도 여기에서 못난 사람 없습니다. 한사람도 버림받은 사람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내가 말한 것은 성령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을 정도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맡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필하고 나갈 때 여러분의 모든 짐을 다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맡기고 나가십시오. 아멘.
그 한 사람!
로마서 5:12-21 / 崔仁根 牧師
지금 미국은 영어를 공식 국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게 된 역사를 보면, 1776년 미국의 국어로 영어를 선택할 것이냐? 독일어로 할 것이냐? 를 놓고 투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표 차이로 영어가 결정되었습니다. 그 때 그 한 표 차이가 아니었으면 독일어로 가결되어 미국은 독일어가 국어가 되고, 세계는 독일어가 공식 통용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한 표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1645년 6월 10일 영국 의회에서 총사령관 투표가 있었습니다. 크롬웰이 총사령관으로 당선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91대 90 한 표 차로 당선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는 장면입니다.
1945년 텍사스 주를 미국 영토에 포함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를 놓고 미국 의회가 투표를 하였습니다. 한 표 차이로 미국 영토에 포함하도록 가결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만약 한 사람의 부표가 나왔다면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크고 자원이 풍부한 텍사스를 잃었을 것입니다.
또 영국의 챨스 1세를 사형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를 놓고 투표하였습니다. 135명 재판관이 투표에 참석하였습니다. 68대 67로 사형이 가결되어 챨스 1세를 사형시켰습니다. 한 표로 영국의 왕이 죽고 그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한 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중요성을 대변해 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래서 단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이 그렇게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재인식하여 인생을 값지고 보람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그 한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배워보려고 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한 사람!
이 세상에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들어 왔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 5:12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오늘날 이 땅에 태어났으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다 죽습니다. 그 원인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 한 사람 아담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한 사람, 이 종이 시애틀 지역에 교회를 세워보겠다는 의지로 지난 35년 동안 없었던 시애틀에 빌립보장로교회가 탄생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영향력은 작게는 한 교회로부터 크게는 전 인류에게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전제로 한 사람이 우리 인류 역사에 미친 사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한 사람의 소중함을 가슴으로 인식하며 남은 삶을 보다 더 보람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한 사람 아담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함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음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짧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거듭 반복하면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아담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플로리다에서 시애틀로 오늘 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설교준비를 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평소에 스쳐 지났던 한 말씀이 강하게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한 사람 아담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아담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라는 아들이 그의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종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제 주변에서 이런 끔찍한 사건을 단 한 번도 목도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순수하던 사람들이 살고 있던 바로 그 때에 이와 같은 끔찍한 살인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을 아주 분명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창 4:6-8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이 끔찍한 사건을 이렇게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내면을 묵상해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살인이 난무하고 인간의 죄가 하늘에 닿고 있는 이 때에도 이와 같이 형이 동생을 쳐 죽였다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을 텐데 봄의 새싹처럼 인류 태초의 그 순수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속에서 이처럼 형제간의 살인이 벌어졌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백주대낮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 한 사람 아담의 죄가 그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하게 나타나게 되는가를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여 남기심으로 오늘 우리들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한 사람 김일성이가 갈라진 북녘 땅의 모든 교회를 불사르고 성도들을 모조리 학살하였습니다. 지금 북한은 이 땅에 있는 200개가 넘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는 악랄한 나라 1위를 차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었던 평양의 그 화려하던 교회들을 그들을 단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제거하고 성도들 또한 모조리 닥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직 7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들은 과연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 지구 위에서 최악으로 비참한 악성국가로 남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산에 나무가 한 거루도 없을 만큼 나무껍데기까지 다 벗겨 먹었겠습니까? 그 악인의 3대인 김정은이는 아직 나이도 어린데 그 얼마나 잔악하면 제 고모부를 처참하고 잔혹하게 처형하였겠습니까? 이렇듯 단 한 사람의 죄가 그 자식들과 그 나라를 비참하게 망하게 한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바로 여기에 이처럼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예외가 아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고 철없이 자라나고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을 생각해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조급한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경계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아담과 북녘 땅을 심판하시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들을 내려다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 바울
우리는 신약의 절반을 기록한 위대한 사도 바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잔인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요 자진해서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행 7:57-60 /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9:1-2 /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매우 잔인한 사람이요 의협심이 강한 못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180도 달라지고 변화 되어 인류 역사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특별히 암울하던 초기 기독교 역사에 획을 긋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신약성경 27권 중에 그 절반을 기록하였고 교회가 없던 초기 기독교 역사에 가는 곳 마다 교회를 세워 전무후무한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로마교회를 비롯하여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등에 교회를 세워나가 아시아와 갈라디아 지방과 데살로니가 지방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 초대교회의 초석을 세우는 위대한 전도의 역사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도 온 세상에 널리 퍼저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지난 주간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세계예수교장로회 WMS선교대회를 다녀왔습니다. 주일 밤 12시에 시애틀을 출발하여 휴스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목적지인 플로리다에 도착하니 이튿날 아침 11시였습니다. 거기에서 모임을 준비하고 공항에서 픽업하며 수고하는 모든 목사님들도 주일에 각기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는데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습니까? 모임을 갖는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가깝게는 30분, 멀게는 2시간 30분이나 걸리는데 그 모든 사람들을 픽업하느라 수고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누간가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겠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우리교회도 내년 5월에는 시애틀에서 세계예수교장로회 43회 총회가 열리고 200여명의 목회자들을 모셔 와야 하는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그 누군가가 되어 봉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모여 선교사님들의 강의를 듣고 선교사를 배우는 중에 단연 대한민국에 최초로 들어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신 토마스 선교사님을 배웠습니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려다 순교한 그 분은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에서 토마스 선교사님의 순교사화를 간략하게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순교자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1840-1866)라는 분입니다. 영국에서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선교사님은 1863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상하이로 갔습니다. 그런데 캐럴라인 사모님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곧 병사하시고, 상해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르 선교사와의 불화까지 겹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푸라는 곳에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중국에 와 있던 김자평, 최선일이라는 천주교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토마스 선교사님은 조선 선교를 결심합니다. 1865년 9월 서해안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 동안 인근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한국말을 배우기도 하고 1백여 권의 성경을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1866년 1월 북경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인 1866년 8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지부의 후원을 받아 통역사 자격으로 미국 국적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하여 대동강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당시 조선은 거듭되는 외세 열강들의 침입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맞물려서 그 어느 때보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나쁜 시기였습니다. 1866년 8월27일 평양의 한 포구에 정박한 셔먼호는 조선을 향해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하고 총과 포를 쏘아 사상자를 내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9월2일에 양각도의 모래톱에 배가 좌초되었는데, 이 때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하여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하자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토마스 선교사님도 이 때 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들은 분격한 군인들에 의해 결박되고,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 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님을 죽인 병사 박춘권이란 사람이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 선교사님에게서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많은 분들이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를 죽였던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받은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아 널다리교회를 세웠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던 조선 땅은, 마치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 온통 뼈로 가득 차 있던 에스겔이 본 골짜기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 땅에 하나님은 에스겔과 같은 종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게 하시고 마른 뼈들과 같던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한 토마스 선교사님을 통해 조선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겔37:10을 보면 에스겔이 뼈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할 때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순종하여 이 땅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고 전한 결과 훗날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 한국에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복음의 열매들이 맺혀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님은 육신의 안전과 평안을 기꺼이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육으로는 죽었으나 오늘도 영으로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 많은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의 사람, 한 명의 복음을 위한 헌신적 열정과 죽음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님은 죽었지만 그의 신앙과 열정은 그가 전한 성경책과 복음을 통해 영원히 한국에 살아 있습니다. 이렇듯 그 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한 사람 예수님
오늘 본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다 죽어야 하는데 또 다른 한 사람 예수님으로 인해 그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도 간단하지만 그 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죄와 생명은 참으로 인류 역사상 잊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롬 5:18-19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심을 따라 불순종하고 먹음으로 이 땅의 죄인의 대부가 되었으나 예수님은 그 모든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라시는 끔찍한 말씀이라도 순종하시어 오늘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 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들의 생명을 구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의 그 희생과 사랑을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단 5초만 망설여도 모든 사람의 목숨이 끊어진다는 게 확실한 순간, 쉽사리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엄청난 두려움에 발끝 하나도 떼기 힘든 상황에도 단호히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람을 살린 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965년 10월 4일 당시 29세이던 고 강제구 소령은 폭발하는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부하들을 살리고 꽃 같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1965년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이던 강재구 소령은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대원들과 강원 홍천 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한 이등병이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던지려다 손에서 미끄러졌고, 하필 수류탄은 중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굴렀습니다. 중대원이 모여 있기에 수류탄을 다른 곳으로 찰 수도 없어 무수한 대원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강제구 소령은 망설임 없이 수류탄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그가 덮친 몸 아래로 수류탄의 폭발음이 들렸고 강재구 소령은 산화했습니다. 아내와 어린 아들 그리고 홀어머니를 두고 떠났지만, 그가 있었기에 무수한 대원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매달 작은 월급을 쪼개 꼬박꼬박 보내던 효자이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는 늘 작은 성경책을 품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군복 주머니에 있던 성경책엔 한 글귀에 빨간 밑줄이 쳐 있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육군은 그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해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켰고 4등 근무공로훈장을 추서했습니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속한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를 ‘제구대대’로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숨진 지 1년 뒤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기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장한 대한민국의 용사요 예수님의 멋들어진 제자요 홀어머니의 훌륭한 아들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죽어야만 했던 그 모든 부하들이 다 살았으니 그는 진정 예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도 이와 같은 그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어느 때나 그 한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악한 일에 그 한 사람이든 선한 일에 그 한 사람이든지간에 그 한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담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과 같이 무엇인가 희생하고 생명을 살리는 그 복된 일에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아담의 죄악으로 우리 모두는 죽어야 하는 제한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토마스 목사님과 같이 비록 젊은 나이에 순교하여 이 세상은 떠났으나 오고 오는 성도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 삶이 더욱 아름답고 값진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우리들의 삶을 악하고 어리석은 곳에 허비하지 말고 소령 강제구와 같이 진정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살린 보람되고 고귀한 것으로 바꾸어 가는 그런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입어가야 하겠습니다. 힘든 이민 생활에서 때로는 지치고 고달프고 힘들 때도 많지만 우리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들의 자손들이 잘 되고 이웃들이 복을 누리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우리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는 삶을 기꺼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노동을 하였기에 휴식이 값진 것과 같이 헌신하고 희생을 하였기에 그 삶이 빛나는 것이므로 더욱 우리 모두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소중한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7월의 네 번째 주일에도 어김 없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아름다운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주님만이 주시는 위로와 축복과 기적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5:12-21 / 조상호 목사
EX) 제가 고등학교 학생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매주 2시간씩 두차례 교련 수업을 통해서 행진하는 법, 수류탄 던지는 법, 총쏘는 법, 엎드려 기어가는 법,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교육청에서 높은 사람들이 1년에 한차례 학교를 순방하며 교련 교육이 잘되고 있나 점검하는 교련사열을 하곤 하였습니다.
