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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
9월 20일 오후, 강릉시 동해 고속도로 굴다리 밑 숲속에서 이광수(31)가 인근 농민과 얘기를 나누다가 주민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붙잡혀 생포되었다.
3일동안 자지못해 휘청거려 경찰은 술 취한줄로 알았다고. 이씨가 총을 뽑는 순간 경찰이 제압.
생포직후에 계속심문을 받았는데, 물어보는 질문에 엉뚱하게 대답하며 단 두가지만 생각했단다.
1. 내 옷깃에 숨겨진 자살용 캡슐을 언제 깨물까.
2. 죽기전에 딱 두놈은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굴 죽일까. 그는 젓가락으로도 살인할 수 있다고 강연에서 말함.
수사당국은 잠수함 공비들이 정찰국 출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정찰국 출신으로 90년 9월백령도로 귀순한 이덕남을 투입하여 이광수 씨 설득.
나중에 김신조와 김현희도 투입.북과 남의 실체에 대해 말해주고 설득. 이광수는 그 두선배는 다 고문받다가 죽은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짜라고 생각 했다고 말했다.남쪽 괴뢰군들은 정보를 다 빼내면 껍질을 벗겨 죽인다고 교육 받았다고 함.
군인 교육 과정. 이광수씨가 통일공원에 전시된 북한 잠수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잠수함 조타수 출신이다.
무장간첩 잠수함이 강릉 해안 암초에 걸린 것은 정이 많은 함장이 규정을 어긴 실수였다.
침투규정에는 잠수함은 해안으로부터 2키로 밖에서 정찰국 전투원(공작원)들을 출구시키고 입구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함장은 침투 시에는 해안으로부터 2키로 내외에서 출구시켜 안내 조 2명과 공작조 3명은 개인 잠수해 무사히 해안으로 침투하는 데는 성공시켰다.
그러나 공작원 3명이 강릉에 있는 공기기지 ‘레이다’를 정찰하고 무사히 복귀하였으나 잠수함이 해안 가까이 있는 암초에 자초되고 말았던 것이다.
해안으로부터 2키로 밖에 있던 잠수함 함장이 공작요원들이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자 파도가 높아 임무수행하고 돌아오는 공작요원들이 지쳐 있어 2키로 잠수수영을 하기가 힘들겠다고 걱정하여 해안 가까이 접근하기를 명령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큰 파다에 밀려 잠수함이 암초에 좌초하게 되었다.
25명중 2명이 살아 남은 것으로 확인.
이중 살아 북으로 돌아간 자는 제 2기지 선발대 요원으로 나중 확인되었고, 생포된 사람은 이광수 (전 인민군 대위)씨이다.
그는 위의 박태홍과 동갑이며 계급도 비슷하다.
이광수(1965~)는 그뒤 전향하여 1997년부터 해군에 들어가 군무관으로(정신교양) 근무하고 있다. 진해 해군 사령부에 근무.
경남대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고 임은경과 결혼, 지금 두 딸의 아빠다. 천안함 폭침사건후 방송에 나와 잠수함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소행임을 입증하었다.
현지에 세워진 위령탑
소탕 작전중 희생된 17명(군인 11명, 경찰 1명, 예비역 1명, 민간인 4명)의 희생자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수함의 침투장소가 보이는 강원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통일공원내)에 '강릉 무장공비 침투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
오영안 준장은 사후 준장으로 승진. 전사시에는 대령.
표종욱 상병은 나무하러 나갔다가 2명의 북한군에 생포,군복을 빼앗기고 혹심함 고문을 당하고 철사에 목조여 살해당함. 군 당국은 탈영으로 오인, 가족에게 사람을 내 놓으라고 협박.
나중에 대통령에게 청원하여 국립묘지에 안장.