각 학교에서는 이러한 사열 받는 날짜가 정해지면 비상이 걸렸습니다. 교련 수업시간 뿐만 아니라, 일반 수업시간 중에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고 나서 정해진 시간 이내에 전교생이 교련복을 갈아입고 운동장에 총들고 집합해야만 했습니다. 지금에는 그러한 일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비상이 걸릴 때마다, 저희 반이 꼭 문제였습니다. 비상벨이 울리면 모든 친구들은 열심히 옷을 갈아입고 무기고에 가서 총을 들고, 정해진 시간에 운동장에 잘 모입니다. 그러나 유독 저희 반의 한 친구는 1500여명의 전교생이 다 집합한 후 한참 시간이 지나면, 그제서야 어슬렁 어슬렁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한 두번이 아니라, 매번 가장 늦게 나오는 데에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군대에서 쓰는 말로 우리 반의 고문관이었습니다.
그 친구 한사람이 늦을 때마다 저희 반 모든 학생은 엄청 고생하였습니다. 그 친구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반 전체는 기합을 받았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행진훈련을 하고 있을 때, 우리 반은 기어가는 포복연습을 하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훈련이 끝나서 교실로 들어가 학과수업을 받지만, 우리 반은 학과수업은 받지 못하고 운동장을 20바퀴 돈다든지, 소총을 머리 위까지 올린 상태에서 운동장을 오리걸음으로 돈 다든지, 교련 보충수업을 받는 등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 친구 한 명의 잘못으로 인하여 그 친구만 기합을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 학급 전체가 기합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EX) 약 10여년 전에 제가 시드니순복음교회 중고등부에서 교사로 봉사할 때였습니다. 중고등부 학생 중에 지금은 장로님이 되셨지만, 당시에 모집사님의 둘째딸인 이모라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이 얼마나 신실한지 모릅니다. 중고등부 찬양팀 싱어로 섬기고 중고등부 분반 공부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예쁘게 믿음생활을 잘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12학년이 되어 대학입시인(NZ Busary와 같은) HSC 시험을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본인에게 통보도 되기 전에, 시드니 모닝 헤럴드 신문에 나왔습니다. 'NSW 여자 전체수석' OOO'하며 그 학생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NSW 여자수석은 호주 여자수석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 학생이 수석을 차지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교민잡지와 신문에도 그 학생에 대한 기사가 몇주 동안 계속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이름이 매스컴에 오르면서 그 학생이 시드니순복음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였다는 것까지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이 다닌 중고등부에 자녀들을 보내면 공부도 잘하게 되고, 또한 착하게 된다는 소문이 시드니 교민사회에 나게 되었습니다. 그 한 학생으로 말미암아 시드니순복음교회 중고등부는 일약 유명해졌고, 그 결과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오게 되어 중고등부가 크게 부흥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학생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 공동체가 잘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린 두가지 예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잘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대표성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21절까지 보면, 유독 반복되는 단어를 찾을 수가 있는 데, 그것은 <한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12절, 15절, 16절, 17절, 18절, 19절, 계속 '한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대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오고,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한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제일 마지막으로 가장 정성을 기울여 지으신 피조물이 우리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인간들에게, 에덴동산에서 거하며 모든 것을 누리며 살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시면서, 단 한가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실과만 따먹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범한 결과, 사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불순종하기 전에는 가장 멋지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아 영원히 살수 있었던 인간들이었지만,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죽음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손인 전 인류가 사망의 저주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는 12절 중반 부분인 <이와 같이>라는 접속사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아담의 죄의 결과, 아담이 사망할 뿐 아니라, 우리도 아담과 같이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가 인정을 하든지 우리가 인정을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원죄 아래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애써 부인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닙니까?"라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원죄설은 분명히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결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적으로 조상의 특별한 형질은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EX) 제가 학교 다닐 때, 미생물을 공부했습니다. 술이나 빵이나 의약품 등을 만드는 원료인 효모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이 효모는 생장기간이 매우 짧은 것이 특징입니다. 짧게는 12시간, 길게는 36시간이면 거의 왕성한 발효를 합니다. 따라서 효모의 한 세대는 길게 잡아 36시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 효모라는 미생물은 약 한달이 지나면 몇 세대가 진행이 됩니까? 20 Generation(세대)이 진행이 됩니다. 6개월이 지나면 몇 세대가 진행이 됩니까? 20X 6개월 하면 무려 6개월만에 120세대가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효모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은 효모가 6개월여 동안 120세대가 지나는데도 곰팡이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효모는 효모일 뿐이지 효모가 곰팡이로도 변하지 않고, 세균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원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는 모든 사람에게 유전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보편성>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이상, 죄의 먹물이 묻지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금방 태어난 간난 아이라 할지라도 죄인의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그 죄악으로 인하여 죽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사망의 보편성>입니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죽음 외에는 우리의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에게 분명한 소유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내가 원치 않아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류는 날 때부터 죄인이고 또한 죽습니다. 한마디로 죽기 위해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씀처럼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권세를 거부하던 거부하지 않던,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우리에게는 죽음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한 분을 인간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로 한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는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15절의 <그러나>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라는 영어 단어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라는 뜻을 이야기할 때 쓰는 접속사입니다. 우리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망 가운데 발버둥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쳤으니라" 누구의 은혜가 넘친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아무 소망도 없고 절망 가운데에서 살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EX) 미국 어느 지방의 철도 연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철길을 따라 학교에 가다가 간밤에 내린 폭우로 철도가 끊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기차가 지나갈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기차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수백 명이 희생당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멈추게 할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지나갈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소년은 자기의 셔츠를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책가방에서 작은칼을 꺼내어 자기의 다리를 찌른 후, 흐르는 자신의 피로 흰 셔츠를 물들였습니다. 소년은 피를 흘리면서, 피로 빨갛게 물든 셔츠를 흔들며 기차가 달려오는 쪽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스톱!" "스톱!" "스톱!" 칙칙폭폭 힘차게 달려오던 기차의 기관사는 다행히 그 붉은 깃발을 보고 기차를 세웠습니다. 기차는 소년 앞에서 멈출 수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뛰어내려와 보니 몇 미터 앞의 철도가 끊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기관사는 기차길 옆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부축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차 속에 있던 승객들은 누구 때문에 살았습니까? 소년 때문입니다. 기차를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피를 흘린 소년 때문에 승객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소년으로 말미암아 살아났기 때문에, 소년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또 17절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이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생명 안에서 무슨 노릇한다고요?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
또 21절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신분이 완전히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세번째 우리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시절에는 사망의 권세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왕노릇 하기 때문에 고민과 번민에 날을 지새우며 살았습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 려고 내가 왔던가'를 외치며 엄청 갈등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며 삽니다. 적어도 우리는 지난 금요일 저녁에도 김안드레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자요, 공주들입니다. 아멘입니까?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다윗, 그리고 예수님까지 연결된 족보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에 추가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인 줄 아십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경은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어 성경에 이름을 올릴 수는 없지만, 이미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은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하다가 계속 낳다가 보면 저와 여러분들에게까지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은 족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늘나라 가문의 하나님 족보에 오른 왕자요, 공주입니다. 아멘입니까?
EX) 어제 어느 성도님 댁에 가서 김안드레 목사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가족사진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진이 있었지만, 부부 두분이 찍은 사진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부군인 형제님은 꼭 왕자의 모습을 하고 멋지게 서있고, 부인인 자매님은 머리에 왕관을 쓰고 공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보니 그 자매님 머리에 왕관이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저는 사진과 자매님의 얼굴을 교차해서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왕관들과 세상의 지위는 이와 같이 허무하고 일시적이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왕관과 지위는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시시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당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왕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힘있는 실세들입니다. 비록 겉모습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 날의 실세들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의 특권을 누리십시오. 이 놀라운 권한을 사용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망가운데 헤매이는 인류를 위하여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우리는 새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새 생명을 소유할 뿐 아니라,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족보에 올랐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할 바가 있습니까? 당당하게 아버지께 요구하십시오. 사단이 공격해 옵니까? 당당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으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거지처럼 살지 마시고, 당당하게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답게 사십시오. 그리고 신분에 걸맞게 왕권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박용래 목사
요즈음 국제공항에 나가보면 검역이 아주 강화된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테러에 대한 불안 때문이 아닙니다. 외국에 나갔다가 다시 입국할 때에 농산물은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리 농산물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만이 아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농산물 속에 병균이 있는 것을 모르고 반입했을 때 그것으로 인해 국내 농산물이 병으로 전염되어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과를 통해서 전체 농산물이 오염될 수 있습니다.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질병이 있습니다. 구제역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각 나라마다 예방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병균이 사람이나 어떤 물체를 통하여 반입되면 짐승이 병에 걸리고 한 마리의 돼지가 병에 걸리면 수천 마리의 돼지나 소나 짐승에게 병이 전염될 수 있습니다.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이 병에 의심나는 짐승이 있다하면 그 지역에 있는 소나 돼지를 먹지도 못하고 다 죽여서 땅속에 묻어버립니다. 한 마리의 병든 소 때문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영국에선 의심나는 짐승은 모두 다 죽여서 땅속에 파묻었습니다.
사스라는 질병 때문에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 전염병은 무서운 병이라 한 사람이 이 병균을 가지고 들어오면 순식간에 수백만명에게 병이 전염되어 생명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오직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오늘 본문 말씀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이와같이’란 말은 한 사람 아담이 범죄했을 때 모든 사람이 범죄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에 빠졌습니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의인이 되었고 구원받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고전 15:12에서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사람의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처녀 몸에서 나셨습니다. 오직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죽음과 생명으로 갈라지게 되는 비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1)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지난번 월드컵때 축구가 4강에 들어갔을 때 온 국민이 하나되어 뜨겁게 응원했습니다. 수십만의 국민들이 도시마다 길거리에 나와서 응원을 했습니다. 축구선수 몇 명이서 경기를 하지만 온 국민을 열광속에 몰아넣는 것은 그 대표선수들은 온나라 국민들에게 대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축구선수들의 승리는 바로 온 국민의 승리가 됩니다.
대통령이 국제관계 속에서 다른 나라와 체결하는 조약이나 비준은 전체 국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왜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국민 전체가 힘들고 어려워집니까? 대통령도 바로 대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인류를 대신합니다. 구약성경의 아담은 죄와 죽음아래 있는 인류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생명과 영생 아래 있는 인류를 대신합니다. 아담은 옛 시대의 인류를 대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인류를 대신합니다. 성경에 보면 요나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배 전체가 풍랑을 당하고 아간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큰 재난을 당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죄와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들어왔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인류에게는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아담을 통해서 만들어진 문입니다. 또 하나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들어진 문입니다. 인류는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담을 통해서 만들어진 멸망의 길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들어진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인류는 모두 아담을 통해서 만들어진 죄와 심판과 멸망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멸망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셨고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대표성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우리나라 법에는 연좌제법이 적용되지 아니합니다. 부모의 잘못이 자식에게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부모가 부채를 청산하지 못하면 자식에게 이어갑니다. 아들의 빚을 갚지 못하면 손자까지 내려갑니다. 보모가 빚 때문에 자식들이 노예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빚을 갚을 때까지 대대로 빚을 물려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자기 개인 신분보다는 어느 지파, 어느 족보를 가진 민족인가를 항상 앞세워 주장하였습니다. 바울도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베냐민 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2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맑은 물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온 물을 더럽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죽음, 사망은 죄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가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원죄라고 말을 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자, 죄의 노예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자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종자가 나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죙니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종자가 죄와 타락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주와 멸망과 형별을 받을 자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콩이라고 하는 종자에서 수박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족보는 아담-가인-라멕-노아의 8식구-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이스라엘 민족에 이르는 계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할례 공동체인데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만들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11제자-120문도-500문도-3,000명 성도-5,000명 성도- 세례 공동체-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입니다.
사람의 족보, 그 혈통속에 유전자가 이어져오고 유전자대로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부모의 얼굴을 닮기도 하고 성격을 닮기도 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 복잡한 죄의 혈통을 타고 세상에 왔습니다.
3) 복음의 원리입니다.
어떤 때 중국 영화를 보면 독약을 먹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해독제를 구하러 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뜻하지 아니하게 독사에게 물렸을 때도 해독제가 필요합니다. 해독제를 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생명에 위협을 느낍니다. 아담, 한 사람에 의해 들어온 죄의 독성은 온 인류를 병들고 사망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롬 5:7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담의 족보로 태어난 종자는 모두가 저주와 삼판과 사망과 멸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죄의 독성으로 사망에 빠진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해독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죄의 독성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제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인류의 죄의 독성을 해독시키고 인류를 살리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엄청난 희생 죄의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서 인류의 죄값을 청산하여 주셨습니다.
갈 2:20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 안에서 살면 죄와 멸망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죄의 독성은 온 인류를 저주와 사망과 멸망에 빠지게 만들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류의 죄값을 청산하고 해독시킴으로 생명과 구원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이며 은혜의 원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주신 말씀입니다.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사망과 멸망에 빠졌으나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그 보혈의 피로 죄의 독성을 해독시킴으로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으로 사망에 빠졌지만 또한 오직 한 사람으로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족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완전히 바꾸어서 생명과 영생의 길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성우 목사
오늘은 우리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 기념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1703년 6월 17일 영국의 런던에서 북으로 약 400리가량 떨어진 링컨 주의 엡워드 촌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와 성모 가운데 한 분인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특히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어머니의 철저한 가정교육을 통해서 어려서부터 하나님과 만나는 경건생활을 몸에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6살 때에는 목사관에 화재가 나서 죽을 뻔 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잊지 않고 늘 하나님의 은혜로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11살 때에는 런던의 차터하우스라는 중학교에 입학해서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으며, 17세 때에는 옥스퍼드 대학 안에 있는 크라이스트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공부를 마치고, 이 대학과 링컨 대학에서 조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22세 때에는 영국 국교회 집사 안수를 받고나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과 ‘거룩한 생활과 죽음의 규칙’ 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23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1726년에 옥스퍼드 링컨 대학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일하던 중 그곳에서 성결클럽을 만들어서 동료들과 함께 경건훈련과 규칙생활을 철저하게 지키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저녁 6시에서 9시까지 모여서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그날 일을 반성하며 내일 일을 준비하는 생활 습관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웨슬리와 그 동료들을 ‘메도디스트’ 즉, 규칙 쟁이라고 조롱하였으며, 이 모임이 확대되어 감리교회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는 32살 때이던 1735년에 북미 식민지 중에 하나인 조지아 주에 선교사로 일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해 10월 14일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조지아 주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아직 복음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또한 영국 국교회 규칙을 너무 엄격하게 실시한 까닭에 19개월간의 북미 선교에서 실패를 하고 1738년 2월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지아 주 선교는 실패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지아 주 선교는 웨슬리로 하여금 영적인 각성과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깨달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런던에 돌아온 웨슬리는 경건생활을 더욱 철저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매주 두 번의 금식과 극기를 힘써 자기 언행의 완전을 힘쓰는 동시에 검소와 절제로 가난한 자를 돕는 일과 감옥의 죄수와 병자를 방문하며 사람의 육신과 영혼을 구하는 일이면 물질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그런 삶을 통해서 자신의 내적인 성결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마음에는 종종 의심이 있었으며 심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런 고통 중에 있었던 웨슬리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모라비안 교도였던 피터 뵐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웨슬리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온전한 성결과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선행이나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음’ 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웨슬리는 그가 35세가 되던 해인 1738년 5월 24일 뜨거운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날 아침에 ‘네가 하늘나라에서 멀지않다.’는 성경말씀을 읽었고, 오후에는 성 바울 예배당에 갔다가 ‘오 이스라엘아 주를 의지하라’ 라는 찬송 소리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으며, 밤에는 올더스게잇 거리에 있는 소집회에 참석했다가 인도자가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8시 45분쯤이 되어 인도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의 기사를 읽을 때 웨슬리의 심령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기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자기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웨슬리의 삶과 신앙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고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서 이전과는 다르게 힘 있는 사역을 펼쳐나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88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어서 그 당시 혁명 직전의 영국 사회를 구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감리교회가 비로소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활동했던 그 시기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직후로써 시대적으로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많은 실직자들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의 계층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가면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웨슬리 목사님은 소외된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과 병원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버려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들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돌보며, 그들의 아픔에 깊이 동참하는 돌봄의 사역을 펼친 결과 똑같은 상황에서 프랑스는 혁명을 겪게 되었지만 영국 사회는 혁명 직전의 상황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일반 역사가들이 웨슬리 목사님의 역할의 중요성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웨슬리 목사님의 정신이었고 삶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감리교회의 정신이요 자랑스러운 전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곧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바로 세워지고 한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깨어 있는 한 사람이 가정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며, 한 시대를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정 반대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 가운데서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잘 못 세워진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한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던 역사 또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건강한 믿음과 건강한 생각, 건강한 비전을 가지고 제대로 세워지는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던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통해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함으로써 인류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고 창세기 3장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5장 12절-21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아담과 또 다른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 영향력에 대해서 대조해서 말씀하면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심판, 그리고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밝혀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18-19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그리스도로서의 삶을 사셨던 3년 동안에 부지런히 천국 복음을 전하셨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씌어져 있었던 사망의 멍에를 벗겨 내시고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씌어주신 것이니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실례들이 성경 가운데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혈통으로나 주어진 조건으로 볼 때는 결코 복을 누리거나 복을 계승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넘치게 누릴 수 있었으며, 그 복을 자손만대에 물려주는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으며, 그들이 인류에게 끼친 공헌 역시 대단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했던 많은 왕들 가운데서도 어떤 왕들의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세워가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선사한 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떤 왕들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왕권을 이용하여 더욱 악하게 왕권을 남용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 백성들을 곤경에 빠뜨린 왕들이 있었음을 구약성경의 역사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왕으로는 다윗 왕을 꼽을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왕이었던 아합 왕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성경 말씀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경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앞장을 섰던 유대교의 열성분자였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극적으로 변화되는 경험한 하게 된 이후에는 사도 바울만큼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목숨을 건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의 본거지인 이스라엘 땅을 벗어난 이방 지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으니 인류 역사에서 사도 바울은 정말 놀라운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세워나가고, 한 사회를 밝고 건강한 사회로 세워나가는 일을 위해서, 그리고 한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바른 생각과 바른 비전을 가진 한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고 더없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보내면서 여러분의 가정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세워져 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한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바라며,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다시금 밝고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중요한 한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희망이어야 할 교회들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금 주님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고 든든하게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배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처럼 귀하게 쓰임을 받는 소중한 한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신앙과 사상, 그리고 그의 삶에 의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성장하면서 도전을 받고 있던 중에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 연합수련회에 참석했다가 예언자 이사야가 영적으로 어두워져 가던 이스라엘 사회를 회복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더욱 뜨거워진 상태에서 그 날 밤 교육전도사님과 둘이서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강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웨슬리 목사님처럼,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처럼 한 시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중요한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비전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바로 그 전도사님이 경북 북지방 감리사로 취임하게 되어서 다녀왔는데, 정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이 한 없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변화되게 하시며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셔서 한 시대를 위한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정과 사회를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로, 그리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과 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온 인류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한 사람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로 그 한 사람을 간절하게 찾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셔서 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소중한 한 사람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죄와 은혜
백장흠 목사
얘기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무덤가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습니다. 공자는 한 제자를 시켜 무슨 까닭인가를 물어보게 했습니다. 까닭인 즉,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데 이어 자기 남편도 그런 변을 당하였다는 겁니다. “이제는 아들마저...” 라고 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무시무시한 데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았느냐?” 물었더니 그 여인이 하는 말, “그래도 여기는 세금을 안 내어도 되기에 안갑니다.” 라고 말 하더랍니다. 호랑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세금이 무섭다는 말입니다. 세무 사찰 나온다면 다 무서워합니다. 호랑이보다 세금이 무섭다면 근자에는 질병입니다. 암이고 성인병이라고 말할 겁니다. 미국에서 무서워하는 죽음의 병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피로증후군(CFS) 그리고 크로이츠펠트(CJD) 라고 합니다. 만성피로증후군은 전신 피로감이 지속되거나 미열두통, 근육통, 초조, 불면, 정신혼란 등의 증상을 보이는 불치의 병, 이게 만성피로증후군 입니다. 여하간 병은 무서운 것입니다. 왜? 사람을 죽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육체의 병이 두려운 것처럼 영육을 죽게 하는 게 죄입니다.