무장공비 소탕작전
50일간 소탕작전, 군인원 150만명
9월 19일 오전 10시30분,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에서 은신중이던 간첩4명중 3명을 사살한다. 이어 2시55분경 칠성산 부근에서 3명을, 4시25분경 1명을 사살한다.
9월 20일 오후 4시 45분경, 강릉시 모전1리 동해고속도로 굴다리 밑 숲속에서 이광수(31)가 인근 농민과 얘기를 나누다가 주민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붙잡혀 생포되었다.
오후 5시경, 강동면 청학산 정상에서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무장간첩 11명이 권총에 의해 자살한 시체로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오후 7시경에는 동해안 일대에 대한 통행이 금지된다.
오후 9시경, 강동면 임곡1리 이규택氏 집에 권총을 든 간첩 1명이 들어와 옥수수등 음식을 빼앗아 달아난다. 이어 9시 30분경, 신석동 섬석교 부근에 무장간첩 2명이 출현, 군과 교전을 벌였고, 15분후에 강릉비행장부근에서 또다시 총격전을 벌인뒤 달아난다.
9월 21일 강동면 언별리 칠성산 망기봉 일대에서 도주간첩 2명을 발견, 교전을 벌이다 특전사 소속 이병희 중사(25)가 간첩의 조준사격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9월 22일 언별리 칠성산 계곡에서 무장간첩을 2명을 발견하고 치열한 교전끝에 사살한다. 이과정에서 노도부대 소속 송관종 일병(21), 화랑부대 소속 강정영 상병(21)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숨졌다.
9월 23일 22일 밤8시부터 23일 새벽까지 전개된 칠성산 군경합동수색대 간첩소탕작전으로 민간인 1명이 오인사살되고 군인 2명이 중상을 입은채 불리한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밀어붙여 피해를 입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9월 28일 오전 6시 45분경, 성산면 어흘리 왕제산 정상부근에서 잠수함 부함장 유림을 사살한다.
9월 29일 오후 8시경,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을지부대 소속 한대성 병장(21)이 야간매복근무중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간첩으로 오인한 동료장병에 쏜 총탄에 숨졌다.
9월 30일 오후 3시18분경 왕산면 도마리 칠성산 서쪽에서 무장간첩 김영일상위를 발견, 교전끝에 사살한다.
10월 9일 오후 평창군 진부면 탑동리 활산목 인근에서 버섯을 채취하던 민간인 3명이 피살체로 발견된다. 군은 "M16탄피 4개가 발견됐으나 탄피에는 일련번호가 없다"며 "무장간첩의 잔당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높다고 밝혔다.
10월 12일 오후 8시 40분경, 연곡면에서 매복작전 중이던 철벽부대 중대장 홍동진대위(26)가 공비로 착각한 김모상병이 쏜 실탄에 맞아 사망한다.
11월 4일 오후 3시 10분경, 인제군 서화면 서화2리 민통선 북방에서 거동수상자 2명이 발견된다.
11월 5일 오전 4시 28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무장간첩 2명과 교전끝에 10시 30분 2명을 사살한다. 이 과정에서 오영안 대령(49), 강민성 상병등 4명이 전사하고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우황룡 소위는 숙영지로 귀환도중 무장공비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후송되어 생존하였다.
정찰조 3명은 처음부터 따로 행동,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는 등의 도발의 증거가 명백했기 때문에 남측은 북한에 사과를 요구하였으며 , 북은 훈련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한것이니 당장 돌려보내라고 괘변을 하다 3개월 후인 12월 29일 외교부의 유감표명으로 사과같지도 않은 사과를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김일성이 직접 사과한 김신조일당 사건과 함께 북한측의 몇안되는 대남도발 사과의 사례로 남아 있다.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후 사살된 북한 공작원들의 유골을 판문점을 통해 북한측에 전달했다.
첫댓글 이거 남한을 늘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있도록 한 공로로 북에 표창장과 함께 배터지게 먹을 쵸코파이라도 보내 줘야 허나 말어야 허나~~?!