죄는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무섭고 못된 존재입니다. 본문 로마서5:12-21 에는 죄의 기원을 말해주고 죄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죄가 들어온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을 통하여 죄가 들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아담이 살고 있는 곳은 에덴 동산입니다.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풍족하고 만족하게 살면서도 범죄하였습니다. 어떻게 범죄하였습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물론 사탄이 와서 유혹하여 범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뱀을 많이 죽였습니다. 조모님이 성경을 들은 대로 제게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이 왜 죽고 저주를 받아 일을 하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데 고생하느냐 하면, 뱀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뱀만 보면 죽였습니다. 지금은 뱀이 귀하지만 예전에는 왜 그렇게 뱀이 많았는지 들판에 가면 논두렁에도 뱀이 있고 밭 가에도, 그리고 집안에도 있었습니다. 저는 뱀을 보기만하면 닥치는 대로 잡았습니다. 도망가면 어디까지라고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우리의 원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잘 한거지요?
뱀이 와서 유혹하였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었다면 범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먹었습니다. 죽는다면 죽습니다. 그런데 믿지 아니합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나요?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불신이라는 게 참으로 무서운 겁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면 죽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먹었습니다. 왜?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아니하면 범죄하고 죽습니다. 다른 건 다 먹어도 먹으면 죽는다는 선악과는 먹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제가 여기에 맛 좋은 사과를 갖다 놓고 “이것을 먹으면 죽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과속에 독성이 들어있기에 먹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잡수시겠습니까? 안 먹겠다는 분은 ‘아멘’ 하세요. 여러분들이 아담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아담은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범죄하지 아니합니까? 범죄하고 있습니다. 왜 범죄합니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는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대로 그대로 믿는 겁니다. 소학에 있는 말을 풀어서 말씀 드리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 첫째는 너무 젊은 나이에 출세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의 덕으로 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것이요, 셋째는 재능이 있고 문장에 능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만불손 안하무인을 경계 함이요, 다음은 남의 멸시와 빈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이 부족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겁니다. 여기에 진정한 불행이 있습니다. 믿지 아니함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주저하지 아니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담대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인생의 모두 것이 다 흔들립니다. 오직 하나님 중심, 예수중심, 그리고 말씀중심의 믿음을 가지면 어떤 사탄의 유혹이라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불신앙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비참하게 됩니다. 민수기13장을 보면 열 두 지파에서 대표자를 선정하여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열 지파 사람들은 자기들이 수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기가 질린 체로 그 땅은 삼키는 땅이요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불신앙의 바이러스가 불평으로 나옵니다. 다른 이들까지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눈물바다 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론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들과 비교하여 보면 메뚜기 새끼에 불과합니다” 라고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말하지 아니합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다른 이에게 실망을 주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은 인간의 적입니다. 믿으세요.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삽니다. 축복입니다. 교만이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이게 교만입니다. 천사가 마귀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교만이었습니다. 왜? 인간의 언어와 삶이 혼잡하게 되었습니까? “하늘까지 닿은 바벨탑을 쌓자” 라고 할 때였습니다. 교만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잘난체하여 뽐내고 버릇없이 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범죄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사는데 낭패를 당하고 싶어진다면 네 가지를 실천해 보세요. 하나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탐욕 때문에 망합니다. 분수대로 살아야 합니다. 욕심 때문에 사람 노릇도 못하고 추하게 삽니다. 다음은 무절제 입니다. 아껴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신세대는 저축보다 즐거움을 찾는다고 합니다. 물질만 아끼는 게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기주의 입니다. 나만 알아달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제일 좋지 않은 겁니다. 교만해 보세요. 다른 이들에게 시험거리가 됩니다. 교만의 반대말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여야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도 겸손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벧전5:5절에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였습니다. 허리를 왜 동입니까? 힘쓰기 위해서 입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면 힘이 생깁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이 편안합니다. 겸손하면 사랑을 받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영적성장을 지체시키는 무서운 병입니다. 교만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상당히 피곤합니다. 긴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인 자신도 괴로울 겁니다. 왜? 자기 마음에 드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범죄의 원인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평화를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 비행기와 독수리가 충돌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독수리가 죽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도 큰 수리를 해야 한답니다. 대한항공이 독수리와 충돌하는데 30억 이상을 지출했답니다. 교만하여 충돌하면 피차간에 망합니다. 교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항하고 반역하는 행위 즉, 범죄하게 하였습니다.
2. 범죄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 죄는 지배력이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을 아실 겁니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왕 노릇합니다. 나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약을 복용합니다. 같은 약을 계속 복용하면 그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약효가 처음보다 떨어집니다. 독약도 조금씩 분량을 늘려가면서 먹으면 나중에는 치사량을 복용하여도 죽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경 소아시아에서 번영하던 ‘폰투스’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국왕의 이름은 ‘미트라다테스’였습니다. 그는 독약이 무서워 한 가지 묘안을 개발하였는데 각종 독약을 아주 적은 량으로 복용하기 시작하여 차츰 늘려가면서 연습을 하였답니다. 체질화 된 그의 몸에는 독약이 들어와도 죽지 않을 내성이 생기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40년간의 권좌를 지켰는데 문제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자살하기 위하여 독약을 아무리 먹어도 죽지 아니하여 결국은 병졸로 하여금 칼로 찌르게 하여 죽었답니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내성이며 지금도 그 사용하는 방법은 미트라다테스 방법이라고 합니다. 죄가 바로 그러합니다. 한 번 처음 범죄할 때에는 두렵고 걱정하다가 내성이 생기면 범죄하여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도 아니하고 계속 범죄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죄의 종이 되고 맙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속의 유행의 지배를 받거나 사탄의 지배를 받는 어리석은 자는 없어야 합니다.
2) 죄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와 행복을 파괴시킵니다. 에덴은 해복한 동산이었습니다. 남녀가 즉, 아담과 하와가 사랑을 고백합니다. 여인을 보고 남자가 “그대는 나의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와도 무어라고 했을 겁니다. “나는 그대의 이빨이요 손발입니다” 그랬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나두요” 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남편부터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을 같이 먹어야 하겠다.’ 그만큼 남편을 생각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묻기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니까 아담의 말인 즉,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실과를 내게 주무로 내가 먹었 나이다(창3:12)" 그렇게 말합니다. 선악과를 받아 먹는 순간까지는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는 것, 알지?"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하면서부터 사랑은 깨어졌습니다. 사랑이 없어졌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결혼하기까지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젊은 남녀가 어느 순간에 이혼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여러가지 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로 요약하면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깨여졌기 때문이지 다른 것은 이유일 뿐입니다. 관계가 잘못되는데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였습니다. 이제는 두려운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숨어야 했습니다. 반가워야 할 분이 두렵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관계를 파괴시킵니다(창3:8).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따금씩 성도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 앞에 앉는 것을 피합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 “그렇게 내가 싫으면 무엇하러 같이 식사하자고 했어요?” 그러면 “싫은 게 아니라 어렵지요.” 그럽니다. 사실 마음으로 좋으나 어려운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계시록21:8에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 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였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두려움의 관계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과는 지옥입니다. 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도 파괴된다고 하였습니다. 창3:18에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였습니다. 자연계가 파괴되니까 이 땅에 재앙이 오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무서운 파괴가 있게 되었습니다.
3) 죄는 방해합니다. 기도응답을 방해합니다. 그리스도 인들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이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약속을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나요? 죄 때문입니다.
새59:2에 ‘오직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새59:3에는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합니다. 죄가 있으면 기도가 막힙니다. 기도시간이 길어졌다고 응답이 되나요? 사람보기에는 좋습니다. 기도하면 치료의 기적도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능력도 나타납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바로 기도입니다. 내 힘이나 누구의 도움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기도하세요. 풀려집니다. 기도를 통하여 시험도 이깁니다.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는 기도응답을 방해합니다. 축복을 방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주시면서 형통하게 하려고 하십니다(창39:2). 야곱 같이 축복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이미 망한 소련의 3대기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많은데 종이가 없고 원유는 많은데 휘발유가 없답니다. 땅은 넓은데 식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공산주의를 시작할 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광야에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집니다. 축복이란, 인간이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대로 된다면 그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복이 됩니다. 그런데 죄가 있으면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렘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죄는 승리를 막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스라엘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여리고 성을 함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간의 적은 범죄로 인하여 아이성에서는 패배하였습니다. 죄는 축복과 승리를 방해합니다.
4) 죄는 저주의 원인입니다. 창3:19 죄로 인하여 심판과 사망을 가져 옵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 하였습니다. 죽고 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와는 멀어져야 합니다. 근자에 암을 무서워 합니다. 암 예방이라 하면 무엇이라도 먹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죄도 예방하여야 합니다.
죄는 고통을 줍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범죄하면 부끄럽습니다. 창3:10 아담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죄는 공포심을 줍니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고전15:1-4).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죄가 아담이 대표가 되어 범죄함으로 우리에게까지 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길이 열렸습니다. 사죄함이라는 길입니다. 율법시대에는 죄 문제 때문에 수시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속죄 제, 속건 제를 드립니다. 수많은 양들이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무죄가 선언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죄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36년간 종속되어 언어를 상실하고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겨서 해방 받은 게 아닙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였기에 얻었습니다. 미국이 이김으로 덤으로 해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알고 보면 은혜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죄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온다는 것입니까? 성경공부를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불뱀이 나와서 뭅니다. 독으로 죽어갑니다. 그들에게 길이 열렸습니다.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쳐다보면 됩니다. 눈을 들어 고개만 돌리면 되는데 그것을 안하다가 죽어 갑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죽어 갑니다. 예수 믿으세요. 믿기만 하면 살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 나오세요. 십자가가 은혜입니다. 은혜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아니합니다. ‘다 은혜다’ 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율법을 지켰다고 해도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로워졌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은혜로 의로워졌습니까? 사죄함을 받았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할머니를 따라 어디를 가게 됩니다. 어른들이 가는 곳에 갑니다. 어른들이 먹는 것을 먹습니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할머니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사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앞에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사는 길이 있다면 회개입니다. ‘축복 축복’ 그러는데 어떤 축복이 진정한 축복입니까? 지옥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게 된 게 얼마나 귀중한 축복인가요? 멸망하고 저주 받은 인간이 구원의 은총을 받는 게 측량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 사람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이 땅에 저주, 사망, 질병, 가난이 왔으나 예수 그 분은 우리에게 사죄와 축복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 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럼으로 사죄의 주인공이 되시고 영원이 구원 받은 복된 그리스도 인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생명이로다’ 라는 찬송의 사람으로 승리롭게 살아갑시다.
죄와 은혜
롬 5장 20~21절 / 조남신목사
중국의 체제가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바뀌었다고 그러지요. 우리나라도 그 동안 많은 사건을 겪으며 이제 대선 체제에 들어갔는데, 이회창후보, 노무현후보, 정몽준후보, 권영길후보...등이 이제, 3파전, 2파전을 벌이겠지요. 선거 때마다 첨예한 대립을 벌이다보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이번엔 과거보다 좀 성숙한 모습으로 정권이양이 잘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지나온 우리의 나날들이 오늘 설교 제목식으로 표현해볼때 죄의 순간순간들이었다면, 앞으로의 우리의 나날들은 은혜의 나날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그 동안 새벽기도회 때마다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집요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바로 이런 문제들이었지요. 죄와 의, 율법과 의, 믿음과 의, 믿음과 은혜, ..... 그러면서 결론에 이른 것은 "죄와 은혜"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쓰기까지 고민하며 터득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도 이미 이 "죄와 은혜"의 문제를 말하고 있어요. 놀랍지요. 놀라워요. 이미 여기에 생명의 강, 구원의 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죄인들이 구원을 얻는 속죄의 강, 감격의 강 .....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희소식, 복음이라는 거지요.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문제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그의 유명한 작품 중에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이 "죄와 벌"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율법의 원리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율법에 의하면, 죄를 범하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지요. 이것이 "죄와 벌"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죄를 지은 우리들에게 율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어요? 없어요! 그렇다면 이 지구촌에서 구원의 가망성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망,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죽이는 법"이라고까지 말했잖아요. "죄와 사망의 법"(로마서8:2) .... 그런데 하나님이 또 하나의 길을 열어놓고 계셨지요. 그것이 바로 은혜의 원리라는 거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다스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로!! 은혜로!! ... 이것이 다행으로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이것을 "성령의 생명의 법"(로마서 8:2)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은혜로 살아요. 그래서 은혜로 살수가 있어요.
> 언젠가 영국에서 비교종교학회의가 열렸는데, 거기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을 것 아니예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성육신 사건이나 부활사상에서 찾았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있느냐?...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 그러나 다른 종교에도 이런 사상들이 있어요. ... 그러면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라는 것이지요. 기독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점이 달라요. 그 회의에서도 이 점에 동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은혜!! ....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가 베풀어지고 있으니 은혜예요. 은혜!! ...
> 오늘 이 창세기 20장은 바로 이 "죄와 은혜"의 문제, 이 중요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요. 이제까지 창세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그가 죄를 짓지요. 믿음의 조상인데 죄를 지어요. 특히 여기 20장에서 말하려는 이 죄는 어떤 성격을 띠고 있습니까? ①죄의 반복성과 ②죄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어요. 그럴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이 가장 무서운, 뿌리깊은 죄의 성격이에요. 그래서 죄의 양상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나타나지요.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나타나요.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에 이사를 가지요. 왜 이사를 갔을까? ...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큰 일을 치르고 나서, 롯의 아내와 롯의 사위들이 죽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것을 잊어보려고 그랬는지, 회의가 왔는지, 아니면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었는지, ... 이사를 가요. 그랄지방으로 ... 그랄 지방은 팔레스틴의 제일 남쪽, 애굽과의 경계지역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사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비장했던 것 같아요. 또 그 죄를 지으면서라도 이사해야 했거든요. 그게 무슨 죄인데? ...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죄!! 애굽에서 25년 전에도 그랬는데(창12장), 또 그 죄를 여기 그랄에서 범하고 있었어요. 죄의 반복성이에요. ... 소돔과 고모라 심판 때만 해도 그의 신앙이 아주 고양되어 열방 구원의 종보기도를 드렸는데, 그땐 정말 "열국의 아비"같았었는데, 또 다시 이렇게 영적인 침체의 나락으로 깊이 떨어지니, 이거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이것이 인간의 실존인가요?. 이것이 죄성의 깊이인가요? 죄는 이렇게 반복되고 있었어요. 헤어 나오질 못하고 계속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 더 내려가서 13절에 보면, 이 범죄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절에서 이미 아내와 계획했지요. "이후로 ...가는 곳마다...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이미 계획했던 것을 한 것이에요. 이미 합의를 봤어요. 우연히 저지른 것이 아니에요...
> 그러나 우리는 여기 이 본문을 통해서 죄만 보아선 안돼요. 죄보다 은혜를 보라고 말하고 있어요. 창20장은 "죄와 은혜"를 설명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기 이 본문에서 뭐가 은혜예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다루고 계셨는가를 보면, 은혜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때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이제까지의 아브라함의 모든 노력은 그냥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 ①먼저 아브라함의 죄를 묻습니다. 자기 아내를 남에게 양도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일까? 그런데도 그 일을 저지른 저의는 무엇일까? 돌이킬 가망성은 있는가? ...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회개하도록 도와주고 있었어요... 우리가 회개, 회개하지만 사실 회개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여러분, 스스로 회개할 수 있습니까? 은혜가 있으니까 회개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은혜를 주시니까, 감동을 주시니까, 도와주시니까, 회개를 해요. 탕자도 재산 모두 탕진하고 돌아오는데 아버지에게 먼저 회개했어요?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회개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예요. 단지 선처를 바라며 아들은 그만두고 종으로서 먹는 것이나 해결하려고 집에 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이 탕자를 먼저 보잖아요. 먼저 보고 그에게 달려 갔어요. 이 탕자가 그때 한 발짝 옮길 때, 아버지는 열 발짝을 뛰어서 달려 갔어요. 그리고 이 아들을 품에 안고, 뽀뽀를 그냥 막 하지요. 수없이 입맞췄어요. 그리고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벌여요.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정말 좋아하셨어요. 이것이 은혜이지요.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예요. 은혜 없인 회개할 수 없어요. 사랑 없인 변화시킬 수 없어요. 사람들은 회개를 그렇게 쉽게 할만한 위인들이 못돼요. 회개가 그렇게 쉽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어요.
> 그 다음 사라를 보호해 주셨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사라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하시지요.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간섭하세요. 이것이 은혜지요. 은혜의 간섭이십니다. 그래서 사라를 다치지 않게 해요. 그리고 아브라함도 다치지 않게 하시지요.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시지요. 7절을 보세요.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 이 말씀도 은혜지요. 아브라함 편에서 볼 때 은혜예요. 아브라함이 죄를 지어서 지금 여러 명이 다치게 생겼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탓하지 않으시고, 그의 지위도 박탈하지 않으시고 - "그는 선지자라. 그가 기도해 주기 때문에 네가 살 것이다" - 그를 지켜주시고 계세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고 계셨어요. 아브라함에게도, 사라에게도,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에게도 ... . 이 은혜를 은혜로 느낄 수 있습니까?
>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느낄 수 있을까? 은혜가 있어도 은혜를 느끼지 못하면, 은혜가 와도 은혜를 알 수가 없어요. 은혜가 은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 ①아브라함이 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히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죄와 대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13절에 보면, 자기 죄를 인정하지요. 그래서 이러 저러해서 죄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끝난 거예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어요. 그러므로 이미 치료가 시작된 거예요... 그러나 죄를 부인할 때 거기엔 희망이 없어요. 치료가 안 돼요. 우리의 죄를 인정할 때, 그리고 자백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치유가,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도 죄를 느끼지 못하면,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도 말씀하지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것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많이 깨닫는 곳에라야 은혜가 넘쳐난다는 말씀이지요. 깨닫지 않으면,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은혜가 없어요.
> ② 그 다음 창세기 본문 17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자기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자기를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지요. 그러니까 회복이 시작돼요.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주 앞에 엎드려 진지하게 기도할 때, 이때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치유가 시작되고, 회복이 되고..... 그래서 모두가 살아났던 것이에요.
> 창세기 20장에는 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저지른 죄이지요. 반복적이고 계획적으로 죄를 저지르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그는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부어주지요. 그래서 그의 죄 된 본성을, 타락한 인간성을 녹이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기의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요.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부어 주시는 은혜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은혜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때 드린 기도로 자기 자신도 살 수 있었고, 아내도 살 수 있었고, 아비멜렉과 그 아내, 여종까지 치료하고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이 다시 아이를 생산할 수가 있었지요. 은혜였습니다. 죄가 있던 곳에 모두가 살아나서, 은혜가 넘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 요즈음 새벽 기도회에서 로마서 8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로마서8장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그러지요. 그래서 이 로마서 8장을 "가장 큰 생명의 강", "하나님의 구원의 마스터 플랜"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8:1을 이렇게 시작하지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용서함을 받고 살아나요. 은혜예요. 은혜..... 그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도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은혜받고 회개하세요. 천국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십자가 앞에서 보혈의 피에 의지하여 구원의 감격을 느끼며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이 성찬식을 통해서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시고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서 뉘우치고 회개하며, 이 세대를 이기고, 시련, 역경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주 앞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
정영구목사 / 롬 5:12-21, 창 6:9-22
하나님은 결혼이란 것을 만드셔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연합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통해서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연합이 되는지를 실제의 모델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창세기에서 말씀하신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또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도대체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는 신비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신부인 나 또는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나라고 하는 이 두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단일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을 이루고 예수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영적인 결혼 또는 육적인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에서는 결혼을 하지 못한 독신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독신의 은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8절에서는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은 둘이 아니라 혼자, 독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고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는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많은 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든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사람이든 하나님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에 보면 혼인잔치를 통해 세 가지의 상징으로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 있는 말씀에 보니까 세례요한이 과연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주님이 지금이 혼인잔치의 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인데 신랑이 없을 때는 슬퍼하고 금식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모두 바쁘다고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서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는데 그들이 예복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혼인잔치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열 처녀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든 결혼이든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결혼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고멜과 아주 정결하고 거룩한 호세아가 결혼을 합니다. 고멜이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상징되는 정결하고 거룩한 호세아가 고멜을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호세아서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62장에 있는 말씀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결혼할 것을 보여주시는 회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그 모습이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단일을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결혼의 문제에 대해 혼인잔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영적인 짝을 찾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SBS에서 방송하는 ‘짝’이라는 프로를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가끔 인터넷에 뜨는 기사를 읽을 때가 있습니다. ‘여자 1호가 너무 예쁘다.’ ‘여자1호가 남자 1호, 2호, 3호에게 한꺼번에 지명을 받았다.’ 그런 기사들입니다.
사람들이 왜 남의 짝짓기에 왜 그렇게 관심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의 본성 때문일 것입니다. 영적인 짝을 찾아서 한 몸을 이루고자 하는 근본적인 갈망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외롭다고 얘기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있는 것 같고,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배우자가 없기 때문에 외롭다고 얘기하고 배우자가 있는 사람은 또 배우자의 무관심 때문에 외롭다고 얘기합니다. 자식이 있고 배우자가 있어도 외롭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누군가와 한 몸을 이루려고 하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갈급함이 마음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정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신비를 통해서 한 몸이라고 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숙제이면서 신앙여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있는 말씀에 보면 계속 반복되고 있는 단어가 ‘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범죄, 한 사람의 정죄함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사망으로 끌려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은혜의 선물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라인에 있는 사람과 예수의 라인에 있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둘 중에 어떤 라인에 설 것인지는 내 인생의 반려자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입니다. 사망의 사람이 있는 곳에는 짐승의 짝들 밖에 없다고 이사야 34장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신부인 내가 첫 번째 아담과 한 몸을 이루면 나도 짐승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과 범죄와 정죄의 라인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신부인 내게 와서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의의 선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두 번째 아담인데 예수의 흔적과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몸을 가진 그 분과 내가 한 몸을 이루면 나도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몸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남자1호와 남자2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여자로 서서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1호는 짐승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우리 가운데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남자와 만나서 내가 결혼을 하면 내 인생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이 새로워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와 한 몸을 이루는 순간 우리는 사망과 정죄와 범죄 가운데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자를 가정의 머리로 두셨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신랑이신데 내가 아담이라는 남자와 결혼하는 순간에 그 남자가 나의 머리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내가 정죄하고 범죄하고 사망의 말을 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2호는 어린 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착하기만 하고 무엇을 하든 손해만 보는 사람 같고 비리비리하고 마른 순 같이 볼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영원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1호를 선택할 것인가, 남자2호를 선택할 것인가, 그 선택이 너무나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대 이 역사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의 시대가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한 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라디오 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목사님 어떻게 사모님을 만나셨나요?’ 라는 청년들을 위한 프로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출연하기 전까지 모셨던 목사님들은 전부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배우자에 대한 기도를 해서 만났다고 얘기했답니다. 그런데 저는 그냥 예뻐서 결혼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자가 저에게 재차 묻기를 정말 다른 계기는 없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뒤돌아보니까 나는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했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보니까 나에게 주신 가장 귀한 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육신이 됨이니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해서 한 몸이 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의 딸들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5절에 보니까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얘기하고 하나님의 근심이 되었고 하나님이 반드시 쓸어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오히려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완전한 자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결혼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동행, 짝을 이룬 것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절)’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면 어떤 아담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서 누가 통치하느냐가 결정되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니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시대에 살아남은 노아의 생존법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5장은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와 한 몸을 이룰 것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린 양인지 짐승인지입니다. 늑대인지 어린양인지, 늑대인지 양인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누구와 한 몸을 이루어서 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 연합의 신비가 이 한 몸의 신비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영원한 죽음이냐? 영원한 생명이냐? 를 결정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있습니다.
첫 번째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결혼 18주년기념일이 지났는데 올해도 제 아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말해서 뜨끔했습니다. 앞으로 더 잘해야 쫓겨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지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또 이미 결혼한 사람은 그 결혼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영적인 결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의 통치를 받고 누구를 내 남편으로 삼고 영원히 내 친구로 삼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입니다.
옛날에 누군가 도를 닦는 것을 배우는 대학원에 간다고 해서 예수님과 이혼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하고 이혼하고 가지 않으면 가면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가면 엄청 죽을 맛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려면 이혼하고 가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주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한 남자,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겠습니까?’ 저는 여러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사망의 아담의 라인을 쫓아서 살 것인지, 지금은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고 너무나 연약해보이지만 영원한 진리로 가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영국의 왕자가 와서 나와 결혼해 달라고 말할 때 그 왕자를 뿌리치고 보잘 것 없고 찌질한 남자와 결혼한다면 사람들은 진짜 사랑하나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논리를 쫓아갈 것인지 생명의 논리를 쫓아갈 것인지 선택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 아담의 삶을 박차고 나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험악한 남자를 보면서 또 진정한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남자가 얼마나 좋은지 이 여자가 얼마나 좋은지는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범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범죄로부터 떠날 수 있는 용기 선택하는 용기가 내게 필요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주일에는 음식을 사먹지도 못했고 공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일에도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킵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꼭 공부를 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다 차지하려하면,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면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범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순종의 영이 흘러 넘쳐나기를 구하는 헌신의 신앙입니다.
방주를 지을 때 노아에게 아주 정확한 치수를 말씀하시고 동물들을 짝지어 방주에 태우라고 말씀하셨고 나무의 종류도 말씀하시고 역청도 바르라는 얘기까지도 하셨습니다. 아마도 산 위에서 방주를 만들었을 것인데 노아가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맞을까? 하고 자기 멋대로 역청을 바르지 않았다거나 3층으로 만들라고 한 것을 2층으로만 만들고 동물도 그냥 짝을 찾다 없으면 짝 없이 태웠더라면 비가 오는 순간에 그 배는 물이 스며들어 잠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짝 없이 태운 동물들은 멸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일점일획이라도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순종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지 아니면 내 몸의 정과 욕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의 신앙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은 내가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과 결혼해서 이제는 주님 앞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와 순종의 영이 흘러넘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노라고 그렇게 결단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라
김준범목사 / 롬 5:12~2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와 함께 사망이 왔다(12-14절)
로마서 5장 12-21절은 전 인류의 전 역사에 걸쳐 있는 문제, 곧 인간의 죄와 그 죄의 결과로 있게 된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을 때에 죄는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12절). 죄는 사망뿐만 아니라 금생의 온갖 비참을 몰고 왔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온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모든 사람에게 비참과 사망을 몰고 왔습니다. 그래서 역사상의 모든 사람들은 비참하고 고단한 인생을 살다가 다 죽었고 지금도 모든 사람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신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그 실과를 먹음으로써, 죄는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와 함께 사망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가 죽음이 되도록 정하신 것은 모든 인생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의 결과가 얼마나 크고 비참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이 금생의 온갖 비참 가운데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의 비참과 두려움을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히 9:27).
우리는 개인적으로 한 번 죽음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모든 인간은 다 죽었습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수많은 죽음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과, 그 죄의 결과로 죽게 된 비참한 존재임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죄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몰고 온 죽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도 죄는 있었고 죄의 결과인 사망도 있었습니다(13절).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즉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다 죽었고 사망은 왕 노릇했습니다(14절). 비록 그들이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14절)고 하더라도, 아담의 자손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다 죽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의인이 되리라(15-21절)
그러나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상(모형, type)이었습니다(14절). 표상이란 원형과 닮은 점을 가지고 있어서 원형을 가리켜 보여주지만 탁월함과 완전함에 있어서는 원형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입니다. 행위언약의 대표였던 아담 한 사람의 행위의 결과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는 은혜언약의 대표이신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마지막 아담(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생명을 선물(은사)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은사(그리스도의 선물)”는 “그 범죄(아담의 범죄)”와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15절).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에게 넘치는 선물이 있을 것입니다(15절). 아담의 한 범죄를 인하여서 우리에게는 “정죄”에 이르게 하는 “심판”이 임했지만,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동을 인하여서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의롭다 하심”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16-18절). 의롭다 하심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절)고 하셨습니다. 즉,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것입니다(19절).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20절).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서 우리의 죄를 점점 더 분명하게, 더 많이 보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이 비참하고 가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면서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은혜의 초청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20절).
죄는 강력한 것이고 죽음도 강력한 것이지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능히 건집니다. 이전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였었는데, 이제는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의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왕 노릇 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21절). 우리는 순전히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선물(은사)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부활, 모든 죄와 비참과 사망으로부터의 완전한 회복과 해방
이 부활절 아침,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은혜언약의 머리이시며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아담은 죄와 죽음을 가지고 왔지만 그리스도는 의와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우리에게 가져온 비참의 절정이 죽음이라면,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복락의 절정입니다. 부활은 모든 죄와 비참과 사망으로부터의 회복과 역전(逆轉)입니다. 부활의 때에 우리는 우리가 죄로 인해 겪어야 했던 모든 죄와 비참과 사망으로부터 완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죄로부터 받은 모든 타격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될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 죄가 몰고 왔던 모든 비참으로부터 회복될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 우리는 우리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모든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회복될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 모든 가난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부요하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때에 우리의 모든 슬픔은 충만한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며 우리의 기쁨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모든 전쟁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와 평강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모든 가공할만한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는 해방되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사망의 권세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모든 공포와 절망은 완전히 절망할 것입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의 무덤을 열고 우리의 죽은 몸을 다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자들은 모두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큰 기쁨 가운데 모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이러한 기쁨과 영광의 부활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생명의 부활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사망이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이고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요 5:29).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모두 나아오십시오. 우리는 죽음을 이길 수 없으니,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의 선물인 의와 생명을 받아서 충만하게 누리십시오. 그러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롬 5장 12~21절 / 김준범목사
로마서의 모든 구절들이 다 중요하지만, 로마서 5:12-21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 곧 아담과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에 관한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하였는데 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함께 죄인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왜 죄인이며 우리는 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고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을 가지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로마서 5:12-21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매우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정죄와 죽음이 이르렀다
먼저 바울은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하였는데 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함께 죄인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12-14절).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12절).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아담은 그의 후손된 우리에게 죄와 죄에 따른 정죄와 죽음(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담은 첫 사람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대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을 맺으셨을 때에는 아담과만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태어나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언약을 맺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자인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할 존재인 것을 기억하도록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행위 언약(창조 언약, 아담 언약, 생명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아담 한 사람만을 위한 언약이 아니라, 모든 인생들을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이 언약을 깨뜨렸을 때, 우리는 아담과의 언약적 관계로 인해 함께 죄인이 되었고, 죄와 함께 사망도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아담과의 “언약적 관계”에 의해서만, 또는 법정적으로만 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실제로는 아무 죄도 없는데 단순히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온 인류는 아담 안에 있었고, 온 인류는 아담을 통해서 죄의 영향을 “실제적으로” 받았습니다. 아담이 죄로 인해 타락하였고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아담에게서 난 자들은 모두 “실제적으로” 죄의 영향을 받았고 죄로 물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담의 죄의 전가(imputation of Adam’s sin)”라고 부릅니다. 아담의 죄와 죄책은 아담의 후손된 모든 사람들에게도 “실제로” 전가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언약적 관계로 인해서도 죄인이지만, 실제로 죄성(부패성)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죄를 짓는다는 점에서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까닭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12절)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살았던 것뿐이지, 그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13절). 그래서 아담부터 모세 때까지의 사람들도, 비록 아담처럼 똑같은 에덴동산에 살아보지도 못했고 똑같은 선악과를 먹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죽음을 경험해야 했던 것은 그들에게도 실제로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때로부터 모세의 때까지도 사망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들 위에도 왕 노릇하였습니다(14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와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아담은 오실 분의 표상”(14절)이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이 말은 매우 짧은 말이지만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말입니다. 표상(表象, type)이란 원형과 닮은 점을 가지고 원형을 예표하고 가리켜 보여주지만 탁월함과 완전함에 있어서는 원형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입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인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상적 인물이었고, 그리스도는 아담이 가리키는 바로 그 원형적 인물이었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표상과 원상의 관계로서,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표한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온 결과는 상반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우리에게 죄와 정죄와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와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값없이 선물로 가져다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는 은사(선물)는 아담의 범죄가 가지고 온 것과 같지 않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넘쳤습니다(15절).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온 것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정죄에 이르는 심판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많은 범죄로부터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는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16절). 아담의 범죄를 인하여서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정죄”가 임했지만,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동을 인하여서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의롭다 하심”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17-18절).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는 우리의 죄(sin)보다 강해서 우리의 죄를 이겼고 우리의 죄를 덮었습니다. 아담의 죄는 우리에게 정죄(condemnation)를 가지고 왔지만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또한 아담으로부터는 사망(death)이 왔지만 그리스도로부터는 죽음보다 강한 생명(life)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자들”(17절)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된 것처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 될 것입니다(19절). 바로 이것이 한 분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는데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죄를 더욱 많이 드러내어 많아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많이 있는 그곳에 은혜가 임했습니다(20절). 그리고 그 은혜는 죄를 이겼습니다. 그리하여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처럼,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의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왕 노릇할 것입니다(21절).
우리에게 의와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자 한다면 그는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아담에게 속해 있는 자에게는 구원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와 사망 아래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입니다. 아직 이 선물을 받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은혜의 지배 아래 거하며 의와 생명의 선물을 여러분의 것으로 충만하게 받아 누리십시오.
대표성의 원리
롬 5장 12~21절 / 이강웅목사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 몇 차례에 걸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행위의 덫’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이 일어난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주도하는 인생을 살려고 하기에 율법적 성향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의지하도록 우리는 사회에서 학습 받고 또한 그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더 의지하며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배우고서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구원을 위해서 내가 뭔가 좀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는가! 내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애쓰고, 잘 믿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의지하는지 모릅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복음의 영광을 충만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다시 전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탁월한 교사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임한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 한 가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대표성의 원리로써 우리에게 임한 구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지난 본문에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든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렇게 특별하다는 사실에 매우 감격스러워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것도 단순히 감동이나 삶의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면서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현재와 미래, 나의 영원한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분의 죽음이 세상의 악을 이기는 사건이 되고, 모든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됩니다.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대표성의 원리를 통해 설명합니다. 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선수가 메달을 따면 온 국민이 자기 일처럼 기뻐합니다. 이유는 그 선수가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대표성의 원리는 의외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깊숙히 작동하고 있고, 개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나라와 나라 사이에 외교 문서 협정을 맺을 때 대통령이나 외무부 장관이 서명을 합니다. 그때 그 나라 전체 국민이 다 서명하지 않지만 일단 사인하여 협정을 맺은 후에는 그 효력이 모든 국민에게 다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했다면 대통령 한 사람이 선포했어도 모든 국민은 전쟁비상 사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우리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런 대표성의 원리는 구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왜 이렇게 한 사람을 강조하는 것인가요?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시작되었고, 결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으며, 모두가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 얻게 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이 땅에 왔듯이,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 주어졌습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가 들어 있습니다.
1. 아담의 대표성 (12-14절)
먼저 아담과 우리 사이에 대표성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4가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옵니다. 둘째,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넷째,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라는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고,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억울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모든 사람이 죽는 건 너무 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자기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내가 아닌 타인의 선택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 아주 불합리하게 느껴지고,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담은 가장 먼저 창조된 사람으로서 그후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의 죄가 되고, 아담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실제로 이 원리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1997년에 있었던 한국의 IMF 사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경제 우등생이라는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 국가부도를 인정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야 할 뼈아픈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였고,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물론 원인은 여러가지 있었고, 또 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밀어닥친 여파는 온 국민이 다 받아야 했습니다. 한 개인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회사가 망하니 직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범죄 했기에 모든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요?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분명한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범죄 했지만, 아담으로 부터 모세까지,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법이 없는데 어떻게 법을 어기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롬 5:13-14)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범법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으로 부터 모세 때까지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기에 아담과 같이 범법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법이 제정 되기 전까지는 범법이라고 처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범죄 했고, 그래서 그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2:12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사람들은 아담처럼 주어진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들 또한 죄를 지음으로 사망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으로 인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죄와 사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담의 대표성을 받아 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감정적으로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받아 드리기를 거부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도 그렇게 불평했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듣고 하나님이 묻습니다. (겔 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아니 내가 아니라 우리 조상이 잘못을 했는데 왜 국가가 멸망을 당하고, 우리는 포로로 끌려와서 이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까?”하고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렘 31:29-30)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가 시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도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지만 우리 또한 무죄하다고 손을 씻을 수 없습니다. 마치 아무런 책임이 없는 양, 과거로부터 내려온 산더미 같은 죄들에 대해 나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양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하여 우리의 죄를 더하기 때문에 죄는 갈 수록 더욱 불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또한 죄의 범법자이자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편으로 이 원죄에 대한 희생물이기도 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에덴 동산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깨어지고, 일그러지고, 더럽고, 불의한 에덴 동산의 동편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죄의 산더미와 같은 쓰레기에 의한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죄가 한 사람을 통하여 들어왔고, 죽음이 죄를 통하여 들어왔으며, 이처럼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운명이며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종착역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담의 범죄와 상관없다’고 아무리 외쳐도 나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모두 범죄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2. 예수님의 대표성 (15-17절)
우리는 아담의 대표성에 대해서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사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요 축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기에 죄를 짓고, 죄를 짓기에 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악순환 속에서 사망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의 운명이지만, 그 동일한 법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작동 되어서 이제 은혜와 생명으로 우리에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14절 후반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표상이란 어떤 물건을 찍어 내기 위해 만든 하나의 주형이나 모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원형은 따로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담 또한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그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리스도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예표해 줍니다. 그래서 아담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실 자 예수님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모형이 가리키는 바 진짜 실체, 원형이신 예수님의 대표성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롬 5:15-17)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5절에 아담은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16절에 아담은 정죄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의롭다 하심을 가져왔습니다. 17절에 아담은 사망이 왕 노릇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합니다. 이렇게 아담과 예수님이 가져온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여 우리를 속박하고 지배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즉 이전에는 죄의 노예살이를 하던 우리이었는데 이제는 생명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이 되어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가 되어 우리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대표성의 결과 (18-21절)
그렇다면 대표성의 원리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 효과가 무엇입니까?
(롬 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을 반복해서 비교합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이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강조되는 것은 둘 다 모든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행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은 철저하게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은 완벽하게 성공하셨습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단순히 복원시키고, 간격을 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회복시켜 주시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사, 은혜, 선물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은사는 은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물은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은사, 은혜, 선물, 서로 다른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은혜를 더 강조하기 위해 “더욱”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15절 “더욱 하나님의 은혜”, 17절 “더욱 은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것은 아담으로 인해 얻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더욱’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더 강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다 표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아담이 온 인류에게 주었던 그 저주와 고통, 정죄와 사망, 그 모든 것들을 완전히 덮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넘치도록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정말로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다가 20절에서 갑자기 율법에 대해 말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왜 이 말을 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의 진술을 듣다가 ‘그렇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데 왜 율법을 주셨느냐? 그래도 주신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하고 의아해 할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답변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은 율법이 사람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반항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분의 정하신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은 그 역할을 하면서 죄를 더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은혜는 그 어떤 죄보다 더욱 더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완성하십니다.
비록 죄가 크고 넒고 깊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더욱 크고, 더욱 넓고, 더욱 깊습니다. 십자가에서 은혜는 죄를 압도했고, 생명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복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될 것을 알면서도 불순종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순종하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기에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로운 행위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그 넘치는 은혜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고,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 시작과 끝의 모든 것을 바꾸셨습니다.
결론: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다가 낙심하고 좌절할 때, 영적 침체가 찾아왔을 때,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왔을 때, 아니 내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되었지만, 한 사람 덕분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이 모든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은혜 안에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항상 이 은혜 울타리 안에 거하십시오. 우리 모두 이 은혜를 굳게 붙잡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김재흥목사 / 롬 5:12~19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범죄에서는 심판이 뒤따라와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마는, 많은 범죄에서는 은혜가 뒤따라와서 무죄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6월의 첫째 주일이며 성령강림 후 2주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기를 맞아 강단보와 스톨도 초록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강림절기의 색깔은 초록입니다. 초록색은 성장을 상징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십니다. 성령강림절기 기간 동안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푸르게 푸르게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군대에서 연이어 사망사고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수류탄 투척 훈련 중 사고로 훈련병이 사망했고, 지난 주중에는 기합을 받던 훈련병이 사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자의 영혼과 그 유족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군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겨 지금보다 더욱 안전한 매뉴얼에 따라 훈련을 진행하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무리한 훈련과 작전 수행은 삼가길 바랍니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고, 그 한 사람은 그 부모들에게는 세상 전부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
오는 목요일 6월 6일은 현충일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돌아가신 순국선혈을 감사히 기억하고 추모하는 날입니다. 식민시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분들과 한국전쟁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셨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깊이 감사하고 그 삶과 희생을 기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현충일을 맞게 되면 자연스레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역사적 고통과 반성’에 대한 생각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지 않았다면 독립을 위해 죽어간 이들도 없었을 것이고, 식민지배 이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분단도 없었을 것이고, 분단 이후 동족 간 잔혹한 전쟁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준 폐해는 어마어마해서 계산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백 번 천 번 우리가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함이 마땅합니다. 일본에서 활동하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서경식 선생님은 ‘기억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늘 승자 중심의 역사라 약자의 고통은 잘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약자는 기억투쟁을 해야 하고, 약자의 기억투쟁을 통해 역사가 바로잡힐 때 인류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충일이 되면 ‘올바른 국가란 어떤 국가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국가는 순기능도 하지만 역기능도 합니다. 보통 ‘국’자가 들어가는 주의(이즘)들은 위험합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만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믿고 다른 나라와 민족을 배척하는 ‘국수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군사력에 두고 전쟁준비를 최상위에 두는 ‘군국주의’,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정복하는 ‘제국주의’. 이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주의들은 국가 간에 긴장을 높이고 갈등을 빚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한 국가 내에서도 국가의 의미를 과도하게 강조할 때 개인의 자유가 희생될 위험이 있습니다.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그런 경우입니다. 이런 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계속 존속할 것입니다. 많은 순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홉스가 말한 것처럼 국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간, 개인과 집단 간, 집단과 집단 간의 분쟁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다른 국가와 민족의 공격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 성경의 국가관
성경에 나와 있는 국가관을 구약, 복음서, 서신서 3곳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부족연합 형태로 있던 이스라엘이 왕정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이 나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찾아와 말합니다.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왕정국가,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워달라는 요구입니다.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이 다스리게 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설명해 줍니다. ‘왕은 당신들의 아들들을 군인으로 쓸 것입니다. 왕은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요리를 만들게 할 겁니다. 또한 당신들의 밭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신하들에게 줄 겁니다. 그리고 세금도 거두어갈 것이고, 마침내 당신들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왕 때문에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은 왕국국가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는 왕정국가에 대한 사무엘 선지자의 부정적 예언이라기보다는 왕정국가를 겪었던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를 기록한 열왕기와 역대기는 대부분의 왕들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 중에 긍정적 평가를 받은 왕은 극소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정의 쓰라림과 더불어 앗수르와 바벨론과 같은 제국의 폭력적 지배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과 제국의 지배하에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이상국가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는데,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진 나라,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에 여러 말이 오고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왕이오.” 이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엄연히 유대의 왕이 있고, 로마의 황제가 있는데, 자신이 왕이라니요. 예수님은 위험한 발언 이후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진리가 제일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로고스-말씀이고,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이고, 하나님의 계명 중 제일 중요한 계명은 ‘사랑’입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사랑의 나라였고, 예수님은 그 사랑의 나라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나라는 유대와도 달랐고 로마와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유대의 왕과도 달랐고 로마의 황제와도 달랐습니다. 세상의 나라와 왕들은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함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으려했지만, 사랑의 나라와 예수님은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김으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지배하려는 권력 vs 섬기려는 사랑. 다른 나라와 그 왕들과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었습니다.
서신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교회 내에서 음식문제로 다투던 이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권면을 하던 중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17절) 여기서 ‘먹고 마시는 일’이란 단순한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부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율법은 세상의 여느 권력처럼 지배하려는 권력이 되어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의와 평화와 기쁨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의롭게 여겨 주심, 즉 은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 율법을 강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앞세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던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동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심 후 그때의 일을 몇 번이고 아프게 회상했을 것입니다. 회상할 때마다 자신의 폭력성과 율법의 불완전성과 폭력성에 대해서 깊이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고 가는 곳마다 교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사랑과 은혜를 통해 평화와 기쁨을 맛보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했습니다. 바울은 우선 아담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이가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은혜로 많은 이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은혜로 많은 이에게 무죄 선언이 내려졌다.’ 바울이 복음을 설명하던 중 아담을 언급한 이유는 예수님 한 사람에게 시작된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담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죽음과 죄의 세상, 즉 율법의 나라를 가져온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은혜의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아담과 율법의 세상이 아닌 그와 전혀 다른 세상, 다른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바울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이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없던 나라 그러나 말씀과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전해 내려오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존재자체가 하나의 다른 세상, 다른 나라였습니다. 여기서 ‘다른’은 ‘새로움’보다는 ‘참’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세상,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만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우리가 마음에 담은 것만을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있고 전해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당신의 마음에 품고 사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그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La vita é bella.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7년에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입니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하고 주연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가 배경입니다. 유대인 청년 귀도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아주 낭만적인 연애 끝에 결혼하여 조슈아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유대인인 귀도의 가족을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귀도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무자비한 수용소 생활이 사실은 게임이라고, 게임에서 1,000점을 따 이기면 상으로 탱크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조슈아는 그 말을 믿고 힘든 수용소 생활을 견뎌나갔습니다. 어느 날 귀도는 군인들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모두 죽일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도는 아들을 안전한 곳에 숨긴 뒤 아내를 찾기 위해 수용소의 이곳저곳을 돌다가 경비병에게 걸리고 맙니다. 경비병은 귀도를 죽이기 위해 귀도를 건물 뒤편으로 걸어가게 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그 순간 귀도는 은신처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귀도는 아들이 겁먹지 않도록 그 상황 자체도 게임인 것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며 걸어갔습니다. 결국 귀도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살을 당해 죽었습니다. 조슈아는 아버지가 죽은 것을 모른 채 밤새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을 맞았습니다. 연합군이 탱크를 몰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슈아는 엄마와 무사히 재회합니다. 영화 끝에 성년이 된 조슈아의 말이 나옵니다. 조슈아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라고, 아버지의 희생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고 말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아버지의 희생만이 선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면서까지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아버지의 가르침 또한 그의 평생 길과 힘이 되는 귀한 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배하려는 권력과 정죄와 심판과 증오가 난무하는 전쟁 같은 세상이라도 그 누군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화와 기쁨을 전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도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이십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아담의 나라도, 율법의 나라도 한 사람을 통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디 율법의 나라의 통로가 되어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되어 살길 바랍니다. 불의한 권력과 정죄와 심판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런 것만 바라보며 살지 맙시다. 사랑과 은혜와 평화와 기쁨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삽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슴에 품고 삽시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이 세상은 좀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